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achelor RAW novel - Chapter 77
77화. 선택
그 내용인 즉, 혈금시련의 금지를 5년 후부터 60년 간 봉해 이 기간 동안 칠대선파가 공동으로 감독하며 그 누구의 출입도 막는다는 것이었다.
이런 임시 봉인은 희한한 일은 절대 아니었다. 매 2, 3백 년에 한 번씩 칠대선파가 모여 결정을 내리곤 했다.
금지가 빈번하게 개방되면서 그곳의 영기가 대량으로 유출되었고, 영초의 성장 속도나 양이 급감했던 것이다.
정기적으로 금지를 봉해 다시 영기의 밀도를 높여 그곳의 성장환경을 망가뜨리지 않으려는 의도였다.
그러나 이런 휴지기를 만들었음에도 금지의 영초는 해가 다르게 감소했다.
특히 연단에 필요한 연분의 영초는 드물어 찾기가 너무 어려웠다. 칠대선파의 모 수사는 진정 금지를 원래의 왕성한 모습으로 돌리려면, 휴지기를 천 년 이상은 가져야 한다고 주장하기까지 했다. 이런 임시적 조치로는 그저 영초 고갈을 조금씩 늦출 뿐 근본적 문제해결이 될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의 말이 금지에서 벌어지는 상황과 맞아 떨어진다 해도, 칠대선파의 권력자들은 어려운 결정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축기단의 수량은 각 문파의 흥망성세와도 연관되어 있기 때문이다.
만일 5, 60년 정도 단약이 부족하다면 칠대선파는 그럭저럭 손실을 메우며 꾸려나갈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 기간이 수 백 년 혹은 천 년 이상 지속되면 칠대문파는 물론이고 월국의 수도계가 흔들릴 만한 파급력을 갖게 된다.
누구도 축기를 하지 못하는 곳이 진정한 수도계라 불릴 수 있겠는가? 그 때가 되면 수도가문이든 산수들이든 모두 월국을 벗어나 다른 지방으로 수도의 장소를 옮길 것이다.
그들은 금지의 영초가 씨가 마르기 전에, 다른 숨겨진 지역에서 영초를 채집할 수 있기를 희망하고 있을 뿐이었다.
이에 각 문파의 결단기 혹은 원영기 수사들까지 움직이고 있었다. 최근 수 백 년 간 빈번히 사문을 떠나 영초를 채집할 수 있을 숨겨진 지역을 찾기 위해 애쓰며 눈에 보이는 문파의 쇠락을 막을 출구를 찾으려 하고 있었다.
이런 고충이야 한립이 정확히 알바가 아니었고, 그저 의외의 선포에 5년 후 재도전의 기회는 날아가 버렸을 뿐이었다.
아무리 멍청한 이라도 5년 후 마지막 개방에서는 이미 선혈이 낭자하는 혈금시련이 지옥이 되리란 사실을 알 수 있었다.
각 가문의 걸출한 인재들은 모두 모여 최후의 영초를 차지하려 달려들 테니, 그냥 죽으러 가는 것이나 다를 바 없었다.
일단 이런 소식이 전해졌으니 이번 원행도 다른 때에 비해 참혹하겠지만, 마지막 원행에 비해서는 훨씬 나을 것이 분명했다.
마음을 굳히고 금지 원행 명단에 이름을 올리러 갔다가 뜻밖에 그 담당자가 왕 사숙인 것을 보고 서로 놀랐다.
사실 왕 사숙이 한립보다는 더욱 놀랐을 것이다. 그는 한립 같은 입문제자가 혈금시련에 참가하려 한다는 사실과 그의 비약적 발전에 입을 다물지 못했다.
한립의 자질로 단기간 내에 공법이 11성에 이르렀으니 놀랄 만한 일이었다. 9성에서 한 단계도 아닌 두 단계가 올라있었다. 한립이 천부적 자질을 타고난 제자들 중 하나였다면 그리 드문 일도 아니었다.
그러나 한립이 위영근(伪靈根)을 지닌 것은 왕 사숙이 친히 검사한 사실인데, 어찌 이렇게 빠른 진보를 이룬단 말인가?
한립이 막 입문을 했을 때 이미 9성이었던 것도 놀라울 정도였다. 집안의 어른에게 법력을 주입 받았거나 영약을 수시로 복용하며 고된 수련을 하지 않았다면 불가능한 결과였다.
그런데 이미 11성이 된 한립이 눈앞에 나타났으니 경악할 만한 사건이었다. 왕 사숙은 한립을 이끌고 가 다시 한 번 속성을 판별했다. 결과는 당연히 이전과 동일해 위영근자였다.
이 사실이 왕 사숙의 머리를 복잡하게 만들었다.
한립은 왕 사숙의 의문을 모른 척하며 딱 잘라 열심히 수련을 했을 뿐이라 답했다.
다만 이 놀라운 수련 속도는 미리 준비한 정체를 알 수 없는 과실을 먹었던 경험으로 얼버무렸다. 어릴 적 우연히 괴이한 과실을 따먹었는데, 그 이후 알 수 없는 힘에 의해 이런 놀란 만한 성취를 내는 것이란 이야기였다.
이런 상황이 발생할 것을 대비해 한립이 미리 준비해 놓은 구실이었다.
아마 상대는 반신반의하는 중일 테니 앞으로 한동안 왕 사숙은 될 수 있는 대로 피하고 더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었다.
축기에만 성공해 축기기에만 오르면 자신의 신분은 지금과 확연히 달라질 것이다. 그때가 되면 아무리 의심스럽더라도 함부로 자신을 건들일 수 없었다. 어쨌든 수도계는 강자독식의 세계였다.
이렇게 겨우 빠른 성취에 대한 해명을 마치자 왕 사숙은 더이상 한립을 괴롭히지 않고, 바로 그가 원하는 대로 수속을 해주며 원행에서 주의해야 할 사항을 일러주었다.
이에 한립도 계속 감사를 표하며 그 자리를 떠나왔다. 돌아온 한립은 노인을 찾아 백약원 임무를 잠시 내려놓고 전심전력을 다해 혈금시련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그가 원행에 참가한다는 말에 반나절은 말이 없던 노인은 마치 이미 죽은 사람을 보는 것 같은 시선으로 한립을 줄곧 쳐다봐서 한립의 모골을 송연하게 했다. 그러나 의외였던 것은 떠나기 전 마 사백이 말도 없이 약병 두 개를 한립에게 던져준 것이다. 단약을 받아 든 한립의 머리위로 법기를 타고 날아가는 마 사백의 싸늘한 음성이 들려왔다.
“하나는 내상용, 다른 하난 외상용.”
그의 뜻밖의 행동이 한립의 마음을 따듯하게 해주었다. 두 해를 함께 보내며 노인의 모습을 조금 알게 되었는데, 성정이 괴팍하긴 해도 차가운 겉모습에 비해 마음은 따뜻한 사람이었다.
* * *
금지 원행 3일 전, 왕 사숙이 원행에 대한 논의가 있으니 대전으로 집합하라는 내용을 전달했다.
대전에 가보니 혈금시련에 참가하는 제자들이 모여 서로의 기량을 재보고 있었다. 그 중 한명이 너무 익숙했는데 육 사형에게 봉변을 당할뻔 했던 진 사매였다.
육 사형이 한립에게 제거당한 후, 황풍곡에는 작은 소란이 벌어졌다. 아직 축기에는 성공하지 못했지만 어쨌든 이영근자로서 황풍곡 상층의 관심을 받던 저계 제자가 사라진 것이다.
그러나 진 사매는 문파로 복귀한 후에도 무슨 생각인지 그 날 밤에 일에 대해 입을 다물고 절대 발설하지 않았다.
그러다보니 육 사형은 자연히 실종 처리가 되었고, 문파에서 곳곳에 연락을 해보고 그의 종적을 찾아 나섰으나, 아무런 성과도 없이 점차 잊혀졌다.
진 사매의 태도는 예전과 확연히 달라져 있었다. 아마도 정인의 배신에 큰 충격을 받은 듯 가까이 다가오지 말라는 기운을 풀풀 날리니 그녀의 용모에 끌려 말이라도 붙여 보려던 청년들이 시도도 하지 못하고 움츠러들었다.
그러나 이 냉담하고 도도한 모습은 그녀의 아리따운 외모를 상하게 하기는커녕 오히려 신비한 매력을 더해 주었다. 그녀 주위의 사내들은 대부분 그녀를 힐끔거리곤 했다.
이때 한립만은 입을 꾹 다물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정인에게 처절히 배신당한 경험은 이후에도 쉽게 사내와 교류를 할 수 없게 할 것이며, 심지어 평생 홀로 늙어 죽을 가능성도 컸다. 그는 고의로 그녀의 앞을 돌아다니며 상대가 자신을 알아보지 않는다는 것을 확인했다.
그녀가 자신을 기억에 담아두었을 지 모른다는 걱정이 완전히 사라진 순간이었다.
상대가 이런 혈금시련에 참가한 이유의 절반 정도는 자신이 초래한 것과 같았다. 축기단을 잃었으니 그녀 역시 혈금시련에 참가해 축기단을 얻을 방법 밖에는 남지 않았던 것이다.
이번 원행에 참가하는 제자들은 정말 정예 중에 정예라 13성 막바지에 이른 제자들도 대 여섯 명이나 되었다. 나머지도 거의가 12성에는 이른 이들이었고, 진 사매도 12성 중계 정도의 수준이었다.
마지막으로 11성 제자는 단 세 명이었는데 한립을 제외하면 백발이 성성한 노인과 열 살도 되어 보이지 않는 꼬마가 있었다.
이런 상황을 보자 한립은 오한이 들었다. 이 세 명은 인원수를 채우기 위해 억지로 맞춘 이들이었고, 동시에 먹잇감이 될 것이란 예감 때문이었다.
규정에 따르면 금지에 들어가는 제자의 수는 스물다섯 명을 넘을 수 없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인원을 모두 채웠을 뿐 아니라 모두 수준이 월등하니 다른 원행에 비해 수준 높은 시련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 틀림없었다.
* * *
장문인 종영도의 훈화와 격려가 끝나고 집사제자 둘이 쟁반을 들고 전 내로 들었다.
한 쪽에는 금빛이 나는 저물대가 다른 쪽에는 아름다운 색채를 뽐내는 중계 영석 더미가 올려져 있었다. 원행 전 사기를 북돋을 겸 약속된 물건을 먼저 지급하는 것이었다.
중계 영석은 각자 원하는 것을 골라 가질 수 있어, 이미 토속성과 화속성 영석을 보유한 한립은 수속성을 골라 들었다.
여기까지는 아무도 경쟁할 이유가 없었다. 그런데 저물대 안에서 법기를 고르는 차례가 오면, 제자들의 안색이 신중해졌다.
이 저물대는 일반적인 것과는 달랐다. 다른 저물대가 의식을 집중하고 영기를 주입하면 원하는 물건이 나온다면, 이것은 수도자의 법력을 이용한 탐지능력을 완전히 봉쇄했다.
그저 손을 집어넣어 수십 배까지 축소된 법기를 떠내야만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다시 말해 오로지 촉감을 이용해서만 다른 물건과 구별이 가능했다.
이 저물대는 이런 법기 수여를 위해 특별히 제작된 물건이 분명했다. 아니라면 누가 이렇게 불편한 저물대를 사용하겠는가?
비록 저물대 안의 물건은 모두가 상품(上品)이겠지만, 기본적으로 방어성 법기는 공격성 법기보다 드물었다. 게다가 동일한 등급이라도 그 기능에 따라 가치는 천차만별이라 할 수 있었다.
자신에게 꼭 맞는 법기를 얻는다면 혈금시련에서 그것의 도움을 빌어 목숨을 구할 수도 있었다. 그러니 특히 법기가 부족한 제자들은 더욱 신경을 곤두세웠다. 하지만 한립은 이번엔 크게 연연하지 않았다.
지난번에 시장거리에 가 만옥루의 진귀한 보물들을 쓸어오며 특상품의 법기가 두 개였던 데다가 이후 청교기와 기타 법기까지 얻은 후였다.
거기에 상품 법기 하나가 추가되는 것은 그리 감격할 만한 소식은 아니었다.
한립의 바로 앞 사람까지 물건을 골라가자 대부분은 선택을 마친 후였다. 모두 어떤 법기를 손에 넣었는지는 결코 발설하지도 보이지도 않았다.
앞에 나선 한립은 한 손 만을 넣어 안을 휘적거렸다. 그런데 손에 형태가 남다른 물건이 하나 걸려들었다.
이에 문득 무언가 떠오른 그가 더 고를 것도 없이, 그것을 꺼내 들어 저물대로 집어넣으며 슬쩍 확인했다. 그는 잠시 멍해졌지만 금세 원래의 표정으로 돌아왔다.
법기까지 분배가 끝나자 대전 밖에서 몇몇 인물들이 들어왔다. 그 중 대부분은 한립이 황풍곡에 입문하며 보았던 관사(管事)들이었고, 그 중에는 왕 사숙과 한립의 눈 밖에 난 엽 사숙이 포함되어 있었다.
모두가 평소와는 다른 긴장된 모습으로 공손히 한 노인을 모셔오고 있었다.
노인은 5, 60대 정도로 간혹 희끗희끗한 백발이 섞여있긴 했지만, 혈기가 왕성하고 호랑이 같은 눈빛을 지는 것이 성격이 만만치 않아 보였다.
그가 모인 제자들을 훑어보자, 한립은 마치 오장육부가 그 앞에 훤히 드러난 듯 한 기이한 느낌을 받았다.
종 장문인도 노인이 들어오는 것을 보더니 급히 맞이하며 말끝마다 ‘이 사숙’이라며 존칭을 하였다. 은은히 그를 떠받드는 듯한 인상까지 보여 이를 지켜보는 제자들을 어리둥절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다른 관사들은 전혀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고, 종영도의 말에 노인이 몇 마디 해주자 그것만으로도 선망과 질투의 눈빛을 보내었다.
보아하니 저 노인과 대화를 하고 또 ‘사숙’이란 칭호를 쓸 수 있다는 것이 큰 영광이라도 된다는 태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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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