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achelor RAW novel - Chapter 68
68화. 허 노인과 숨겨진 방
“저는 한립으로…….”
“지금 네가 누군지 궁금할 것 같으냐? 축기기에도 이르지 못한 걸로 보아 담보인(擔保人)이 있겠지. 어서 담보인의 증표를 꺼내 보거라.”
상대가 한립의 말문을 막고 서둘러 물었다. 한립은 상대의 방자한 태도에도 흔들리지 않고, 품에서 옥부 하나를 꺼내 광막 앞에 던져놓았다. 그러자 제자 중 한명이 손을 내밀자 옥부가 날개라도 달린 듯 그의 손에 떨어졌다.
“마 사형이 네 담보인이라?”
옥부를 확인한 이가 조금 놀란 듯 입을 열었다.
“그 증표는 마 사백께서 주신 것이 맞습니다.”
한립은 담담한 척 하면서도 속으로는 크게 놀랐다. 그의 앞에 나타난 제자들은 나이가 무척 어려 보였는데, 놀랍게도 축기기의 고수였던 것이다. 수도가에서는 입문한 순서가 아닌 높은 경지에 오른 자가 신분이 높고, 때로는 사형도 되고 스승도 되었다.
“온종일 연단만 한다는 그 마 사형 말인가?”
“그분이 다른 이를 위해 담보인도 되어준다니, 놀랄 일이야! 설마 네가 마 사형과 친전제자나 친 조카라도 되는 것이냐?”
차가운 말투의 홍의를 입은 제자가 의외라는 듯 묻자, 옥패를 든 이도 호기심이 생긴 듯 여러 번 옥패를 확인했다.
“아닙니다. 저는 그저 마 사백을 대신해 약재를 재배하는 정원을 관리하고 있을 뿐입니다. 이 증표를 얻기 위해 1년간 보상 없이 일을 해, 어렵게 얻은 것입니다.”
한립은 상대의 추측이 말도 안 된다는 듯, 공손한 어투로 사정을 설명했다. 처음 비방을 얻으려고 했을 때, 가장 먼저 떠오른 이가 바로 마 사백이었다.
그가 약초를 귀히 여기는 것으로 보아, 연단을 위한 연구를 하고 수중에도 많은 약방이 있는 것이 분명했다. 그래서 수개월 전, 마 사백이 약재를 가져가려 들렸을 때 기회를 보아 말을 꺼냈다.
그러나 마 사백은 한립의 말을 듣자마자 어찌나 고개를 열심히 젓는지, 누가 봐도 싫다는 의사가 명백하게 표시했다.
그가 수중에 지니고 있는 약방은 모두 수많은 실패를 맛보고 겨우 알맞게 다듬어 놓은 것들이었다. 그러니 어찌 아무에게나 주겠냐며 단박에 한립의 청을 거절한 것이다.
한립이 포기하지 않고 보통의 약방이라도 달라고 집요하게 청하자, 마 사백은 참지 못하고 그런 보통 약방은 악록전에 가면 될 것이지, 자신을 귀찮게 하느냐고 소리를 질렀다. 그래서 한립은 1년 동안 대가 없는 노동을 약속하며 겨우 노인의 증표를 갖고 악록전을 찾게 된 것이다.
“하하, 그랬구만! 난 유명한 마 사백이 갑자기 성격이라도 바뀌셨나 했지.”
두 홍의를 입은 제자가 한립의 설명에 이해가 된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래, 들어가 보거라!”
둘이 동시에 법결을 외자, 빛의 장막이 열리며 한 사람이 지나갈 만큼의 공간이 만들어졌다. 그 모습에 한립은 서둘러 신형을 움직여 그 안으로 들어섰다. 광막을 지나니 헐벗은 산에 작은 원형의 진법 외에는 다른 것은 눈을 씻고 찾아봐도 보이지 않았다.
“매번 올 때마다 검사를 해야 하니 옥패를 잘 챙기거라. 그것이 이곳의 규율이다.”
빛의 장막에서 법결을 거둬드린 이가 한립에게 옥부를 건네며 말했다.
“감사합니다. 사숙!”
한립이 최선을 다해 공손하게 예를 갖추며 말했다. 두 사람에게 좋은 인상을 남겨야 앞으로 자주 드나들 때 편할 것이다.
“그래, 나를 따라 오거라.”
둘의 표정이 처음보다 많이 온화해져 있었는데, 이곳에 드나드는 이들은 거의 그들과 비슷한 실력의 사람인지라, 한립처럼 예를 차리는 경우가 거의 없었다. 그러니 마음에 안들 것도 없었다.
“그런데 한 사질은 어찌 악록전까지 찾아온 게야. 연단이든, 연법정이든 축기기 이상의 수준은 되어야 사용할 수 있을 텐데, 너무 이른 것 아닌가?”
원형의 진법으로 한립을 데려가던 제자가 물어왔다.
“마 사백의 정원에서 연단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 보니, 약초밭에 자라고 있는 것이 그 원료이니 운이 좋다면 적합한 약방을 구할 수 있지 않을까 하여 온 것입니다. 어쨌든 사질의 자질이 썩 좋지 못해, 외부의 도움 없이는 수련이 힘들어서 말입니다.”
반쯤은 사실이었고 반은 거짓이었다.
“그렇군. 허나 사질의 소망이 이뤄질지는 잘 모르겠네. 들어가 보면 내 말뜻을 이해할 걸세.”
원형 진법에 당도하자, 홍의를 입은 제자들이 한립을 원형 진법 중간에 새우고 각각 좌우로 가서 자리를 잡았다.
“원래 전송진을 이용하면 저급 영석 하나를 내놓아야 하지만, 처음 왔으니 이번만은 넘어가지. 다음부턴 이곳의 규율에 따라야 하네.”
그들 중 하나가 낮게 웃고는, 숙련된 손길로 진법을 향해 홍광을 쏟아 부었다. 양쪽에 홍광이 몰아치니 진법을 이루는 영석이 빛나기 시작했다.
그들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전하기도 전에 하늘과 땅이 뒤바뀌더니 주변이 흐릿해졌다. 다시 눈을 떴을 때는 낯선 대청 안이었다. 그리고 여전히 방금 전에 본 원형진법과 똑같이 생긴 진 안에 서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이게 바로 말로만 듣던 전송진이었다. 한립은 뛰는 가슴을 진정시키고 대청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 * *
이 대청은 특이하게 원주형의 초대형 공간으로 되어 있었다. 좌우로 직경이 30미터 높이로 되어 있었으며 사방이 푸른 암석이었고, 곳곳에 붉은 색의 수정이 박혀있었다.
고개를 들자 놀랍게도 대청의 천장에 하얀 색의 종유석들이 매달려 있었는데, 보기 드문 종유동굴에 누군가 변형을 가해 지금의 대청이 탄생한 듯 싶었다.
한립은 단자가 새겨진 통로로 천천히 걸어갔다. 이 통로는 그리 길지 않아서 모퉁이를 도니 큼지막한 공간이 드러났다.
그곳에는 기다란 탁자와 얼굴에 홍광을 띤 노인이 서서 한립을 향해 웃고 있었다.
“얼굴이 낯선 것을 보니 이곳에 처음 와본 것이로군! 이곳을 찾는 이들은 지겨워 죽겠다는 얼굴뿐이었는데, 자네 같은 젊은이가 찾아오니 좋군.”
노인이 고개를 끄덕거리며 진지하게 이야기 했다. 한립은 천안술을 이용해 상대를 파악해보려고 했으나 실패했다. 그 역시 축기기에 오른 고수였기 때문이다.
“사백을 뵙습니다. 처음 악록전(嶽麓殿)에 든 것이니, 부디 많은 가르침 부탁드립니다.”
“이해가 안가는 게 있으면 무엇이든 물어 보거라. 다만 난 허 가이니 그저 허 백이나 허 노라 부르면 된다. 무슨 사백이니 뭐니 길게 부를 것 없고.”
노인이 서둘러 호칭을 고쳐 주었다.
“그것이……. 그럼 명을 받들겠습니다.”
“알았다. 그런데 이곳에 온 목적이 무엇이냐?”
허 노인이 만족스럽게 물어왔다.
“다름이 아니라 단약과 관련된 약방이나 서책을 찾아 연단하는 법을 살펴보려고 합니다.”
“연단에 관한 약방과 서책이라면 이 계단을 올라가면 될 걸세.”
놀랍게도 허 노인은 한립이 이곳에 온 이유에 대해서는 더 이상 묻지 않았다. 허 노인이 품에서 흑색 영패를 꺼내 주술을 외우자, 노인과 수납장 사이에 천장으로 향하는 돌계단이 나타났다.
한립이 기쁜 마음으로 계단으로 다가서자 그제야 노인은 교활한 표정을 드러냈다.
“2층의 장서를 보려면 한 시진마다 저계 영석 하나다. 원본은 들고 나갈 수 없고, 복제를 하려면 따로 열 개를 내야 하네.”
‘너무 비싸잖아! 복제 비용 열 개는 그렇다 쳐도 열람만 해도 영석 한 개라니 가난한 제자들은 들어가지도 못하겠군.’
저계 제자가 1년 간 모을 수 있는 영석은 이, 삼십 개 밖에 되지 않는데 수련에 필요한 물건을 사거나 생활에 필요한 물품을 구입하는데 써야했기 때문에 남는 것은 얼마 되지 않았다.
한립의 표정이 조금 일그러졌지만, 노인의 말에 더 이상 머뭇거릴 수는 없었다. 고개를 돌리지 않은 채, 한립은 노인의 손에 영석 한 개를 올려놓고는 빠른 걸음으로 계단을 올라갔다.
“영석을 받는다는 소리에도 놀라지 않다니 흥미로운 녀석이구나! 꼬마 재력가가 왔군. 허허, 이번에도 한 몫 두둑이 챙기겠는걸.”
허 노인이 한립의 호쾌한 태도에 즐거워했다. 그리고 손에 쥔 영석을 정성 들여 닦으며 눈을 떼지 못했다. 종전의 온화한 얼굴은 온 데 간 데 없고, 수전노 같은 모습만 남아 있었다.
한립은 서둘러 2층의 물건들을 살펴보았지만, 한립의 예상과는 달리 공간은 넓었으나 방 안의 물건들은 너무 적었다.
거무튀튀한 책장 두 개, 더러워 보이는 탁자 그리고 낡은 의자가 방 안의 전부였다. 책장에는 이, 삼십 권의 누렇게 바랜 고서들이 있었고, 탁자에는 낡아빠진 죽간과 본래의 색을 잃어버린 옥통이 두 개 놓여있었다.
“이렇게 초라하다니! 이건 수도대파의 장서가 있는 비각이라기보다는 어느 가난한 생원집 서재 같잖아!”
한립은 눈앞에 펼쳐진 광경에 충격을 받았다. 옷깃을 붙들고 이게 뭐냐고 따지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는 겨우 진정을 하고 책장 하나에 다가가 아무 서책이나 골라 살펴보았다.
책의 말 머리를 읽다 표지를 살펴보자 표지에 쓰여 있는 라는 글자가 눈에 들어왔다. 이 책에는 병자를 기사회생 시키는 침술 비법이 있었다.
하지만 이 금침술과 연단이 대체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하지만 그를 열 받게 한 것은, 이 책은 문 대인의 서재에서 보았던 서책이었다.
그는 충격을 받아 화가 났지만, 다시 시선을 책장의 다른 책들에게로 돌렸다. 하지만 불길한 예감이 그의 마음을 휘젓고 있었다. 그는 무작위로 남은 고서들을 살펴보기 시작했다. 그리고 한 권 한 권 살펴볼 때마다, 얼굴에는 음울한 기색이 가득했다.
이십 여권의 책 중 연단에 관한 것은 단 하나도 없었고 모두 병을 고치는 비술이거나 잡다한 증상을 기재해 놓은 책만 있었다. 심지어 독을 쓰는 고수가 남긴 독경이란 것도 있었는데, 결국에는 모두 속세의 서책에 불과했다.
“한 시진이 지났네. 더 보려면 다시 영석 하나일세.”
돌연 허 노인의 목소리가 아래층에서 들려왔다. 대답을 하지 않았지만 이런 속세의 서책을 모아 영석을 받는다니, 화가 치밀어 올랐다.
하지만 아직 탁자에 남은 물품들을 확인해야 했기에, 한립은 영석 하나를 더 꺼내 아래로 던져주었다.
“영석 잘 받았네. 그럼 계속 살펴보게나. 방해하지 않을 테니.”
상대는 노골적으로 영석을 얻어내려고 했다. 한립도 더는 영석을 낭비할 마음이 없었기 때문에, 그저 대략의 내용만을 살필 뿐 정독하려는 의지는 전혀 없었다.
이번에 죽간에 기재된 것들은 분명 여러 종류의 단약 제조법이었다. 허나 아쉽게도 황룡단이나 금수환과 다를 바 없는 약성의 영단들이었다. 지금 장춘공 11성에 이른 한립에게는 필요가 없는 것들이었다.
이제 유일한 희망은 옥으로 만든 통 뿐이었다. 이대로 영석만 잃고 빈손으로 돌아갈 수는 없었다.
* * *
옥으로 만든 통을 들어 먼지를 불어내니 청록색의 모습이 드러났다. 그가 옥 통을 관자놀이 부근에 대고 천천히 정신을 집중하니 단약 제조법 하나가 그의 눈앞에 펼쳐졌다.
놀랍게도 한립이 꿈에 그리던 축기단의 제련법이었다. 원료부터 연단하는 법까지 모두 담겨 있었다.
다른 옥 통이 하나 더 있다는 사실도 잊은 채, 온 정신을 쏟아 세세히 살펴보았다. 그러다 약방 중 ‘선천진화(先天眞火)를 가해 담금질을 해야 단약을 만들 수 있다.’는 부분에 이르자 완전히 바보가 되어버린 기분이 되었다.
선천진화는 축기단 수사가 되어야 다룰 수 있는 도가의 강화(罡火)였다. 축기기 이후의 수사만이 기본 공능으로 다룰 수 있었고, 수사의 수행에 따라 위력이 달라졌다.
심지어 결단기 후에는 소위 말하는 삼미지화(三味之火)로 변해 천하의 어떤 물건이든 잿더미로 만들 수 있다고 전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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