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ad Born Blood RAW novel - Chapter (106)
배드 본 블러드-106화(106/197)
106
나는 바보다.
나는 등신이다.
나는 머저리다.
일어난 나는 숙소의 천장을 보면서 자괴감에 빠졌다.
지난밤의 일이 떠올랐다. 난 카르티카 빌딩에서 무장헬기의 공격을 받았다. 어찌어찌 해치웠다. 일레이가 자신의 경쟁자이자 사촌인 가르시아를 죽였다.
그리고 나는 지젤과…….
그녀와 헤어지던 순간이 떠올랐다.
‘무슨 짓을 한 거냐!’
‘정말로 뒈지고 싶은 거냐?’
내 머릿속의 목소리가 충돌하고 있었다. 난 하면 안 될 짓을 했다. 몇 번이고 억눌러온 욕망이 터졌다.
‘감당하지 못할 일을 저질렀다.’
난 불필요한 위험요소를 늘렸다.
“빌어먹을.”
고된 전투를 마친 뒤라 감정을 통제하는 능력이 떨어진 탓이리라. 일레이가 쓸데없는 말을 해서 흔들린 것도 있지.
아니, 허튼 변명이다.
잘 알고 있으면서도 참지 못했다. 난 갈망에 패배한 것이다. 언젠가는 이런 일이 생겼으리라.
진작, 지젤과 거리를 뒀어야 했다. 얼굴을 마주치는 일 자체를 줄여야 했지.
그러지 않았다는 건…… 나도 그녀가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지금도 그렇다. 난 당장이라도 지젤을 찾아가고 싶어서 몸이 근질근질했다. 가서 어젯밤의 일이 꿈이 아니라는 걸 확인하고 싶었다.
“이 등신 같은 새끼.”
나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며 한숨을 쉬었다. 터져버린 감정은 드세게 나를 지배했다. 통제할 수가 없었다.
‘이럴 때가 아닌데.’
이 와중에 나는 근위대장 헤일라스의 호출을 확인했다. 오늘 오후에 집무실로 오라는 통보였다.
습격과 관련된 이야기일 것이다.
나와 이스칸의 정보가 새어 나갔으니 추가적인 습격이 있을 수도 있었다. 다른 귀족도 같이 죽이는 과감한 행보를 보면 보통내기가 아니었다.
‘정신 차려라, 루카.’
난 머리를 쓸어 넘기며 거울을 응시했다.
‘지금의 삶과 지젤을 지키고 싶다면 괴물이 돼야 한다. 날 막는 이가 누구든 모조리 씹어 삼킬 수 있는 괴물.’
그게 헤일라스든 키누안이든 말이다.
각오를 다질 때다.
과거의 나를 떠올려라. 난 많이 바뀌었다. 아끼는 게 많아졌다. 잃을 것도 생겼다.
내가 아끼고 좋아하는 걸 잃는다면…… 난 다시 일어서지 못할 정도로 무너질 수도 있다.
그게 싫다면 잃을 게 없던 나처럼 강해져야 한다. 예리한 칼날과도 같은 그 시절의 내가 돼야 한다. 거칠고 비정한 나로 돌아와야 한다.
정신을 칼날처럼 예리하게, 의지는 송곳의 끝처럼 뾰족하게.
물리적 힘도 키워야 하고, 날 도와줄 사람도 있어야 한다. 현실 세계의 사건과 문제는 정신과 의지만으로 해결되는 게 아니다.
‘이게 불순물인가…….’
쓴웃음을 흘러나왔다.
날 둘러싼 상황은 더 복잡해졌지만, 해야 할 일이 명확하게 보였다. 그리고 지금의 나는 그 어느 때보다 강해지고 싶었다.
요동치는 격정이 어두운 감정을 밀어내고 있었다.
* * *
집무실에는 헤일라스와 이스칸이 있었다. 두 사람은 내가 들어오기 전까지 이야기를 나눈 듯했다.
나는 어젯밤에 대한 보고를 구두로 마쳤다.
“……무장헬기가 절 노렸다는 건 일레이 카르티카만 알고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테러리스트의 짓이라 믿을 겁니다.”
“급박한 상황에서 일을 용케 잘 처리했군. 이건 순전히 내 잘못이지. 자네에게 미안한 마음이 커.”
헤일라스가 이렇게 말하는 건 드문 일이다. 그만큼 그도 이번 사태를 예상치 못한 듯했다.
실제로도 난 죽을 뻔했다. 내 기량이 생도 평균이었다면, 지금쯤 장례식 관짝에 누워있겠지.
“어디의 누가 습격을 사주했는지 알아내셨습니까?”
평범한 생도라면 이런 건방진 질문을 하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나는 이런 말을 할 자격이 있었다.
“조사 결과 용의자는 열 손가락으로 셀 수 있을 정도로 추렸네.”
“하지만 확실하진 않겠군요.”
“시간은 걸릴 거네.”
나는 잠시 생각하다가 입을 열었다.
“용의자 명단을 주시면 제가 조사하겠습니다.”
헤일라스의 눈이 커졌다. 이스칸도 의문이 담긴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자네가?”
“키누안의 도움을 받으면 가능할 겁니다. 키누안은 어떤 변덕에서인지 저를 좋아합니다. 그리고 우리보다 지하세계의 일에 밝죠. 그 정보망을 통하면 흔적을 찾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용의자 명단이 있다면 더욱 쉬울 거고요.”
내가 키누안을 직접 언급하는 일은 드물었다. 그는 불온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키누안과의 친분을 과시할수록 나도 불온분자라고 의심받을 것이고, 헤일라스가 나를 믿지 않을 확률이 올라간다.
“자넨 내 예상보다 더 깊게 키누안과 엮인 모양이로군.”
헤일라스가 여러 의미가 담긴 말을 내뱉었다. 하지만 그도 키누안이 황제의 직속 감시자라는 건 꿈에도 모르겠지.
“그렇지 않았으면 진즉 키누안에게 죽었겠죠.”
“뭐든 좋으나…… 릭 실바 누네즈를 기억하게. 릭도 처음에는 충실한 근위대원이었네. 상부에서 위장 잠입 임무를 맡길 정도로 말이야.”
“그 릭을 죽인 사람이 접니다. 저는 망상에 빠져 출세를 놓칠 머저리도 아니고요.”
고민을 마친 헤일라스는 탁자를 손가락으로 두드려 홀로그램을 띄었다. 근위대 조사로 추려낸 용의자 명단이 홀로그램에서 흘러나왔다.
내가 빠르게 이름과 얼굴을 외웠다. 5초도 지나지 않아서 홀로그램이 사라졌다.
“지원이 필요하면 말하게나.”
나는 헤일라스의 집무실을 빠져나왔다. 이스칸도 일어서더니 나와 같이 나왔다.
복도를 걷다가 이스칸이 먼저 입을 열었다. 그의 검붉은 제복이 멋스럽게 흔들렸다.
“미안하게 됐어, 루카.”
“무슨 말씀이십니까?”
“내 판단 때문에 일이 꼬였으니까. 거기서 바오 자카난만 납치하고 나오는 게 합리적 행동이었지.”
이스칸은 고문 시설의 고객을 전부 죽였다. 그 때문에 우리가 습격을 받은 것이다. 그러나 나는 이스칸의 행동을 원망하지도 않았고, 잘못됐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만약 제가 상급자였으면…… 저도 같은 판단을 했을 겁니다.”
“아니, 넌 그러지 않았을 거야. 더 좋은 결정을 내렸겠지. 난 감정을 이기지 못한 거다.”
내가 더 나은 판단을 했을지는 의문이다. 어젯밤의 나를 떠올리면 더더욱.
“하지만 놈들은 살리는 것보단 죽이는 게 제국을 위한 길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최선은 모르겠지만, 최악의 선택은 피한 것이죠.”
내 말에는 확신이 차 있었다. 정말로 그렇게 믿기 때문이다.
“……넌 좋은 근위대원이 될 거다.”
이스칸의 호의가 느껴졌다. 그러나 나는 의문도 들었다.
“칭찬은 감사합니다만, 좋은 근위대원이 무슨 의미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자신을 잃지 않은 자.”
이스칸은 한마디로 정의했다. 평소에도 확고한 가치관을 지니고 있기에 나오는 말이었다.
“저도 그러고 싶군요.”
나도 이스칸의 말에 동의했다.
* * *
나는 키누안에게 연락했다. 그러나 한참이 지나도록 답신이 없었다.
원래라면 키누안이 먼저 연락하길 기다릴 것이다. 그러나 오늘의 나는 서둘렀다. 일 처리는 빠르면 빠를수록 좋다.
그리고 허가 없이 찾아가도 될 정도의 유대가 키누안과 나 사이에 있다고 생각한다.
똑, 똑.
난 키누안의 집무실 앞에 섰다. 내부의 반응이 없었으나 확인해 보니 닫혀있진 않았다.
치익.
내가 문을 열며 내부를 보았다. 난 눈을 크게 떴다.
“교…….”
난 입을 바로 다물었다. 그리고 머리만 빼서 복도를 보았다. 다행히 밖엔 아무도 없었다.
‘키누안이 쓰러져 있다.’
누군가의 습격은 아니다. 그랬다면 진작 나도 알아챘을 것이다.
키누안의 집무실은 깔끔하게 정돈된 상태였다. 그는 문 앞에 쓰러져 있었다. 문을 잠그려다가 실패한 듯했다.
‘죽진 않았어.’
난 쓰러진 키누안의 상태를 살폈다. 죽은 건 아니었다. 전신의체의 기관계가 정상적으로 작동하고 있었다.
‘뇌의 문제.’
키누안을 따라다니는 뇌의 기능 이상이었다. 아키에스 빅티마의 부작용이다.
“교관님, 실례하겠습니다.”
난 키누안을 들쳐 메곤 소파에 앉혔다. 그 대단한 키누안이 무방비한 채로 내 앞에 있었다.
‘내가 손만 움직여도…….’
집무실 내부엔 감시 장치조차 없었다. 나는 강렬한 유혹을 느꼈다.
키누안은 나의 스승이자 조언자다. 그러나 내 생사여탈권을 쥔 자이기도 하다. 필요하다면 망설이지 않고 날 처분할 것이다.
‘키누안의 죽음.’
내 사고는 자유로이 뻗어 나갔다. 키누안이 여기서 죽는다면 난 무얼 얻고 잃을 것인가? 내게 상황이 유리하게 작용할까? 아니면 즉결 처분으로 이어질까? 황실은 견습에 불과한 나를 키누안 대신에 신용할 것인가?
……그리고 이 상황 자체가 나를 시험하는 함정일까?
나는 가만히 선 채로 죽은 듯이 앉아있는 키누안을 응시했다.
달그락.
난 키누안의 품을 뒤적거렸다. 내 예상이 맞다면 분명히 있을 것이다.
“역시…….”
나도 아키에스 빅티마 숙련자다. 키누안의 표현을 빌리면 ‘미스타’였다. 아키에스 빅티마의 원리와 속성은 잘 파악하고 있다.
약물 주사기가 내 손에 잡혔다.
‘각성제.’
키누안은 자신의 뇌 상태에 맞는 비율로 합성한 약물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그가 맡은 직위와 임무의 특수성을 생각하면 전투 상황도 있을 테니까.
그는 중요한 일이 있으면, 수명 단축과 부작용 가속을 감수하고도 자신의 뇌를 현역 수준으로 활성화할 것이다.
‘폐인이 됐던 켄 노마도 가능한 일이다. 키누안이 못할 리가 없지.’
나는 키누안의 후두부에 주입구를 찾아서 주사기를 꽂아 넣었다.
푹!
약물은 3할 정도만 집어넣었다. 이 정도면 의식 각성에 충분할 것이다. 그 이상은 전투 상황이 아니니 필요가 없지.
파르르르.
키누안의 눈꺼풀이 빠르게 떨렸다. 위아래로 닫히고 열리길 반복했다. 의안은 어찌나 빠르게 도는지 동공이 여러 개처럼 보일 정도였다.
뚝.
이윽고 경련이 멈췄다. 그리고 폭풍이 일었다.
휘리리릭!
키누안이 내 팔을 붙잡더니 끌어당겼다. 그가 내 몸을 감싸듯 얽매며 내 등 뒤까지 움직였다. 생전 듣도 보도 못한 움직임이었다. 그는 뱀이라도 된 듯이 내 목과 사지를 죄였다.
“교, 교관님, 접니다.”
나는 목 사이로 손을 넣어서 겨우 목을 졸리는 걸 막았다. 내 신음이 키누안의 의식을 완전히 깨웠다.
“아, 루카, 자네였군.”
키누안의 말투는 지극히 차분했다. 날 죄던 손과 발도 느슨해졌다.
‘이게 키누안의 실력…….’
내가 방심한 것도 있지만, 대단히 괴기스러운 움직임이었다. 전혀 예측 불가능한 독특한 공격에 나는 목숨을 유지하는 게 고작이었다.
키누안의 몸에 밴 전투 반사 정도에 당했다. 내 상식이 무너지는 느낌이었다.
‘현역 시절에는 얼마나 괴물이었다는 거지?’
난 키누안 전성기의 편린을 본 것에 불과했다. 그가 멀쩡할 때는 어떤 사람이었을지 가늠조차 되지 않았다.
키누안은 상황 판단을 끝냈는지 쓰게 웃었다.
“다른 누구도 아닌 자네가 날 발견해서 다행이로군. 내 약점을 보이고 말았어.”
“상태가 많이 안 좋아지신 겁니까?”
난 팔다리를 매만지며 말했다. 키누안의 공격 때문에 욱신거렸다.
“시간이 많지 않은 모양이야.”
어쩌면 키누안이 날 받아들인 게 그 시간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더는 후임자를 여유 있게 고를 시간이 없었을지도.
내겐 다행인 일이다. 좀 부족하더라도 내가 처분당할 확률이 준다는 소리니까.
“하여튼 무슨 일로 찾아온 건가? 소실된 기억이 좀 있긴 하지만, 자네를 호출하지 않은 것 같은데? 아니면 지난 밤의 습격 때문인가?”
방금까지 혼수상태였던 사람이라고 믿기 힘들 정도로 인지 능력이 우수했다.
나는 속으로만 감탄하며 용건을 꺼냈다. 당연하게도 키누안은 내가 무장헬기에 습격받은 사실을 알고 있었다.
“습격을 사주한 사람이 궁금합니다.”
키누안의 입술이 찰나지만 떨렸다.
이반 크라치아는 내게 습격을 미리 경고했다. 황실은 이번 사태의 흐름을 잘 알고 있다는 뜻이다. 정식 감시자인 키누안의 정보망이라면 추가적 조사가 없이도 사주자를 알아낼 수 있다.
“내가 알고 있을 거라 생각하나?”
“그렇습니다.”
“알고 있더라도 자네에게 알려줘야 하는 이유는?”
“……헤일라스를 끌어내리고, 제가 쿠스토리아 가문의 가주가 되겠습니다.”
내가 입을 열었다.
당돌한 말에 키누안도 입을 다물었다. 그는 한참이나 턱을 만지다가 웃음을 터트렸다.
“그게 자네가 찾아낸 답이로군.”
내겐 다른 방도가 없었다. 내가 가진 전부를 지키려면 이게 유일한 해결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