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achelor RAW novel - Chapter 94
94화. 소녀와 소녀
수치스럽고 분해 진 사매는 그 일을 마음 속 깊이 묻어두고 최대한 떠올리지 않으려 노력했다.
그런데 큰 오라비가 그 일을 언급하니 어쩔 수 없이 그날의 생각이 났다. 깊이 생각에 잠긴 그녀의 얼굴이 붉었다 하얘졌다 하면서 종잡을 수가 없었다.
얼떨떨한 상태에서 정신을 차리자 쳐다보고 있는 큰 오라비가 눈에 들어왔다.
그 눈빛이 깊은 뜻을 담고 있어 그녀는 마치 자신의 비밀을 들킨 듯 온 얼굴이 더욱 붉어져버렸다.
부끄러움에 몸 둘 바를 몰라진 진 사매가 발을 구르며 소리쳤다.
“난 영초나 가지러 갈래요!”
그리고는 석실 안 쪽으로 달려가며 내심의 수줍음을 감추고자 했다.
중년인이 자신이 가장 아끼는 어린 누이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미소 지었다. 그리고 속으로 어떤 결심을 하고는 그녀의 뒤를 따랐다.
어느 깊은 숲 속 녹의를 걸친 소녀가 두 입술을 깨물며 백색의 작은 수리매를 지휘해 머리 둘 달린 괴물 뱀을 힘겹게 상대하고 있었다.
지금의 정황으로 보아 서로 막상막하를 이루고 있어 쉽게 결판이 날 것 같지 않았다.
그리고 그 괴물 뱀의 뒤편에 온 몸이 타오르는 불꽃같은 큰 나무가 서있었는데 그 가지 끝에 주먹 만한 붉은 과실이 여러 개 매달려 있었다.
또 산속 깊은 지하 동굴 안에 발걸음 소리를 죽인 백의의 남녀들이 걸어가고 있었다. 그들은 대략 열댓 명 정도로 놀랍게도 금지 원행에서 살아남은 모든 엄월종 제자들이 이곳에 모여 있었다.
그리고 그 선두에는 멀리서 한립을 본 적 있는 그 요정 같은 여인이 걷고 있었다.
그 백의 소녀는 어리고 천진한 얼굴이었지만 표정만큼은 진중했다. 게다가 온 몸에 은색 광채를 휘감고 있어 신비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가장 놀라운 점은 소녀의 뒤를 따르는 백의 남녀의 무리가 전전긍긍하며 말 한 마디를 함부로 나누지 못하는 점이었다. 그들은 소녀의 뒷모습을 훔쳐보며 경외감을 내보이고 있었다.
사막 지형에서 보았던 포악한 여인과 그녀의 수련 반려도 그 중에 있었는데 얼굴 가득하던 자만심은 온 데 간 데 없이 사라지고 다른 이들처럼 숨도 크게 쉬지 않으며 고분고분한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무리를 이끌던 요정 소녀가 발걸음을 멈추니 그 뒤를 따르던 무리도 자연히 걸음을 멈추었다.
그들이 걸음을 멈춘 곳에서 멀지 않은 곳이 탁 트이며 녹색의 깊은 연못이 모습을 드러냈던 것이다. 그 연못 중심에는 묵색의 암초들이 수면 위로 솟아 올라 있었고 그 위로 십여 송이의 옥 같은 영지(靈芝)류가 자라있어 눈길을 사로잡았다.
“여기인가?”
소녀가 자못 흥미롭다는 듯 연못을 보고는 고개도 돌리지 않고 묻자 가냘픈 목소리가 동굴을 울렸다.
“그렇습니다, 사조! 이곳이 바로 최상급 요수 벽수악(碧水鰐)이 살고 있는 연못입니다. 지난 금지 원정에서 영초를 채집하던 중 본 문 제자 하나가 저 축생의 먹이가 되고 말았고 다른 하나가 달아나 목숨을 건진 바가 있습니다.”
엄월종 무리의 여제자 중 그나마 나이가 많아 보이는 이가 나서 허리를 굽히며 공손히 답했다. 사조라. 만일 다른 육 대 문파 제자들이 이 말을 들었다면 너무 놀라 턱이 빠졌을지 몰랐다.
수도계의 수행의 경지에 따른 배분 방식에 따르면 이 귀여운 소녀는 엄월종 결단기 수사는 되어야 사조라 불릴 수 있었다.
그러나 금지 원정은 축기기 이상의 수사는 들어 올 수 없다 알려져 있으니 도무지 어떻게 된 일인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다른 엄월종 제자들의 표정에 이런 놀라움이 없는 것으로 보아 이미 일찍이 그 비밀을 알고 있었던 듯했다.
“응, 알겠다. 물러가 보거라.”
이때 소녀가 자연스럽게 분부를 내리는데 앳된 얼굴과는 어울리지 않는 노련한 기색이 느껴졌다.
“모두 준비하거라! 잠시 후 내가 벽수악을 수면 위로 끌어내면 모두 새로 익힌 협공술, 음양견인술(陰陽牽引術)을 시전해 짝을 이루어 연속으로 공격한다. 축기기 제자가 전력을 다하는 것과 같은 살상력이라면 아무리 포악한 짐승이라도 처리하는데 문제는 없겠지. 그 후 다시 나를 따라 최상급 요수의 서식지에 들어가 그간 아무도 건들지 못한 영초들을 채집해 올 것이다.”
그리 크지 않은 목소리였지만 소녀의 음성에는 자신감이 충만했다. 그 명을 듣는 제자들도 조금의 의문도 없이 완전히 그 말을 믿고 따랐다.
그 모습을 확인한 소녀가 다시 연못으로 고개를 돌려 입을 벌리니 손가락 굻기의 분홍색 원구가 그녀의 입 안에서 서서히 분출되었다.
이어 그것이 삽시간에 부풀어 오르더니 어느새 사람 머리 만해졌는데 웅웅거리는 소리를 발산하며 내뿜는 빛이 어찌나 휘황찬란한지 영기를 듬뿍 담고 있는 것이 확연했다.
원구가 나타나는 방식, 분출되는 빛 그리고 그것이 함유한 대량의 영력으로 보아 어떻게 따져도 값을 매길 수 없는 법보(法寶)인 것이 분명했다. 설마 이 소녀가 정말 결단기 수사란 말인가?
잠시 후 지면 아래에 위치한 비밀 동굴 내에는 엄청난 굉음이 발생했다. 이어서 푸르릉 거리는 소리와 함께 요수의 분노가 느껴졌다.
그러나 연이어 이어진 천둥 번개가 내려치는 듯한 폭발음과 함께 요수의 울림은 약해졌고 각종 폭발음이 끊이지 않고 이어지자 결국에는 어떤 소리도 들려오지 않게 되었다.
몇 시진 후 소녀는 엄월종 남녀 제자들을 이끌고 어느 구석진 동굴의 입구에서 걸어 나왔다. 그 뒤를 따르는 제자들은 제각각 들뜨고 흥분해 있었다.
이런 그들의 기색은 당연했다. 최상급 요수를 공격해 참살할 기회는 겨우 연기기에 이른 애송이들이 쉽게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오늘 별로 힘도 들이지 않고 보기만 해도 흉악하고 공포스러운 벽수악을 해치웠으니 모두 대단히 격동되어있던 것이다.
물론 귀여운 소녀의 원환(圓環) 법보가 요수의 대부분 공격을 막아주지 않았더라면 이렇게 한 사람도 상하지 않고 완벽한 승리를 거두는 것은 불가능 했을 터였다.
그러니 소녀를 바라보는 제자들의 시선은 더욱 강렬한 공경심과 두려움을 담고 있었다. 그런 강렬한 남녀제자들의 시선에도 전혀 개의치 않고 소녀는 담담한 표정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그런 최상급 요수 한 마리를 사냥한 것은 대단치도 않은 일이라는 기색이었다.
잠시 후 인근 수풀 속으로 사라진 엄월종 제자들은 그렇게 종적을 감추었다.
* * *
다른 지역에서는 아직도 각파 제자들이 요수를 죽이고 그것이 지키는 영초를 가져가는 일이 끝없이 이뤄지고 있었다.
그러나 종종 영초를 두고 다툼이 벌어지긴 했으나 기이하게도 그 과정 중 인명피해가 나는 일은 드물었다. 보통 상대가 안 될 것 같은 일 방이 자리를 피하거나 싸움에서 우세하더라도 그 이상 상대를 핍박하지 않고 급히 영초만 회수해 다른 것으로 떠나는 경우가 많았다.
이런 상황이 생긴 원인은 모두 같은 마음이었기 때문이다. 남은 시간이 많지 않으니 피 흘리며 싸우기 보다는 그 시간에 다른 곳을 돌아다니며 영초를 채집하는 것이 더 중요했다.
게다가 영초를 걸고 정말 죽을 기세로 싸울 기회는 최후의 날 모두가 저물대 가득 영초를 담아 귀환하기 전에 충분히 있을 터였다. 그날은 분명 금지 중심부가 필로 물들 것일 테니 그 전 이틀처럼 순순히 상대를 놓아주는 일은 거의 일어나질 않을 것이다.
이런 사정을 대략 파악하고 있던 한립은 이틀간 다른 제자들이 서로 경쟁하며 영초를 모으는 사이 최선을 다해 이곳저곳을 옮겨 다니고 있었다.
도중에 중계 이상의 요수를 만나면 바로 신법을 발휘해 달아났고 그런 사소한 일에 단 일각도 지체하지 않았다.
한립이 무슨 운을 타고 났는지 첫날 영초를 채집하다 보기 드문 독충 요괴인 거대 지네를 마주친 이후, 연이어 네 곳을 갔는데도 그곳을 지키는 요수를 만날 수 없었다.
그 덕에 손쉽게 영초들을 거둬들이면서 기력은 전혀 소모하지 않았으니 정말 유쾌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앞으로 계속 이렇게만 흘러간다면 필요한 양보다 훨씬 많은 수확을 하는 것도 불가능한 일은 아니었다.
이때 금지 원행의 셋째 날이 거의 지나가고 있었다. 한립은 나무 가지를 밟으며 끊임없이 솟구쳤는데 도중에 하계 요수 철비원(鐵臂猿) 두 마리를 마주쳐 손짓 몇 번 만으로 그것들을 사분오열 내버렸다.
이제 한립은 오늘의 마지막 목적지를 향해 달려가는 중이었고 그곳은 산의 장성 부근의 작은 석전으로 듣기로는 비단 한 가지 영초가 아니라 여러 영초들이 혼재해 있었고 그가 꼭 필요로 하는 천령과(天靈果)도 그 중에 포함되어 있다 했다.
그러나 천령과는 미숙했지만 다른 영초들은 이미 충분한 세월을 보냈으니 분명 그곳을 수호하는 요수가 있을 것이었고 다른 문파의 제자들이 먼저 다녀갔을 가능성도 있었다.
한립은 다른 문파 제자들이 먼저 다녀가서 자신을 위해 그곳을 정리해 놓았기를 바라고 있었다. 그렇게 되면 자신이 요수를 잡으려 괜히 헛고생을 할 필요도 없었고 아직 연분이 차지도 않은 천령과를 그들이 따갈 리도 없으니 그에겐 아주 좋은 일이었다.
그가 이런 최상의 가정을 하며 멀리서 석전을 바라보니 역시 그리 규모가 크지는 않았다.
아직 다가가지도 않았는데 격렬한 전투 소리가 들려왔다. 이에 그는 웃으며 역시 누군가 자신을 위해 일을 하고 있음에 만족했다. 즉시 몸을 날려 조용히 석전 부근으로 스며들었다.
석전 앞 공터에는 한립이 생각한 용맹한 사내와 요수의 혈투는 벌어지지 않고 있었다. 대신, 흑의에 맨발을 사각턱의 사내가 은색의 거검을 조종해 호리호리한 녹의 여인을 압박하며 거의 숨 쉴 틈을 주지 않고 있었다.
그녀의 방어수단은 노란 빛이 반짝이는 손수건이었는데 그 마저 지금은 빛을 잃어가는 것이 거검에게 밀려 근근이 버티고만 있는 수준에 불과했다.
그들 옆에 몸이 갈린 거대한 붉은 늑대와 머리와 몸이 불리 된 하얀 수래 매가 피로 대지를 적시고 죽어있었다. 그 진한 혈향으로 보아 모두 죽은 지 얼마 되지 않은 것 같았다.
이 모든 상황을 파악한 한립은 입이 벌어졌는데 그 둘이 여기서 싸우는 것이 이상해서가 아니었다.
그 녹의를 입은 소녀가 놀랍게도 자신에게 금축필을 팔며 쑥스러워하던 소녀라는 점이 그를 놀라게 했다.
한립은 이미 금지 원행 전 집합에서 소녀의 법력이 매우 얕음을 파악했다. 겨우 십 성의 공법이니 그의 마음속에선 소녀는 이미 제거 당했거나 어딘가에 꼭꼭 숨어있으리라는 예측을 하고 있던 것이다.
그런데 지금 이 환형산의 한 가운데에서 그녀가 최상급 법기를 가지고 아무래도 그녀의 상대가 아닌 듯한 거검문 제자와 목숨을 걸고 싸우고 있으니 놀랄 만한 사건이었다.
“지금 포기하고 가더라도 늦지 않았다. 너도 알겠지만 내 계속 손속에 정을 남겨 두었거늘. 난 여인을 죽이기 꺼릴 뿐이지 죽이지 못하는 사람이 아니다. 이렇게 끈질기게 나온다면 너도 네 하얀 새와 같은 꼴이 될 것이야!”
맨발의 사내가 더 이상은 참을 수 없다는 듯 살기등등하게 소리쳤다. 도대체 어디서 튀어 나왔는지 알 수 없는 영수산 소녀가 그의 시간을 한 시진이나 빼앗고 있었다.
이제 그의 인내심도 바닥났으니 정말 끝까지 가겠다면 그도 악랄하게 나갈 수밖엔 없었다. 소녀가 얼굴이 창백해지면서도 이를 악물고 고집을 부렸다.
“저 안에 있는 열양화(烈陽花) 몇 송이를 내어주지 않으면 죽어도 못 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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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