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achelor RAW novel - Chapter 83
83화. 융영부(融靈符)
한립은 당연히 부적이 아까울 이유도 없었고 정체를 알 수 없는 소녀가 그를 점찍은 사실도 전혀 몰랐다. 그저 이리 간단히 곤경을 벗어난 것에 한숨을 돌릴 뿐이었다.
어쨌든 중심부로 다가갈수록 적은 많아질 것이고 교묘한 함정을 파고 잠복하는 일은 언제든 일어날 수 있었다.
살기 위해서 될 수 있는 대로 불필요한 충돌을 피하는 것이 당장의 계획이었다. 한립이 시체에서 아무것도 찾지 못한 것은 아니었다.
그가 손을 피니 거의 투명이 가까운 실타래가 손바닥 위에 놓여있었다. 떠나기 전 그가 가져온 거검문 제자를 죽인 실 형태의 법기였다.
서서히 법력을 주입하자 실이 점차 뻣뻣해지며 거의 십여 장으로 늘어났다. 그가 시험 삼아 실을 휘둘러 이 법기의 용도를 살폈다. 역시 은밀히 사람을 상하게 하는 데는 탁월한 무기였다.
눈에 띄지 않는 특성에 열 배나 늘어나는 탄성과 예리함이 겹치자 적이 알아채기도 전에 머리를 잘라 버릴 수 있을 터였다.
무슨 재질로 만들어 진 줄 모르겠지만 길이가 더 길었다면 활용할 수 있는 방법은 무궁무진 했을 것 같았다.
그는 곧바로 실을 운용해 가까이에 있는 수목 십여 그루를 두 동강냈다. 아무런 힘도 들이지 않고 얻은 결과물에 한립은 크게 만족했다. 그가 예측한 것보다 더 쓸 만했다.
그때 금지 중심부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선 화도오와 청허문 제자들의 무리가 맞부딪쳐 서로 죽고 죽이고 있었다.
양쪽 모두 대여섯 명으로 숫자가 맞아 기량이 엇비슷했다. 이번 혈금시련에서 처음으로 벌어진 비교적 큰 규모의 사투였다.
모두의 목표는 조금이라도 먼저 금지 중심부에 진입해 영초를 얻는 것이었으니 주변의 적을 미리 제거하는 것이 좋지 않겠는가?
결국 청허문 도사들이 한 수 높아 상대의 대부분을 물리쳤고 남은 화도오의 두 명은 부상을 입은 채 중심부 쪽으로 달아났다.
중심지대에는 각종 기이한 약초와 열매뿐 아니라 그것을 수호하는 강력한 요수들이 있어 축기기 정상에 있는 제자와도 겨루어 봄직한 녀석들도 많았다.
요수를 물리쳐야 약초를 찾을 수 있었다. 일단 어떤 영초가 있다 싶으면 요수도 어디에선가 모르게 나타나는데 그 속성이 비슷했다. 이에 대해선 각 문파의 고인들도 정확한 설명을 내놓지 못했다.
오랜 세월 각 문파의 제자들이 중심지역의 외곽에서만 영약을 채집했는데 조금만 중앙으로 접근하면 금제나 함정에 빠져 갇히거나 죽게 되었다. 게다가 안으로 들어갈수록 야수들이 흉포해져 금제를 뚫고 들어갈 정도의 낮은 등급 제자들은 그저 얌전히 중심부 주변을 배회하는 수밖에 없었다.
“일단 청허문 제자들은 신경 쓰지 말고 먼저 중심지대로가 영초를 채취하자!”
* * *
그 시각 한립은 금지에 들어온 후 최대의 위기를 맞고 있었다. 어느 협소한 길 양쪽에서 한 쪽은 영수산 다른 한 쪽은 천궐보 사람이 막아선 것이다. 게다가 영수산의 장정은 한립이 아는 얼굴이었는데, 원행을 떠나기 전 눈을 흘기던 구레나룻 사내가 ‘넌 죽었다’는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았다.
정말 씁쓸했다 자신이 그렇게 조심하고 또 조심했는데도 다른 이의 매복에 걸려든 것이다.
그것도 최악의 상황으로 일 대 다수의 싸움이 될 듯했다. 그가 위치한 곳은 자료상에 일선천(一綫天)이라 명시된 구역이었다.
주변 환경이 극히 위험해서 어기비행(御器飛行)을 하지 않으면 중심으로 통하는 좁은 길 하나 밖에는 없었다.
이 좁은 길의 양쪽은 모두 험준한 산봉우리라 한립처럼 속세의 무공을 익혀 강한 몸을 지닌 이라도 쉽게 오를 수 없었다.
법기를 타고 이곳을 지나는 것은 누군가의 암습을 받을 테니 말할 필요도 없이 자살행위였다.
이미 선배들이 다년간의 경험 끝에 절대 금지 내에서 하지 말아야 할 행동으로 명시해 두었을 정도였다.
한립 역시 이 좁은 길을 두고 망설였으나 법기를 타고 날아갈 수 없다면 방법은 하나밖에 없었다.
그저 착실히 뚜벅뚜벅 걸어가는 것이다. 평소대로 한립은 만전을 기했고 신경을 바짝 곤두세웠다.
그렇게 겨우 길을 빠져 나오려는데 어떤 조짐도 없이 이 두 사람에게 앞뒤를 막혀버린 것이다.
구레나룻 사내의 표정을 보니 입을 놀려서 빠져나갈 상황이 아니었다. 그는 바로 온몸에 방어술을 걸어 일렁이는 수막을 펼쳤고 이어서 비천순을 발동했다.
손에는 여전히 금부자모인과 초급 고계 부적 중 토뢰술(土牢術)을 쥐고 있었다.
구레나룻 사내와 뒤편의 인물은 그저 한립이 하는 냥을 지켜볼 뿐 막거나 먼저 공격을 감행하려는 의지가 없어 보였다.
자신을 죽일 수 있다는 자신감이 충만하지 않고서는 할 수 없는 행동이었다.
이상한 일도 아닌 것이 뒤에 선 이는 십이 성 막바지였고 구레나룻 사내야 아까 보았든 십삼 성에 이르러 있었다.
그 둘이 겨우 십 일 성에 이른 한립을 상대한다는 것은 십중팔구는 누워서 떡 먹기였다.
한립은 바싹 마른 입술을 핥으며 냉소했다. 상대가 이렇게 나온다면 그것 또한 이용하면 그만이었다.
그는 소리도 없이 신형을 움직여 두 사람과 자신이 삼각형을 이루도록 위치를 옮겼다.
뒤에서 공격을 당할 가능성을 줄인 것인데 역시 두 사람은 그 틈을 타 자신을 공격하지 않았다.
수도계에 들어와 적으로 맞닥뜨린 이중 가장 강자라 할 수 있지만 한립은 그다지 겁이 나지 않았다.
그가 항상 불필요한 싸움을 피한다 해서 자신에 대한 믿음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상대보다 법력이 훨씬 부족해 장기전으로 가면 안 되겠지만 최상급 법기와 부적이 충분하니 그 차이는 충분히 메울 수 있었다.
정 안되면 천뢰자를 꺼내 둘 중 하나만 죽이는 것도 가능했다. 쓰기 너무 아깝다는 말이다.
그러나 지금 궁금한 것은 어찌 구레나룻 사내가 천궐보 사람과 함께 있는지였다.
동문끼리 뭉치는 것이야 흔한 일이지만 그들은 분명 다른 문파가 아닌가!
“네 놈이 간도 크게 감히 금지 밖에서 날 비웃어? 게다가 그 천한 계집이랑 눈을 마주치고 시시덕거리다니 네 놈 목숨으로 그 죄를 물어야 할 게다.”
구레나룻가 흉악한 표정으로 대뜸 고함을 쳤다.
“엄 형제, 저 자식은 나와 풀어야 할 게 있으니 내게 맞기면 돼. 내가 수선계가 만만치 않다는 것을 가르쳐줘야지! 내세에라도 실수하지 않도록 말이야!”
듣고 있던 천궐보인이 어깨를 으쓱했다.
“난 빠져 있을 테니 마음대로 해. 그래도 저번처럼 또 내게 목숨 빚지지 말라고!”
“하하. 저번에는 정말 의외의 사건이었다고. 이번엔 정말 햇병아리이니 실력의 반만 써도 처리 할 수 있네.”
얼굴이 약간 붉어진 구레나룻 사내가 툴툴거렸다.
“허, 그래도 네 부고는 듣기 싫으니 잘하게. 어쨌든 마음이 맞는 술친구를 다시 찾는 것도 어려운 일이니까.”
천궐보인이 고개를 젓는 모습이 구레나룻 사내의 성질머리에 머리가 아픈 듯 했다. 그래도 그 역시 상대가 오랜 친구의 적수가 되리라 여기지 않았으므로 그의 말에 동의한 것이다. 우두커니 서서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자니 마음 속 의문이 풀렸다.
두 사람은 벗이었고 그 중에서도 관계가 아주 좋은 축이었다. 이렇게 되면 분명 둘의 협공은 마음이 잘 통해 임시로 연합한 이들보다 상대하기 어렵다. 또 말하는 어투로 보아 처음 협공하는 것도 아닌 듯싶었다.
‘빠른 속도로 한 놈을 처리하고 남은 놈을 상대해야겠어. 각 파 제자들이 다 흩어져 떨어졌는데 이들은 서로 만나 뭉치다니 너무하잖아!’
한립은 두 사람이 서로 비슷한 곳에 떨어진 운을 의심하면서도 하늘을 타박했다. 마침 천궐보 제자도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는 구레나룻가 한립을 향해 다가가는 것을 보며 그들이 한 데 모이게 한 가장 큰 공신인 융영부(融靈符)를 떠올렸다.
고계 융영부는 정말 대단했다. 그들이 금지로 들어선 순간 동시에 부적을 사용하면 둘의 영기가 잠시 동안 연결되어 같은 장소에 떨어지게 만들었는데 성공확률은 반 정도 밖에 안 되었다.
다른 초급 고계 부적들보다 훨씬 비쌌지만 여기에 매복해 협공을 통해 벌써 여러 명을 보냈으니 그 수확도 컸다.
엄 가는 영리한 이였다. 그가 엄청난 대가를 치르고 이곳에 온 것은 다른 사람들처럼 영초를 노린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보물을 털어 일확천금을 벌려는 의도였다.
두 사람이 협공을 하고 몇몇 대단한 고수들만 피하면 어떤 후환도 남기지 않고 간단히 자신의 목적을 이룰 수 있었다.
‘정말 완벽한 계책이 아닌가! 내가 아니면 그 누가 이런 생각을 하겠어.’
천궐보 제자가 원정이 끝난 후의 아름다운 미래를 생각하자 마음이 붕 떠서 눈앞의 대전에는 전혀 눈길을 주지 않았다.
이때 구레나룻이 비웃는 기색으로 녹색 가죽주머니를 열며 한립에게 다가섰다. 금방이라도 출수를 할 것 같았다.
그러나 방금 친구의 말이 효과가 있었던지 반절쯤 오다가 부적을 꺼내 자신의 몸에 녹색이 도는 방어술을 걸었다. 한립도 그 모습에 눈썹을 꿈틀거렸다.
원래는 영수산 제자의 실력이 뛰어나더라도 그가 소홀한 틈을 타 제거하려 했으나 방어법술을 펼쳤으니 쉽지 않을 것이다.
물론 천뢰자를 발동시키면 저런 방어법술은 전혀 쓸모가 없어지겠지만 그건 어쨌든 일회용품이었다. 정말 죽을 위기가 아니라면 되도록 사용하지 않을 작정이었다.
한립의 주의는 다른 한 사람에게로 옮겨갔다. 그가 뒷짐을 지고 하늘을 보며 무언가 생각하는 모습이 전혀 이곳에 신경 쓰고 있는 것 같지 않았다. 그런 태도에 한립은 꽤 만족스러웠다.
더 생각할 것도 없이 바로 토뢰술 부적을 구레나룻에게 냅다 던졌다. 부적이 허공에서 황광을 내며 상대의 몸으로 분출되더니 뜻밖에 구레나룻의 녹색 방어막 위로 다시 거대한 황색의 덮개가 생겨 그를 가두었다.
구레나룻은 한립이 부적을 던져도 별 걱정을 안 했다. 그가 두른 목속성 방어막은 효과가 엄청나서 일반적 공격으로는 뚫을 수가 없는 것이었다.
게다가 겨우 십일 성 공력을 가진 햇병아리가 무슨 대단한 위력의 부적을 가지고 있을 것 같지도 않았다. 기껏해야 초급 중계 정도면 다행이었다.
이런 이유로 전혀 신경 쓰지 않고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내들었다. 그러나 뜻밖에 화색 덮개에 갇히고 토뢰술이란 것을 알아본 뒤로 구레나룻의 안색이 묘하게 바뀌며 일이 심상치 않게 돌아간다는 것을 느꼈다.
그가 주머니에서 뽑아낸 것은 기다란 자색의 괴물 뱀이었는데 날개가 달리고 ‘꽤꽥’거리는 괴성을 지르는 것이 무척 괴이했다.
그것은 손을 빠져 나오자마자 황색 덮개에 달려들었는데 서로 충돌을 할 때마다 토뢰술이 걸린 덮개가 잘게 흔들리는 것이 힘이 장난이 아니었다.
구레나룻도 웃으며 다시 한 번 주머니에서 다른 영수를 풀어놓았다. 이 둘이 함께 공격하면 토뢰술을 부수는 것은 시간 문제였다. 이곳을 빠져나가 상대의 늑골을 모두 뽑아버려 이 수모를 갚으면 그만이었다.
하지만 한립은 구레나룻은 신경 쓰지 않았다. 예상 밖에 한립의 신형이 빛나며 바로 천궐보 제자에게 쏘아져 나갔다.
그 속도가 극히 빨라 보일 듯 말 듯 했으며 심지어 환영까지 만들어 냈다. 동시에 손으로 저물대를 가볍게 치자 손에 비슷한 크기의 다른 법기가 쥐어졌다.
천궐보 제자도 결국 망상에서 벗어나 괴이한 움직임으로 다가오는 한립을 발견하였다. 그의 안색이 대번에 변해 서둘러 물러나며 동시에 부적 한 장이 손에 나타났다. 이때 한립과 그의 거리는 아직 여유가 남아있었기에 천궐보 제자는 부적을 이용해 법술을 펼치기에 충분한 시간이 남아있다 여겼다.
하지만 그가 영력을 부적에 불어넣기도 전에 묘한 웃음을 띤 한립의 표정을 보았다. 한립은 그를 향해 인사를 건네 듯 손을 흔들었는데 동시에 목에서 모기에 물린듯한 가려움이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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