Bachelor RAW novel - Chapter 622
622화. 빙해 요수
“저희가 지닌 한수는 이미 그 배신자가 훔쳐 달아나지 않았습니까? 사실대로 밝히면 되지 요물들의 공격을 당할 이유가 있을까요?”
줄곧 입을 다물고 있던 하얀 장삼의 여인이 냉랭히 물었다. 목소리가 어찌나 차가운지 소름이 돋을 정도였다.
“백 사매의 생각처럼 그리 간단하면 얼마나 좋겠는가. 일단 한수를 도둑맞은 사실을 밝히면 우리 소극궁의 체면은 땅에 떨어질 텐데. 그 말을 요물들이 곧이곧대로 믿기나 하겠는가? 아무 이득도 없이 북부 지방 제일의 종문이라는 소극궁의 명예만 실추될 뿐이야.
그래도 만 년이 다되어가고 이번에 허령전의 빙옥동(氷玉洞)을 개방하니 운이 좋다면 한수를 약간 구할 수 있을 테지. 바깥에는 그저 우리가 한수 한 병을 지니고 있다고 알고 있으니 우리가 벌써 한수를 수련에 사용하고 있었다는 것을 누가 알겠는가 말이야.
그렇지 않고서야 본궁의 삼대 한염을 대대손손 전수할 수도 없었을 것이야. 그나마 이번에 빙옥동을 개방해서 망정이지 아니었다면 앞으로 삼대 한염을 수련하지 못할 뻔했어.”
한려 상인은 거대 솥의 남색 화염을 보며 다행이라는 얼굴을 하였다. 이에 푸른 장삼 수사가 그 말에 그저 쓴웃음을 지었다.
“이 일은 되었네. 둘 다 흑수빙염(黑水氷焰)과 풍리빙염(風離氷焰)을 정련하는데 진전이 없는 것으로 아는데, 한수를 얻으면 몇 방울씩 가져가도록 하고! 한염의 위력이 강력할수록 내게도 도움이 될 것이네.”
“감사합니다, 한려 사형!”
한려 상인의 말에 푸른 장삼의 중년인이 기뻐하며 인사했고 하얀 장삼의 여인도 겉으로는 냉랭했지만 속으로는 좋아하고 있었다.
“백 사매, 돌아가 요이에게 저 한 수사에 대해 알아봐 주게. 십여 년 전 수많은 원영기 수사들이 죽은 곤오산에서 멀쩡히 살아남은 것을 보면 보통이 아니야.”
한려 상인이 하얀 장삼을 입은 여인에게 분부했다.
“알겠습니다. 돌아가 종매에게 물어보겠습니다.”
여인이 냉랭히 답했다. 여인과 중년인이 인사를 하고 떠나자 한려 상인은 멍하니 생각에 잠겼다.
“……허천정.”
그가 불현듯 거대 솥을 돌아보며 중얼거리는 소리는 아무도 듣지 못했다.
한립은 커다란 밀실에서 옥석으로 만든 선반을 넋을 잃고 보고 있었다. 빼곡한 선반들은 대충 보기에도 백여 장 가까이 이어졌고 각각의 선반에 놓인 수많은 옥간들을 보호하기 위해 오색찬란한 보호막이 쳐져 있었다.
그리고 밀실 끝에는 다음 층으로 향하는 계단이 있었는데 그 입구는 두꺼운 장벽으로 단단히 막혀 있었다.
“이곳이 바로 귀 궁의 장경각인가!”
한립이 놀라서 살피다가 고개를 돌려 소극궁 제자의 복장을 한 노인에게 물었다.
“예, 선배님! 본 궁의 장경각은 총 7층으로 나뉘는데, 각 층마다 같은 종류의 경전들이 보관되어 있습니다. 층수가 높을수록 더욱 진귀한 경전이 있는 것은 아니라는 뜻이지요. 각 층은 결계로 나뉘어 있으니 다른 층을 둘러보시려면 저를 불러 주시면 됩니다.”
나이가 많아 보이는 노인은 눈썹이며 눈이 축 쳐져있었고 뜻밖에도 결단 중기 수사의 기운을 풍겼다.
“알겠네. 나가보게.”
한립이 고개를 끄덕이며 분부했다.
“예!”
노인이 공손이 대답하고는 뒤로 물러나 석문을 다시 잠가 주었다.
이제 밀실에 홀로 남은 한립은 바로 보호막 중 하나로 가서 무언가를 꺼내들었다. 그러자 펑 하며 보호막이 흩어졌고 세 개의 옥간이 나타났다. 한립은 손 가는대로 그 중 하나를 골라 의식을 주입했다.
같은 시각, 백응각 2층에서는 하얀 장삼을 입은 두 여인이 마주보고 있었다. 한 명은 백요이였고 다른 한 명은 한려 상인과 같이 있던 여인이었다.
외모는 비슷했지만 한 명은 온화하고 부드러운 인상이라 호감을 주었고 다른 한 명은 얼음장 같이 서늘해서 기이한 느낌을 주었다.
“이미 말씀 드렸듯이 한 수사에 대해 아는 것은 이게 전부예요. 스스로 해외 산수라 했지만 후에 음라종과 천란 성전 수사들은 그를 천남 출신이라고 하더군요. 신통은 원영 후기 수사에 못지않고 음양굴에서는 은시야차에게도 밀리지 않았습니다. 곤오산에서 어떻게 빠져나왔는지는 저도 전혀 모릅니다.”
백요이는 창가에 서서 검은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렸는데 미간을 좁힌 것이 이런 질문이 달갑지 않은 것 같았다.
“종매를 믿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겨우 원영 중기 수사가 그런 신통을 지녔다는 것도 이상하고 궁벽하기 그지없는 천남 출신이라는 것이 너무 와 닿지가 않아서 말이야. 사실 납득하기 어려운 이야기잖아.”
백의 장삼의 여인이 완곡하게 해명했지만 그 목소리는 오싹할 정도로 감정이 없었다. 백요이는 그것이 여인이 수련하는 공법 때문이라는 것을 알았기에 개의치 않았으나 계속 한립에 대해 캐물으니 내심 유쾌하지는 않았다.
“저도 오래 알고 지낸 사이가 아니니 그 밖의 사정은 알 수가 없지요. 그래도 제가 말씀드린 것은 전부 사실입니다. 그런데 대장로께서는 갑자기 왜 한 수사에게 관심을 보이시는 거예요?”
“왜기는, 그 자가 극한의 화염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지. 한려 사형이 찾아다니던 조건이 부합하는 자니까. 그러고 보니 이 일에 대해 왜 미리 말하지 않은 거야?”
“당시 헤어지고 십여 년 간 소식을 듣지 못했으니 곤오산에서 살아 돌아왔는지도 몰랐죠. 그런 와중에 한려 사형에게 불쑥 이야기를 꺼내 보아야 좋을 일이 있겠어요? 이번에 그를 대신해 현빙화를 찾아 준 다음 부탁을 해보려했는데 임 사형이 먼저 대장로께 고할 줄은 생각도 못했어요.”
“그렇다면 더 물을 것도 없네. 그렇게 실력이 대단한 자라면 좋은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좋겠어. 하지만 그 보라색 화염의 위력은 확인을 해봐야겠어.”
“네, 기회가 되면 저도 확인해 볼게요.”
백요이가 짙은 눈썹을 끌어올리며 건성건성 대답했다.
“그렇게 해주면 가장 좋겠지. 그럼 나는 이만 일어나 볼게. 요물들이 자주 북명도를 침입해서 할 일이 많으니까.”
이야기를 마친 여인이 무표정하게 계단을 내려갔다. 백요이는 창문을 통해 사촌 언니의 둔광이 누각에서 멀어지는 것을 보며 표정이 어두워졌다.
* * *
한립이 소극궁 장서각에 들어간 지도 7, 8일이 흘렀다. 그 동안 한 번도 밖으로 나가지 않고 경전들을 살펴보았는데 도움이 되는 내용이 꽤 많았다.
그런데 이렇게 집중해서 살폈는데도 겨우 7층 중 3층을 돌아보았을 뿐이었다. 아무래도 4층을 살펴보면 시간이 다 될 것 같았다.
이 날은 희귀한 영약에 관련한 상고 경전을 읽어나가고 있었는데 화염이 번뜩이며 밀실로 들어왔다.
마치 결계 따위는 없다는 듯 들어온 화염을 한립이 끌어당기자 활활 타오르는 불덩이가 나타났다.
전음부에 의식을 불어 넣은 그는 반가운 소식에 얼굴이 밝아졌다.
그리고 들고 있던 옥간을 선반에 내려놓고 그대로 푸른 빛줄기로 변해 아래 층으로 내려갔다. 일다경이 지나 푸른 빛줄기는 백응각 앞에 도착했다.
그곳에는 백요이가 단아하게 서서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빛이 가시고 한립이 나타나니 조급한 기색을 드러냈다.
“백 수사, 현빙화를 찾았다는 소식이 정말입니까?”
“정말이지요. 한 달은 걸릴 줄 알았는데 대장로께서 나서시니 몇 배는 빨리 찾을 수 있었습니다.”
“다행입니다. 백 선자께서 가능하시면 지금 바로 출발하시지요.”
기쁨을 억누르며 한립이 즐겁게 물었다.
“가능합니다. 한 형께 안내를 해드리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만년현빙을 발견한 장소가 조금 멀어 북명도 밖이라고 합니다. 갔다 돌아오려면 며칠은 거릴 것 같습니다.”
“시간이야 얼마나 걸려도 상관없습니다. 현빙화만 찾을 수 있다면 일 년을 달려가야 해도 다녀올 수 있으니까요.”
한립이 소리 내 웃으며 말했다. 백요이가 그의 그런 모습에 말없이 웃었다. 이렇게 둘은 바로 한려비경을 빠져나와 얼음성 밖으로 향했다.
그대로 북쪽으로 날아가며 백요이는 만년현빙에 대한 구체적인 정보를 알려주었다.
“설후수(雪吼獸) 무리가 서식하고 있다고요?”
한립이 의외라는 듯 말했다.
“만년현빙을 발견한 제자가 방심하다 설후수 무리에 발각되어 중상을 입었다고 합니다. 거의 죽을 뻔 했다고 하더군요.”
“설후수들은 몇 급이나 되는 요수인지요?”
“아마 실망하실 겁니다. 겨우 5, 6급 정도에 불과하거든요.”
“굳이 포획할 가치는 없겠군요.”
백요이가 미소 지으며 하는 말에 한립도 입 꼬리를 끌어올렸다.
“조금만 더 가면 북명도를 벗어나 빙해 지역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완전히 요수들의 소굴이라 어떤 요수든 나타날 수 있지요. 다행인 것은 섬에서 멀어질수록 나타나는 요수의 등급도 올라가서 평소대로 며칠 거리 내로는 8급 이상의 요수는 나타나지 않을 겁니다.
그러나 심해에는 무서운 위력을 지닌 요물들이 허다하고 10급 요물도 있다하더군요. 심지어 전전 대장로께서 심해에서 10급 상고 빙봉(氷鳳)을 본적도 있다고 이야기 해주셨으니까요. 진정한 상고 영수의 혈족이라 그 한 마리만 나서도 저희 소극궁 수사 절반은 죽은 목숨이라고 합니다.”
‘10급 빙봉!’
한립도 화들짝 놀랐다.
“하지만 크게 걱정하실 것 없습니다. 저희 조사께서 본 궁을 창립하실 때 빙해의 막대한 신통을 지닌 대요수들과 전투를 벌이셨고 그 후 서로 약조를 하였다고 합니다. 저희 소극궁 수사들은 빙해의 고계 요수들을 함부로 공격하지 않고, 빙해의 고계 요수들도 북명도 백만 리 내로는 접근하지 않겠다고요.
그렇지 않았으면 저희 소극궁이 지금까지 버텨낼 수 없었을 것입니다. 매번 소극궁을 포위하고 공격하는 요물들은 대진 내륙에서 북부로 진격해 올라오는 요수들인데, 만일 그들이 빙해 요수들과 손을 잡았다면 소극궁은 벌써 수차례 점령당하고 멸문되었을 것입니다.”
백요이는 이곳의 사정을 무척 자세히 설명해주었다.
“그런 일이 있었군요. 그래도 수사의 말대로라면 이번 일정은 위험한 일이 없겠습니다.”
“확실하지는 않지요. 약조는 약조일 뿐이라서 가끔은 고계 요수들이 포악한 성질을 이기지 못하고 침입하기도 하거든요. 그래서 매년 제자들 중에 사상자가 나오니 조심은 해야 합니다.”
백요이가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겨우 며칠 돌아다니는 것인데 그런 일은 없을 겁니다.”
한립이 멀리 빙하를 보며 담담히 말했다.
푸른 빛줄기의 속도가 조금 더 빨라졌고 백요이도 눈부신 빛을 내며 그를 따라갔다. 그녀도 그저 사실대로 이야기해 주었을 뿐 그들이 위험한 상황에 처할 거라 생각하지는 않았다.
3일 밤낮을 날아간 끝에 그들은 빙하에 생긴 거대한 틈 위에 도착했다.
“이곳에 설후수들이 산단 말이지요?”
한립은 깊이를 알 수 없는 빙하의 틈을 내려다보았다. 차가운 바람이 스산하게 몰아치는 빙하 속의 협곡이었다.
“예, 정확히 이곳이 본궁 제자가 말한 위치입니다.”
“그럼 바로 요수들을 먼저 유인해 내겠습니다.”
고개를 끄덕인 그가 수결을 맺으며 전신에서 빛을 뿜어냈다.
화륵!
동시에 불티가 점점이 몰려들더니 주먹 크기의 새빨간 불덩이들로 변했다.
“가라!”
쉬쉬쉭!
소매를 털어내자 수십 개의 불덩이들이 어두컴컴한 협곡 속으로 사라졌다. 한립과 백요이가 눈도 깜짝이지 않고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그런데 시간이 흘러도 폭발음은커녕 협곡에서는 아무런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한립과 백요이는 시선을 마주치며 의아해했다.
“5, 6급 요수가 이렇게 간단히 불덩이를 없애지는 못할 텐데요. 보아하니 더 높은 등급의 요수가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럴 수도 있겠네요. 본 궁 제자도 깊이 내려가 확인할 겨를은 없었을 겁니다. 가장자리에서 만년현빙과 현빙화를 발견한 직후 설후수에게 발각당해 쫓겼다고 했으니까요.”
“뭐든 상관없으니 나오게 해야지요.”
한립이 영수대 중 하나를 내려쳤고 동시에 열두 개의 하얀 빛이 빠져나와 한 척 크기의 새하얀 지네들로 변하였다. 투명한 날개가 달린 지네 요수들은 하나같이 흉악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가 손짓하자 날개달린 지네들이 전신에서 한기를 분출하며 아래쪽으로 떨어져 내렸다. 백요이는 그것을 보며 눈을 빛냈지만 입을 열지는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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