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ad Born Blood RAW novel - Chapter (103)
배드 본 블러드-103화(103/197)
103
“잠깐 나 좀 봐, 루카…… 우스 쿠스토리아.”
엔리코가 내게 다가오며 말했다. 그는 내 새로운 신분이 어색한 듯했다.
“잠시 실례.”
나는 지젤과 일레이에게 양해를 구하고는 엔리코를 따라 연회장 바깥으로 나갔다. 복도는 갈색 카펫이 길게 깔려 있었다.
엔리코는 죽고 싶은지 다짜고짜 내 멱살을 쥐며 벽까지 밀어붙였다. 내게 엔리코에게 미안한 마음이 없었다면 그의 팔이 부러졌을 것이다.
“너, 너, 이 자식, 나, 나와 지젤을 이어준다고 했잖아!”
“이어준다고는 안 했어. 도와준다고 했지.”
나는 크라치아 아카데미에서 엔리코를 이용했다. 지젤과 이어지지 않을 걸 알면서도 그의 고백을 종용했었다.
그리고 당연히 지젤은 엔리코를 거부했다. 그 실연 때문에 엔리코는 마음의 큰 상처를 받았다. 내가 나쁜 짓을 하긴 했지.
그러나 그래서, 뭐 어쩌라는 것인가?
내가 사는 세상에 비하면 사춘기의 실연 따윈 지극히 사소한 일이다. 나는 죽고 죽이는 세계에 살고 있다. 여자에게 차인 정도로 세상 전부를 잃은 듯이 구는 애새끼의 칭얼거림을 언제까지 들어줄 순 없었다.
“일레이는 네 친구잖아! 네, 네가 지젤과 일레이를 이어준 거지?”
엔리코는 침이 튈 정도로 소리를 질렀다. 나는 뺨을 묻은 타액을 손가락으로 쓸어내리고선 엔리코를 밀쳤다.
“둘이서 눈이 알아서 맞은 걸 나보고 어떡하라고? 그리고 일레이가 너보다 잘 생기고 집안도 낫잖아.”
“뭐, 뭐라고?”
엔리코가 휘둥그레 눈을 떴다.
마침 복도로 술잔을 나르는 시종이 지나갔다. 나는 술잔을 두 개 낚아채고선 하나를 엔리코에게 넘겼다.
엔리코도 얼떨결에 술잔을 받았다. 나는 그의 목에 팔을 감으며 짐짓 친한 척했다.
“일단 한 잔 쭉 마시면서 생각해 봐, 머저리야.”
“뭐, 머저리?”
“지젤은 성격도 나빠. 거기다가 줏대도 강해. 나긋한 여자는 아니지.”
“나, 나는 그런 점에 끌, 끌렸는걸.”
“네가 여자 경험이 없어서 그래. 지금까지 여자를 만나본 적은 없지?”
나도 없긴 하다. 하지만 여기선 허세를 부리며 잘난 척을 할 때다.
“난 일편단심…… 윽!”
난 엔리코의 멍청한 주둥이를 손바닥으로 때렸다. 엔리코는 어안이 벙벙한 표정으로 어깨까지 움찔했다.
“염병하네. 일편단심? 지젤이 만나주지 않으면 평생 혼자 살 거야? 다른 여자를 안 만나고?”
“그, 그건 아니지만.”
“너한테 빚진 게 있으니 여자를 소개해 줄게. 너 같은 도련님을 좋아하는 여자를 알고 있거든.”
엔리코도 들어보니 솔깃한지 바로 거절하진 않았다.
“정말?”
“물론이지.”
……마르티나 디바에게 연락하면 라비앙로즈에서 엔리코 취향의 여자를 뽑아서 엔리코에게 보내줄 것이다. 라비앙로즈도 귀족과 어떻게든 연줄을 하나라도 더 만드는 게 이득이니까.
엔리코는 언제 화냈냐는 듯이 골몰히 생각했다.
“너, 혹, 혹시 여동생이 있어? 지젤 말고, 혈연관계의 여동생 말이야.”
“뭐?”
내가 눈살을 찌푸렸다.
“예전에 너와 분위기가 비슷한 시녀가 지젤을 모시는 걸 본 적이…….”
아아, 케이사를 말하는 거로군. 더는 세상에 없는 여자지. 다신 이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을 거야.
나는 불쾌한 기억을 떠올렸다. 내 목소리는 어느덧 차갑게 식었다.
“없어.”
“그, 그래. 난 또 그 여자를 소개해 주려는 줄……. 윽! 왜 자꾸 때려! 망할 자식아.”
난 손가락을 튕겨 엔리코의 코를 때렸다. 그의 코끝이 술에 취한 듯이 붉게 부어올랐다.
“네 여자 취향이 한결같은 건 알겠다.”
엔리코는 드센 여자를 좋아하는 모양이다. 하기야 행동거지를 보면 그런 여자를 만나는 게 잘 어울릴 것 같긴 했다.
“네 정성과 우정을 생각해서 소, 소개는 받겠지만, 난 아직 지젤을 포기하지 않았어. 의외로 약혼이 혼인까지 이어지는 경우가 드문 건 알지?”
나와 엔리코 사이에 우정이 있는지 방금 처음 알았다.
“그래, 알았어. 단말기 고유번호나 주고 가. 조만간 연락 갈 거야.”
어쨌거나 나는 엔리코는 달래는 데 성공했다. 연회장으로 들어가는 엔리코의 뒷모습은 경쾌했다.
난 연회장에 바로 들어가지 않고 숨을 돌렸다.
“하하…….”
자조적인 웃음이 흘러나왔다. 나는 입도 대지 않은 술잔을 가만히 쳐다봤다.
“지금 누가 누구에게 조언을…….”
가만히 생각해 보면 웃길 따름이다.
난 술잔을 쓰레기통에 그대로 넣고선 흐트러진 옷매무새를 가다듬었다. 오늘은 일레이에게 중요한 날이다. 녀석에게 힘을 실어줘야 한다.
끼이익.
내가 연회장으로 들어섰다.
일레이와 지젤이 다정하게 서서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그러나 난 두 사람의 눈이 웃지 않고 있다는 걸 알았다. 묘한 불편함이 그 둘 사이에 있었다.
“아, 엔리코와 이야기는 잘 끝냈어?”
일레이가 화색이 된 표정으로 나를 반겼다. 지젤과 둘이 있는 게 겸연쩍었던 모양이다.
“똑바로 해. 둘이 어색한 게 티 나잖아.”
“어쩔 수 없잖아. 지젤은…….”
나는 일레이의 말을 전부 듣지 않고 저 너머에 있는 인파를 보았다. 그중에서 이채를 띈 듯이 이목을 끄는 보랏빛 소년이 있었다.
내 시선이 보랏빛 소년에게서 멈췄다. 난 전신에 힘이 들어가는 걸 겨우 눌렀다.
“루카? 저 애를 알아?”
일레이도 내 시선을 따라가더니 보랏빛 소년을 응시했다.
“임무 중에 만난 적이 있어.”
난 짧게 대답했다. 거짓말은 아니다. 실제로 그의 경호 임무를 수행했으니까.
‘이반 크라치아!’
소리를 벌컥 지르고 싶었다. 등골이 서늘하게 식는 느낌이다. 내 머릿속엔 의문만 가득했다.
‘네가 왜 여기에 있는 거야?’
……이반 크라치아가 연회에 참석해 있었다. 연회장의 그 누구도 그가 황족인지 모르는 듯했다. 심지어 그는 그냥 황족도 아니다. ‘진짜 황태자’로 내정된 차기 황제였다.
아마도 적당한 말단 귀족으로 신분을 위장해 연회장에 참가했겠지.
나와 눈이 마주친 이반이 싱긋 웃었다. 난 그가 무슨 생각하는지 모른다. 불안감이 내 심장을 거칠게 두들겼다.
이 와중에 일레이의 사촌이 거만한 표정으로 우리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진절머리가 날 정도로 난장판이네! 정말!
“약혼을 축하하네! 일레이! 내 사촌 동생아! 쿠스토리아 가문과 깊은 인연을 맺다니, 카르티카 가문에겐 대단한 경사야!”
가르시아 카르티카, 일레이가 일러준 경쟁자 중 하나였다.
가르시아는 기갑여단의 장교다. 기갑여단은 양산형 전갑의체 미르미돈을 운용하는 부대였고, 그 부대의 장교는 제국군 내에서도 상급 군인이었다. 그의 현 복무 기간이 이십여 년이었고, 여단장 후보 중 하나였다. 그 정도면 군인 가문의 가주로서 손색이 없었다. 심지어 슬하의 자식 중엔 선별검사에서 근위대 생도로 뽑힌 아이도 있었다.
“근위대장님의 따님과 이런 자리에서 만나 뵐 줄이야, 대단한 영광입니다. 지젤 쿠스토리아 양.”
가르시아가 호쾌하게 인사했다. 언행이 시원하고 도량이 넓어 보였다. 사람들, 특히 군인에게 호감을 쉽게 살 성격이었다.
그러나 난 가르시아보다 이반 크라치아에게 자꾸만 눈이 갔다. 그가 무슨 의도로 여기에 있는지 알아야 한다.
“자네가 루카우스 쿠스토리아로군! 근위대 최초로, 아니…… 제국군 역사상 자네 나이에 4급 십자검 무공훈장을 받은 사람이 있던가? 좋은 친구마저 둔 일레이가 정말 부럽군, 부러워! 자네의 영웅담을 듣고 싶…….”
이대로 이야기를 나누다간 시간이 질질 끌릴 것 같았다. 이반 크라치아는 자신을 따라오라는 듯이 인파 사이를 빠져나가고 있었다.
지금은 이반을 놓쳐선 안 될 것 같았다. 직감에 따를 때다.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급한 일이 생겨서요.”
내가 과감하게 말했다. 지젤과 일레이도 움찔했고, 가르시아는 언제 웃었냐는 듯이 얼굴을 찡그렸다.
“호의를 무례로 답하는 사람이 여기에 있군. 역시 타고난 출신은 어쩔 수…….”
가르시아는 날 향한 모욕을 끝내지 못했다. 일레이가 서늘하게 웃으며 끼어들었다.
“제 손님의 무례는 제가 대신 사과드리겠습니다. 하지만 제 친구에 대한 모욕은 허락하지 않겠습니다.”
“무슨 자격으로 허락이니 뭐니 지껄이는 거냐, 일레이.”
나 때문에 가르시아와 일레이가 충돌했다. 표면적으론 그렇게 보인다.
‘아니, 내 무례는 핑계일 뿐이야.’
두 사람은 무슨 이유로든 갈등을 빚었을 것이다. 여긴 누가 더 영향력이 많은지 경쟁하는 자리니까.
“일이 있으면 가봐도 돼, 루카.”
일레이가 한 발짝 나오더니 가르시아를 막아섰다. 난 고개만 끄덕이며 그 옆을 걸어갔다.
나는 이반을 쫓아갔다. 그는 물고기처럼 인파 사이를 이리저리 흐느적거리며 지나갔다. 때론 사라지는 것처럼 보였다.
‘나와 장난이라도 치고 싶은 건가. 짜증스럽게 구는군.’
나는 이반을 좋아하지 않는다. 오히려 싫어하는 편이다. 절대 입 밖으로 내뱉지 못할 생각이긴 하다.
누가 뭐래도 이반 크라치아는 차기 황제로 내정된 황족이니까.
“제 손으로 형을 재기불능으로 만들더니 아주 기고만장하구나, 일레이!”
“제가 먼저 결투를 신청한 것도 아니었고, 참관인도 있는 합법적 결투였습니다.”
내 등 뒤에선 일레이와 가르시아의 다툼이 한창이었다. 연회장의 이목은 그 두 사람에게 쏠렸다.
사람들은 나와 이반에게 관심이 없었다. 뭐, 지젤 정도만 내 등을 쳐다보고 있겠지.
이반은 연회장 구석에 있었다. 날 응시하는 그의 동공이 짐승처럼 세로 꼴로 변하더니 황금색으로 빛났다.
“절 곤란하게 만드는 게 즐거우신가 봅니다.”
내가 사납게 말했다.
“내 존재가 널 곤란하게 만드는가 보네. 그저 네가 만나고 싶어서 온 거야.”
헛소리. 내가 황족을 많이 본 건 아니지만…… 저들의 언행에는 언제나 이유가 있었다. 단순한 친목을 위한 담소와 방문 따윈 하지 않는다.
“용무가 있다면 지금 말씀하시죠. 따를 준비가 됐습니다.”
“하하, 내 말을 하나도 안 믿네. 섭섭한걸…….”
그늘 한 점 없이 맑은 미소와 웃음이다. 그러나 내 앞의 소년은 손짓 한 번으로 이 자리의 귀족을 전부 죽일 수 있었다. 그럴 힘과 권력이 그에겐 있었다.
이반이 입술을 달싹이다가 말을 이어갔다.
“……그리고 네게 주어진 임무는 이미 알고 있잖아. 설마 모른다고 말하진 않겠지?”
모든 불안과 걱정이 현실이 되었다.
‘황실은 헤일라스와 쿠스토리아 가문을 축출할 생각이다.’
나와 키누안은 황실의 직접적 명령이 없어도 그들의 뜻을 읽을 수 있었다. 때가 되면, 각자의 위치에서 황실의 의지에 따라 움직여야겠지.
그렇기에 아키에스 빅티마를 익힌 아키에스 도미니, 황제의 감시자인 것.
“알고는 있습니다.”
내키지 않는다는 걸 간접적으로 말했다. 이반은 내가 어떤 사람인지 알고 있을 테니까. 거짓말을 하면서까지 충성스러운 인형인 척할 필요는 없다.
“루카, 난 아버지와 달라. 아버지는 아버지이고, 나는 나니까. 지금의 계획은 아버지의 뜻이지.”
난 눈을 가늘게 떴다. 이반의 말이 거짓일까, 진실일까. 내 직관으로도 판단이 불가능하다.
……그러나 이반의 말이 사실이라면, 쿠스토리아 가문을 구할 여명이 손톱만큼이나마 비치는 셈이었다. 이반의 계획에는 쿠스토리아 가문의 축출이 없을 수도 있었다.
이반의 말이 함정일지라도 나는 걸어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제 약한 면을 노리는 거라면 성공하셨다고 말하고 싶군요.”
난 쿠스토리아에 속하면서 권력과 지위를 얻었으나 대신에 약점도 생겼다.
보육원의 이레귤러 루카는 잃을 게 없었다. 그러나 루카우스 쿠스토리아는 잃을 게 있었다. 나는 쿠스토리아 가문을 지키고 싶다.
“지금부터 날 제외하곤 그 누구도 믿지 마.”
“명심하겠습니다.”
나는 고개를 까닥였다. 하지만 이반을 믿을 생각도 없다.
“아, 그리고 무기는 챙겨왔어?”
이반이 연회장을 응시하며 말했다.
‘무기.’
그는 불안하기 짝이 없는 단어를 꺼냈다.
“단검과 권총 정도는 챙겼습니다.”
“전투를 준비해 두는 게 좋을 거야. 난 이만 가볼게.”
이반이 영문 모를 소리를 내뱉으며 연회장을 나갔다. 그러나 나는 그의 말이 허튼소리가 아니라는 걸 잘 안다.
난 전투 감각을 천천히 깨웠다. 신경계에 부하가 걸리면서 몸의 열이 올랐다.
삑.
단말기가 울렸다. 나는 인상을 찌푸렸다.
‘헤일라스?’
근위대장 헤일라스의 긴급 연락이었다. 내 의사와 상관없이 헤일라스의 메시지가 망막 디스플레이에 떠올랐다.
-자네와 이스칸이 귀족들을 죽였다는 소식이 새어 나갔네. 정보에 따르면 곧 급습이 있을 거다, 대비하도록.
불명예스러운 자라도 가족은 가족인가 보다. 복수하려는 자는 많다. 그렇기에 헤일라스는 나와 이스칸의 정보를 숨기려 했다.
하지만 결국 정보가 새어 나갔다.
위이이이잉!
연회장의 음악과 목소리조차 묻어버리는 굉음이 들렸다. 연회장의 유리 너머로 무장헬기가 나타났다.
무장헬기의 전조등이 연회장을 들쑤시듯 비췄다. 이윽고 빛은 내게서 멈췄다.
연회장의 사람들은 지금 어떤 상황인지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누군가는 이벤트라고 생각했는지 활짝 웃으며 손까지 흔들고 있었다.
기이잉.
무장헬기의 하부에 달린 기관총이 움직였다. 총구는 날 향해 움직이고 있었다.
“환장하겠네, 정말.”
나는 땅을 긁듯 옆으로 뛰쳐나갔다. 총성이 따갑게 울려 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