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achelor RAW novel - Chapter 93
93화. 충돌
한립이 동남쪽 고요한 산속으로 향하는 동안 세 명의 제자들이 한립이 손에 넣은 자후화 두 송이를 차지하려 서로 맞서고 있었다.
다만 이 자후화들은 연한 푸른색이 아닌 아름다움이 극에 달한 밝은 자색이었고 진한 향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그 두 송이의 기이한 꽃 앞에 타오르는 불처럼 붉은 뿌리를 가진 괴물 사슴이 머리와 몸이 분리 된 채 핏물 속에 죽어 있었다.
죽은 지 한참은 되어 보이는 요수와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 각각 상이한 의복을 걸친 세 사람들이 삼각형을 이루며 서있었다. 아직 누구도 먼저 움직이지 않는 것이 다른 둘을 상당히 경계하는 낌새였다.
“이 무슨 짓이냐? 자각록(炙角鹿)을 내가 죽였으니 영초는 내 것이다.”
결국엔 그 중 일인이 만면에 노한 기색을 보이며 입을 열었다. 말을 하는 이는 이십대 정도의 남색 의복을 걸친 청년으로 몸매가 호리호리했고 한 손에는 푸른 삼지창을 다른 손에는 노란 구슬을 들고 있었다. 두 물건 모두 눈부신 영기를 발산하는 것이 척 보아도 최고급 법기였다. 그 홀로 비범해 보이는 상계 요괴를 해치웠다는 말이 맞는 듯 했다.
“도 형, 올해도 또 마주할 줄은 몰랐습니다. 저와 도형의 인연이 대단합니다 그려!”
이번에 입을 뗀 것은 지팡이를 진 평범한 청삼의 노인이었는데, 퍽이나 인자한 표정을 하고는 청년의 말을 무시한 채 다른 중년 도사에게 말을 건넸다.
“그러니 말입니다. 저도 이번 해에 다시 이 시주와 마주칠 줄은 몰랐습니다.”
도사가 칼집에 넣은 소박한 장검을 등에 지고는 아주 평안한 표정으로 답했다. 역시 청년 쪽으로는 눈길조차 주지 않았지만 말이다.
천궐보 청년은 화가 치밀어 올랐다. 어릴 적부터 자질도 비범하고 가문이 좋은 탓에 어딜 가도 대접을 받아온 그가 언제 이런 무시를 당해 보았겠는가?
그런데 이 두 놈이 코 앞에서 수모를 주니 열이 받았다. 무어라 따지기도 전에 노인이 도사를 향해 하는 말이 그의 안색을 바꾸게 하였다.
“옛일은 말 할 것 없고 지금 이곳에 영초가 두 뿌리뿐이니 도 형과 내가 반반씩 나누어 가지면 딱 알맞겠습니다.”
쓸데없는 말을 길게 할 것 없이 노인이 단도직입적으로 청허곡 도사와 연합하자는 의견을 제시한 것이다. 중년 도사도 놀란 기색도 없이 잠시 침묵하더니 그의 말에 응했다.
“그도 좋겠지요. 여기 모인 이는 실력이 비슷하니 다투어 보아야 양패구상밖에 더 할까요. 그리하는데 저는 이견이 없습니다.”
그 소리를 똑똑히 듣고 있던 청년은 화가 나기도 하면서 놀라기도 했다. 저 둘이 협공하면 그의 법기가 아무리 강력하다 해도 승산이 별로 없었다.
그래도 이렇게 눈앞의 영초를 포기하는 것도 달갑지 않았다. 그가 급히 머리를 굴리고는 돌연 신형을 뒤로 빼 영초가 있는 곳으로 달려갔다. 그리고 영초 하나를 쥐고는 바로 내달리기 시작했다.
“죽고 싶으냐!”
청년이 막 출발하는데 청삼의 노인이 안색을 굳히더니 손에 들고 있던 지팡이를 집어던졌다.
그 지팡이가 한 줄기 청광으로 변해 청년의 뒤를 쫓는데 어찌나 빠른지 번쩍하는 순간 이미 청년의 앞에서 그를 막고 있었다.
크게 놀란 청년은 도대체 어떤 법기 길래 이렇게나 빠른지 감을 잡지 못했다.
그러나 이미 결정을 했으니 더 생각할 것도 없이 손에 든 청색 삼지창을 쏘아 보내 그 청광을 상대하게 하고는 자신은 계속 달음박질을 유지했다. 영초를 손에 넣지 않고는 곱게 물러날 기세가 아니었다.
“이미 늦었네. 빨리 영초를 놓고 달아나지 않으면 빈도가 어쩔 수 없이 살생의 계를 범해야겠구만!”
청년이 막 두 걸음을 뗐는데 바로 뒤에서 도사의 평이한 목소리가 들어왔다.
마치 그가 바로 뒤에 서있는 것 같은 소리에 청년은 혼이 나갈 것 같았다. 얼굴에 핏기가 가신 그가 고개를 돌리니 역시 머리 위에 도사가 위치해 그를 보고 웃고 서있었다.
청년은 창백한 얼굴로 영초를 놓고는 말도 없이 곡 바깥을 향해 미친 듯 질주했다.
고개를 돌릴 생각조차 못했는데 저 둘과 자신의 실력 차가 너무 커 다시 영초를 가져보겠단 마음을 먹었다간 죽을 것임을 깨달은 것이다. 그들이 자신을 살려 보내는 것만으로도 기적이었다.
“헤헤! 도 형의 영호보(靈狐步)는 역시 대단합니다. 정말 절묘한 경지에요!”
노인은 도장이 청년을 살려 보낸 것을 보고 괴이하다 여겼지만 그래도 말리지 않고 도리어 그에게 찬사를 보냈다.
“보잘것없는 재주에 불과합니다.”
도사가 청년이 사라진 방향을 보며 느긋이 대답했다.
“이 시주는 빈도가 저 자를 놓아준 것이 이상하지 않습니까?”
“허허! 조금 그렇긴 하더군요. 저 녀석의 법기가 쓸만해 보여 조금 욕심이 나더이다.”
중년 도사가 잠시 침묵하더니 돌연 이리 물어오자 노인도 자신의 심사를 속이지 않고 솔직히 답했다.
“그런 마음은 일찍 접으시는 게 좋을 겁니다. 저 자는 죽여서는 안 될 자이니.”
도사가 양 눈썹을 찡그리며 경고했다. 청삼의 노인이 그 말을 듣고 이상하단 기색을 떠올렸으나 그 이유를 묻지는 않았다. 이미 여기까지 이야기가 나온 바에야 기다리면 그 이유도 알려줄 것이 분명했다. 역시 도사가 말을 이었다.
“저 자는 천궐보의 마운룡과 관련된 인물이니 되도록 건드리지 않는 게 좋습니다.”
노인이 듣고는 관심이 가는 지 놀라 물었다.
“천궐보에서 백 년 만에 결단기에 들 가능성이 보인다는 그 마운룡 말입니까?”
“그가 아니면 또 누구겠소? 내 이전에 그를 몇 번 본 일이 있는데, 방금 청년의 손에 들린 낙진주(落塵珠)가 바로 그의 성명 법기였습니다. 절대 내 눈이 틀릴 리 없으니 그 청년은 마운룡과 관계있는 자인 것이지요. 그를 건드려 좋을 일이 없다는 말이외다.”
“그렇군요. 도 형의 가르침 덕분에 큰 실수를 면했습니다. 허, 그래도 어서 영초를 챙겨 떠나시지요. 불청객이 찾아들도록 기다릴 수야 없지 않겠습니까?”
노인이 겨우 놀람에서 벗어나 의견을 냈다. 자연히 도사도 이에 동의해 각자 좌우의 자후화를 한 송이씩 챙겨 즉시 갈라섰다. 비슷한 일이 다른 곳곳에서도 벌어지고 있었다. 다만 다른 곳의 충돌은 이렇게 평화롭기보다는 굉장한 극렬했다는 점이 달랐지만 말이다.
환형 산의 어느 산등성이, 네 명이 두 패로 갈라져 각자 법기를 구동하여 싸우고 있었다. 그 중 일남일녀가 황색의 의복을 걸친 것이 황풍곡의 제자로 보였다.
사내는 40세 정도로 학자 느낌이 났고 한 손에는 은광을 발하는 거대한 붓 그리고 다른 한 손에는 금광을 발하는 금빛 서책을 들고 있었다. 그것들을 휘두르고 시전하자 온 천지가 은빛과 금빛으로 뒤범벅돼 상대 두 명의 등 뒤로 식은땀을 흐르게 만들었다.
어여쁜 여인은 역시 남색과 황색을 띠는 비검 법기들로 보조공격을 하고 있었지만 안목이 있는 사람이라면 그녀의 실력이 그녀의 패거리는 물론이고 상대와 비교해도 퍽 뒤떨어져 도움이 되지 못한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도리어 뛰어난 그녀의 동료가 몇 번이나 그녀를 도와주어야 할 정도였다. 그리고 그들의 상대는 동일 문파 사람들이 아니었다.
한 명은 머리 위로 녹광의 보호막을 띄우고 사발만한 굵기의 비사(飛蛇)와 대형 황색 말벌 떼를 이용해 황풍곡 남자의 금빛 공격을 막으며 미친 듯 날뛰고 있는 추남이었다. 뜻 밖에도 한립이 자료를 교환 했던 종오였다. 다른 한 사람은 유순한 외모의 잘생긴 청년이었는데 청색 의복으로 보아 화도오 제자로 보였다.
그 앞에선 붉은 비도 두 개가 춤을 추며 네 개의 광망을 분출하고 있어 척 보아도 보통 법기가 아님을 알 수 있었다. 그러나 본래는 공격성 법기인 비도가 지금은 두개의 수레바퀴 모양의 광막으로 온 힘을 다해 별처럼 쏟아지는 은색 붓의 공격을 막아내고 있었다.
“그만! 그만 하시죠! 우리 두 사람이 졌어요. 진 가 분들이 솜씨가 이리 매서우니, 이 석실 내의 영초는 이제 당신들 것입니다.”
정말 더는 막을 수 없었는지 화도오 청년이 입을 열고 승복했다. 옆의 추남 종오는 달갑지 않다는 기색을 드러냈으나 그를 말리지도 않아 청년의 말을 묵인한 것이다 다름없었다. 그는 바로 비사와 말벌 떼를 불러들였다.
“흥! 당신들이 그만 하자면 그만 해야 하나요? 그렇게 봐줄 수가 있을까!”
실력이 가장 약한 황풍곡 여인이 얼굴이 드리운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기며 그럴 순 없다는 듯 소리쳤다. 자신은 방금 전까지 계속 밀리고 있던 터라 그녀의 말이 곱게 나갈 리 없었다.
“그럼 어쩌자는 게요? 설마 우리를 깡그리 죽여 없애겠다? 그럴 수 있을 듯 합니까!”
그 말에 황도오 청년이 화가 치밀어 소리치는데 여인이 놀랐을 때 내는 고음이어서 듣고 있던 다른 세 사람을 닭살 돋게 만들었다.
“당연히 아니지요. 우리 칠(七) 매가 화가나 하는 말일 뿐이니 두 분께서는 어서 가보시지요. 이 진 아무개는 절대 두 분을 붙잡을 생각이 없습니다.”
중년의 황풍곡 사내가 이맛살을 찌푸리며 바로 여인의 버릇없는 말을 막았다. 그리고 안색을 평안이 하고 종오 등에게 차분히 설명했다.
“하하, 진형이 진가의 대공자답게 역시 기도가 저 계집과는 다르십니다. 그럼 저희는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화도오 청년이 돌연 평정을 되찾았는지 정상적인 사내의 목소리로 돌아왔다. 날카로운 여인의 목소리와 미공자의 저음이 차이가 너무 커서 다른 이들은 이상하게 여겼다. 말을 마치고 청년과 종오가 아쉽다는 눈길로 석실 내부를 살피더니 쓰린 가슴을 부여잡고 종적을 감추었다.
“큰 오라버니, 어찌 저 둘을 살려 보낸 거예요. 조금만 더 했으면 죽일 수 있었는데!”
아리따운 여인이 둘이 사라지는 것을 눈으로 살피더니 결국엔 참지 못하고 중년 사내에게 고개를 돌렸다.
“칠 매, 그 일 후에 어찌 이리 과격해 진 것이야! 걸핏하면 인명을 해하자 들고. 저 둘이 어떤 사람들인지 알기나 하는 거야? 저들은 꽤 이름난 명문 대가문 출신으로 우리 연, 진 가 등 초(超)급 대가문에는 미치지 않더라도 쉽게 보아선 안 될 이들이야. 쉽게 원한을 사서 좋을 일이 없다는 것이지!
게다가 정말 저들을 죽이고 싶다 해도 성공하지 못할 가능성이 태반이라고! 서책과 은필의 위력으로 겉으론 저들을 위기로 몬 것 같지만 실제론 둘이 도망갈 생각을 하지 않을 때나 그렇지. 만일 정말 살수를 쓴다면 저들이 바보가 아닌 이상은 금세 눈치 채고 도망갔을 것이야. 그렇게 되면 아무리 내 서책과 은필의 위력이 대단하다 해도 저 둘을 어쩌겠어? 결과적으로 헛되이 원한만 만들 뿐이 되는 것이지!”
황풍곡 중년인은 우선 애정을 담은 말투로 여인을 질책하고는 자신이 저들에게 살수를 펼치지 않은 원인을 설명해 여인을 깨우쳐주었다.
“그래 맞다, 칠 매! 육가 놈이 널 모해하려 한 후 다시는 얼굴을 비추지 않는 걸 보니 아마 널 구해준 이에게 살해당했을 가능성이 커. 정말 그렇다면 육 가 놈의 운인 것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죽느니만 못한 꼴을 당하며 대가를 치렀을 것인데! 그런데 널 구한 이의 정체는 더 알아보아야겠어. 본 곡의 제자들 중 육가에게 위협이 될 만한 이가 출타한 적이 있는지 알아보았는데 그럴 만한 녀석이 없더군. 육가 놈의 하찮은 법력이야 몰라도 그 청교기는 만만찮은 최상급 법기이니, 그의 수중에서 널 구할 정도면 실력이 약하지는 않아야 하는데 말이야. 설마 정말 본 문 사람이 아닌 지나가던 수도자였던 것일까?”
여인이 큰 오라버니라 부르는 이가 말투가 다정하게 변하였다. 알고 보니 이 칠 매라는 여인이 얼음장같이 변해버린 진 사매였다. 그러나 자신의 큰 오라비에게 만은 예전의 모습을 드러내 그의 말을 듣자마자 부끄러워 얼굴을 붉히며 응석을 부렸다.
“피! 그 녀석은 이야기해 뭐해요. 구했으면 구한 거지 날 야산에 버려두고 내 축기단을 가지고 달아났잖아요. 십중팔구 그리 착한 사람은 아닐 거예요.”
그녀의 말투에서 그에 대한 불만이 느껴졌다. 사실 그녀가 이리 창피하고 화가 나는 원인은 일단 그를 떠올리면 정신이 혼미해서 발가벗고 불처럼 타오르던 그 난감한 밤이 떠올라서였다.
게다가 그녀의 전신을 훑던 서투른 두 손과 그에게서 뿜어져 나오던 사내의 숨소리가 아직도 기억에 남아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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