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ad Born Blood RAW novel - Chapter (102)
배드 본 블러드-102화(102/197)
102
나와 지젤은 하층 구역의 거리를 나란히 걸었다. 밤은 깊었다. 스산한 움직임이 골목길과 그림자에서 일었다.
휘릭.
난 보급권총을 꺼내 빙글빙글 돌렸다. 무기가 있다는 걸 보여줘야 어쭙잖은 부랑배가 들러붙지 않는다. 나도 이런 식으로 멋없이 무력을 시위하고 싶진 않았다.
하층민들은 자신의 외형을 거칠게 꾸미며 폭력적인 분위기를 뽐낸다. 천박할 정도로 과시에 집착하는 자도 많았다. 다 이유가 있는 행동이다. 이 바닥에선 약해 보이면 귀찮은 일이 늘어난다.
“요즘 거리의 분위기가 안 좋아.”
내가 지젤에게 한마디 툭 던졌다. 바로 용무를 꺼내기엔 분위기가 어색하고 딱딱했기 때문이다. 언제부터 내가 이런 걸 신경 썼는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어쨌거나 군인이 아닌 자와 이야기하는 건 피곤했다. 군인의 화법은 직설적이고 합리적인 경우가 많았다. 필요한 말이라면 감정적인 부분을 배제하고 바로 내뱉어도 된다.
심지어 때론 상대를 설득하지 않고 권위와 힘으로 누르면 그만이었다. 군인은 권위와 힘의 논리에 익숙하다. 전쟁터에선 상급자의 명령에 일일이 토를 달 시간조차 없으니까.
그러나 일반인과의 대화는 상대의 감정을 헤아려야 한다. 여러 가지로 번거롭다.
……나도 오늘은 잡생각이 많다, 젠장.
“왜 안 좋은데?”
지젤이 한 박자 늦게 되물었다.
“얼마 전부터 갱단끼리 항쟁이 잦아졌어. 가브리엘 말에 따르면 주기적으로 그런 시기가 온다고 하더군. 거기다가 큰 사업을 맡던 투기장 갱단이 반 토막이 나면서 혼란이 더 심해졌고. 세력의 균형이 불안정하니…… 외곽과 폐허의 무법자들도 슬그머니 들어오고 있어. 제일 악질적인 놈들이지.”
하층 구역의 갱단은 필요의 악이다. 치안의 공백을 대신하는 자경단 역할도 했다. 그러나 폐허의 무법자들은 규범은 물론이고 불문율조차 무시한다. 인간적인 수치심조차 잃어버려 아무것도 가진 게 없는 놈들이기 때문이다.
자꾸만 내 생각이 다른 방향으로 흐른다. 아무래도 지젤에게 이번 용무를 꺼내는 게 내게도 꺼림칙하기 때문이리라.
“그래, 그렇구나.”
지젤은 갱단 이야기에 전혀 관심이 없었기에 건성으로 대답했다. 나는 그 태도에 조금 짜증이 났다.
“너한테도 중요한 이야기야. 하층 구역에서 사업을 하겠다면서? 갱단들의 균형과 흐름 정도는 알아야지.”
“그런 이야기는 너한테 듣는 게 아니라 길다나 가브리엘에게 들으면 돼. 너보단 그 사람들이 더 잘 알 테니까.”
지젤이 날카롭게 말했다.
음, 저 말도 맞다. 아무리 내가 잘난 척해봐야 이젠 난 하층 구역에 속한 사람이 아니다. 한 방 먹은 기분이었다.
오늘, 내 집중력은 좋지 않군.
우린 좀 더 걸었다. 치안이 안 좋은 구역을 벗어나니 그나마 단정한 거리가 나왔다.
“할 말이 있다면서?”
지젤이 걸음을 멈추며 내게 물었다.
“일레이 카르티카를 기억해? 저번에 신세를 좀 졌잖아.”
당연히 알겠지. 내가 말하고도 바보 같았다.
“너답지 않게 말을 빙빙 돌리는 걸 보니…… 불편한 이야기를 하고 싶은 모양이네. 뜸 들이지 말고 해. 난 들을 준비가 됐으니까.”
지젤은 역시 영특하다. 내 미적지근한 태도에 어떤 종류의 이야기가 나올지 눈치채고 있었다.
나는 눈을 감았다가 살짝 떴다.
지젤의 말이 맞다. 나답지 않은 짓을 하고 있다. 정신 차려라, 루카. 지금 내겐 심각한 문제가 산더미처럼 쌓여있다. 오늘의 이야기는 지극히 사소한 일이지. 적어도 목숨이 오가진 않으니까.
“일레이가 우리에게 부탁했어. 카르티카 가문의 손님으로 와서 힘을 실어달라고 하더라.”
“어려운 일은 아니네. 귀족에게 인맥을 과시하는 건 중요한 일이니까.”
“그리고 일레이가 곤란한 처지인 것 같더라고. 차기 가주로 지위를 공고히 다지기 전에 아버지가 쓰러지셨거든. 생각보다 더 빠르게 가주 경쟁에 들어가야 해.”
“더 설명하지 않아도 무슨 소리인지 알아. 이때다 싶어서 힘 좀 있는 친족들이 가주 자리를 넘보겠지. 아무리 잠재력이 뛰어나다고 해도 일레이는 기반을 닦지 못한 애송이니까. 만약 가주 자리를 빼앗기면 일레이는 죽거나 어떤 식으로든 재기불능이 될 거야. 찬탈자가 위협적인 정통 후계자를 살려둘 리가 없지.”
지젤도 잘 이해하고 있었다. 어느 가문이든 세대교체기에는 비슷한 일이 일어나는 듯했다.
“일레이가 너를 약혼녀로 초대했어. 당연히 일레이가 자리를 잡을 때까지만 형식상으로 약혼하는 거야. 그러면 카르티카의 다른 친족이 일레이를 쉽게 건드리지 못하겠지. 자칫하면 쿠스토리아 가문이 개입할 수도 있으니까.”
나는 차분히 말하려고 노력했다. 그래서인지 목소리에는 감정이 실리지 않았다. 다행이로군.
“……하하, 그게 중요한 용건이었나 보네. 이해했어, 루카. 중요하고말고. 너도 드디어 귀족다운 짓을 이제 하는구나.”
“비꼬고 싶으면 얼마든지 해도 돼. 네게 몹쓸 짓이라는 건 아니까.”
“아버지도 두말하지 않고 허락하겠지. 여차하면 진짜 약혼해도 된다고 말할걸. 카르티카 가문의 차기 가주에게 빚을 지워두고 긴밀한 관계가 되면, 쿠스토리아에게도 이득이니까.”
지젤도 머리로는 잘 이해하고 있었다. 이해관계에 따라 약혼과 파혼하는 건 귀족 사회에서 흔한 일이다.
난 기억을 더듬어 릴리안 라모네스를 떠올렸다. 그녀는 귀족 가문에서 태어났어도 돈 때문에 인간성을 부정당했다. 약혼자의 취향에 따라 외모와 행동거지 하나하나까지 교정당한 ‘살아있는 인형’이었다.
만약, 내가 릴리안과 똑같은 처지에 놓였다면 자살했을지도 모르겠다. 그만큼 릴리안은 끔찍한 일을 당했다.
릴리안에 비하면 지젤의 처지는 자유롭기 그지없다.
“너도 이해한 것 같으니 일정을 잡아둘게.”
“내가 거절한다면?”
지젤이 날카롭게 쏘아붙였다. 그렇다고 정말로 거절하려는 건 아닐 것이다. 그저 가정일 뿐이다. 거절하면 내가 어떻게 행동할 건지 듣고 싶은 것이리라.
나도 얕은 투정 정도는 들어줄 용의가 있었다.
“거절하면 어쩔 수 없지. 강요할 순 없으니까.”
“말은 잘하네. 어차피 내가 거절하지 않을 거라는 걸 알았잖아. 가문의 이익에 반하는 행동을 해서 내게 좋을 것도 없고.”
“맞아.”
나는 부정하지 않았다. 지젤은 한숨을 쉬었다.
“아버지에겐 네가 말해.”
“그럴 거야.”
“그리고 네가 못된 놈이라는 걸 알아둬.”
지젤이 주먹을 쥐더니 내 가슴을 때렸다. 아프진 않지만 아프다.
……나도 내가 못된 놈이라는 건 잘 알고 있다.
* * *
일주일이 지났다. 나는 헤일라스에게 ‘가짜 약혼’에 대한 허락을 맡았고, 일레이는 빠르게 일정을 잡았다.
그래서 우린 카르티카 가문의 집회에 참석했다.
카르티카 가문의 본가 저택은 아크바란 바깥에 있었다. 그러나 권세가 꽤 있는 귀족 가문이 다들 그러하듯, 카르티카도 아크바란 내에 가문 명의의 고층 건물을 가지고 있었다.
오늘의 집회 장소는 카르티카 빌딩이었다.
카르티카 빌딩은 말단 가문원과 가신이 머무는 임시 숙소 역할을 하기도 했다. 늘 느끼는 거지만 귀족끼리도 엄연히 서열이 있었다.
‘상층과 하층.’
크게 보면 두 부류지만, 그 안에서도 무수히 많은 계급 분화가 있었다.
나는 상층 구역의 계급 중에서도 높은 지위까지 올라왔다. 군인 가문 중에서 손에 꼽히는 명문가는 쿠스토리아의 직계니까.
새삼스레 이런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하층 구역의 고아 출신인 내게 저자세로 구는 귀족을 보니 감회가 새로워서 그렇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루카우스 님, 지젤 님.”
하인이 아닌 귀족들이 비행장까지 우릴 마중 나왔다. 일레이가 보낸 안내인 말고도 말단 귀족이 여럿 있었다.
카르티카의 말단 귀족과 가신들은 나와 일레이가 절친한 사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내게 어떻게든 환심을 사려고 다가왔다.
“환대에 감사드립니다.”
지젤이 그리 말하며 공중차량에서 내렸다. 그녀는 평소와 달리 고혹적인 드레스를 입었다. 내키진 않을 텐데도 그녀는 거짓 약혼녀 역할을 충실하게 수행했다.
나도 옥상 비행장에 발을 내디뎠다.
고개를 든 나는 주변의 풍경을 보았다. 밤이 깊어가고 있는지라 조명이 현란했다. 귀족의 건물이 밀집한 곳이라 오가는 공중차량도 많았다.
카르티카 가문은 군인 중에서는 꽤 괜찮은 집안이다. 그러나 제국 전체로 보면 중간 정도에 불과했다. 가문 빌딩의 높이는 권세를 은연중에 나타내는 장치였다. 주변에는 카르티카 빌딩보다 더 높은 건물이 수두룩했다.
‘카르티카 가문의 암투 같은 일이 다른 건물에서도 일어나고 있겠지.’
제국 내부의 이해관계는 끔찍하리만큼 엉켜 있었다. 알면 알수록 더 보이지 않는 느낌이었다. 이 복잡한 역학관계를 전부 이해하고 이용하려면…… 얼마나 어둠에 익숙한 괴물이어야 할까.
“근위대 역사상 처음으로 4급 십자검 무공훈장을 받으셨다고 들었습니다.”
이름도 모를 귀족이 내 곁에 서며 말했다. 사실 이름은 아까 들었는데 떠올리기 귀찮았다.
옛날의 나라면 하나하나 모두의 이름을 곱씹듯 되뇌었을 것이다. 이젠 그러기엔 알아야 할 사람이 너무 많았다. 나라고 뇌의 용량이 무제한인 건 아니다. 인지에는 한계가 있었다.
문득, 지젤의 말이 떠올랐다. 그녀는 내가 귀족다워졌다고 말했지.
나도 귀족이 되어가고 있었다. 나는 내게 영향력을 미칠 수 있으며 향후 도움이 될 만한 위치의 사람만 인지했다.
보육원 시절에 스쳐 간 아이들의 이름도 까먹은 지 오래다. 그들과 평생 만날 일이 없을 테니까. 설사 만나더라도 내게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겠지.
“……운이 좋았죠.”
나는 따분할 정도로 상투적인 겸손을 내뱉었다. 시큰둥한 내 반응에도 안내역의 귀족은 과장된 미소를 지으며 날 치켜세웠다.
“운이라니요. 보통은 제국의 일급 수배범을 마주한 순간, 행운이 아니라 재난이라고 생각했을 겁니다.”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귀족은 여전히 웃고 있었다. 그가 속으로 어떻게 생각할지 뻔했다. 하층 출신 주제에 거들먹거린다 생각하겠지.
하지만 내가 거들먹거리면 뭐 어쩔 건가? 저들은 날 비난하지 못한다. 나는 피식 새어 나오는 웃음을 참았다.
위이이잉.
우린 승강기를 타고 연회장에 도착했다. 복도를 지나 문을 열자 넓은 연회장이 보였다. 벽은 전부 유리라서 바깥이 훤히 보였다.
연회장에선 이미 귀족들이 모여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카르티카 말고도 다른 가문의 귀족이 드문드문 보였다.
우리의 등장에 짧은 침묵이 일었다. 연회장의 사람들은 하던 일을 멈추고 나와 지젤을 응시했다.
사람들의 시선이 우리에게 꽂혔다. 그도 그럴 것이 오늘의 주연은 우리였다.
“마중 나가지 못해서 미안해. 아직 인사가 덜 끝나서. 오랜만입니다, 지젤 양.”
잘 차려입은 일레이가 우리에게 다가왔다. 그는 평소보다 더 격식을 갖춘 어투로 지젤을 대했다.
지젤이 치마의 끝단을 잡으며 고개를 살짝 숙였다.
“이렇게 다시 만나 뵐 줄은 몰랐습니다. 처세와 계략에도 능하시군요.”
반쯤 비꼬는 말이었다. 나와 일레이는 서로의 이득을 위해 지젤을 이용하고 있었다.
하지만 귀족도 결국 가문을 위한 도구에 불과했다. 개인은 가문을 위해 존재한다. 나아가 가문도 제국을 위해.
우린 현실을 잘 이해하고 있다. 지젤도 그렇기에 순순히 따르고 있었고.
“진심이 없진 않습니다.”
일레이가 낮게 속삭이며 내 눈치를 살폈다.
지젤은 고개를 숙이고 있기에 난 그녀의 눈빛을 보지 못했다. 아니, 굳이 볼 생각이 없었다.
그 대신, 나는 연회장을 응시했다. 나는 사람들의 얼굴 하나하나를 훑으며 눈동자를 움직였다.
“흐음…….”
둘러보던 나는 곧장 입을 다문 채로 한숨을 쉬었다.
익숙한 얼굴이 연회장 한편에 있었다.
‘엔리코 라간.’
엔리코는 두 눈을 부릅뜬 채로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조금만 더 있으면 피눈물이라도 흘릴 기세였다. 일레이와 지젤의 약혼 소식을 듣고 온 모양이었다. 표정을 보니 여전히 지젤을 향한 짝사랑을 불태우고 있는 듯하다.
엔리코 라간의 얼굴에는 비참한 분노가 서려 있었다. 이윽고 그의 시선이 내게로 향했다. 음, 머리가 아프다. 요즘 두통이 잦아진 느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