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ad Born Blood RAW novel - Chapter (11)
배드 본 블러드-11화(11/197)
011
나와 일레이는 면회실로 들어갔다.
릴리안 라모네스는 보랏빛 자수가 놓인 검은색 원피스를 입고 있었다. 그녀는 나를 보자마자 가시 돋친 말을 내뱉었다.
“루카, 어째서 저를 계속 피하신 건가요?”
그게 자존심이 상한 모양이었다. 평생 누군가에게 거절을 당해본 적이 없을 테니까 말이다.
“……관심이 없으니까요.”
나는 자리에 앉지도 않고 차갑게 말했다. 더 귀찮아지기 전에 선을 그을 생각이었다.
“루카. 그래도…….”
일레이가 미소 띤 얼굴로 중재하려 했다. 나는 그를 보지도 않았다.
“일레이, 넌 닥쳐. 이 상황만으로도 충분히 짜증이 나니까.”
내 말에 릴리안도 놀라서 눈을 동그랗게 떴다.
카르티카 가문은 라모네스 가문보다 서열이 높다. 나는 그런 카르티카 가문의 도련님에게 막말했다. 확실히 상식적인 장면은 아니지.
“제가 당신에게 실수한 게 있나요? 아니면 제 어디가 마음에 들지 않는 거죠?”
릴리안이 자리에서 일어서더니 내 앞으로 걸어왔다.
“여자를 만날 여유가 제겐 없습니다. 아시겠지만 저는 보육원 출신이죠. 당신과 달리 단 한 번이라도 미끄러지면 다신 올라오지 못하는 처지입니다.”
“그렇다면 더욱더 저와 친해지면 좋지 않나요?”
“제 말을 이해하지 못하는군요, 릴리안 라모네스. 제가 당신에게 의존해 성취하고 올라선다면…… 당신의 변덕 한 번에 제 모든 게 무너져 내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힘으로 쌓아 올린 탑은 쉬이 무너지지 않죠.”
“일레이 카르티카와 친하게 지내면서 귀족 가문의 덕을 보지 않겠다고 말하는 건가요? 모순이네요.”
릴리안이 일레이를 힐끗 쳐다보다가 말했다. 저렇게 생각할 순 있어도 일레이 앞에서 할 말은 아니다.
일레이는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그도 릴리안에게 어지간히 우습게 보인 모양이다. 하기야 녀석이 자신의 동생뻘인 여자애에게 모질게 대할 성격은 아니니까.
“제가 일레이와 교류하는 건, 녀석이 카르티카 가문이라서 그런 게 아닙니다. 목숨을 믿고 맡길 수 있는 제 동료이자 친구이기 때문이죠. 일레이도 마찬가지일 겁니다. 전장에서 목숨을 지켜주는 건 가문의 후광도 명성도 아닙니다. 나와 곁에 있는 동료뿐이죠,”
나는 일레이 쪽을 보지도 않고 말했다. 그가 히쭉히쭉 웃는 꼴을 보기 싫었기 때문이다.
릴리안은 말문이 막혀 분한 표정만 지었다. 그녀가 여기서 내게 욕을 내뱉고 자리를 뜨면 나도 속이 편할 것 같았다.
나는 뺨을 맞을 각오도 하며 전투 반사를 억제했다.
“……제겐 최소한의 기회조차 주지 않을 생각이시군요.”
릴리안이 감정을 억누르듯 말했다. 그녀는 나를 올려다보다가 고개를 숙였다.
나도 조금 미안한 마음이 들긴 했다. 그러나 나는 일말의 여지조차 남기기 싫었다.
“할 말이 없으면 가보겠습니다.”
내가 그리 말하며 등을 돌려 면회실을 나섰다. 일레이는 날 따라 나오지 않고 면회실에 남아 릴리안과 이야기했다.
중개 역할을 한 일레이가 곤란할 만한 상황이었다. 하지만 자업자득이지.
나는 면회실에서 떨어진 벤치에 앉아 일레이를 기다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일레이가 면회실 밖으로 나오더니 내 옆에 떨어져 앉았다.
“루카.”
“왜?”
“방금은 너무했어. 그 정도로 매몰차게 굴 필요는 없잖아.”
일레이가 한숨을 쉬었다. 그도 릴리안을 달래느라 피곤했던 모양이다.
“이 정도까지 하지 않았으면 떨어져 나가지 않았을걸.”
“그야 그렇긴 해. 하지만 그토록 릴리안을 거부하는 이유가 뭐야? 가볍게 만나보는 것 정도는 할 수 있잖아.”
나는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나조차도 이유가 바로 생각나지 않았다. 그저 직감적인 판단이었다. 그녀를 거부하는 게 옳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내 사고의 흐름을 되짚어갔다. 내게 릴리안은 미지의 존재였다.
“……내게 달라붙는 이유를 알 수가 없으니까. 죽은 클로드가 내게 릴리안을 소개하려고 한 건 이해가 돼. 가까이서 날 봤으니 가능성을 생각해 인척으로 엮으려고 한 거지. 그러나 릴리안은 나에 대해 잘 몰라. 그런데도 뭐 하나 내세울 것 없는 내게 접근한다는 건 어떤 이유가 있을 거야.”
만약, 그 이유가 호기심이라면 더욱 그녀를 멀리해야 한다. 호기심은 쉽게 증발하는 감정이다. 빈민가의 아이들조차 장난감이 질리면 언제 아꼈냐는 듯이 쓰레기통으로 내던진다.
“쉽게 말해서, 잘 모르니까 일단 거부부터 한다는 거잖아. 그러다간 평생 홀아비로 늙어 죽을걸.”
일레이가 도발하듯 툭 내뱉었다. 나는 화를 내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나는 릴리안에 대해 모른다. 그녀가 내게 접근하고자 하는 까닭도 이해할 수 없었다. 정체와 의도가 전부 미지였다.
“네가 뭐라고 해도, 내 결정은 똑같아. 다신 릴리안의 이야기를 꺼내지 마.”
미지는 위험이다. 독이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는 낯선 열매를 처음 먹어보는 사람이 되고 싶진 않았다.
* * *
키누안 밑에서 아키에스 전투술을 배운 지 한 달이 지날 무렵이었다. 키누안은 나를 데리고 하층 구역으로 향했다.
우린 승강기를 타고 내려가 상층과 하층의 경계 역할을 하는 검문소를 지났다.
“너와 내겐 익숙한 곳이지.”
키누안이 하층 구역으로 들어서며 말했다.
상층 구역은 도시의 중심에 있었고, 하층 구역은 바깥이다. 외곽으로 갈수록 치안은 공백에 가까워졌고, 거리는 수십 년 동안 치우지 않은 쓰레기로 지저분했다.
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그동안 내 뿌리를 잊고 있었다. 끈적거리며 추잡한 밑바닥 생활 말이다.
다시 이곳에 오니 새삼스럽다.
“뭐야, 비켜.”
“네가 멀뚱히 서 있었잖아, 새끼야.”
길거리에는 험악한 소리가 오갔다. 대로를 걷는 동안, 부랑자의 싸움만 두 번을 봤으며, 소매치기는 네 번이나 당할 뻔했다.
‘매캐하면서도 미지근한 공기.’
옛 생각이 자꾸만 났다. 내 의식은 과거를 더듬고 있었다.
수도 아크바란 아래에는 용암지대가 있었다. 그곳에서 끌어 올린 지열 에너지가 도시 전체를 지탱한다. 발전소에서 걸러지지 않은 오염물질과 열기가 빈민이 사는 하층 구역을 노니고 있었다.
“루카, 이쪽이다.”
두건을 눌러쓴 키누안이 나를 돌아보며 말했다. 그는 골목길을 가리켰다.
‘나보다도 하층 구역의 지리에 밝아.’
아마도 하층 구역을 자주 오간 것 같았다.
아무리 하층 출신이라지만, 근위대원이 된 지 수십 년이 지난 사람이 하층 구역에 해박하며 자주 올 일이 있을까. 그런 의문이 내 안에 자리 잡았다.
저벅, 저벅.
나는 골목길을 걸으면서도 감각을 곤두세웠다. 부랑자와 거지들의 시선이 느껴졌다. 내가 틈을 보인다면 강도로 돌변할 이들이다.
불법 증축을 거듭한 건물 사이로 이어진 골목은 미로와 같았다. 바늘을 통과하는 실처럼 빛 몇 줄기만이 어렴풋하게 바닥까지 닿았고, 안쪽으로 들어갈수록 썩은 유기물과 녹슨 쇠의 비린내가 코를 쿡쿡 찔렀다.
‘불안하군.’
나는 팔을 들어 인공 피부조차 없는 의수를 응시했다. 지금 내가 장착한 의수와 의족은 출력이 낮았다. 일상생활 정도나 가능한 수준이다. 역체감이 무시무시했다. 팔다리에 족쇄를 찬 기분이었다.
키누안은 이번 외출에서 출력이 낮은 의수와 의족 장착을 내게 강제했다. 무슨 목적인지는 몰라도 그의 훈련을 받으려면 시키는 대로 해야 했다.
‘이런 몸으론 총알도 피하지 못해. 내 감각 바깥에서 누가 기습한다면 꼼짝없이 당하겠지.’
그렇기에 나는 평소보다 더 긴장했다.
‘그동안 키누안 밑에서 별로 배운 것도 없는 것 같지만…….’
한 달 동안, 나는 키누안을 매일 찾아가다시피 했다. 그때마다 한 시간 남짓한 시간 동안 다섯 번의 대련을 나눠서 했다. 별다른 가르침은 없었다.
키누안은 직접 가르쳐주기보다 내가 알아서 기술을 훔치길 원했다.
‘보고도 훔치지 못할 눈썰미라면 가르쳐줘도 배울 수 없다.’
키누안은 내 불만을 알아챘는지 그리 말했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나도 그간 아키에스 전투술의 성격을 어느 정도 파악했다.
……아키에스 전투술은 내가 지금까지 배우던 전투술과 확연히 달랐다.
지금까지 내가 이해한 게 맞다면, 아키에스는 내가 가진 전투술을 재활용하는 방법이었다.
기존의 전투술 학습은 특정한 기술을 새롭게 배워 숙달하는 과정이다. 그러나 아케이스 전투술은 내가 가진 능력을 분석하고 해체해서 재조립한다. 즉, 전투체계의 최적화에 가까웠다.
키누안의 말을 빌리자면, 그는 메타 전투술이라는 용어까지 썼다.
‘그래서 지엽적인 부분만 익히고 아키에스 전투술을 쓴다고 날뛰는 얼치기들이 많은 거지.’
제대로 된 아키에스 전투술 사용자는 극소수일 것이다.
어느새 좁은 골목길이 넓어지고 있었다. 그만치 인파가 많아지면서 활기가 돌았다.
“근위대 생도가 되는 날, 다신 하층 구역에 올 일이 없을 거라 생각했습니다. 이런 무지렁이와 같은 공기를 마시지 않는 삶을 살고 싶었거든요.”
나는 내 주머니에 손을 뻗는 소매치기를 걷어차며 말했다. 소매치기는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사라졌다. 이걸로 다섯 번째로군.
“자넨 출세할 타입이야. 집착이 강하고 그에 걸맞은 재능도 가지고 있지.”
비꼬는 건지 칭찬하는 건지 모르겠다.
조금 더 나아가자 골목길이 끝나고 넓은 공터와 시장이 나왔다. 위를 보니 아슬아슬하게 증축을 거듭해 가지를 친 건축물이 거미줄처럼 얽혀 하늘을 가리고 있었다. 언제 무너질지 모르는 건축물 아래에서 사람들이 물건을 사고팔고 있었다.
“암시장이군요.”
나는 키누안과 나란히 서며 말했다. 나도 여기까지 와본 적은 없었다.
“제국에서 가장 자유로운 곳이지.”
키누안이 눈을 빛내며 말했다.
“무질서한 혼돈의 중심이죠.”
내가 볼멘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암시장에 가본 적이 없는 이유는 간단했다.
‘터무니없이 위험하기 때문이지.’
호기심으로 암시장을 방문했다가 사라진 아이들이 한둘이 아니었다. 설사 살아오더라도 안구나 장기가 한둘 정도 없어졌다.
뭐, 그래도 유년기에 상상만 하던 암시장을 이렇게 직접 보니 느낌이 묘했다.
‘……몇 세대 전의 물건이지만, 군용을 버젓이 팔고 있군.’
군용 무기와 의체까지 좌판에 놓고 팔고 있었다. 가게 주인들은 한결같이 무장한 상태였고, 거리에는 치안을 대체하는 갱들이 영역표시라도 하듯 어슬렁어슬렁 오갔다.
우뚝.
나는 걸음을 멈췄다. 앞서가던 키누안이 멈춰 섰기 때문이었다. 그는 갱이 지키고 있는 건물을 보고 있었다.
“관객용 입구는 저쪽이요.”
경비를 서던 갱이 키누안에게 말했다. 눈이 있어야 할 부분은 일자식 고글이 이식되어 있었고, 인공 피부 아래로는 광 차폐가 되지 않은 회로가 과시용 문신처럼 빛났다.
“이곳 관리자에게 볼일이 있네.”
키누안이 침착하게 말했다. 그 당당한 태도에 갱이 머뭇거렸다.
“알레프 형님과 무슨 관계이십니까?”
“아, 지금 관리자 이름이 알레프인가 보군.”
그 말을 듣자마자 갱이 인상을 찌푸렸다.
“이런 정신 나간 새끼를 봤나! 당장 안 꺼져?”
갱이 키누안을 위협하며 총구를 들이밀었다. 귀한 광경이다. 제국에서 근위대원에게 총을 겨누고 살아남은 자가 몇이나 될까…….
키누안이 여기서 정체를 밝히기라도 하면, 저 갱은 오줌을 지리며 나자빠질 터다.
톡.
키누안은 자신의 허벅지를 손가락으로 두드렸다. 내게 보내는 신호였다.
스륵.
나는 갱의 시선 바깥으로 자세를 낮추며 조심스레 움직였다. 그리고 나아가는 건 한순간이다.
끼릭!
나는 갱의 측면으로 다가가 그의 목과 어깨를 감아서 졸랐다. 총구가 위로 치솟으며 키누안이 사선에서 벗어났다.
내 조르기에 갱은 몸을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 관절을 짚어서 감은 거라 완력만으로 벗어나기 힘들 것이다.
키누안은 갱의 총을 빼앗더니 이리저리 돌렸다. 곧 그의 총구가 갱의 이마에 닿았다.
“당장 알레프를 불러오면 좋겠군. 그쪽에게도 손해 보는 이야기는 아닐 테니까. 이해했으면 고개를 끄덕이게.”
갱이 고개를 냉큼 끄덕였다. 나는 키누안의 눈짓을 보곤 조르기를 풀었다.
“으, 윽. 이…….”
갱은 욕설을 삼키며 그대로 건물 내부로 들어갔다. 나는 갱이 들어간 건물을 바라보다가 의문을 내뱉었다.
“그나저나 여긴 뭐 하는 곳입니까?”
“투기장이네.”
나는 고장 난 것처럼 잠시 침묵했다. 키누안이 여기까지 온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약한 팔다리를 달고 오라고 한 까닭도.
“……제가 생각하는 그게 맞습니까?”
“자네는 우수해서 좋아. 굳이 주절주절 설명할 필요가 없으니까.”
나는 키누안의 안면에 주먹을 먹이고 싶은 충동을 참으며 한숨을 쉬었다.
끼릭.
눈을 내려 내 손을 바라봤다. 빈약한 악력이 느껴졌다. 돌멩이조차 으깨지 못하는 이 손으로 투기장에서 싸워야 한다. 벌써 한숨이 픽픽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