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ad Born Blood RAW novel - Chapter (108)
배드 본 블러드-108화(108/197)
108
보육원에서 지내던 과거가 떠올랐다.
그 시절의 나는 지저분한 전선 사이로 보이는 상층 구역을 우러러보곤 했다. 노력한다면 저길 갈 수 있을 거라 믿었다. 제국이 그렇게 선전하고 가르쳤기 때문이다.
그리고 선별검사에서 내가 근위대 적성이라는 결과가 나왔다. 난 주먹을 불끈 쥐며 소리 없는 고함을 내질렀다.
내 노력의 결과가 나왔다. 이 시궁창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누군가의 변덕으로 죽을까 봐 벌벌 떨지 않아도 된다.
‘그러나 여기도 똑같다.’
상층 구역과 귀족 사회도 다를 바가 없었다. 입는 옷과 먹는 것만 좋아질 뿐이었다.
……우린 모두 누군가의 노예였다.
비참한 노예와 그보다 좀 더 나은 노예만 있을 뿐이다.
저기 권세를 자랑하던 귀족 가문조차 하루아침에 무너지는 걸 보라.
지금 이 자리에는 백여 명이 넘는 근위대원이 모여 있었다. 상당히 많은 숫자였다.
근위대원의 공식 정원은 천 명이다. 그러나 실제론 그보다 못했다. 많아야 팔, 구백여 명, 인력난일 땐 오, 육백여 명 정도였다.
평시에도 근위대원은 제국 각지의 임무로 차출된다. 수백여 명의 근위대원이 전부 모이려면 두어 달 전부터 준비해야 하고, 백여 명도 하루아침에 모이긴 힘들다.
‘코로부스 가문의 영지.’
우린 그 앞에 서 있었다. 영지 중심엔 저택이라고 부르기엔 조금 특이한 건축물이 있었다.
거대한 비행선을 개조한 형태의 대형 거주지였다. 듣기론 정착 초창기에 아크 행성에서 출발한 제국 이민선 중 하나라고 한다. 그 이민선의 함장이 코로부스 가문의 시작이었다.
“역사가 오래된 가문이지. 한때는 황실의 외척이기도 했고.”
내 곁에 있던 일레이가 중얼거렸다. 나와 같은 기수의 생도는 근위대의 보조병 역할로 여기에 있었다.
그러나 오늘은 전투가 없을 것이다.
근위대가 이만큼 모인 것도 단순한 무력시위였다. 코로부스 가문은 멸족을 당하기 싫으면 순순히 잘못을 시인하고 항복할 것이다.
‘코로부스 가문은 근위대원에게 손대려 했다.’
나와 이스칸의 습격을 사주한 자가 코로부스 가문의 일원이었다. 그 집안사람 중 하나가 고문 시설의 단골이었다가 이스칸 손에 죽었기에 복수하고자 한 것이다.
그리고 그 정보는 키누안을 통해 내게 전해졌고, 나는 헤일라스에게 보고했다.
근위대는 코로부스 가문과의 협상에 나섰다. 군부의 상층부와도 이야기가 끝났는지 헤일라스도 공식적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삑.
나는 헤일라스의 호출을 받고선 대열 앞으로 나아갔다. 근위대원의 시선이 나를 훑어보듯 지나갔다. 이제 나도 근위대의 유명 인사였다.
어린 시절의 소원대로, 나는 출세의 문턱에 섰다.
“자네가 준 명단을 들이미니 코로부스에서 죄를 시인했네. 멸족만 피하게 해달라고 하는군. 저들 내부에서도 일부 멍청이들이 저지른 짓이야. 바보 몇 명이 가문을 망친 셈이지.”
헤일라스가 나와 단둘이 앞에 서며 말했다.
“도움이 됐다니 다행입니다. 일이 순조롭군요.”
“대외적으로 발표하면 저들과 관련된 친인척까지 모두 죽을 테니까. 약소 귀족이 되는 것으로 끝날 수 있으니 다행이라 생각하겠지.”
“코로부스 가문이 싸우지도 않고 포기할 줄은 몰랐습니다.”
“백 년 넘게 고위 공직자도 배출하지 못한 놈들이네. 터를 잘 잡은 선조 덕분에 지금까지 떵떵거리면서 산 거지.”
코로부스 가문은 타락한 귀족의 전형처럼 보였다. 그들은 영지를 가진 가문이었다. 그것도 수익이 나는 광산이 있는 땅이었다.
‘카타콤 광산.’
질 좋은 광물이 다량으로 채굴되는 광산이었다. 그 때문에 그들은 고위 공직자와 군인을 배출하지 않아도 가문의 위세를 유지할 수 있었다.
“가진 게 많기에 노력할 필요가 없었던 거지. 채굴권을 판매하는 것만으로도 부귀영화를 유지할 수 있으니까.”
헤일라스의 말에는 경멸이 섞여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팔다리가 제거된 귀족 다섯 명이 쇠수레에 실린 채로 우리 앞까지 나왔다. 그들이 이번 사건의 주모자였다.
‘나와 이스칸을 죽이려 했던…….’
화도 나지 않았다. 누군가에겐 죽어 마땅한 쓰레기라도 저들에겐 가족이었을 테니까.
……그리고 저들도 피해자다.
‘제국에선 카타콤 광산의 이권을 회수하고 싶은 거야.’
아크레시아 제국이 노바스 행성에 정착한 지는 이백 년이 다 되어갔다.
정착기의 혼란은 잦아들고 세력의 구도는 굳어지고 있었다. 그렇게 제국은 안정기에 접어들었다. 더는 알짜배기 이권을 나눠줄 필요가 없었다. 이런 식으로 명분이 생길 때마다 이권을 회수해 강력한 중앙집권 체제를 공교히 다지고 싶은 것이리라.
이건 불온한 생각이다. 과거의 나라면 부정했겠지.
하지만 명백한 사실이다. 제국은 좋은 명분이 생겼다고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귀족조차 언제 숙청당할지 모른다.’
코로부스 가문은 오늘부터 쇠락의 길을 걷는다.
“따라오게, 루카. 자네도 협상하는 법을 배워야 하니까.”
헤일라스는 나를 비롯해 측근 다섯 명을 데리고 코로부스 가문의 저택으로 들어갔다. 측근 중에선 이스칸도 있었다.
“신민의 영도자이자 제국의 수호자에게 통치권을 반환합니다. 부족하고도 미력한 우리는 단지 이 땅을 빌렸을 뿐이니…….”
코로부스 가문의 가주가 무릎을 꿇은 채로 말했다. 그의 안색은 몹시도 어두웠다.
‘싸움이 있었군.’
코로부스 저택 내부에는 전투의 흔적이 있었다. 파벌이 나뉘었던 모양이다.
코로부스 가문은 굴욕적이지만 멸족을 피하기 위한 선택을 했다.
“이미 다 끝난 이야기지만…… 당신들은 땅에서 나오는 이익을 퇴폐와 향락에 낭비하는 게 아니라 미래를 준비했어야 했지.”
“우리도 바보는 아니오, 헤일라스 쿠스토리아. 준비 정돈하려고 했지.”
코로부스 가주가 고요히 말했다. 그는 그 이상 말하지 않았다. 정말로 바보가 아닌 모양이다.
헤일라스가 눈을 게슴츠레 뜨며 턱을 매만졌다. 그는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코로부스 가문을 향한 경멸이 걷혔다.
나도 코로부스 가주의 말이 무슨 의미인지 알 것 같았다.
‘제국과 황실이 코로부스 가문의 확장과 고위직 진출을 방해했다.’
코로부스 가문과 근위대의 협상과 행정처리는 미리 짠 듯이 물 흐르듯 진행됐다. 코로부스 가문은 표면적으론 광물 밀수출 혐의로 이권과 땅을 빼앗겼다.
‘웃긴 건 밀거래가 아예 거짓말이 아니라는 거지.’
나는 탁자 위로 빠르게 흘러가는 홀로그램을 응시했다. 코로부스 가문은 비자금 확보를 위해 광물을 빼돌려 외계종족과 거래를 한 적이 있었다.
‘그렇게 마련한 비자금은 제국이 건드리지 않는다. 적어도 이번 대까지는 귀족다운 삶을 살 수 있겠지. 아니면 훗날의 가문 재건을 위한 투자금이 되거나.’
이게 코로부스 가문의 대비였다. 저항과 분쟁 없이 이권을 넘기는 조건이다.
‘이들은 언젠가 이권을 빼앗길 거라고 예상했기에 밀수출을 통해 비자금을 꾸준히 마련한 거지.’
원인과 결과가 거꾸로 돌아갔다. 그러나 표면적으론 코로부스 가문의 잘못이었다.
‘밀수출 혐의 기소를 거부하면…… 제국은 테러라고 알려진 카르티카 빌딩 습격 사건을 재조사해 코로부스 가문원의 짓으로 수정해 발표하겠지.’
그러면 코로부스 가문은 멸족한다. 귀족 사회는 물론이고 제국에 발을 붙이지 못할 것이다. 그래서 충분히 발뺌할 수 있는 밀수출 혐의를 순순히 인정한 것이다.
‘서서히 압박하며 명분까지 확보한 다음에 조용히 죽인다.’
이런 방식으로 ‘쓸모가 다한 가문’은 하나둘씩 사라졌다. 무력으로만 눌렀으면 진즉 반란이 일어났을 것이다.
깜빡, 깜빡.
나는 몇 번이고 눈을 감았다가 떴다.
……젠장.
처음에는 의안에 오류라도 일어난 줄 알았다. 그러나 그게 아니었다.
‘환각.’
지금 내 시야에는 코로부스의 가주가 헤일라스처럼 보였다. 헤일라스가 저렇게 비굴하게 굴 리가 없는데도 자꾸만 모습이 겹쳤다.
스륵.
나는 오른쪽 의안을 질끈 감았다. 왼쪽 생체 눈으로만 보니 얼마 있지 않아서 환각이 사라졌다. 사이버네틱 의안의 사용을 중단하니 신경계의 부하가 확연히 줄었다.
‘그 망할 진가우 소장이 괜히 이상한 말을 해서…….’
환각을 조심하라는 그의 조언이 어느 정도 내 심리 상태에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서두르지 않으면 쿠스토리아 가문도 이런 꼴이 된다는 건가?’
내가 혼자 애쓰는 사이에 협상이 계속 진행됐다.
“카타콤 광산의 채굴권과 이익은 군부와 근위대가 반반 나눠 가진다.”
헤일라스가 다른 사람들도 들으라는 듯이 말했다. 따라온 그의 측근들이 숙덕거렸다. 저 말은 통신을 통해 다른 근위대원에게도 퍼졌다.
다시 말하지만, 이 자리는 밀약이 아니다. 공식적인 협상이다.
“군부, 아니, 제국의 결정이오?”
코로부스 가주가 오히려 당황했다. 헤일라스가 팔걸이에 팔을 괸 채로 차분히 말했다.
“그간 향락에 쓰인 무의미한 돈은 제국의 상이군인을 위한 기금으로 탈바꿈하겠지.”
나는 입을 악다물었다. 앞니와 입술이 떨리는 걸 필사적으로 막았다.
‘황실이 이런 걸 허락할 리가 없잖아, 헤일라스!’
이건 근위대장 헤일라스와 군부의 독단적인 결정이다. 그러나 상이군인을 위한 기금으로 먼저 발표한다면 황실은 체면상 무를 수도 없다.
진짜 알력다툼이 시작됐다.
헤일라스도 알고 있었던 것이다, 황실이 자신을 축출하려고 한다는 것 정도는.
‘이 능구렁이 같은…….’
그렇게 가까이서 지켜본 나조차도 눈치채지 못했다. 나는 경악하며 오른쪽 의안을 열었다. 아직도 환각의 잔재가 남아있었다.
스스스.
헤일라스의 머리카락과 검붉은 제복이 뾰족하게 서더니 수십 자루의 창과 칼이 일어난 것처럼 보였다. 누구라도 자신을 죽이려고 한다면 그도 성치 못할 거라는 듯이 말이다.
* * *
난 내 생각보다 빨리 진가우 소장과 재회하게 됐다.
‘환각.’
코로부스 영지에서 발생한 환각 증상은 자질구레하게 나를 괴롭혔다.
어둠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사람의 형체를 갖춘 누군가가 나를 보는 듯했다. 어쩔 땐 황제들의 조각상이나 초상화가 살아 움직이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들의 동공이 움직여 나를 보는 듯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날 이후로 헤일라스가 정상적으로 보이지 않는 날이 많았다. 종종 조금만 이성이 흐려져도 그가 사나운 짐승처럼 보였다. 검붉은 짐승이 털을 곤두세우며 흉흉한 안광을 흘리고 다녔다.
‘불안의 형상화.’
나는 내 증상을 객관적으로 보려고 노력했다.
‘이래서 아키에스 빅티마의 사용자나 신경계 개조한 사람들이 미치는군.’
이 상태를 지속했다간 상태가 더 나빠질 게 확실했다. 더군다나 나는 당장 중압감과 스트레스를 줄일 수 있는 상황도 아니었다.
전문가의 도움이 필요했다. 그러나 근위대나 군의 의료진에게 갔다간 고스란히 내 상태가 윗사람들에게 보고될 것이다.
나는 제4연구소의 새하얀 복도를 걸었다. 내 옆에는 금발의 도련님이 싱글벙글 웃고 있었다.
“정말 나도 같이 가도 돼?”
일레이가 소풍이라도 나온 듯이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이미 왔잖아. 그리고 네가 있는 편이 나아. 소장님도 널 꽤 좋아하는 것 같고.”
진가우가 내게 무슨 짓을 할지 알 수 없다. 내가 당장 믿을 수 있는 사람 중에서 전력이 될 만한 사람은 일레이뿐이다.
끼릭, 치이익.
나는 안내를 받은 연구실 앞에 섰다. 문의 잠금장치가 해제되면서 내부가 드러났다.
“왔군, 루카. 준비는 다 해뒀네. 저쪽에 앉아.”
하얀 가운을 입은 진가우는 별다른 인사치레도 없이 연구실의 의자를 가리켰다. 온갖 살벌한 수술 도구와 기계장치가 주렁주렁 달린 의자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라도 저걸 보니 움찔할 수밖에 없었다.
위이이잉.
진가우는 뾰족한 전동드릴의 방아쇠를 당겼다가 놓길 반복했다.
“아, 그리고 근위대니까 마취는 안 해도 괜찮지? 훈련받았잖아.”
“저도 사람인지라 통각은 느낍니다.”
이 사람은 나를 인간으로 보고 있긴 한 걸까.
“마취 안 하는 게 증상 확인이 빨라.”
애초에 해줄 생각도 없었던 모양이다.
“루카, 옆에서 손잡아줄까?”
일레이가 나긋한 미소를 보이며 말했다. 나는 인상을 잔뜩 찌푸리며 일레이의 안면에 내 외투를 내던졌다.
털썩.
내가 의자에 앉자 잠금장치가 내 팔다리를 고정했다.
위이잉.
진가우가 전동드릴을 내 얼굴에 들이밀었다. 나도 눈을 휘둥그레 떴다.
설마, 내 눈깔에 지금 저걸…….
“좋아, 좋아. 아주 좋은 반응이네.”
내 반응에 진가우가 히쭉 웃었다.
키이잉!
오른쪽 의안과 전동드릴이 충돌했다. 나는 비명이 나오려는 걸 간신히 참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