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ad Born Blood RAW novel - Chapter (111)
배드 본 블러드-111화(111/197)
111
나는 동이 트기도 전에 일어났다. 오늘은 정오부터 진홍의 황태자 프란세크의 가두행렬이 있었다.
예약해 둔 개인 훈련실로 들어간 나는 신경계를 점검했다. 전투술 기본 동작부터 복잡한 동작까지 차례대로 수행했다.
벽면의 디스플레이를 힐끗 보니 수행 속도와 균형 감각이 최고기록에 근접해 있었다. 컨디션이 훌륭하다.
나는 주먹을 뻗었다. 생체와 기계의 조율을 통해 최적화된 동작이다.
상체를 좌우로 움직이며 연달아 주먹을 내질렀다. 내 의수의 출력이 점차 올라가면서 타격 주머니가 점차 위로 치솟았다.
파- 앙!
이윽고 타격 주머니가 천장에 닿았다가 떨어졌다. 굉음이 벽면에 반사되며 쩌렁쩌렁 퍼졌다.
나는 숨을 고르며 눈을 감았다. 몸에 열이 적당히 올랐다.
이번엔 가상의 적을 가정해 싸울 차례였다. 바보 같아 보여도 효과는 상당하다. 맞닥뜨릴 적의 움직임을 반복적으로 예상해 미리 뇌에 입력해 두는 거니까. 가상 시뮬레이션이 아니더라도 훈련을 해두면 실전에서 더 빠르게 판단하고 행동할 수 있다.
‘적은…….’
눈꺼풀을 게슴츠레 떴다. 빛이 희미하게 내 동공으로 들어왔다.
‘……키누안이냐, 헤일라스냐.’
눈을 전부 떴을 때는 두 사람의 형상이 겹치며 내 앞에 나타났다. 상상치고는 꽤 또렷했다.
‘또 환각인가.’
나는 눈을 깜빡였다.
진가우 소장에게 갔다 온 뒤로 환각은 호전됐다. 특히 헤일라스가 털이 달린 두발짐승처럼 보이지 않았다.
내 머릿속이 좀 망가지는 건 두렵지 않았다. 내가 두려운 건 전투 시에 뇌의 기능 이상으로 전투력이 떨어지는 거였다.
‘전투만 똑바로 할 수 있으면 평시에 환각 좀 보는 건 괜찮아. 그 정돈 감안하고 여기까지 온 거니까.’
하지만 전투 시에 환각을 느끼거나 운동 신경 장애가 생긴다면 곤란하다.
‘키누안, 헤일라스…… 누구든 상관이 없어. 누구라도 날 막아선다면 부수고 가야 한다.’
그 인간들도 마찬가지다. 저들도 내가 방해된다고 판단하면 서슴지 않고 내 목숨을 거둘 것이다.
‘결정해야 할 순간에 망설이면 안 돼.’
일레이가 보여준 결단력을 배워야 한다. 감정을 끊어내고 행동한다. 나도 할 수 있는 일이다.
키릭!
나는 충격권총 루이나를 뽑아서 방아쇠를 당기는 시늉만 했다. 진짜로 쐈다간 근위대 훈련실이라도 벽이 박살 날 테니까.
키이잉!
고압축 중량병기 크루시스는 여전히 테를 뽐내고 있었다. 여러 차례의 실전에도 불구하고 날이 새것처럼 반들거렸다.
휘릭!
난 묵직한 크루시스를 휘둘렀다. 몸이 칼이 딸려 갈 것 같았다.
크루시스를 사용할 땐 흐름을 이어가는 공격을 펼쳐야 했다. 고출력 의체라도 중량병기인 크루시스의 운동 에너지를 거슬렀다간 손목과 팔꿈치가 버티지 못한다.
그래서 크루시스는 다루기 어렵다. 관용적 표현을 하자면, 날뛰는 야생마와 같았다.
난 앞을 보았다. 키누안인지 헤일라스인지 모를 상상의 적은 내 공격을 잘도 피하고 있었다.
우우웅!
가속이 붙으면서 나와 크루시스는 더 빠르게 움직였다. 팽이처럼 돌던 나는 발상 하나를 떠올렸다.
휘릭!
나는 빙글 돌면서 칼을 휘두르다가 바닥을 긁듯 내던졌다. 내 손을 떠난 크루시스가 부메랑처럼 낮게 날아갔다.
상상의 적이 크루시스를 맞더니 흐릿하게 사라졌다.
카드드드드득!
회전하며 날아간 크루시스가 훈련실 벽을 찢어발기더니 천장까지 타고 올라갔다. 내부의 전선과 회로가 훤히 드러나며 전류가 흘렀다.
천장까지 파먹던 크루시스가 철골에 박힌 채로 겨우 멈췄다. 나는 손을 뻗어서 천장에 박힌 크루시스를 잡아당겨 빼냈다.
콰지지직!
천장 너머의 복잡한 부품이 딸려 내려왔다. 나는 뒷걸음질 치다가 머쓱하게 어깨를 으쓱했다.
“……이 정돈 근위대 경비로 처리해 주겠지.”
나는 엉망이 된 훈련실에서 나갔다.
이제 동이 트고 있었다. 태양은 난잡하게 세워진 건물 사이로 빛을 뿌리고 있었다. 나는 일부러 씻지 않고 새벽바람을 맞으며 걸었다.
훈련 이후, 찬바람을 맞으며 식어가는 땀의 느낌이 좋았다. 뭐라 형용하기 힘든 상쾌함이 몰려왔다.
‘머지않아 사라질 감정과 감각이지.’
지금 내가 겪는 이 감정과 감각은 전신의체로는 느끼지 못한다. 오늘의 기억은 다시 경험하지 못할 추억이 되겠지.
‘모순투성이인 세상이다.’
나는 강해지기 위해 팔다리를 기계로 바꿨다. 그러나 다시 인간으로 남기 위해 기계와 싸워야 한다.
키누안도, 헤일라스도, 심지어 이스칸조차…… 생체 육신의 감각과 기억을 소중히 여기고 다양한 경험을 해보라 내게 조언했다.
저벅, 저벅.
나는 서두르지 않고 천천히 몸을 식혔다. 눈이 아릿할지라도 태양을 정면으로 응시하기도 했다.
‘언젠가 나도…… 내가 잃어버린 피와 살을 그리워할까. 아니면 고문 시설의 짐승들처럼 잃어버린 피와 살을 질투하며 살아갈까.’
알 수 없는 노릇이다. 당장은 강해질 수만 있으면 피와 살보다 더한 것도 버릴 수 있을 것 같다.
생각에 잠긴 사이, 부지런히 움직인 내 발은 방문 앞에 멈췄다. 어느새 내 방이다.
치익.
문이 전부 열리기도 전에, 나는 누군가 방에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리고 곧 그가 누군지 알고선 이맛살을 찌푸렸다.
“무슨 일이십니까?”
이반 크라치아가 침대에 걸터앉아 있었다. 그는 다리를 꼰 채로 나를 느슨하게 응시했다.
“인사부터 해야지. 좋은 아침이야, 루카. 프란세크의 경호를 맡았다면서?”
이반이 재밌다는 듯이 말했다.
“근위대의 일원으로 임무를 수행하는 겁니다. 개인 경호는 아닙니다.”
“아니, 분명히 프란세크는 너를 바로 옆에 두고 움직일 거야.”
나도 그렇게 생각하곤 있다. 날 곁에 두지 않을 거면 굳이 부를 이유가 없겠지.
“……아, 그리고 저번의 경고는 감사합니다. 덕분에 살아남을 수 있었습니다.”
난 감사를 표했다. 경고를 듣고 대비하지 않았다면 무장헬기에게 팔다리 한쪽은 날아갔을 것이다. 운이 나쁘면 죽었을 것이고.
“내가 경고하지 않았어도, 너는 잘 해냈을 거야. 그저 네게 빚을 만들고 싶었을 뿐. 넌 빚을 진 상대에게 약하니까.”
“그렇긴 하죠.”
“그나저나 헤일라스도 제법이야. 거기서 카타콤 광산의 이권을 가져갈지 몰랐어. 그래서 핍박하기 더 힘들어졌지. 지금 헤일라스와 군부를 건드렸다간?”
이반이 내 대답을 기다리며 말을 끊었다. 그의 눈이 순수한 소년처럼 반짝였다.
“카타콤 광산의 이권을 상이군인 기금으로 돌린 탓에 헤일라스가 핍박받는 것처럼 보이겠죠.”
이반은 만족했다는 듯이 손뼉을 쳤다.
“하하, 역시 똑똑해. 감시자다워. 지금까지 헤일라스가 교묘하게 덫을 피해 움직이는 게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는 거지. 걸릴 듯하면서도 안 걸렸거든. 설마 딴 주머니를 차고 있었을 줄이야. 휘장을 달고 거들먹거리는 다른 영감들도 그렇고. 제국 경영이 쉽지만은 않아. 조금만 머리가 굵어지면 다들 주인을 물려고 달려드니 말이야.”
나는 복잡한 심경이 들었다.
헤일라스는 충실하기만 한 군인이 아니었다. 군부의 최상층 중 한 명답게 모략과 계략에도 능했다. 숨겨왔던 마각을 드러낸 헤일라스는 순순히 당하지 않을 것이다. 어쩌면 반격을 시작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헤일라스가 버틸수록 쿠스토리아 가문의 멸족 확률은 올라간다.
“전하께선…….”
“이반이라고 불러. 한 번만 더 호칭을 틀리면 나도 화를 낼 거니까.”
“이반, 당신의 생각은 폐하와 다른 것 같습니다.”
나는 과감하게 말했다. 이반은 저번에 넌지시 그런 이야기를 내게 했었다.
‘루카, 난 아버지와 달라. 아버지는 아버지이고, 나는 나니까. 지금의 계획은 아버지의 뜻이지.’
나는 저 발언을 진실이라 믿으며 말을 꺼낸 것이다.
이반이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입술을 움직였다.
“아버지는 늙었어. 모든 황제와 왕이 그렇듯 말년에는 판단력이 흐려지고 유약해지지. 신의 혈통이나 마찬가지인 존엄한 황제도 다르지 않아. 반면, 나는 이제 전성기를 맞이했어. 지금도 내 머릿속엔 무수히 많은 계획이 밑도 끝도 없이 치솟고 있지. 이걸 현실로 옮길 권세와 힘이 필요해. 십 년은커녕 일 년도 기다리기 아깝다고 느낄 정도야.”
이반은 가느다란 손을 뻗더니 허공을 움켜잡았다. 그의 눈동자가 찬란하게 빛나고 있었다. 주변의 빛을 끌어모으는 것 같았다. 그의 주변은 어둡고 동공만이 해와 달처럼 빛나는 듯했다.
……과감하고도 과감하다. 지금까지의 내 발언 따윈 우습게 느껴질 정도였다.
나는 뭐라 말해야 할지 몰랐다. 황족이 아닌 자가 저런 말을 했다간 즉결처형도 부족할 것이다. 일족만이 아니라 알고 지내는 자들조차 모조리 목이 날아갈 터다.
‘아버지를 자신의 손으로 밀어내고, 그 자리를 차지하고자 한다.’
이 야심 찬 소년은 아버지가 깔아준 길을 걸을 생각이 없는 모양이다.
난 침묵으로 답했다. 동조하는 말을 꺼내선 안 된다.
“루카, 이건 감시자 자격을 시험하는 게 아니야. 내 모든 걸 걸고 맹세하지.”
이 말은 진실일 것이다. 내 직관이 그렇다고 말하고 있었다. 그러나 내 입은 여전히 굳게 잠겨있었다.
이반이 한숨을 내뱉더니 일어섰다. 그는 놀랍게도 벽을 타고 걷더니 천장에 거꾸로 섰다. 맨발바닥이 벽에 척척 달라붙었다.
머리카락을 거꾸로 늘어뜨린 이반이 내 위에 걸음을 멈췄다.
“아키에스 도미니, 황제의 감시자…… 그 자격 중 하나를 말해줄게. 감시자는 권위에 짓눌리지 않고, 설사 그 상대가 황제일지라도 다른 의견을 낼 수 있는 자야 하지.”
난 눈을 크게 떴다. 그제야 모든 게 이해가 됐다.
감시자에겐 아키에스 빅티마의 사고방식이 필요했다. 황제의 사고와 판단을 보조할 수 있는 존재인 것이다. 따로 명령이 없더라도 감시자는 황제가 놓친 점을 찾아내고 보완해야 할 것이다.
“우리가 살아가는 인간 세상엔 절대적 진리가 없어. 예나 지금이나 정반합과 충돌이 고차원의 사고와 더 나은 판단을 끌어내지. 하지만 표면상 황제는 신적 존재여야 해. 실수할 수 있는 존재처럼 보이는 건 더더욱 안 되고.”
천장을 걷던 이반이 툭 떨어지더니 내 등 뒤에 섰다. 나는 돌아보지 않았다. 이대로 이반을 봤다간 자진해서 무릎을 꿇고 마음에서 우러나온 충성을 맹세할 것 같았다.
형용하기 힘든 무언가가 이반에게 있었다. 이걸 아우라, 후광, 카리스마 따위로 부르는 거겠지.
“원래 아키에스 빅티마를 익힌 감시자는 자신의 존재를 지우고 황제를 보좌해야 해. 하지만 아버지는 약해졌고, 키누안은 선을 넘었지. 프란세크를 죽인다는 계획은 오래전에 키누안이 세운 것이야. 뇌에 구멍이 숭숭 뚫린 폐인 나부랭이가…… 황족을 죽이자고 건의한 거지.”
이반이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난 모른다. 그의 안광이 내 뒷덜미를 응시한다는 것만 어렴풋이 느껴졌다.
“프란세크 전하를 죽인다는 게 문제인 겁니까?”
내가 침묵을 깨며 물었다. 내 등 뒤의 괴물에게도 혈육의 정이 있는 걸까?
“아니, 계획 자체는 훌륭해. 하지만 그게 키누안의 입에서 나왔고, 아버지가 흔쾌히 받아들인 게 문제지. 그건 정상적인 황제와 감시자의 관계가 아니야. 의견 충돌 끝에 나온 결론이 아니라 교묘하게 키누안이 아버지를 속여 끌어낸 결과야.”
형제애 따위를 기대한 내가 바보 같았다. 역시 그럴 리가 없지.
“네가 아무런 말을 하지 못하는 것도 이해해. 답변할 필요도 없지. 황제와 감시자의 관계란 말 없이 이어지는 법이거든. 들어봐, 루카. 내겐 혼란이 필요해. 그리고 아버지와 키누안의 계획을 망쳐야 하지.”
이반은 프란세크의 가두행렬 직전에 날 찾아왔다. 여기서부터 시작된 내 사고는 알아서 인과를 추론하면서 내 임무와 역할을 찾아내고 있었다.
“……때가 되면 네 역할을 수행해. 넌 그 누구의 것도 아닌 나의 감시자야.”
문이 열리면서 이반의 기척도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