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achelor RAW novel - Chapter 9
9화. 추수환(抽髓丸)
잠시 후, 그는 굳게 닫았던 두 눈을 뜨고, 한립의 손에 들린 환약을 쳐다보았다. 그 시선에서 뜨거운 열망이 느껴졌다.
한립은 말없이 그의 입 안에 환약을 넣어 주었다. 그가 목구멍으로 환약을 넘기는 것을 보고 천천히 그의 몸에서 은침들을 뽑아내었다. 모든 은침들이 사라지자, 환약의 약효가 퍼지기 시작했다.
려사형의 창백했던 얼굴에 비정상으로 붉은 기가 돌더니, 온 얼굴이 점차 피처럼 붉게 변하였다. 그가 다시 발작을 일으키며 사지를 떨기 시작했고, 입에서는 낮은 신음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는 이런 추한 꼴을 보이고 싶지 않아, 온 힘을 다해 신음소리를 참고 있었다. 하지만 엄청난 고통은 결국 그를 울부짖게 만들었다.
그의 울부짖음이 커질수록 발작도 더 심해져만 갔다. 한참의 지나고서야 그는 천천히 조용해져 갔고, 결국에는 어떤 소리도 내지 않았다.
려사형의 얼굴도 본래의 빛을 되찾기 시작했고 발작을 멈추었다. 고통스런 순간은 지나간 듯 했다.
려사형은 천천히 몸을 바로 하고 가부좌를 한 채 두 눈을 감았다. 그는 제자리에서 꼼짝도 않고 운기행공에 들어갔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던 려사형이 갑자기 두 눈을 뜨더니 옆에 던져두었던 장도를 들고는 뛰어 올랐다.
팔뚝에 힘을 주어 휘두르니 도가 빛을 머금었고, 날카로운 도의 날이 한립의 목을 겨누고 있었다.
“내가 널 죽이면 안 될 이유를 하나라도 말해 보거라!”
려사형의 눈빛은 차가웠고 살기가 가득했다.
“방금 당신의 목숨을 구해 준 것이, 그 이유가 될 만한지요?”
한립은 변함없는 안색으로 단지 눈썹꼬리를 슬쩍 올렸을 뿐이었는데, 자세히 관찰하지 않으면 발견하지 못할 만한 것이었다.
려사형의 표정이 미세하게 풀리는 듯하였으나, 여전히 흉악한 눈빛으로 한립을 쳐다보았다.
“당신을 구하기 전부터, 이 비밀을 지키기 위해 살인멸구(殺人滅口)를 할지도 모른다고는 생각했으나, 이렇게 빨리 움직일 줄은 또 몰랐습니다.”
한립이 끝내 쓴웃음을 지으며 말을 이었다.
“허! 당신을 구하면 내게 이런 성가신 일들이 생길 줄은 알았지만, 의술을 익힌 사람으로서 죽어가는 사람을 구하지 않을 수가 없어서 말이지요.”
려사형이 그의 말을 듣고는 난처한 기색을 보였다. 도를 한립의 목에서 미세하게 떼어 놓기는 하였지만, 완전히 치우지는 않았다. 한립은 속으로는 크게 한시름 놓았지만, 더욱 침착한 말투로 타일렀다.
“당신의 비밀을 다른 사람에게 털어 놓지 않을 겁니다. 내가 그렇게 입이 가벼운 사람은 아니라서요. 정말 마음을 못 놓겠다면 내 맹세를 하지요. 당신도 알겠지만 난 무공을 할 수 있는 사람도 아니니, 내가 이 맹세를 저버린다면 당신이 손쉽게 베어 버리면 그만이지 않습니까?
“그럼 맹세를 해라.”
려사형이 단호하게 답했다. 그제야 한립은 완전히 마음이 놓였다. 비록 그가 려사형을 치료하기 전에 살펴본 바로는 그가 배은망덕하고 잔인한 사람처럼 생각되지는 않았지만 확실치 않은 일이었다.
만일 그가 은혜를 원수로 갚는 소인배였다면, 자신 역시 유일한 호신(護身)의 수단을 사용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는 이런 생각을 하며 손가락을 슬그머니 소맷자락 안의 철통으로 가지고 갔다.
한립이 신중하게 맹세의 말을 다 한 다음에야, 려사형이 장도를 거두어 칼집 안으로 집어넣었다.
그 후 목을 쓰다듬어 보니 피부에 날카로운 칼날이 만들어낸 한 줄기의 얇은 혈흔이 묻어났다.
조금 끈적한 것이 만져지니 뒷골이 서늘해졌고 식은땀이 흐르는 듯했다.
‘진짜 위험할 뻔했어! 빈틈없이 생각해야 했는데. 이제 누가 뭐라고 하든 이런 생고생은 절대 하지 않겠어. 다른 사람 일을 내가 알게 뭐람.’
* * *
“귀하가 내 생명을 구해 주었고 또한 날 위해 비밀을 지켜준다 맹세까지 하였으니, 이 려비우가 당신에게 큰 빚을 졌습니다. 내가 죽기 전에 도울 일이 생기면 찾아오시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무슨 일이든 돕겠습니다.”
려사형은 온전히 기운을 회복하고는 땅에 던져진 자신의 잡다한 물건들을 다시 챙겼다. 그리고 한립에게 진지하게 자신의 이름을 밝히며 이런 약조를 건네었다.
“내가 당신을 귀찮게 할 일은 아마 없을 듯한데. 오히려 당신 스스로에게 성가신 일이 적지 않을 거요.”
한립이 빙그레 미소 지으며 반문하였다.
“어찌 알았소?”
려비우가 놀란 듯 어리둥절해했다.
“누구나 쉽게 추측해 낼 수 있는 일이지요. 당신 같은 일개 호법의 제자가 당주, 장로 그리고 심지어는 문주의 제자들을 능가해 버리니, 어떻게 편안한 나날을 보낼 수 있겠습니까?”
한립이 려비우의 정곡을 찌르며 말하자, 려비우의 안색이 침울해 지며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이러한 문제는 제가 관여 할 수 없는 일이죠. 허나 당신이 먹는 추수환이 불러오는 고통에 대해서라면 내가 다소 도움을 줄 수 있겠군요.”
“정말이오?”
려비우의 얼굴에 희색이 가득한 것으로 보아, 이 추수환의 고통이 그를 상당히 괴롭히고 있었음이 분명했다.
“내가 당신을 속여 무엇 하겠습니까.”
한립이 맑은 눈으로 려비우를 바라보았다. 그에게는 당연히 고통을 줄여줄 만한 약방이 있었는데, 그가 시간이 날 때 마다 장석철을 위해 연구해 놨기 때문이었다.
고통을 느끼는 감각 자체를 대폭 제한하여 고통을 줄여주는데 굉장히 효과가 좋았다.
“잘 되었소. 정말 잘 되었습니다!”
려비우가 흥분해 두 손을 비비며 눈이 빠져라 한립을 쳐다보았다.
“그런 눈으로 날 보아서 무엇 한답니까? 내가 지금 약을 들고 다니는 것도 아닌데요. 신수곡으로 돌아가 약재를 만들어야 합니다.”
려비우가 이 말을 듣고 있자니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자신이 위협한 상대에게 이제는 자신을 위해 약을 지어 달라 청하고 있었다.
“내일 오시쯤 신수곡 입구로 와서 날 기다리세요. 내 약을 잘 만들어 줄 테니. 지금은 문 대인이 출타중이라 외부인을 마음대로 들일 수가 없으니까요.”
한립이 느긋하게 말을 맺었다.
“좋소. 내 그곳으로 가겠소. 정말로 고맙소.”
“난 한립이라 하고 문 대인님의 직전제자입니다. 그냥 한사제라 불러주세요.”
한립은 그가 다정하고 친밀한 말투로 대하자, 얼른 자신의 이름을 밝혀 그의 낯간지러운 소리를 피했다.
* * *
려비우는 돌아가서 몸 상태를 살펴야겠다는 말과 내일 오시에 약을 받아 가겠다는 약속을 하고는 한립에게 먼저 이별을 고했다.
한립은 려비우가 사라져가는 모습을 묵묵히 바라봤다.
지금까지 한립은 려비우가 이런 종류의 비약을 먹은 이유에 대해 캐묻지 않았다.
한립 역시 그 연유를 물어 본다 한들 이미 일어난 일을 되돌릴 수는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의 빛나고 영광스러운 모습 뒤에는, 분명히 말 못할 고충이 있을 것이다. 그에겐 그것이 목숨과 바꾸더라도 포기할 수 없는 것인지도 모른다.
만약 그에게 억지로 이 고충에 대해 털어 놓게 한다면, 간신히 봉합된 상처를 다시 벌리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
한립이 이렇게 한 것은 옳은 일이었다. 려사형은 떠나기 전 한립이 추수환을 먹게 된 이유에 대해 캐묻지 않는 것을 보고는, 그가 마음을 잘 헤아린다며 감격했기 때문이다.
한립이 자신의 생명을 위협했던 사람에게 고통을 줄여줄 비약을 주기로 한 것은 간단했다.
그에게 소소한 은정(恩情)을 베풀어 필요할 때 자신을 도울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올해 아니 몇 년 동안 그의 도움이 전혀 필요치 않다 하더라도 상관없었다.
도움이 필요한 사람에게 작은 도움을 주는 것도 스스로가 유쾌해질 수 있는 일 중 하나였다.
비록 려비우가 엄청난 호인은 아닐지라도 오늘 이런 일을 함께 겪었으니, 자신에게 위해를 가할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될 듯 싶었다.
한립은 그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서둘러 신수곡으로 돌아와 비약을 만들기 시작했다.
아픔을 줄여주는 약을 만드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다. 그저 약재원에서 알맞은 재료를 찾아다가 배합하면 되는 일이었다.
다만 배합 과정이 조금 복잡해 조심할 필요가 있었다.
한참동안 약 만들기에 몰두한 한립은 려사형이 일 년 동안 쓸 수 있는 약을 배합해 내었다.
그가 더 많은 약을 만들지 않은 것은 려사형이 매년 약을 찾으러 자신을 찾아오기를 바랐기 때문이다.
그가 베푼 은정을 잊게 내버려 두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 * *
저녁 무렵이 되자 한립은 갑자기 평소와는 다른 표정으로 자신의 방문 앞 의자에 앉아 있었다.
고개를 들어 칠흑 같은 하늘을 올려다보니 밝은 달빛이 눈에 들어왔다. 달빛 속에는 저 멀리 고향에 있는 가족들의 모습이 들어 있었다.
그가 부모님 곁을 떠나 온지도 이미 4년이나 흘렀다. 노을산에 올라온 후 거의 매일 고되게 수련을 해야 했으므로, 가족에 대해서 생각할 여유도 없었고 한 번도 하산을 하여 찾아간 일도 없었다.
그저 매월 자신이 받는 은자의 대부분을 다른 사람을 대신하여 집에 보내거나 매년 장씨 아저씨가 대필한 부모의 서신을 받았을 뿐이다.
서신에는 이전에 비해 집안 사정이 넉넉해져 큰 형은 이미 혼인을 하여 독립하였고, 둘째 형도 좋은 며느리 감을 데려와 내년쯤에는 경사가 있을 듯 하다고 했다.
그 외에는 별다른 이야기는 없었다. 물론 이런 변화들은 모두 자신이 집으로 보낸 은자 덕분이었다.
그러나 한립이 몇 번의 안부를 묻는 서신에서 가족들이 자신을 대하는 태도가 가면 갈수록 예의를 차린다는 느낌을 받았고, 마치 낯선 사람을 대할 때와 비슷하다고 느껴졌다.
한립은 서신에 어떻게 응답해야 할지 몰라 당황스러웠다. 그러나 이런 감정초자 시간이 갈수록 무덤덤해졌고, 가족들의 모습도 그의 마음속에서 흐릿해져 갔다.
오늘 밤 같은 경치를 보면 어떤 감정이 물밀 듯 밀려와 고향에 있는 가족들을 회상하곤 했다.
되돌아 생각해보니 집에서 보냈던 따뜻하고 평화로웠던 나날들이, 지금 그가 쉽게 얻을 수 없는 것이었기에 더욱 편안하고 소중하게 느껴졌다. 그는 천천히 이 기분을 즐겼다.
한립은 가슴에 품고 있는 평안부가 담긴 가죽주머니를 살짝 건드려보았다.
가죽주머니를 만지작거리면, 옅은 만족감이 생기고는 했는데, 오늘은 어찌된 일인지 마음이 요동치며 평정을 찾을 수가 없었다.
지금 한립은 뭐라 말할 수 없이 울적한 기분이 들어 스스로의 감정을 통제하기가 어려웠다.
몸 전체가 뭔가 불편해지며 체내의 기혈도 쉼 없이 꿈틀대기 시작했고, 구결 수련을 통해 생성된 괴상한 내력 역시 난동을 부리려 하고 있었다.
‘주화입마(走火入魔)!’
순간 이 무서운 글자가 한립의 머릿속에 떠올랐다. 한립은 일어서서 심호흡을 하며 평정을 되찾으려 하였다.
지금 문 대인이 없으니, 오직 자신만이 눈앞의 위험에서 스스로를 구할 수 있었다. 한립은 아무런 이유도 없이 어찌 주화입마에 들려 하는 지 여전히 답답하기만 했다.
지금 이 문제의 근본적 원인을 찾기에 좋은 때는 아니었지만, 주화입마를 불러일으킨 원인을 파헤쳐야 이 사단을 철저히 해결할 수 있을 것이다.
한립이 고개를 들어 주위를 구석구석 살폈다. 허나 시선을 끄는 물건은 눈에 띠지 않았다. 그가 오른손으로 자신의 아래턱을 문지르는데 손에 뭔가 불룩한 것이 닿았다.
‘가죽주머니……. 평안부!’
무엇이 있는지 바로 한립의 머릿속에 떠올랐다.
‘설마, 이게 이런 사단을 냈단 말인가? ’
한립은 확신할 수 없었지만 일단 지금은 머뭇거릴 겨를이 없었다. 몸 상태가 더욱 엉망이 되면 언제든 자신이 통제 불능의 상태로 빠질 수 있었기 때문에, 그는 주머니를 잡아 당겨 온 힘을 다해 멀리 던져 버렸다.
‘안 돼! 더 참기 어려워졌어. 기혈의 뒤틀림도 더욱 강렬해지고.’
한립이 다시 한 번 몸 안의 기이한 현상을 억누르려 시도하며, 핏발 선 눈으로 뚫어져라 주머니가 던져진 곳을 쳐다보았다. 몸이 망가지기 전에 원인을 찾아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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