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ad Born Blood RAW novel - Chapter (104)
배드 본 블러드-104화(104/197)
104
나는 좀 억울했다, 아니 많이 억울하다.
고문 시설의 귀족을 몰살시킨 사람은 이스칸이었다. 내가 죽인 사람은 바오 자카난 밖에 없다.
그러나 그 사실을 알더라도 복수심에 눈이 먼 귀족들은 나와 이스칸을 구분하지 않을 것이다.
투- 웅!
무장헬기의 기관총이 첫 불꽃을 뿜었다. 내 의수와 의족도 산산조각낼 수 있는 대구경탄이었다.
펑!
얼핏 장난처럼 들리나 사람의 머리가 터지는 소리였다. 인간의 뇌가 손톱만 한 살점으로 사방팔방 흩어졌다.
사람들의 비명이 들리기도 전에 연발 사격이 이어졌다. 총구가 날 쫓느라 연회장 전체를 긁어버리다시피 했다.
투두두두두!
총격으로 유리 벽이 깨졌고, 탁자와 식기가 휙휙 날아갔다. 유리 벽 가까이 서 있던 귀족들은 기압 차에 휩쓸려 바깥으로 떨어졌다.
‘얼마나 위세가 좋은 귀족이길래, 이딴 짓을.’
나는 눈을 잔뜩 찡그렸다.
무장헬기는 무고한 피해자 따윈 상관없다는 듯이 공격을 퍼부었다. 나와 일직선으로 서 있던 사람들은 빗발치는 총알로 벌집이 되고 있었다.
‘일레이, 지젤을 부탁한다.’
나는 지젤과 일레이를 쳐다봤다. 일레이가 지젤을 비롯해 사람들을 대피시키고 있었다. 아직도 사태를 인지하지 못한 채로 발이 얼어붙은 바보들이 대다수였다.
“이쪽으로!”
일레이가 소리를 질렀다. 그는 무장헬기가 노리는 게 나라는 걸 대번 알아채곤 반대 방향으로 인파를 유인하고 있었다.
‘상층 구역 한복판, 그것도 귀족 가문의 집회에서…….’
나조차도 믿기지 않는 현실이었다.
연회장의 인파 대다수가 귀족이다. 그들은 자신이 이런 곳에서 죽을 거라곤 상상도 못 했을 것이다. 그들은 언제나 죽음이 타인의 것이라 여기며 살고 있으니까.
……그러나 이상할 것도 없다. 저들의 시선이 얕고 생각이 짧은 것이다.
제국의 귀족 사회는 암투로 그득하다. 비범한 괴물들이 웃는 낯짝으로 서로를 향해 칼을 들이밀고 방아쇠를 당기고 있다. 지금은 그 아득한 악의가 표면으로 잠깐 올라온 것뿐이다.
끼릭, 끼릭.
기관총이 나를 따라 움직였다.
나는 인파가 없는 방향으로 사격을 유도했다. 내 기동력은 총구의 회전보다 빠르기에, 공간만 확보하면 회피는 어렵지 않았다.
“후우.”
난 호흡을 내뱉으며 집중력을 끌어올렸다. 이반의 조언 덕분에 전투를 준비하고 있던 터라 신경계는 딱 알맞게 열이 오른 상태다.
무기라곤 단검 그라켄 부트와 보급권총이 전부다. 크루시스도 루이나도 놔두고 와서 없다. 벌써 그 애들이 그리워졌다.
내 전용무장이 있다면 저런 무장헬기 따윈 어렵지 않게 박살 낼 수 있었다. 하지만 없는 걸 찾는다고 하늘에서 뚝 떨어지진 않는다.
‘여러모로 악조건이로군.’
나쁜 환경과 악조건 따윈 지긋지긋할 정도로 익숙하다. 날 둘러싼 상황이 나쁘다고 징징거려 봐야 바뀌는 건 없다. 가진 것만으로 어떻게든 해결해야 한다.
내 전술 사고가 이동 경로를 그려냈다. 기관총의 회전 반경을 감안해 벽과 천장을 오가면서 전진하면 된다. 이대로 가면 총구와 내가 일직선이 되는 경우가 없었다. 완벽하게 안전한 경로다.
그러나 누군가가 내 동선에 있었다.
‘엔리코 라간!’
난 이맛살을 찌푸렸다. 저 앞에 엔리코가 있었다. 그는 어쩔 줄 몰라 하며 주저앉아 있었다.
내 이동 경로와 겹친 엔리코의 위치가 몹시도 안 좋았다. 내가 예정대로 움직이면 엔리코의 몸뚱이는 총알 세례에 너덜너덜해질 것이다. 확실하게 죽는다!
난 빠르게 예비 경로를 하나 더 짜냈다. 지금 내겐 두 가지의 길이 있다.
안전하고 확실한 길을 선택하고 엔리코를 죽게 놔둘 것이냐, 아니면 위험을 다소 무릅쓰고 엔리코를 살릴 것이냐.
당장 판단해야 한다.
끼이이익!
나는 오른발로 바닥을 긁으며 제동을 걸었다. 속도를 줄인 나는 반대 방향으로 뛰었다. 이러면 엔리코와 동선이 겹치지 않는다.
‘엔리코를 살린다.’
이건 내가 유약한 게 아니다. 엔리코에겐 빚이 있다. 그리고 지금 이 사태는 어쨌든 내 탓이다. 여기서 엔리코를 죽게 놔둔다면 몇 년은 찜찜할 터다.
무장헬기의 총구가 날 포착했다. 안전책을 포기한 대가를 감당할 때가 왔다. 탄도통제술 사용자가 가장 꺼리는 상황이 불규칙한 제압 사격이다, 바로 지금 같은 상황.
총알을 피하는 건 반사 신경의 영역이 아니다. 고속 사고와 연산 기반의 예측이다. 불규칙할수록 예측은 어렵다.
‘선으로 된 궤적이 아니라 원으로 된 범위라고 생각해.’
오차야 있겠지만 기관총의 사격 범위를 원으로 한정하고 움직이면 된다. 그렇다면 실수하더라도 손발 같은 말단만 부서진다.
언제나 이론과 말은 쉽다. 행동과 실천이 어려울 뿐이지.
휘릭!
나는 높게 뛰며 재주를 넘었다. 내 몸이 사격 범위를 아슬아슬하게 벗어났다. 무수히 많은 총탄이 내가 있던 자리를 깨부수고 있었다.
뛰어오른 나는 떨어지고 있었다. 자세를 잡으며 다리로 착지할 시간 여유는 없었다.
타앙!
난 손끝으로 바닥을 세차게 치며 재차 가속했다. 내 왼쪽 손가락이 충격으로 부서지면서 뒤틀렸다.
덕분에 나는 빠르게 물러나며 기관총의 범위에서 완전히 벗어났다.
‘안전영역을 확보했다.’
나는 입술이 씰룩이며 사나운 미소를 지었다. 또다시 생사의 경계에서 삶을 쟁취했다. 약이라도 한 것처럼 뇌가 호르몬을 잔뜩 뿜어냈다.
두려움이 마비된다. 다시 한번 아까와 같은 곡예를 하고 싶었다.
그래, 목숨을 건 싸움이란 미치광이나 하는 것이다. 제정신으로 할 일이 아니지.
무장헬기의 총구가 나를 쫓으려면 한참 움직여야 한다. 일직선으로 따라붙을 시간을 벌었다.
타- 앗!
내가 땅을 박차며 내달렸다. 주변의 풍경이 빠르게 지나갔다. 기름과 피 냄새가 자욱한 현장이다.
‘빚은 갚았다, 엔리코.’
엔리코도 그제야 정신을 차리곤 허둥지둥 도망가고 있었다. 난 더는 그에게 마음의 빚이 없었다. 다음에 같은 상황이면 그를 죽게 내버려둘 것이다.
철컥!
난 보급권총을 꺼내서 겨누었다. 무장헬기와 거리는 가까워졌고, 내 자세는 안정됐다. 정밀 사격할 찰나가 생겼다.
탕! 타앙!
내가 연달아 방아쇠를 당겼다. 내가 쏜 총알이 무장헬기와 기관총 사이의 이음부에 명중했다. 비좁은 틈새에 총알이 끼면서 기관총의 좌우 움직임이 멎었다. 삐걱거리는 소리만 났다.
“방금, 그, 그건 뭐, 뭘 어떻게 한 거냐?”
누가 나를 향해 감탄을 터트렸다. 난 동공만 힐끗 움직였다.
가르시아 카르티카였다. 그도 군인답게 도망가지 않고 응전을 준비했다. 그는 기둥 뒤에 숨어서 어디선가 가져온 에너지 라이플을 예열하고 있었다.
나는 가르시아 방향으로 고개도 돌리지 않고 엄호를 요청하는 수신호만 보냈다. 하는 행동을 보니 유능한 군인인 듯하니 도움이 될 것이다.
그러나 나는 전진하는 대신에 엄폐물을 찾아 움직였다. 무장헬기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았다.
콰드드득!
기관총이 무력화된 헬기는 그대로 돌진하더니 연회장으로 몸통을 들이밀었다. 프로펠러가 천장과 바닥을 긁어대며 끔찍한 굉음을 냈다.
콰아아아아아!
나도 기둥 뒤로 숨으며 잔해와 파편으로부터 몸을 숨겼다.
강행 진입으로 반파된 헬기의 문이 열렸다. 그 안에선 전투 안드로이드 다섯 기가 걸어 나왔다. 주인과 소속조차 식별되지 않는 불법 안드로이드였다.
-투항하면 죽이지 않겠다, 루카우스 쿠스토리아.
안드로이드의 무미건조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빌어먹을, 이 새끼들이 널 노린 거야?”
가르시아가 날 탓하듯 소리 질렀다.
“시끄럽고, 엄호나 해.”
내가 짜증스레 말했다. 귀책을 찾는 건 전투가 끝난 뒤에 해도 충분하다.
‘날 붙잡아 실컷 고문이라도 하고 싶은 모양이지. 바로 죽이는 것보다 그게 더 훌륭한 복수니까.’
놈들이 폭발 무기를 쓰지 않는 이유였다.
이미 연회장엔 일반인의 대피가 끝났다. 일레이가 부지런히 움직인 덕분이었다. 나와 가르시아만 안드로이드와 대치하고 있었다.
콰직!
갑작스레 안드로이드의 머리가 날아갔다. 그 위력이 원체 대단해 폭탄이라도 터진 것 같았다. 붉은 잔열이 머리가 사라진 목을 지글지글 태우고 있었다.
총성은 진원지는 연회장 입구였다. 누가 쐈는지 불 보듯 뻔했다. 사람들을 대피시킨 일레이다.
“이야, 루카. 아직까지 팔다리를 전부 멀쩡히 달고 있을 줄은 몰랐어.”
일레이가 밉상스럽게 말하며 권총을 재차 조준했다. 말이 권총이지, 총신이 팔뚝만큼 길었다. 언뜻 보면 균형이 앞으로 무너져서 부자연스럽게 보였다.
‘일레이의 전용무기.’
제국의 공방에서 만든 건 아니었다. 권총에는 카르티카 가문의 인장이 박혀있었다. 어떤 구조인지는 몰라도 일레이의 특기를 극대화하는 총일 것이다.
“도와주려면 빨리 도와줘. 힘들어 죽겠으니까.”
나는 안도의 숨을 내뱉으며 기둥에 등을 바짝 기댔다.
주륵.
내 콧구멍에서 피가 흘러내렸다. 신경계 과부하가 오고 있다. 전투 시간은 짧았지만, 그만큼 어려운 전투였다. 특히 엔리코를 살린다고 바늘구멍을 통과하는 듯한 곡예를 했다.
“기관총이 달린 헬기를 보급권총 하나로 상대하다니. 하하, 너도 괴물이 다 됐구나.”
일레이는 연거푸 사격하며 말했다. 그의 권총은 개인화기의 위력을 까마득히 뛰어넘었다. 내 충격권총만큼의 위력은 아니지만 작렬탄을 쓰는지 매번 폭발이 일었다.
쉬이이이익.
일레이의 권총에서 뿌연 연기와 증기가 일었다. 별다른 냉각 장치 없이도 권총이 고열을 버티는 걸 보니 내구성 하나는 끝내주는 듯했다.
치이이익!
일레이의 손이 권총의 열기에 녹아내리고 있었다. 인공 피부가 벗겨지면서 기계 의수의 원형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터- 엉!
일레이의 사격할 때마다 안드로이드가 터져나갔다. 전투용인 만큼 어느 정도의 탄도 계산이 가능할 텐데도 놈들은 맥을 추지 못했다. 권총 규격에서 벗어난 탄속과 화력 때문이었다.
일레이가 다섯 기의 안드로이드를 전부 처치했다. 그는 헬기 내부를 마저 조사하며 위험요소가 있는지 확인했다.
“너 때문에 이 사달이 난 거지? 대답해라, 루카우스 쿠스토리아. 사람이 한둘 죽은 게 아니야. 그것도 우리 카르티카 가문의 사람들이지.”
상황이 종료되자마자 가르시아가 날 추궁했다.
나는 가르시아를 쳐다보지도 않았다. 대신에 안드로이드의 총기를 매만지는 일레이를 보고 있었다.
철컥.
장전하는 소리가 들렸다. 내 눈동자가 커졌으리라.
“일레이, 잠깐…….”
내 말이 끝나기 전에 일레이의 조준이 끝났다. 그가 방아쇠를 당기자마자 가르시아의 관자놀이에 총알구멍이 났다.
털썩.
내 앞에서 가르시아가 허무하게 쓰러졌다. 난 불쾌한 감정을 숨기지 않고 눈을 찌푸렸다.
“널 감싸려고 죽인 건 아니야. 방금은 경쟁자를 제거하기 좋은 순간이었으니까. 이러면 사고에 휘말려 죽은 것처럼 보이겠지.”
일레이가 평온하게 말했다. 그는 안드로이드의 총기를 깨진 유리 너머로 내던졌다.
“죽일 정도로 위협적인 경쟁자는 아니었잖아.”
내 추궁에 일레이가 착잡하게 웃었다.
“……쿠스토리아에 속하면서 넌 물러졌어, 루카. 그러다가 죽을 거야. 귀족 사회는 그렇게 만만하지 않아.”
나는 한쪽 입술을 비틀면서 그를 응시했다.
“난 네 말대로 밑바닥 출신이라 이쪽 생리를 잘 몰라. 하지만 이거 하나만큼은 잘 알지. 방금 네 행동은 비겁했다, 일레이 카르티카.”
“그럼 명예는 네가 가지도록 해. 난 실리를 챙길 테니까.”
우리는 입을 다물며 바깥을 응시했다. 뒤늦게 치안경비대의 공중차량이 오고 있었다.
까득.
나는 이를 갈았다.
짜증이 솟구쳤다. 그리고 속도 부글부글 끓었다. 일레이에게 화가 나긴 했다. 하지만 생각해 보면 일레이의 행동은 수긍할 수 있었다.
내가 진짜로 화가 난 이유는 다른 데 있었다.
‘일레이의 말이 맞아. 나는…….’
쿠스토리아 가문에 속하면서부터 난 빠르게 녹슬고 예리함을 잃고 있었다. 루카라는 칼날이 무뎌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