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ad Born Blood RAW novel - Chapter (105)
배드 본 블러드-105화(105/197)
105
카르티카 가문의 집회는 비극으로 끝났다.
날 노린 무장헬기의 습격으로 스물두 명의 사망자가 생겼다. 그중 하나는 일레이가 죽인 거긴 하다.
표면적으론 테러리스트의 습격으로 발표될 것이다. 생각해 보면 테러 조직이란 통치자 입장에서 꽤 편한 집단이었다. 불편하거나 숨겨야 할 일이 생기면 전부 테러리스트의 탓으로 돌리면 되니까.
나는 단말기로 헤일라스에게 지금 상황을 보고했다. 헤일라스도 어디서 정보가 새어 나갔는지 바삐 조사하는 듯했다.
-이스칸도 습격을 받았네. 아마 근위대 내부에서 정보가 새어 나간 거겠지. 고문 시설에서 사망한 귀족의 친인척인 근위대원부터 조사하고 있네.
만약 헤일라스의 추측이 사실이라면 씁쓸할 따름이다.
‘이반 크라치아는 습격이 올 거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어.’
그렇지만 황실이 꾸민 짓은 아닐 것이다. 황실의 정보망을 통해 습격 사실을 미리 알아낸 것이겠지. 황실의 귀는 제국 곳곳에 있을 테니까.
‘그러면 정말 이반은 선의로 날 만나러 온 건가? 미리 경고해 주기 위해서?’
이반 덕분에 나는 습격에 대응할 수 있었다. 그의 경고가 없었다면, 지금보다 더 험한 꼴을 당하거나 죽었을 수도 있었다.
기분이 묘했다.
일레이는 차기 가주로서 사고를 수습했다. 카르티카 가문원도 많이 죽었기에 가르시아의 죽음에 의문을 가지는 이는 없었다.
“제가 초대한 자리에서 이런 일이 생겨 진심으로 유감입니다.”
일레이는 지젤과 나를 배웅하며 말했다. 그는 지젤에게 정중한 태도로 사죄했다.
지젤은 말없이 고개만 끄덕이며 공중차량으로 들어갔다. 그녀의 드레스에는 타인의 핏자국이 있었다.
지젤과 이야기를 나눈 일레이가 내게 다가왔다. 그는 담배를 입에 물더니 불을 붙였다.
“루카, 자세한 건 묻지 않을게. 말해줄 수 있는 거라면, 내게 이미 말했겠지.”
일레이는 내막을 묻지 않았다. 그는 언제나 영악할 정도로 똑똑했다. 그리고 나도 가르시아의 죽음에 대해 침묵할 것이다.
말로 꺼내지 않았지만, 우린 거래를 마쳤다.
“총이 멋지더라.”
난 일레이의 전용무기를 언급했다.
“실전에서 쓴 건 오늘이 처음이야. 생각보다 쓸 만하더라. 그리고, 루카…….”
일레이가 그리 말하며 지젤이 들어간 공중차량을 힐끗 보았다.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확실히 해.”
“릴리안 라모네스를 기억해?”
기억하다마다. 잊으래야 잊을 수가 없는 여자다.
“갑자기 왜?”
“넌 나와 같은 실수를 하지 마. 현실적인 척하면서 변명을 늘어놓지 말라는 거지. 인생이라는 기회는 한 번뿐이니까. 그 무엇도 지나가면 돌아오지 않아.”
“헛소리하고 있네. 취한 거냐?”
내가 일레이의 어깨를 밀치며 지나갔다. 일레이는 내 등 뒤에 대고 말을 덧붙였다.
“난 아직도 후회하고 있어. 내 자신에게 이런저런 핑계를 댔지. 잡을 수 있을 때 잡지 않은 걸 말이야.”
나는 그의 목소리를 한 귀로 흘리며 공중차량으로 들어갔다. 먼저 탄 지젤이 자리에 앉아있었다.
날 본 지젤이 고개를 돌리더니 창밖만 응시했다. 우린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위이이잉.
우리가 탄 공중차량이 자동 운행에 돌입하며 떠올랐다. 쿠스토리아 저택으로 가는 동안 여명이 밝아오고 있었다.
“습격은 너와 관련된 일이지?”
이게 지젤의 첫마디였다. 나는 부정도 긍정도 하지 않은 침묵으로 답했다.
“헬기가 습격하기 직전에 넌 이상하게 행동했어.”
당시에 나는 이반을 발견하고 그를 쫓아갔다. 내가 습격을 미리 알고 있던 건 아니지만, 지젤이 보기엔 관련된 것처럼 보였을 것이다.
“그래서?”
나도 모르게 말투가 차가웠다. 밤새 일어난 일 때문에 내 신경이 곤두선 탓이다.
“……방금은 아버지 같았어. 항상 내 의문에 대답을 해 주지 않으셨지. 언제나 가문을 위해서 대단한 일을 하시는 분이셨으니까. 추궁해 봐야 너도 똑같이 대답하겠지? 모든 게 쿠스토리아 가문을 위한 거니까. 난 알아선 안 되고.”
“잘 알고 있네.”
난 지젤의 투정을 들을 심적 여유가 없었다.
‘황실과 쿠스토리아 가문, 유리 크라치아, 이반 크라치아, 키누안, 헤일라스, 이스칸, 일레이 카르티카…….’
내 머리는 지금 상황의 인과추론을 위해 맹렬하게 굴러가고 있었다. 두통이 아까부터 식지 않았다. 콧구멍 위쪽은 피가 나올 것처럼 뜨겁게 욱신거렸다.
이건 내가 통제할 수 있는 사고가 아니다. 심장이 의식하지 않아도 절로 뛰는 것처럼, 아키에스 빅티마로 발달한 직관과 사고가 알아서 작동하고 있었다. 뇌의 과부하도 멈추지 않았다.
이런 작동 기제 덕분에 나는 불의의 기습과 상황도 예지하듯 대비할 수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단점으로 작용하고 있었다. 어떻게든 의식을 다른 곳으로 돌려야 한다.
“……습격이 있을 때, 나는 네가 걱정됐어. 일레이를 따라 도망치면서도 온갖 나쁜 상상 때문에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고.”
지젤의 목소리가 젖어있었다. 나는 그녀의 얼굴을 보지 않았다. 창밖으로 흘러가는 새벽의 푸른 풍경만 응시했다.
“난 널 걱정하지 않았어. 일레이를 믿고 있었거든. 그 녀석이라면 널 어떻게든 지켜줄 테니까.”
“그렇게 믿고 있어서 일레이와 약혼하게 만든 거야?”
“녀석이 자리를 잡을 때까지만 하는 거라고 했잖아.”
“아버지는 일레이가 마음에 들면 진짜 약혼을 해도 된다고 하셨어. 카르티카 가문이라는 배경보다는 일레이의 능력을 믿으시는 것 같더라고.”
“나만 없었어도 일레이가 이번 기수의 최고가 됐겠지. 능력도 좋고 괜찮은 놈이야. 분명히 출세하겠지.”
“내가 일레이와 혼인한다면 너도 좋겠네. 그렇게 막역한 사이니까.”
슬슬 짜증이 났다.
“……그러든가 말든가. 아니면 무슨 대답을 원하는 거야? 우린 남매지만, 난 양자야. 네 혼인에 관여할 결정권도 없잖아.”
“그걸 말하…….”
난 지젤의 말을 잘랐다.
“잘 들어, 지젤 쿠스토리아 양. 난 힘들게 기회를 얻어서 여기까지 온 사람이야. 거기다가 눈앞에 닥친 일을 처리하는 것도 급급하지. 난 숨만 쉬고 있어도 온갖 문제에 휘말리고 있어. 더는 너한테 신경 쓸 여유도 없다고. 이해했어?”
내가 지젤을 정면으로 보며 말했다. 그녀의 동공이 커졌다. 아까부터 그녀의 눈시울이 붉을 것 같더니 정말로 그랬다.
……빌어먹을.
나라고 폭언하고 싶은 건 아니다. 그러나 지젤의 행동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둑이 무너지듯 막아둔 감정이 내 목구멍에서 새어 나왔다. 참지 못한 나는 지젤의 입을 틀어막듯이 말을 이어갔다.
“현실적으로 생각해 봐. 난 일시적인 감정 때문에 내가 쌓아 올린 걸 무너뜨리고 싶지 않아. 너도 그렇잖아. 그렇게 잘난 척하며 똑똑하던 네가 왜 이러는지 이해가 안 돼. 나도…….”
말문이 막혔다. 지젤의 뺨을 타고 흐르는 눈물 때문만은 아니었다.
난 약한 말을 하고 싶지 않다. 약점을 드러내지 않아야 한다. 양으로 태어나도 늑대의 가면을 써야 하는 세상이다. 자신이 피식자인 걸 드러내선 안 된다.
……나라고 힘들지 않은 게 아니다. 미쳐버릴 것만 같았다. 몇 번이나 이 모든 걸 집어던지고 싶었다. 앞만 보고 나아가는 것도 한계가 있었다.
주변에는 온통 나보다 더한 괴물뿐이다. 내 이해를 넘어선 존재도 있었다. 그들에게 잡아먹히지 않으려면 나도 괴물인 척해야 한다.
그러나 그 누구에게도 이런 말을 할 수 없다.
멍하니 내 말을 듣던 지젤이 손바닥 밑부분으로 눈물을 닦으려 했다. 그러나 흐르는 게 더 많았다.
“미, 미안. 잠깐만, 끅, 다른 곳을 봐줘, 부탁이야.”
그녀는 표정을 갈무리하려고 애쓰고 있었다.
나는 아랫입술을 깨물 듯 튕겼다. 다시 말하지만 나도 윽박지르고 싶진 않았다. 지젤에게 나쁜 감정이 있는 건 아니다.
우우웅.
공중차량의 엔진 소리가 진동으로 퍼지고 있었다.
한참이 지나도 지젤의 동요는 멈추지 않았다. 그녀는 홀로 감정을 쏟아내고 있었다.
그래, 오늘로 깔끔하게 관계를 정립하면 된다. 애매모호한 태도를 취한 내 잘못이 없는 것도 아니다. 확실하게 표현했어야 했다.
“……다 됐어.”
지젤이 그리 말하며 고개를 들었다. 나도 시선을 그녀에게 두었다.
보는 사람이 민망할 정도로 지젤의 뺨과 눈시울이 붉었다. 옷깃과 소매도 젖어있었다. 그러나 눈빛에는 총기가 희미하게 돌아와 있었다.
어느덧 공중차량이 쿠스토리아 저택이 가까워지고 있었다. 난 그녀를 데려다주고 근위대 숙소로 돌아갈 생각이었다.
“앞으로의 내 계획은 이래. 난 가주가 될 생각이 없어. 쥬페가 멋대로 날 경쟁자로 여길 뿐이고. 특히 양어머니…… 에바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나를 막을 거야. 절대로 날 지지하지 않겠지.”
내가 화제를 돌리듯 말했다. 지젤은 침묵하며 내 말을 계속 들었다.
“그러나 에바도 친딸인 네가 가주가 된다면 견제하지 않을 거야. 네게 뜻이 있다면 나는 쥬페를 무너뜨리면서 널 지지할게, 예전에 약속한 것처럼. 그러면 군인이 아닌 가주를 꺼리는 사람들도 널 지지하겠지.”
이건 진심이었다. 난 가주와 맞지 않았다. 가주직을 염두에 둔 적이 없다고 말한다면 거짓말이겠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지젤의 표정도 차분해졌다. 그녀는 입술을 달싹이다가 식어버린 말을 내뱉었다.
“루카, 그간 감정적으로 행동해서 미안했어. 지금 생각해 보니 정말 바보 같았네.”
“알면 됐고.”
나는 안도하듯 말했다.
“나도 내가 가주 자리에 어울린다고 생각하진 않아. 지금까진 그저 가문 내에서 쓸모 있는 사람으로 인정받으려고 발버둥 친 거야. 가주라면 쿠스토리아의 이름을 가진 사람들을 지킬 힘이 있어야 해. 그러나 내겐 그런 힘이 아직 없지.”
지젤이 고요한 눈동자로 말했다. 이성의 빛이 그녀의 동공을 채웠다.
“힘이 없는 건 나와 쥬페도 마찬가지야.”
“쥬페는 몰라도, 넌 장차 힘을 가지게 될 거잖아. 아버지의 총애도 받고 있고. 그래서 난 결정했어. 네가 정신을 차리게 해 준 덕분에 내가 뭘 해야 하는지 잘 알게 됐지.”
지젤은 차분하다 못해 얼어붙은 표정을 지었다. 동공의 초점도 빈 것처럼 흐릿했다.
기이잉.
공중차량이 쿠스토리아 저택의 비행장 위에서 멈췄다. 추진체의 출력이 줄면서 소음도 잦아들었다. 그리고 지젤의 목소리는 그만큼 더 선명하게 들렸다.
“일레이 카르티카와 가짜가 아닌 정식 혼약을 하겠다고 아버지에게 말할 거야. 합리적인 판단이지. 모두에게 이득이잖아.”
그래, 이거면 충분하다.
“일레이는 좋은 녀석이야. 널 아껴줄 거고.”
“좋은 사람이 아니라도 괜찮아. 날 아껴주지 않아도 그만이고. 귀족의 혼인에선 이해관계가 맞는다는 게 중요한 거지. 난 이걸로 쿠스토리아 가문에서 쓸모 있는 사람이 돼. 루카, 네게도 나와 일레이의 혼인이 도움 될 거야. 절친한 친구가 친척으로 엮이는 거니까.”
마치 나를 위해서 하는 결정인 것처럼 들렸다.
쿠웅.
공중차량이 착륙했다.
지젤이 느릿하게 일어섰다. 정말로 느린 건지, 아니면 내가 그렇게 느끼는 건지 모르겠다.
모든 게 정리된다. 여기서 내린 그녀는 헤일라스에게 일레이와 혼인하겠다고 말하겠지. 아마도 시기는 내년이나 내후년 정도.
헤일라스도 흔쾌히 허락하며 서두를 것이다. 일레이도 지위를 확고히 하려면 강력한 힘을 가진 쿠스토리아 가문과 사돈이 되는 게 좋을 거고.
모두에게 이득이다. 빠르면 빠를수록 좋다.
그리고 한번 내린 결정은 무르지 못한다. 이건 애들 장난이 아니다. 홧김에 저지를 일은 더더욱 아니고.
“안녕히, 그리고 앞으로 잘 지내요. 루카.”
지젤이 공중차량의 문 앞에 서더니 고개를 정중히 숙이며 말했다. 그녀가 손만 뻗으면 공중차량의 문이 열릴 것이다.
‘넌 나와 같은 실수를 하지 마. 현실적인 척하면서 변명을 늘어놓지 말라는 거지. 인생이라는 기회는 한 번뿐이니까. 그 무엇도 지나가면 돌아오지 않아.’
일레이의 조언이 떠올랐다.
그 무엇도 지나가면 돌아오지 않는다.
지금의 순간과 감정도.
내 안의 무언가가 무너졌다. 나는 밑바닥 없이 추락하고 있었다. 내 모든 것이 저 아래로 떨어진다.
“아…….”
이건 내가 내뱉은 말이다. 어느새 나는 일어서서 지젤의 손목을 잡고 있었다. 나조차 자신의 돌발행동에 놀랐다.
지젤의 눈동자가 커지면서 일렁거렸다. 그녀의 얄팍한 가면이 무너져 내렸다.
쿵!
나는 그녀의 손목을 잡은 채로 차량의 벽까지 밀었다.
“바보 같은 짓이라면서?”
지젤이 웃는지 우는지 모를 표정으로 나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지금까지 말로도 꺼내지 않았고, 생각조차 하지 않으려 했다. 그러나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이 여자를 좋아한다.
지젤이 눈을 감는다. 나는 얼굴을 가까이 가져다 댔다. 들뜬 숨이 먼저 닿는다. 그녀의 체취가 이토록 달다는 걸 새삼스레 깨달았다.
입술이 맞닿았다. 나와 그녀의 앞니가 가볍게 탁하고 부딪힌다. 어디서 배운 것도 아니지만, 나는 본능적으로 혀를 밀어 넣었다. 그건 그녀도 마찬가지였다. 태어나기 전부터 약속이라도 한 듯이 숨결과 타액을 나누고 있었다. 이 깊은 감정에 빠진 자들이 서로가 운명이라 허황된 착각을 하는 이유가 있었다. 모든 순간이 감미롭다.
끔찍한 현실조차 잊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기다리는 게 파국이라는 것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