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ad Born Blood RAW novel - Chapter (100)
배드 본 블러드-100화(100/197)
100
아크레시아 제국의 대외정책 기조는 간단하다.
벨라토 연방과 코라 신성국은 제국 입장에서 애증 어린 존재다. 숙적이면서도 때론 동반자이기도 했다. 지구인이라는 공통의 뿌리가 있기 때문이다. 심지어 적대적 상황에서도 민간차원의 교류까진 철저히 막지 않았다.
그러나 외계종족에 대해서는 철저한 멸시와 배척으로 일관했다. 외계인은 제국에서 인간과 동등한 권리를 얻지 못한다. 대부분은 노예와 불법체류자다. 가끔 쓸모를 인정받은 일부 외계인만 그나마 체류 허가 정도만 받을 뿐이다.
‘어쨌거나 제국에서 외계인은 보기 힘들다.’
그렇다고 외계종족에 대해 숨기는 건 아니다.
특히, 근위대나 군대에선 몇몇 외계종족을 집중적으로 가르치기까지 했다.
‘프레도, 사우라, 크롤러…… 그리고 에퀘시안.’
내가 잘 아는 외계종족의 이름이다. 이들의 공통점은 하나였다. 전투 종족이라 불릴 정도로 호전적이거나 전투력이 뛰어났다.
제국의 적으로 만날 가능성이 높은 종족들이란 소리다. 난 그중 하나와 오늘 마주했다.
기이이잉!
내 앞의 에퀘시안이 창을 예리하게 뻗으며 나를 관찰하고 있었다. 창을 잡은 손가락은 넷이었고, 마스크 너머로 안광이 흉흉하게 빛났다. 몸의 줄무늬는 체내에 쌓이는 열을 바깥으로 배출하느라 주황빛을 띠고 있었다.
‘용병 종족, 에퀘시안.’
사람들은 에퀘시안을 그리 불렀다. 에퀘시안 용병은 신의성실로 명성이 높았다.
실제로도 내 눈앞에서 그들의 신의가 증명됐다. 아무리 아크바란 변두리라지만, 고용주를 지키기 위해 제국에서 활동하고 있었다. 돈만 받으면 외계인 혐오가 만연한 제국에서도 활동하는 자들이었다.
‘이놈은 에퀘시안 중에서도 상당한 수준의 전사다.’
나는 상대가 만만치 않다는 걸 직감했다. 충격탄을 막아내는 에너지 방패부터 예사롭지 않았다. 장비의 수준만큼이나 전투력이 대단할 것이다.
외계인이 제국에서 활동한다? 그것만으로도 실력을 증명한 셈이다.
키이잉.
나는 크루시스를 느슨하게 떨어뜨리며 칼끝으로 바닥을 긁었다.
‘인간이 아닌 존재와 싸운다.’
여기서 난 또다시 무언가를 배우겠지.
살아남아 성장하느냐, 고꾸라지느냐.
전사란 결국 그런 것이다. 강자는 타인의 죽음 위에서 탄생한다.
끼릭.
에퀘시안이 먼저 움직였다. 그의 팔은 손가락이 무릎까지 내려올 정도로 길었다. 거기다가 키도 나보다 머리 두 개만큼 더 컸다.
‘무기도 범위가 긴 창.’
파고들어야 하는 건 내 쪽이다. 멀리 있으면 견제만 당하다가 찔릴 것이다.
‘놈의 공격을 피하면서 안으로 들어간다.’
전투와 전술로 나뉜 병렬적 사고가 빠르게 계획을 수립했다.
키잇!
나는 점으로 찔러오는 창을 응시하며 움직였다. 놈의 창이 내 어깨를 긁듯이 스치며 지나갔다.
휙!
난 그대로 전진하며 거리를 좁혔다. 이젠 내 칼이 닿는 범위까지 도달했다.
칼을 사선으로 휘두르며 창을 쳐내고 놈의 몸통을 벤다.
정석적인 방식이다. 정석은 언제나 가장 효과적이기에 정석이라 불린다.
……그리고 경험이 많은 이들은 언제나 정석을 파훼하는 함정을 파두는 법이지.
츳!
난 앞발을 뻗어서 제동을 걸었다. 파고들다가 뒤로 한 걸음 물러났다.
에퀘시안은 내 머리가 원래 있을 방향으로 왼손을 휘둘렀다. 그의 왼팔을 감싼 완갑에서 어느새 팔뚝만 한 칼날을 튀어나와 있었다.
‘숨겨둔 무기로 허를 찌르는 것.’
놈이 노련한 전사라는 뜻이다.
내가 그대로 전진했다면 저 칼날에 찔렸거나 막느라 빈틈을 보였을 것이다. 그러면 수세에 몰렸겠지.
‘하지만 예상하고 피했다. 내 차례야.’
공세를 이어가는 건 나다. 에퀘시안의 동작이 무너지고 있었다. 그는 커진 안광으로 날 응시했다.
휙!
내 칼날이 놈의 왼팔을 갈랐다. 두꺼운 뼈와 근육이 말끔하게 잘렸다.
에퀘시안은 비명도 지르지 않았다. 통증으로 머뭇거리지도 않았다. 냉철하게 나를 응시하며 다음 동작을 이어가고 있었다.
곤란할 정도로 대단한 전사였다. 팔을 잃은 고통과 충격으로 흔들렸다면 내가 공세를 이어갔을 것이다.
놈은 나와 수싸움에서 져서 팔을 잃었으나 당황하지 않았다. 그러니 이번엔 내가 방어할 차례였다. 난 놈의 팔을 베느라 칼을 길게 휘두른 상태였다.
내 머리와 왼쪽 어깨가 무방비하게 노출됐다.
‘맨손으로?’
창을 회수해서 뻗기 힘들다고 판단한 에퀘시안은 과감하게 무기를 놓았다. 그는 남은 오른손으로 내 머리를 잡으려 했다. 그의 손아귀는 내 머리를 한 손으로 쥘 정도로 컸다.
한 손으로 내 머리통을 터트릴 자신이 있으니 저러는 거겠지.
키잇!
난 길게 휘두른 칼을 멈추지 않았다. 그대로 칼끝을 바닥에 꽂으며 원심력을 살렸다.
내 크루시스는 고압축 중량 무기다. 경도도 높고 무겁다. 바닥에 꽂힌 칼끝 덕분에 내 몸은 장대를 짚은 것처럼 위로 솟구쳤다.
휘릭!
난 칼자루를 놓으며 그대로 떠올랐다. 순식간에 나는 에퀘시안의 머리 위에 떴다.
에퀘시안은 오른팔을 휘두른 채로 무방비하게 등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의 뒷덜미가 훤히 보인다.
나는 잽싸게 단검 그라켄 부트를 뽑았다. 이건 에퀘시안 종족의 상징적 보검이다.
……내 그라켄 부트의 첫 사망자가 에퀘시안이 될 줄이야. 나의 메마른 감수성으로 생각해 봐도 애석하고도 애꿎은 일이다.
푹!
내가 에퀘시안의 등을 짓누르며 놈의 후두부에 단검을 깊게 꽂아 넣었다. 칼날이 중추신경계를 끊으며 놈의 뇌를 파고들었다.
끼릭!
난 칼날까지 비틀어 놈의 뇌를 찢어발겼다.
-우리, 모두가 실패한다면, 대금은, 지불하지 않아도, 된다.
번역기의 기계음이 지직거리며 퍼졌다. 그의 유언은 내가 아니라 고용주 바오 자카난에게 남기는 말이었다.
나는 일어서며 그라켄 부트를 뽑았다. 피를 털어내자 하얀 칼날은 여전히 새것처럼 빛났다.
죽은 에퀘시안은 미동이 없었다.
방금까지 격렬하게 서로의 목숨을 노렸는데도, 나는 이 자가 밉지 않았다. 그는 그저 충실하게 계약을 이행했을 뿐이었다.
에퀘시안도 나를 미워하거나 증오하지 않았을 것이다. 아마 생이 끊어지는 마지막 순간까지도.
‘이게 용병 종족인가…….’
모든 에퀘시안 용병이 이러하다면, 돈으로 체결된 관계일지라도 믿을 만했다.
나는 집약한 감각과 집중을 넓게 퍼트렸다. 둔감하게 막아둔 청각이 길게 열리면서 바깥의 소란이 선명하게 들렸다.
‘이스칸은 아직 싸우고 있다.’
심지어 에퀘시안이 두 명이나 붙은 것 같았다. 병장기가 부딪히는 소리가 그러했다. 내 쪽은 처리했으니 그를 도우러 가야 한다.
하지만…… 내겐 지금 처리해야 하는 일이 있었다.
“바오 자카난.”
나는 그를 내려다봤다. 바오 자카난은 모든 걸 포기한 듯이 한숨을 쉬었다.
“그래, 날 데려가. 귀족끼리 협상을 해보자고.”
아직도 바오 자카난은 거래의 여지가 있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뭐, 내가 일반적인 쿠스토리아 가문의 일원이라면 놈을 데려가 제대로 심문할 것이다.
그러나 나는 황제의 감시자다. 거대한 흐름과 계획을 알고 있다.
여기서 쿠스토리아 가문을 보호하려면…… 바오 자카난을 죽여야 한다.
“니콜라오스의 암살은 제국 상부에서 내려온 거지? 네가 네메시스와 접촉해 암살을 의뢰한 것도 그 때문이고. 이게 복잡하게 가려진 이야기 아래에 가라앉은 진실이겠지.”
바오 자카난이 추한 꼴을 들켰을 때보다 더 눈을 크게 떴다. 동공도 흰자위를 잡아먹을 듯이 커졌다.
“그걸…….”
이 정도의 대답과 반응이면 진실을 파악하기에 충분했다.
푹!
나는 에퀘시안의 창을 들어 그의 머리를 찔렀다. 이마를 파고든 창날이 뒷덜미로 튀어나왔다.
바오 자카난은 죽었다.
난 쿠스토리아 가문이 무너지길 바라지 않는다. 날 싫어하는 쥬페와 에바조차 죽지 않았으면 한다. 헤일라스나 지젤은 더더욱이.
‘제국은 니콜라오스 쿠스토리아를 죽여 혼란을 의도적으로 만들었다. 아마 헤일라스가 이런 행동을 할 거라고 예상한 거겠지.’
안개처럼 흐릿한 불안이 드디어 선명하게 모습을 드러냈다. 나도 보고 싶지 않았다. 어렴풋이 보일 때마다 부정하고 싶었다.
난 고요히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제국은 쿠스토리아 가문을 없애려고 한다.’
그러기 위해선 명분이 필요했다. 저 꼭대기에 서 있는 자들은 쿠스토리아 가문이 제국을 적대하길 바라고 있다.
위험하고도 위험하다. 나도, 헤일라스도.
그리고 난 직감했다. 왜 아키에스 빅티마가 감시자의 조건인지 뼈저리게 깨달았다. 이 모든 관계성을 알기 싫어도 알게 되니까.
나는 제국 황실과 키누안이 내게 내린 임무를 저절로 깨닫고 말았다. 그들이 직접 말하지 않아도 뭘 원하는지 난 알아챘다.
내가 키누안처럼 정식 감시자로 인정받으려면…….
‘쿠스토리아 가문을 무너뜨리는 걸 내부에서 도와야 한다.’
염병할 정도로, 어려운 시련과 시험이로군.
그래, 그냥, 아주 좆같다.
* * *
냉정하게 말하자면, 우리가 상대한 에퀘시안의 전투력은 근위대 평균보다도 한참 아래다.
저들이 에퀘시안 내부에서 어느 정도의 강자인지는 몰라도 수준 이하는 아닐 것이다. 그러나 우린 제국에서도 손꼽히는 엘리트 전투집단이다.
당연히…… 근위대에서도 상급 부대 소속인 이스칸은 혼자서 에퀘시안 두 명을 쉽게 처리했다.
“목표는 격전 중에 사망했나? 어쩔 수 없군. 꽤 귀찮은 놈들이긴 했지.”
이스칸은 바오 자카난의 시신을 보더니 말했다.
“그 전에 심문은 했기에 필요한 정보는 대충 얻었습니다.”
“흠, 불행 중 다행이네.”
이스칸은 별달리 아쉬운 기색이 없었다. 그는 헤일라스와의 의리 때문에 이번 임무를 하는 것이다. 잘 풀리든 안 풀리든 그에겐 상관없는 일이었다.
“에퀘시안이 호위로 붙을지는 몰랐습니다. 수업으로만 들었거든요.”
난 화제를 돌리며 말했다. 생도인 내가 외계종족을 신기하게 여기는 건 이상하지 않다.
“에퀘시안은 지구력이 뛰어나고 인내심도 대단해서 대기가 많은 장기 호위에 적합하지. 바오 자카난은 평소에 구린 부분이 많았기에 에퀘시안을 개인 경호로 쓰고 있었던 거야. 아마 어금니에 에퀘시안 호출기가 있겠지. 외계인의 통신 기술은 독자규격이라 제국에서도 차단이 힘들어.”
이스칸이 선배 근위대원으로 조언하듯 말했다.
바오 자카난의 말마따나, 때론 제국에 이해관계가 전혀 없는 외계종족이 더 믿을 수 있었다. 그래서 제국의 귀족 중 일부는 외계종족을 은밀한 일에 종종 끌어들일 것이다.
나는 바오 자카난에게 캐낸 정보를 정리해서 이스칸에게 보고했다.
“이 사업장이 네메시스와 연관된 돈줄이었고, 그 때문에 네메시스에 반강제로 협조하고 있었다는 거지?”
“본인의 말에 따르면 협박을 당해서 그런 거라지만…… 제가 보기엔 자신의 성벽과 욕구 해소를 위해 네메시스에서 드문드문 정보를 넘긴 것 같습니다만, 중요한 기밀은 넘기지 않은 듯합니다. 만약 그랬다면 지금까지 살아남지 못했겠죠.”
거짓과 진실이 섞인 보고다. 나는 간혹 눈을 찡그리며 이 사업장과 바오 자카난에 대한 혐오만 간간이 드러내며 깊은 감정을 숨겼다.
물론, 여긴 끔찍한 곳이다. 나는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자넨 통신권역까지 가서 치안경비대를 부르게. 난 여길 마저 정리할 테니까. 아마 저 안쪽에 더 있을 거야.”
“저흰 여기서 귀족을 많이 죽였습니다. 치안경비대를 불러도 괜찮습니까?”
“이대로 일을 비밀리 진행하려면 살아남은 피해자들도 내 손으로 모두 죽여야 해. 난 그러고 싶지 않아. 이해했나? 그리고 이런 쓰레기 좀 죽였다고 제국이 우릴 추궁하지 않을 거야. 각 가문은 창피해서라도 일을 조용히 묻으려 하겠지.”
나는 옅은 미소가 나오려는 걸 참았다.
선행과 친절은 자칫하면 약해 보이기 마련이다. 그러나 이스칸의 선행은 약해 보이지 않았다. 그가 쌓아온 지위와 성과가 배경으로 있기 때문이었다.
이스칸은 괜찮은 사람이다. 아마도 저런 인격자는 근위대 내부에서도 드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