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ad Born Blood RAW novel - Chapter (101)
배드 본 블러드-101화(101/197)
101
고문 시설에서 많은 귀족이 죽었다. 뒤처리는 헤일라스의 몫이다.
‘기밀 유지를 위한 근위대의 단독 조사.’
‘해당 지하 시설은 네메시스의 자금줄로 추정.’
‘귀족을 비롯해 사망자 다수 발생.’
상류 사회에서는 이번 사태를 모르는 이가 없었다. 상류층 인간이 한 번에 이렇게 많이 죽는 건 이례적인 일이었다.
지인과 가족이 죽었을지라도, 사람들은 근위대의 조치를 비난하지 않고 침묵했다. 어지간히 퇴폐적인 귀족일지라도 쾌락 살인까지 옹호하는 이는 없었다. 나아가 장례식마저 가족장으로 축소하는 가문이 많았다.
나는 흘러가는 소식을 들으며 안도했다. 만약 귀족들이 앞장서서 사태의 책임을 근위대에게 물었다면, 나는 무척 실망했을 것이다.
‘이런 분위기 때문에 바오 자카난도 누가 운영하는지도 모르는 위험한 지하 시설까지 방문한 거지.’
반사회적인 욕구를 해소하려면 고위 관료조차 위험을 무릅써야 했다.
그리고 제국의 테러 조직은 이런 제국의 그늘을 적극적으로 이용하고 있었다. 상류층 인간의 약점을 잡을 수 있고 활동 자금도 충당할 수 있으니까.
사태가 어느 정도 잠잠해지고 나서야 헤일라스는 나를 호출했다.
“이번 임무에 참가한 근위대원의 이름은 자네를 포함해서 기록에서 지웠네. 아무리 정당하다지만 복수하고자 하는 이가 있을 수도 있으니까.”
헤일라스가 피로에 찌든 어투로 말했다. 저 말 한마디만 들어도 헤일라스가 얼마나 무마하려고 힘썼는지 알 수 있었다.
“역시 수습이 꽤 힘들었나 보군요.”
“이스칸을 투입할 때부터 예상한 사태야. 그 성격은 나도 잘 알고 있거든. 이스칸과 나는 생도 시절의 동기네.”
난 잠시 놀랐다.
“음, 외모는 그렇지 않은 듯합니다.”
겉보기엔 이스칸이 1, 20년은 더 젊어 보였다.
“난 위엄이 있어야 하니 더 나이가 들어 보이는 얼굴을 쓰고 있고, 이스칸은 그럴 필요가 없으니까.”
당연하다면 당연한 말이다.
제국의 귀족과 고위층은 대개 중년의 나이에 이르면 거기서 외견을 고정한다. 그 편이 존경과 신뢰를 얻기 편하기 때문이다.
젊으면 미숙해 보이고, 늙으면 약해 보인다. 그 중간이 적절하다.
그리고 암묵적으로 조직 내의 상급자보다 젊어 보이는 외형을 유지하는 게 예의였다.
나도 익히 알곤 있었지만 직접 보니 묘한 이질감이 들었다. 은연중에 이스칸이 헤일라스보다 젊을 거라 생각했었다.
“이스칸이 사고를 치는 성격이라는 걸 알면서도 이번 임무에 투입한 까닭이 있습니까?”
나는 궁금증을 참지 않고 말했다. 솔직히, 이젠 헤일라스가 꽤 많이 편했다. 이래선 안 되는데 말이다.
“그만큼 믿을 수 있는 사내니까. 그리고 어떤 상황에서도 자넬 지켜줄 수 있는 사람이라고 판단했네.”
감사해야 할지 화내야 할지 모르겠다. 그러나 화가 좀 더 컸다.
“저도 제 몸을 지킬 수 있는 군인입니다.”
“그래 봐야 아직 생도지. 이스칸은 자네가 태어나기 전부터 베테랑이었던 사내고. 불평하고 싶다면 우리보다 강해진 다음에 하게.”
나는 할 말이 없어서 입을 다물었다. 한숨이 목구멍까지 올라왔다가 꺼졌다.
“어쨌거나 저번 보고에서 부족한 부분이 있었습니까?”
나는 말을 돌렸다. 헤일라스가 날 부른 까닭은 잡담이 아닐 것이다.
하지만 임무에 대한 보고는 복귀 첫날에 마쳤다. 그땐 이스칸과 함께였다.
“아니, 부족한 부분은 없지. 자네의 보고는 언제나 훌륭하니까. 상관이 궁금해할 만한 건 묻기도 전에 말하거든.”
이건 정말로 빈정거리는 건지 진심인지 모르겠다. 헤일라스는 편하다 싶다가도 가끔 이렇게 어렵게 변했다.
난 헤일라스에게 허점을 찔리기 전에 저번 보고를 상기했다.
‘바오 자카난은 연인이라 생각했던 니콜라오스에게 배신감을 느꼈습니다. 그래서 네메시스를 통해 암살을 의뢰한 거죠. 네메시스는 바오 자카난에게 빚을 더 지워두려고 기꺼이 수행했고요. 니콜라오스의 동선과 일정이야 바오 자카난이 다 말해줬을 거고요.’
하지만 이것만으로 설명되지 않는 부분이 더 있었다.
하필이면 니콜라오스의 사망이 키누안의 뒷조사를 맡긴 직후였다는 것.
이걸 우연으로 치부하긴 힘들다. 그래서 나는 이야기를 지어내 덧붙였다.
‘네메시스가 자신들이 청부살인도 한다고 바오 자카난에게 다가왔습니다. 청부살인이 가능하다는 걸 안다면, 바오 자카난이 니콜라오스 암살을 즉시 의뢰할 거라 생각한 거죠. 마침 네메시스도 키누안을 뒷조사하는 니콜라오스를 죽이고 싶었으니 정보 제공을 해줄 바오 자카난을 꿰어낸 것일 겁니다.’
그래, 이 정도면 그럴싸하다.
그리고 또다시 모든 비밀과 원인은 키누안에게 귀결됐다. 이게 키누안의 역할 중 하나였다. 그는 온갖 의문과 비밀을 품고 있었다. 그 때문에 언제나 조사와 추적의 흐름이 그에게서 끊어졌다. 누군가 어둠을 파헤치려고 해도 키누안에게서 번번이 막혔다.
헤일라스도 턱을 매만지며 내 보고를 상기하는 듯했다.
“……결국, 키누안이로군.”
헤일라스가 키누안에게 집중하면 쿠스토리아 가문은 안전하다. 키누안을 아무리 파헤쳐도 정답과 진실은 나오지 않을 것이다. 키누안은 제국의 유령이며 허상이다.
‘아무리 황실과 키누안이 계략을 세우더라도 명분 없이 쿠스토리아 가문을 치진 못한다.’
차라리 황실이 쿠스토리아 가문을 없애고 싶어 한다는 게 내 착각이라면 좋겠다. 그저 내 망상이라면 마음이 놓일 것이다.
‘아직 내게 직접적인 명령이 내려온 건 아니야. 쿠스토리아 가문을 지키고자 하는 건 제국에게 반하는 행동이 아니고.’
나는 나 스스로에게 말했다. 그러나 이건 자기합리화다.
내 직관은 이미 답을 찾아냈다.
‘쿠스토리아 가문의 영향력이 너무 커졌어. 헤일라스는 지나치게 유능하고.’
쿠스토리아는 군인 가문 중에서는 제일가는 명문가였다. 그리고 이번 사태에서도 알 수 있듯이 근위대원 중에는 제국보다 헤일라스에게 충성하는 이들이 있었다. 그 비율이 어느 정도인지는 몰라도 적진 않을 것이다.
‘쿠스토리아 가문이 지금보다 더 영향력을 넓히고, 나아가 헤일라스가 근위대를 사병화한다면…….’
헤일라스는 충성스러운 군인이다. 그러나 언제까지 충성스러울지는 알 수 없다. 황실 입장에선 잠재적인 위험요소다.
……이게 황실이 헤일라스와 쿠스토리아 가문을 축출하려는 이유였다.
내 머릿속에선 인과추론이 끝났다. 난 현실을 부정하는 사람이 아니다. 이제 받아들일 때가 됐다.
루카, 결정해라. 황실과 쿠스토리아, 넌 어느 쪽이지?
* * *
일정이 당분간 비었기에 나는 하층 구역으로 내려갔다. 내가 종종 여길 방문해야 ‘키누안을 계속 조사하는 것’처럼 보인다.
무엇보다 하층 구역은 머리를 식히기 좋았다. 내겐 하층 구역 방문이 산책인 셈이다.
그러나 오늘은 머리를 식히긴커녕 더 아플 예정이다.
“어이, 귀족 도련님. 이렇게 좋은 걸 너만 쓰고 있었다 이거지?”
가브리엘이 업그레이드한 의수의 손가락을 까닥까닥 움직이며 말했다. 난 두통이 생길 것 같아서 미리 인상을 찌푸렸다.
“영업 개시 기념 할인 행사입니다! 지앤지 공업소의 새 출발을 응원해 주세요.”
길다가 활기차게 외치고 있었다. 갱단 사무실 1층에는 기름 냄새가 자욱했다.
“이번엔 무료로 해드릴게요. 대신에 기록용 칩은 멋대로 제거하지 말고, 한 달 뒤에 꼭 가지고 오세요.”
지젤이 간이 정비대를 차려놓고선 갱단원의 의체를 정비하고 있었다. 그녀는 천박하기 짝이 없는 인간들을 상대하며 조곤조곤 말하고 있었다. 예전의 그녀를 생각하면 놀라운 일이다.
“히, 히히. 물론입죠, 아가씨! 세상에, 살다 살다 공짜로 업그레이드를 다 해보네.”
갱단원이 히쭉히쭉 웃으며 일어섰다.
“도대체 뭐 하는 짓이야?”
나는 지젤의 맞은편에 앉았다.
“너도 업그레이드 해줘?”
지젤이 천연덕스레 말했다. 보나 마나 내겐 필요 없는 업그레이드다. 하층 구역의 싸구려 의체나 효과를 보겠지.
“하자가 있는 건 아니지? 그래도 내 부하들인데 이상한 걸 달아놓진 마.”
“뇌파 분석으로 사이버네틱과 생체 신호 체계를 정돈해 최적화한 거야. 이것만으로도 다들 반응 속도가 빨라졌겠지. 하지만 이 효과가 얼마나 가는지는 지켜봐야 해. 사람마다 향상되는 정도도 다르고.”
말 그대로 실험이다. 물론, 악영향과 피해만 없다면 상관없지만…… 모든 부작용을 예상할 수 있는 과학자와 기술자는 없다.
하지만 당장은 별다른 부작용 없이 개선 효과만 있는 듯했다.
‘어차피 여기 인간들은 이보다 더 큰 부작용과 위험을 감수하고 의체를 강화한다.’
따지고 보면 누구도 손해 보는 장사는 아니었다.
“지앤지 공업소?”
“나와 길다는 둘 다 G로 이름을 시작하니까. 그리고 가브리엘 갱단에 돈을 주고 가게 경호를 맡겼어. 예전에 길다에게 안 좋은 일이 있었다고 듣기도 했고. 너, 제법 좋은 일을 했더라.”
질 나쁜 갱들에게서 길다를 구한 일을 말하는 것이리라. 나도 어디 가서 자랑스럽게 말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선행이긴 하다.
“……뭐, 마음대로 해.”
여기까지 온 이상, 내가 지젤을 말릴 수도 없었다. 애초에 그럴 자격도 없고.
“물론이지. 네가 말하지 않아도 내 마음대로 할 거야.”
나는 주변을 쳐다봤다.
‘어쩌면 이게 지젤에겐 굉장한 의미가 있는 출발일 수도 있지.’
아마 지앤지 공업은 그녀 스스로 선택한 몇 안 되는 결정일 것이다. 이 결정으로 그녀의 인생에 큰 변화가 있을 수도 있었다.
난 자리에서 일어나서 가브리엘에게 향했다. 내가 일어나자마자 기다리고 있던 갱단원이 업그레이드를 받으려고 냉큼 앉았다.
가브리엘은 아까부터 이리저리 손동작을 바꾸고 있었다. 나는 그 옆에 앉았다.
“예전 기억이 나는걸. 내가 팔을 기계로 바꾸기 전에 감각 말이야. 이것 봐봐. 내가 생각하자마자 바로 반응하잖아.”
가브리엘이 싱글벙글 웃으며 말했다. 진짜로 생체 수준의 반응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그 정도로 업그레이드 차이가 체감되는 듯하다.
“가브리엘, 이런 말하긴 뭐한데…… 당분간 지젤을 부탁한다. 혼자서 하층 구역에 자주 내려올 생각인 것 같으니까. 야, 왜?”
내가 덤덤하게 말했다. 그러나 가브리엘은 동그랗게 눈을 뜨곤 날 쳐다보고 있었다.
“아니, 루카, 네, 네가 나한테 부드럽게 부탁하는 건 처음인 것 같거든. 흠, 기분이 오묘하네.”
“별걸 다…….”
나는 구시렁거리며 지젤과 길다를 쳐다봤다.
길다는 여전히 밝았다. 가브리엘과 갱단원은 모두 그녀를 좋아했다. 흠모하는 이도 많을 것이다.
나는 정비에 열중인 지젤을 힐끗 보았다. 갱단원은 지젤을 어려워했다. 귀족인 지젤이 변덕을 부리면 하루아침에 자신의 목숨이 날아간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그리고 지젤의 배경으로 성질머리가 더러운 데가 있기도 했다.
“지젤이 나보다 아랫사람이면 하층 구역에 내려오지 말라고 명령하겠지만 그것도 안 되는 처지야. 그렇다고 항상 내가 곁에서 지켜줄 수도 없는 노릇이고.”
“알았어, 인마. 제일 괜찮은 애들만 공업소 경호로 보낼게. 나도 비번인 날은 찾아올 거야.”
가브리엘이 가슴을 탕탕 치며 호언장담했다. 그러나 여전히 나는 불안했다.
라비앙로즈와 그레이스에게 지젤의 안전을 부탁할 수도 있다. 그러나 라비앙로즈와 그레이스는 엄연히 나와 사업 관계다.
‘내가 라비앙로즈에게 뭔가를 부탁하면 그쪽에서도 그만한 무언가를 요구한다.’
그리고 자칫하면 라비앙로즈가 순진한 지젤을 구워삶을 수도 있다. 여러모로 라비앙로즈에게 지젤을 맡기긴 꺼림칙했다.
‘헤일라스는 지젤이 아크바란 내에 있는 한 안전하다고 했지.’
헤일라스를 못 믿는 건 아니지만, 걱정되는 건 사실이다. 바바라의 집착과 광기가 느닷없이 지젤에게 향할 수 있었다.
“아…….”
생각에 빠져 있던 나는 문득 일레이의 부탁이 떠올렸다. 난 카르티카 가문 내에서 일레이에게 힘을 실어주기로 했었다.
나는 지젤에게 다가가 말을 걸었다.
“일이 끝나면 말해. 내가 데려다줄게. 할 말도 있고.”
지젤이 나를 빤히 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