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achelor RAW novel - Chapter 89
89화. 적과 벗의 경계
“봉이의 보물 신발을 어찌 손에 넣었지? 그 녀석은 답운보를 보물처럼 여겨 절대 남에게 빌려줄 리 없을 텐데.”
말을 하며 알록달록한 의복을 걸친 인물이 어느새 거목 밑에서 등장했다. 체격은 평범했고 온 얼굴에 곰보가 가득한 사십 대의 남자였다. 특이한 점은 크기가 제각각인 일곱 개 정도의 주머니를 매달고 있었다.
그는 못생긴 얼굴에 가득 의문을 담고서는 한립의 신발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마치 답운보가 한립에게 있는 것이 있을 수 없는 일이라는 표정이었다.
“댁은 누군데 날 습격한 거죠?”
한립은 상대의 질문에 답하지 않고 도리어 반문했다. 상대의 수에 놀아나거나 기세에 눌리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추한이 그 말을 듣더니 일순 어이없어하며 바로 흉흉한 기세로 노려보았다. 당장이라도 손을 뻗어 눈앞의 애송이를 혼내주려다가 무슨 생각인지 손을 거두었다.
“네가 봉이의 신발을 신었다고 내가 혼내지 못할 거라 생각 말거라! 봉악 녀석이 신을 주며 영수산 종오의 이름을 언급하지 않더냐? 정말 이상하구나. 분명 황풍곡 사람이거늘 어찌 그가 네게 신을 넘겼지. 설마 봉이의 사생자인가? 그렇다고 하기에는 너무 닮지 않았는데.”
그는 계속 한립을 보며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그 어이없는 추측에 이번엔 한립이 화가 치솟았다.
“그런 놈을 아무에게나 갖다 붙이지 마시죠. 봉악은 이미 죽은 지 오래고 이 신발은 그 놈에게서 벗겨낸 것이니!”
“죽었다고? 광인 봉악이?”
원래 서슬이 시퍼렇던 사내가 경악했다. 그리고 자신도 모르게 뒷걸음치며 한립을 다른 눈으로 바라보았다.
“네가 죽인 것이냐?”
그가 눈을 굴리며 묻는데 이미 처음의 포악한 기세는 온데 간데 없었다.
“그렇다면. 왜? 그 대신 복수라도 하려고요?”
한립이 뒷짐을 지고 말없이 상대를 주시했다. 그러나 저물대에서 몰래 꺼내든 실이 그의 손가락에 은밀히 감겨있었다. 그가 이리 대범하게 봉악을 죽인 사실을 털어 놓은 것은 위세를 부려 상대를 물러나게 할 의도가 다분했다. 중심부로 가는 길목에서부터 괜히 싸움에 휘말려 양패구상하거나 약초를 캘 시간을 낭비할 마음이 없었다.
그의 어투로 보아 봉악과 친분이 있을 듯 하나 정말 봉악을 위해 무슨 복수를 하려 들 가능성은 정말 희박했다. 수도자라 함은 대부분 정에 연연하지 않는 경우가 많은데 저런 악인이야 말해 무엇 하겠는가?
물론 상대가 흔쾌히 죽은 봉악을 위해 복수 하겠다 나서면 어쩔 수 없이 선공을 해 승기를 잡을 계획이었다. 체력을 허비하더라도 신법을 완전히 개방해 손에 든 실로 목을 그어버리면 어떻게 죽는 줄도 모르게 죽일 수 있을 터였다.
지금은 추한과의 거리가 너무 멀었다. 한립이 아무리 빨라도 일격에 죽일 수 있다는 보장을 할 수 없었다. 상대가 언제든 방어법술을 사용하면 이 실은 완전히 무용지물이 된다.
“복수? 그게 무슨 말 같지 않은 소리야. 내가 그리 할일 없는 사람처럼 보이더냐? 이전에 그 녀석과 교분이 있긴 했지만 그것이 전부다.”
그는 전혀 아무렇지 않다는 듯 자신의 입장을 밝혔다. 경계도 그대로였고 말은 안 했지만 한립도 약간 안심이 되었다. 어쨌든 중심 구역에 들어오자마자 일전을 벌일 필요는 없어진 것이다.
“그런데 어린 친구가 실력이 대단하구만. 봉악은 그렇게 쉽게 상대할 녀석이 아닌데 말이야. 특히 그 신발은 최상급 법기라, 헤헤. 정말 얻기 힘든 물건이지.
사내가 자신의 코를 긁적이며 한결 친밀하게 말하는데 심지어 그를 부르는 호칭도 달라졌다. 그러나 그렇게 아무 말이나 하면서 그 자신은 슬금슬금 뒤로 물러나는 것이 보였다. 한립과의 거리를 더 벌리려는 것이었다. 그 모습에 한립은 쓴 웃음을 지었다.
그의 생각엔 지금 달려든다 해도 이미 성공확률은 십분의 일이나 될까 말까했다. 저 자는 고수인데다 간교하고 경험이 풍부했다. 게다가 상대는 자신이 봉악의 법기를 차지한 걸 보고 무척 경계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모든 것을 파악하고는 한립은 웃음을 머금었다. 자신이 법기를 어찌 얻었는지 굳이 중얼거릴 필요는 없었다.
“석벽 위의 작품은 당신이 그런 겁니까?”
그저 석벽 위의 일을 꺼내 대화를 시작했을 뿐이었다.
“개소리! 그건 화도오 인요(人妖) 한천애가 그런 것이다. 난 그런 무료한 짓 따윈 안 해! 그 많은 피와 살점을 낭비하다니 얼마나 아까우냐? 나였으면 우리 귀염둥이들에게 먹였지. 듣자니 수도자의 피와 살은 보양에 그만이라던데.”
처음에는 은은한 미소를 들으며 상대의 말을 듣고 있던 한립이 추한이 등 뒤에서 커다란 보따리를 꺼내 피가 뚝뚝 떨어지는 고깃덩이를 보이자 얼굴 표정을 유지하기가 힘들어졌다. 악한이 한립의 기색을 슬쩍 보고는 홀로 의기양양해했다.
‘이 황풍곡 녀석은 어쨌든 너무 어리고 경험이 적어.’
몇 마디 말에 저렇게 얼굴색이 변하다니, 정말 전투가 벌어지면 큰 약점이 될 것이었다. 그가 보기에 한립이 봉악 녀석을 죽인 것은 너무 의외였다. 겉보기엔 평범하기 그지없었고 그럴만한 능력도 없을 것 같았다.
이렇게 어린데다 법력도 얕다면 좋은 법기를 몇 개 가지고 있다 해도 봉악의 황라산, 답운화 등의 최고급 법기를 이겨냈을 리 없었다. 너무 이상했으나 답운보가 지금 한립의 발에 신겨있는 것만은 확실한 사실이었다. 그가 봉악을 죽인 게 아니라 운이 좋아 얻게 될 것을 수도 있고 그것도 아니라면 다른 원인이 있을 터였다.
종오는 생각을 하다 하다 머리가 다 아플 지경이었지만 아직도 한립의 실력에 대한 판단은 내릴 수 없었다. 이런 경우 먼저 상대를 도발하는 짓은 죽어다 깨어도 할 리 없었다. 자신의 목숨을 담보로 도박을 하는 것은 총명한 이가 할 짓이 아니었던 것이다. 추한이 생각을 정리한 후 보따리를 다시 매더니 눈을 깜빡이며 한립에게 못생긴 웃음을 선보였다.
“그렇지. 아직 소형제의 이름도 묻지 않았네. 이 종 아무개에게 알려줄 수 있겠나?”
“황풍곡의 한립입니다.”
숨길 것도 없는 일이라 안색이 훨씬 나아진 한립이 대답해 주었다.
“음, 한 형제였구만. 내 이전에는 소형제의 이름을 듣지 못했던 걸 보니 아마 이번에 들어온 신예인가보군. 한 형제는 중심구역에 대해 얼마나 아나?”
종오가 뜻밖에 몇 년간 못 만나다 본 벗을 대하듯 확연히 살가워졌다.
“그리 아는 것이 많지 않습니다. 종 형이 연배가 있으니 저보다는 훨씬 많이 알 것 같습니다.”
상대의 의도를 파악하지 못한 한립의 경계심이 커졌다.
“헤헤! 한 형제 날 믿을 수 있다면 우리 중심구역 자료를 교환하는 게 어떤가? 우리 둘 모두에게 득이 되는 일이니 말이야.”
종오가 잠시 뜸을 들이더니 낮은 목소리로 자신의 의사를 밝혔다. 한립이 주저하며 다시 얼굴색이 어두워졌다. 다른 문파 사람과 사사로이 자료를 교환해도 된다는 사문의 없었던 것이다. 그래도 비록 명문에는 안 된다 적혀 있긴 했으나 실제로는 교환을 하는 경우도 허다했다. 그래서 한립도 잠시 후 얼굴에 다시 웃음을 걸었다.
“가능하지요. 자료를 교환하면 우리 둘 모두에게 이익일 것입니다.”
“하하! 잘 됐구만. 역시 한 형제가 미적거리는 이는 아닐 거라 보았네. 자, 우리 자료를 옥간에 넣어 서로 교환하지.”
오종의 얼굴 가득한 곰보에서 흥분의 광채가 분출되었다. 게다가 계속 손을 비비는 것이 한립의 자료에 크게 기대하는 느낌이었다. 이를 본 한립을 냉소했지만 입으로는 그 거래를 수락했다. 자료를 복사하는 일은 간단해서 한립과 상대 모두 일다경이 지나자 일을 마치고는 서로에게 옥간을 던져주었다.
옥간을 받을 오종과 한립은 중심구역의 자료가 맞음을 확인하고서야 서로 딴 궁리를 하며 웃음을 지었다. 이 짧은 시간동안 거짓 자료를 만드는 것은 불가능 했지만 관건이 되는 몇 가지 중요한 사실을 누락하는 것은 가능했다.
이 일을 계기로 종오와 한립의 관계는 부쩍 가까워져서, 종오는 한립에게 수선계의 기원기사에 대해 늘어놓기도 했다. 둘이 웃고 떠드는 모습이 잠깐 전까지 서로 생사를 걸고 싸우려 했던 사람들처럼 보이지 않았다. 보아하니 둘 모두 언제 치고 언제 빠져야 할지를 아는 사람들이었다. 겉으로는 활짝 웃으며 흥미롭게 대화하는 한립이었지만 속으로는 오히려 욕을 하고 있었다.
‘떠들고 싶으면 떠들어라. 근데 이렇게 먼 거리를 유지할 것은 무엇이야? ’
그가 한발만 앞으로 다가가도 상대는 더없이 다정한 표정을 지으며 두 발 물러섰다. 한립은 이미 그를 죽일 생각이 아니었음에도 그 신중함에는 혀를 내둘렀다.
그래도 조급하지는 않았다. 금지 내부는 외부와는 확연히 달랐다.
중심지 외의 기타구역은 영초(靈草)나 기과(奇果)들이 대부분 규칙성 없이 무분별하게 자라났다. 그것들을 발견하면 먼저 가져가는 자가 임자였기에 보통은 얼른 챙겨서 달아나곤 한다. 그래서 이런 기타지역에선 영초로 인해 유혈사태가 벌어지는 경우는 오히려 드물었다. 보통은 정예제자들의 대청소나 어떤 이들의 살인탈보(殺人奪寶)에 당해 비명횡사하는 경우가 훨씬 많았다.
그러나 일단 중심부에 오면 달랐다. 간신히 살아 돌아온 이전 제자들의 증언에 따르면 중심지 면적은 엄청 커서 검지의 삼분의 일이 넘는다 했다. 그 전체를 석벽이 감싸며 원형을 이루었는데 네 개의 황동대문 주변까지 합해 전체를 크게 세 층으로 구분할 수 있었다. 마치 과실의 껍질과 과육 그리고 씨앗으로 나눌 수 있는 것처럼 분명히 나누어졌다.
이 그림과 같은 풍경 속이 바로 중심부의 가장 바깥층이었다.
자료에 따르면 이곳은 그리 넓지 않아서 폭이 일 리(里) 정도로 이곳에서 자생하는 화초와 수목은 각각이 진귀하고 드문 개체들이긴 하지만 영약이라 불리거나 수도자들에게 실용적인 것은 거의 없었다. 그저 감상용 혹은 취미용 화초들인 것이다.
칠대선파의 많은 이들이 추측하기에 첫 번째 구역은 금지 주인이 고의로 이렇게 만든 것이었다. 화원과 같은 용도로 눈과 마음을 사로잡는 다채로운 꽃과 나무들을 감상하려 했던 것이다. 그러니 이곳에서 쓸모 있는 영초를 찾을 바에야 중심지 밖으로 나가는 것이 더 날을 정도였다.
정말 수도자에게 쓸모가 있는 상품 영초는 중심부의 두 번째 구역에서 자라난다. 금지에 들어온 각 문파 제자들 중 대부분이 바로 이 두 번째 구역을 노리고 온 것이다. 그 영초들 중에 축기단의 주요 재료인 삼대약초가 포함되어 있으니 자연히 최대의 목표가 되고 한립 역시 같은 마음을 먹고 이곳에 왔다. 이 구역 이야기가 나오니 처음 자료에서 관련 정보를 보았을 때 한립은 꽤나 놀랐었다.
두 번째 구역은 전체가 거대한 환형(環形) 산맥으로 연중 짙은 안개가 껴있어 자신의 손을 들어도 손가락을 확인할 수 없는 지경이라 했다.
또한 산 중에 동굴이나 계곡 벼랑 같은 자연적 지형뿐 아니라 석실, 선전과 같은 인공건축물이 있었고 당연히 각종 천지 영초가 모두 자라났다.
종오와 한립이 교환한 자료의 주요 내용도 이곳의 영초의 위치를 다루고 있었다. 누구도 자신이 이 산에 들면 자료에 자신이 있는 장소가 기재되어 있을 지 확신할 수 없었다. 그러니 딱 맞는 지형으로 가 영초를 찾으려면 가능한 자료는 많으면 많을수록 좋았다.
이 산은 운무가 너무 짙고 규모가 커서 일단 들어가면 몇 걸음 만에 방향 감각을 상실하곤 한다. 그러면 이리 저리 더듬거리며 나아가야 했고 같은 길로 돌아 올 수 있을 지도 모두 운에 맡겨야 했다.
더 골치 아픈 일은 이 환형의 산속엔 무수히 많은 요수들이 살고 있었다. 일급 하계의 화염서(火焰鼠), 추풍토(追風兎)부터 일급 최고계의 금광망(金光蟒), 빙화랑(氷火狼)까지 칠대문파 사람들이 들어본 것들은 다 모여 있었고 듣지도 보지도 못한 요수까지 전부 살고 있었다.
대부분은 그리 강하지 않은 요수로 일급 상계가 가장 많이 서식했다. 정예 제자 여러 명이 합공하면 확실히 간단히 처치할 수준이었다. 물론 홀로 상대해야 한다면 힘든 싸움을 각오해야 할 테지만 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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