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achelor RAW novel - Chapter 927
927화. 한정족(寒精族)
*
심해의 한 지하궁전, 아주 깊숙한 밀실에는 12개의 청동으로 만든 고대 등(燈)이 녹색 화염을 불태우고 있었다. 큰 것은 달걀만 했고, 작은 것은 엄지손톱만 했다.
그 앞에 몸집이 거대한 인영이 가부좌를 틀고 앉아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쉭!
그런데 한립이 괴물 나방의 혼백을 죽이는 순간, 고대 등불 중 하나가 갑자기 꺼져버렸다. 이에 마른 인영이 괴이한 소리를 내며 천천히 고개를 들어 얼굴을 드러냈다.
그는 놀랍게도 해골 머리에 눈에는 녹색 불길이 괴이하게 타오르고 있었다. 해골은 고개를 들어 불이 꺼진 고대 등을 보고는 분노에 차 검은빛을 토해냈다. 검은빛에서 나타난 것은 네모난 검은색 인장이었는데 인장의 표면에는 새까만 진룡이 네 면을 빙글 돌며 새겨져 있었다.
낯선 주술 소리가 해골의 입에서 들려오고 검은 인장이 거무튀튀한 안개를 내뿜었다. 등불은 안개 속에서 청록색 소머리 괴수의 모습을 비추었다.
괴수는 바닥에 엎드려 꼼짝도 하지 않았는데 가슴이 오르락내리락하지 않았다면 시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해골은 입을 벌려 괴수의 몸을 향해 녹색 화염을 뱉어냈다.
끼익-
괴수가 녹색 화염을 흡수하자 갑자기 몸을 부르르 떨며 기이한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그리고 천천히 눈을 뜨고 바닥에서 일어났다.
크아앙!
초점이 없던 괴수의 눈빛이 점점 또렷해지며 두 손을 움켜쥐고 괴성을 내질렀다. 그러자 푸른 뇌전이 소머리 요수의 몸에서 튀어나와 주위를 맴돌았다.
이에 해골은 날카로운 소리로 괴수에게 무어라 분부를 내렸고 소머리 요수는 뇌전을 더욱 크게 일으켰다.
꽈광!
천둥소리를 울리며 요수는 푸른 뇌전을 타고 순식간에 사라졌다. 요수가 사라지자 해골은 눈 속의 화염을 번뜩이며 불이 꺼진 고대 등불을 향해 손짓했다.
펑-
고대 등의 불길이 다시 솟았지만 아주 약해 언제라도 꺼질 것처럼 위태로웠다. 해골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침음하다 한 손으로 허공을 동그랗게 갈랐다.
순간 공간파동이 일며 은빛 거울이 나타나 해골 머리 앞에 둥실 떠올랐다. 해골 머리가 다시 녹색 화염을 분출하자 거울 표면에 영기의 빛이 돌며 희미하게 무언가 보이기 시작했다.
그것은 바로 푸른 장포를 입고 뒷짐을 지고 있는 청년의 모습이었다. 그게 한립이 아니면 누구겠는가!
해골은 거울에 떠오른 한립의 모습을 보고 손을 저었다. 그러자 거울이 갈라지며 푸른빛으로 흩어졌다.
* * *
같은 시각, 한립은 보랏빛으로 물든 괴물 나방의 시체 옆에 내려와 자세히 살펴보고 있었다.
고계 괴수의 육체는 전부 희귀재료였으나 내단 외에 그가 가장 관심 있는 것은 괴물 나방이 수정 방패를 응결했던 비늘과 날카로운 칼날을 만들어냈던 거대한 날개였다.
그러나 지금은 요수나 분석하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한립은 괴물 나방의 몸을 줄여 푸른빛과 함께 저물탁 속으로 집어넣었다. 그는 저물탁을 회수하고 곧바로 푸른 빛줄기로 변해 날아올랐다.
그가 향한 곳은 괴물 나방이 날아온 얼음 섬 안쪽이었다.
* * *
얼마 가지 않아 그는 목적지에 도착했다.
한립은 허공에 멈춰 서서 건물들이 부서지고 쓰려져 있는 것을 보았는데 놀랍게도 전부 얼음을 이용해 지은 것이었다.
부서진 얼음 건물과 핏자국 그리고 찢겨져 나간 의복들을 제외하고는 살아있는 생명체라고는 보이지 않았다. 한립은 미간을 좁히며 커다란 궁전 앞에 내려섰다. 그는 두 발이 땅에 닿자마자 고개를 홱 돌려 근처의 한 누각을 돌아보았다.
“숨어 있는 것이 누구냐? 당장 나오거라!”
“살려주십시오, 대인! 저희는 은사 거사께서 부리시던 시종들입니다.”
여인의 목소리가 들려오며 닫혀있던 누각에서 젊은 남녀 한 무리가 튀어나왔다. 전부 청초한 얼굴에 대부분 열예닐곱 살 밖에는 되어 보이지 않았다.
그 중 가장 나이가 많은 여인이 수십 명을 대동하고 한립에게 인사를 올렸다. 그들은 전부 겁에 질려 있었다. 그러나 한립도 그들의 몸을 훑고는 놀란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겉보기에는 인족과 똑같았지만 몸에서 희미한 냉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눈보라에도 얇은 옷만 걸치고 있는 것이 전혀 춥지 않은 모양이었다.
한립이 무언가 물어보려다 표정이 달라지며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하늘 끝에서 영기의 빛이 반짝이고 두 줄기 둔광이 빠르게 날아들었다. 빛이 가시고 나타난 이들은 청소와 검은 치마 여인이었다. 그들은 한립을 보자마자 놀람과 기쁨으로 격앙되었다.
“한 선배님께서 이곳에 계시다니! 그럼 괴물 나방을 벌써……?”
청소는 믿기지 않는다는 얼굴을 했다.
“그렇네. 그 괴물은 내가 이미 처리했네.”
한립이 미소를 지으며 저물탁에서 괴물 나방의 시체를 불러내 땅에 떨구었다.
괴물의 시체까지 확인한 두 여인은 더욱 기뻐했다. 청소는 평정을 되찾고 한립을 향해 예를 올렸다.
“한 선배님이 아니었다면 저희 화호군도에 수많은 사상자가 나왔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은사 거사마저 적수가 되지 못하셨으니 이 일대에서는 재앙이나 다름없는 괴물이었습니다. 한 선배님의 대단한 신통으로 그 요물을 죽여주시니 감사할 따름입니다.”
검은 여인도 더욱 예를 갖추며 말했다.
“별 것 아닐세! 마침 내 공법과 상극인터라 잡을 수 있었던 것이네. 겉보기에는 바다 요수로는 보이지 않던데 어디서 나타난 괴물인지 알고 있는가?”
“그건 저희도 모르겠습니다. 그런 괴물은 이곳에 처음 나타난 것이라서요. 저희와 수십 명의 수사들이 이곳에 모여 어떻게 바다 요수를 상대할까 상의하고 있었는데 그 나방이 안개를 뚫고 섬으로 날아왔습니다.
예상치 못한 습격에 수행이 부족한 수사들은 즉시 포효 소리에 터져나갔습니다. 다행히 은사 거사께서 나서 주셔서 괴물을 붙들어 주신 덕에 나머지 수사들은 무사히 탈출할 수 있었습니다.”
다시 생각해도 끔찍한지 청소가 몸을 떨었다. 한립은 미간을 좁히며 고개를 끄덕이고는 누각에서 몰려나온 젊은 남녀들에게 시선을 돌렸다.
“이들은 이 섬에 머물던 자들인가? 특수한 체질을 지닌 것으로 보이는데 수도자는 아닌 듯하군.”
“하하, 이들은 한정족(寒精族)입니다. 천지영기를 다룰 수 없는 대신 아주 영민하고 약간의 한기(寒氣)를 분출하는 능력을 지녔습니다. 젊은 시절의 용모로 평생을 살다가 수명이 다하는 날에야 늙습니다. 소수 민족이라 화호군도 전체를 통틀어도 만 명밖에 살지 않지요.
수도자를 배출할 수 없는 종족의 특성상 강대한 종족에 의탁하거나 수행이 높은 상족의 문하에서 비호를 받고는 합니다. 이 한정족들은 은사 거사의 거처에 머물며 시종 노릇을 하던 이들이고요.”
검은 치마 여인이 자세히 설명해주었다.
“허나 은사 거사께서 저리되셨으니 앞으로 살길이 막막할 것입니다.”
청소가 퍽 안 되었다는 듯 덧붙였다.
“오, 그런 특이한 종족도 있었구만.”
한립은 처음 들어보는 터라 신기하게 젊은 남녀를 쳐다보았다. 그들은 우두머리 여인을 중심으로 모두 고개를 조아리고 있었다.
“너희는 한 선배님의 문하에 들어가고 싶은 게로구나. 한 선배님, 저들을 거두어 주시는 것은 어떠십니까? 한정족은 시종으로 삼기에는 최적입니다. 동부의 잡다한 일은 물론 약재밭을 돌보는 데도 재능이 있거든요.”
검은 치마 여인이 그들의 의도를 알아채고 제안했다.
“약재를 키울 줄 안다는 뜻인가?”
“키울 줄 안다 뿐인가요. 일반적인 상족 수도자들도 영약을 재배하는데 있어서는 이들보다 못한 경우가 많습니다. 이들이 은사 거사의 비호를 받아 이곳에서 생활할 수 있었던 것도 그 때문이고요. 인근 해역을 벗어나 바깥으로 나갈 수 있다면 여러 상족들이 앞 다투어 탐낼 인재들입니다.”
“아쉽지만 나는 홀로 지내는 것이 습관이 되어 시종이 필요치 않다네. 이들은 두 수사께서 알아서 안배하게.”
한립은 청소의 말에도 고민 없이 고개를 저었다.
“예, 선배님이 정 그러시다면 알겠습니다. 사실 저도 동부에 일손이 부족하기는 해서요. 청 수사께서는 어떠십니까?”
“저는 섬에 시종이 충분합니다. 마음에 드신다면 모두 거두시지요.”
청소가 호쾌하게 한정족들을 내주었다. 그 말을 들은 검은 치마 여인이 한정족 남녀에게 다가가 의사를 물었다.
눈앞에서 주인을 잃었으니 검은 치마 여인의 요청을 거절한 이유가 없었다. 그들은 공손히 그러겠다고 대답했고 검은 치마 여인의 명을 받들어 얼음 궁전을 정리한 다음 한립과 여인들을 안내했다.
“한 선생님께서는 앞으로 어떻게 하실 생각이십니까? 아직도 바다 요수를 죽일 마음이 있으신지요.”
의자에 앉자마자 청소가 먼저 입을 열었다.
“마음을 먹었으니 끝을 봐야겠지. 어찌 되었든 시도는 해볼 생각이네.”
한립의 말에 청소와 검은 치마 여인이 시선을 마주쳤다.
“자네들은 내가 못 할 거라 생각하는가?”
“아닙니다. 괴물 나방까지 물리치신 선배님께서 어찌 바다 해수를 당해내지 못하시겠습니까. 하지만 저희가 바다 요수를 추격할 수 있을 거라 여긴 것은 은사 거사께서 기르시던 은광사란 영수 때문이었습니다. 그 영수가 은사 거사와 함께 목숨을 잃었으니, 그 바다 요수를 찾아내는 것이 쉽지 않을 것입니다.”
검은 치마 여인이 재빨리 해명했다.
“그랬군. 은광사는 어찌 바다 요수를 추격했었는가?”
“은사 거사께서 말씀하시기를 은광사는 태생적으로 추적에 능한 비밀 신통을 지녀 한 번 본 물건은 만 리 내에서도 감응할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저희는 은광사를 데리고 바다 요수가 자주 출몰하는 해역으로 나가 요수가 숨어 있는 곳을 찾으려 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성가시게 되었군. 그럼 홀로 바다 요수가 출몰하는 곳을 돌아다니며 나머지는 운에 맡겨야겠어.”
“한 선배님, 그러지 마시고 한 달 뒤쯤 출발하시는 것이 어떠십니까? 남호도에 모이기로 한 수사들이 아직 많이 남아 있습니다. 그들이 오면 같이 찾아보는 것이 홀로 돌아다니시는 것보다는 나을 것입니다.”
검은 치마 여인이 생각 끝에 건의했다.
“청 수사의 말을 들으니 바다 요수의 신통이 강해 따도 떨어져 수색했다가는 괜히 수사들만 목숨을 잃을 것이네. 함께 돌아다니면 속도도 떨어지고 말이야. 그러느니 홀로 다니는 것이 더 편할 것 같군.”
한립의 말에 두 여인은 반박할 말이 없어 입을 다물었다.
“내 운이 좋아 공운정을 찾아온다면 자네들은 전송진을 수리해주면 되네.”
“그건 안심하셔도 됩니다. 공운정만 찾아주신다면 전송진 수리는 모두 저희에게 맡겨 주십시오!”
두 여인의 답변에 한립이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 후의 일들은 간단했다. 한립은 바다 요수가 출몰했던 곳을 물어보고는 푸른 빛줄기로 변해 날아갔다. 청소와 검은 치마 여인이 대전 문밖에서 그를 배웅했고 그가 사라지자 표정이 달라졌다.
“아직도 한 선배님께서 홀로 그 괴물을 죽였다는 것이 믿기지가 않습니다. 수행이 은사 거사와 비슷해 보이시던데 은사 거사는 얼마 버티지 못하시고 죽임을 당하지 않았는지요.”
“한 선생님께서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마침 상극인 신통을 지녀 괴물을 죽일 수 있었다고요.”
“청 수사께서는 그 말을 믿으십니까? 저는 못 믿겠습니다. 괴물 나방의 괴이한 신통과 심후한 요력은 상족 9계에 이를 만했습니다. 적어도 두 단계는 차이가 날 텐데 겨우 상극인 신통으로 그리 쉽게 죽인다는 것이 말이나 됩니까?”
검은 치마 여인이 묘한 얼굴로 눈짓을 했다.
“그래서 하고 싶으신 말씀이 무엇인지요?”
“별 건 아니고. 청 수사께서는 아직 반려가 없으시지 않습니까? 한 선배님의 능력이라면 좋은 선택이 아닐까요? 마음이 없다면 저라도 한 번 도전해 볼까하고요.”
“저와 한 선배님은 이제 겨우 두 번 보았습니다. 무슨 생각을 하시는 겁니까?”
청소의 얼굴이 일순 붉게 달아올랐다.
“다들 하는 생각입니다. 제 기억이 틀리지 않았다면 청 수사가 5계에 머문지도 상당한 세월이 지나지 않았습니까? 높은 수행을 지닌 수사와 인연이 닿아 함께 수련하면 고비를 넘어 다음 경지로 나아가기도 쉬운 법이지요.
그러니 몇 번 보지 못한 것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어차피 인근 해역에 갇혀 살다보면 앞으로도 자주 볼 수밖에 없으니까요. 청 수사의 미모와 재능에 어느 사내가 마음이 동하지 않겠습니까?”
검은 치마 여인이 장난스럽게 웃음을 터트렸다.
“함부로 그런 말씀하시면 안 됩니다. 한 선배님께서는 하루빨리 자신의 대륙으로 돌아가고자 하시는 분이라 이곳에 오래 머물지 않을 것입니다. 게다가 이미 반려가 있을지도 모르고요.”
“아, 그건 문제네요. 허나 그렇게 교활한 바다 요수를 어디에서 찾는답니까? 대륙으로 통하는 전송진을 수리하지 못하면 그분도 어쩔 수 없이 화호군도에 머물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러면 이전에 반려가 있든 말든 무슨 상관이 있겠습니까?”
검은 치마 여인의 말에 청소는 말없이 한립이 사라진 방향을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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