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ad Born Blood RAW novel - Chapter (112)
배드 본 블러드-112화(112/197)
112
나는 제국과 황실의 역사에 대해 잘 모른다. 그러나 나도 진홍의 황태자가 특이한 성품의 황족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제국의 상류 사회는 딱딱하다. 2세기 가까이 살아가는 게 전신의체 귀족이다. 그만큼 살다 보면 감정이 무뎌진다고들 한다.
꼭 그게 아니더라도 감정의 절제는 귀족의 미덕이었다. 그 때문에 엄숙주의가 만연한 사회에선 억눌린 욕망이 고이다 못해 썩어 문드러지고 있었다.
그런 사회 분위기에 정면으로 도전하듯, 진홍의 황태자는 황족인데도 감정을 곧잘 드러냈다. 풍부한 미소와 상쾌한 언변과 미소로 주변 사람을 대했다.
……지금 나에게 하듯이 말이다.
“언제나 근위대원들은 믿음직스럽단 말이지. 그렇지 않나? 루카우스.”
프란세크가 진홍색 옷깃을 가다듬으며 말했다. 나는 생도 신분에도 불구하고 프란세크 곁에 서 있었다.
가두행렬 선두에는 군용 장갑차와 사족보행 차량 같은 지상차량이 있었다. 외곽에는 이륜차가 일정한 간격을 두고 대열을 유지했다.
우우우웅!
출격한 대형 드론 백여 대가 촘촘한 망을 이루며 하늘을 누비고 있었다. 대형 드론은 사람 한 명이 탈 수 있을 것 같은 크기였다.
대형 드론은 가두행렬 주변의 모든 인파를 감시하며 만약의 상황을 대비하고 있었다. 이동식 상황실 차량에선 프란세크 호위를 위해 막대한 양의 정보를 처리하고 있을 것이다.
가두행렬에 참가한 군인은 근위대 오십 명을 포함해 삼백여 명이었다. 안드로이드도 백여 기였다. 그 외에도 유명 가문의 귀족과 고위 관료도 여럿 따라왔다.
‘가두행렬을 통해 자신이 후계자인 걸 공고히 하고 있어.’
황궁 입구에서 출발한 가두행렬은 상층 구역의 순환대로를 따라 움직였다.
순환대로는 상층 구역을 원형으로 크게 두르고 있다. 순환대로에서 뻗어 나간 여러 크고 작은 도로가 상층 구역의 구석구석까지 닿아있었다.
가두행렬의 규모의 크기에 우린 순환대로만 다닐 수 있었다. 시간이 지나자 순환대로의 좌우는 가두행렬을 보러 온 인파로 빼곡했다.
가두행렬은 규모만큼이나 느릿하게 움직였다. 프란세크는 인파를 향해 손을 흔들고 있었다.
우우웅!
행렬 중심의 차량에서 대형 렌즈가 작동했다. 프란세크의 현재 모습을 실시간으로 투영한 홀로그램이 거인처럼 위로 뻗었다.
“와아아아아아아!”
프란세크의 홀로그램이 이목을 끌었다. 함성과 탄성이 튀어나왔다.
“프란세크 님! 사랑해요!”
“진홍의 황태자!”
“절 봐주세요! 저를요!”
몇몇 사람들이 과할 정도로 추잡스럽게 경계선을 넘으려 했다. 군인과 근위대원이 그들을 밀어내듯 제지했다.
쉬이이이.
내 숨결은 호흡 필터를 통해 천천히 바깥으로 빠져나왔다. 난 얼굴을 전부 가리는 헬멧을 쓰고 있었다.
아크바란에는 날 노리는 이가 많다. 가두행렬 중에 대중에게 얼굴을 노출할 필요는 없었다. 혹여나 하층 구역에서 날 알아보는 이가 있으면 곤란하기도 했다.
목청을 가다듬은 프란세크가 연설을 시작했다.
“우린…… 축복과는 거리가 먼 환경에서 제국을 세웠습니다. 대지는 황량하고, 물줄기는 메말랐으며, 자원은 항상 부족했죠. 아크 행성에서든 이곳 노바스에서든 마찬가지였습니다.”
프란세크가 말하면서도 손과 팔을 크게 움직였다. 그 목소리는 널리 퍼진 대형 드론의 스피커를 통해 쩌렁쩌렁 퍼져나갔다.
“모성 지구를 차지했던 벨라토, 그리고 지구만큼이나 풍요로웠던 코르타 행성에서 시작한 코라…….”
프란세크가 눈을 감으며 한쪽 손을 가슴에 올렸다. 그가 뜸을 들이며 말을 이어갔다.
연설의 대부분은 벨라토와 코라가 아크레시아 제국을 핍박했다는 내용이었다. 나도 수없이 들었던 내용이다.
벨라토는 우리를 쫓아낸 지구의 후손이고, 코라는 제2의 지구라 불리는 코르타에 정착한 부유층의 후손이다.
그렇기에 아크레시아 제국은 벨라토와 코라를 미워한다. 우리 제국민은 지구에서 핍박받아 쫓겨난 자의 후손이었다.
제국민의 선조는 생존에 부적합한 아크 행성에 유배됐다. 나아가 경제 식민지의 역할까지 했었다.
“핍박도 모자라 수탈까지 일삼은 자들이…… 이제 와선 우리를 분쟁의 원흉이라 부르며 평화를 파괴하는 전쟁광이라 부르고 있습니다. 우리가 저들과 싸웠던 이유는 단지 살아남기 위해서였을 뿐, 전쟁을 위한 전쟁은 결코 아니었습니다. 자신들의 잘못은 까마득히 잊은 채, 우리를 탓하고 있죠.”
프란세크의 연설은 호소력이 있었다. 동작은 적절했고, 억양의 강약도 좋았다. 좋은 발성 덕분에 울림도 깊었다.
“저 가증스러운 놈들은 우리를 보고 증오만 남은 이들이라 말합니다. 마치 우리가 잘못한 것처럼! 하지만 명백한 가해자는 저들입니다. 그리고 우린 핍박받고 빼앗긴 자의 후손입니다. 복수는 우리의 천부권리이고, 저들은 우리의 증오와 분노를 받아낼 책임이 있습니다!”
프란세크가 주먹을 불끈 쥐었다. 어디서 어디까지가 진실이고, 어디까지가 거짓인 걸까.
진홍의 황태자가 울부짖은 증오는 번져나갔다. 나이가 많은 고위 귀족은 그래도 무표정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아직 반세기도 살지 못한 어린 귀족과 가신, 그리고 하층 출신의 사람들은 증오에 감염되듯 호응했다.
“우와아아아아아!!”
인파의 환호성은 전투를 앞둔 군대처럼 거칠고 사나웠다.
분위기가 달아올랐다. 프란세크는 연설에 재주가 있었다. 무엇보다 고위층답지 않게 감정을 노골적으로 드러내기에 오히려 연설이 깊게 와닿았다.
상층 구역의 가두행렬은 성공적이었다. 치안이 좋았기에 경호도 편안했다. 어딜 둘러봐도 신원이 불확실한 이는 없었다.
이번 가두행렬의 경호 책임자는 이스칸이었다. 그는 프란세크 곁으로 다가오더니 낮게 속삭였다.
“하층 구역으로 가실 생각이십니까?”
“당연한 이야기를 하는군. 요즘의 흉흉한 분위기는 잘 알고 있네. 하지만 그럴수록 피해선 안 되는 법이지.”
프란세크는 제왕학의 표본과도 같은 말을 내뱉었다.
“……알겠습니다.”
이스칸도 설득을 포기하곤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잘 부탁한다는 듯이 내게 눈짓하며 물러났다.
나와 프란세크는 가두행렬 차량 중에서도 가장 크고 높은 차량에 서 있었다. 안전도 안전이지만, 대중들이 프란세크를 잘 볼 수 있게 하는 것도 그만큼 중요했다.
그리고 제국의 황태자가 부하들 사이에 숨어 있다는 느낌을 대중이 받아선 안 된다. 제국의 건설자, 초대 황제 디노 크라치아는 누구보다 앞장서 적과 싸웠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프란세크 곁에는 나만 서 있었다. 다른 근위대원은 차량 아래에서 거리를 둔 채로 경계하고 있었다.
우린 상층 구역의 순환대로를 한 바퀴 돌며 완주했다. 가두행렬은 순환대로와 하층 구역의 중앙도로로 이어지는 관문에서 멈췄고, 휴식 시간이 이어졌다.
나도 숨을 돌리며 관문을 응시했다.
대형 차량이 십여 대가 지나가고도 남을 관문은 검문소 일부만 열려 있었다. 열린 통로에선 화물차량이 오가고 있었다. 여긴 물류 운송을 위한 출입구였다.
관문에서 이어진 중앙도로는 하층 구역을 관통해 아크바란 바깥까지 일직선으로 이어졌다. 그러나 중앙도로는 하층 구역 사람을 위한 길이 아니다. 어디까지나 바깥의 물자를 원활하게 상층 구역까지 운반하기 위한 길이었다. 그렇기에 중앙도로는 공항이나 기차역과 이어져 있었다.
“7번부터 13번 차량은 돌아가서 정비해. 증원은 아직 멀었어? 뭐 하는 거야, 그 머저리들은.”
저 멀리서 장교들이 바삐 움직이고 있었다. 휴식 시간에도 쉴 수 있는 사람은 소수에 불과했다.
장교들은 가두행렬의 규모를 줄이고 있었다. 프란세크의 명령 때문이었다.
“오늘은 평소와 다르게 갈 거네. 여기와 여기, 그리고 여기까지 방문할 예정이지. 길이 좁아질 거야.”
프란세크가 장교와 관리자들 앞에서 홀로그램 지도를 짚었다. 하층 구역에서 사람이 자주 모이는 광장과 일부 거리였다. 사람들의 얼굴에는 난색이 서렸다.
그러나 프란세크의 단호한 말에 따지는 이는 없었다. 경호 책임자인 이스칸 정도는 돼야 그나마 건의를 해볼 수 있을 정도였다. 그마저도 한 번 말해서 안 되면 포기하고 수긍했다. 두 번은 없었다.
프란세크의 권위를 알 만한 광경이었다.
‘무리한 요구도 따를 수밖에 없지.’
대외적으로 프란세크는 확고한 황태자다. 대중에게도 인기가 많았다. 그를 거스를 수 있는 이는 없었다.
장교들과 이야기를 마친 프란세크가 다시 내 쪽으로 돌아왔다. 그는 진홍빛 의복 덕분에 어디서나 눈에 띄었다.
“루카우스, 자네도 하층 구역 출신이지.”
“이레귤러라고도 부르죠.”
“난 자네 같은 사람이 좋아. 그래서 이스칸도 좋아하지. 제국을 지탱하는 건 귀족이 아니라 자네들 같은 이레귤러거든.”
프란세크가 이레귤러를 좋아한다는 말은 사실인 듯했다.
“칭찬이 지나치면 거짓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전하.”
내가 냉소적으로 대답했다. 아마 프란세크는 이런 반응을 더 좋아할 것이다. 그래, 내 예상은 맞았다.
프란세크가 시원스레 웃더니 내 어깨에 손까지 올렸다.
“거짓말이 아니네. 세상에 공정한 기회란 없어. 그리고 삶은 불평등하지. 제국도 마찬가지고. 불온한 말이지만 엄연한 사실이야. 오히려 공정과 평등이 있다고 말한다는 게 기만이지.”
난 순간적으로 일레이가 떠올랐다. 지금 프란세크는 옛날의 일레이와 묘하게 닮아있었다. 발언의 내용이 그러했다.
프란세크는 개의치 않고 말을 이어갔다.
“자네 같은 이레귤러가 송곳처럼 바닥을 뚫고 나타나기에, 제도는 유지되고 사회가 안정될 수 있는 거네. 불공정하고 불공평한 세상이지만…… 가혹한 환경을 뚫고 일어서는 자가 있기에 사람들은 공정하다는 착각을 하고, 자신도 할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지지. 모두가 풍요롭게 살아가는 건 물리적으로 불가능한 일이야. 그러나 모두에게 희망은 줄 수 있네. 그게 통치자의 역할이고.”
헬멧을 쓰고 있는 게 다행이다. 제법 감명받아 눈을 크게 뜨고 말았으니까.
나는 키누안의 말을 떠올렸다. 그리고 내 입은 키누안의 말을 빌렸다.
“사람은 절망이 아니라 희망을 먹고사는 법이죠.”
예전에 키누안이 했던 말이다. 프란세크는 만족한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희망이 있어야 불행을 버틸 수 있거든.”
프란세크는 그림을 그린 듯한 제왕이었다. 이상적이나 허황되진 않았다.
어지러운 세상이다. 질서는 혼란을 품고 있었고, 혼란은 질서를 갖추고 있었다.
무얼 믿고 무얼 증오해야 할지조차 모호하다. 의지란 전기신호와 화학반응이 만들어낸 일시적 현상일 뿐이다. 그렇기에 견고한 의지란 허상에 불과하다.
……그렇다면 나는 무얼 지침으로 삼고 나아가야 하는가.
“오늘은 하층 구역에 깊이 들어가 볼 거네. 좋은 기회일 것 같아서 말이지. 뭐, 사실은 내 동생의 조언을 받은 거야. 위험한 시기에 방문하면 사람들이 더 감명받을 거라 하더군. 동생이라지만 속내가 깊은 녀석인지라 여러모로 도움을 받고 있네. 언젠가 자네도 보게 될 거야.”
나는 머릿속이 찢어지는 듯한 섬광을 느꼈다. 퍼즐 조각이 순식간에 맞아떨어졌다.
‘이반 크라치아.’
프란세크가 말한 동생은 분명히 이반이다. 이반이 프란세크를 하층 구역의 안쪽까지 이끌었다.
하층 구역에서, 혹은 오늘, 어쩌면 내일. 그것도 아니면 근시일 이내에.
나는 알기 싫어도 이반이 내게 맡긴 임무를 깨닫겠지. 아마도 내가 원치 않는 일일 것이다.
“관문을 통과할 준비가 끝났습니다.”
이스칸이 우리에게 다가왔다. 나와 프란세크는 앞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규모가 줄어든 대열은 자로 잰 듯이 정돈되어 있었다.
우우우웅.
관문의 문이 열렸고, 프란세크의 가두행렬은 상층 구역에서 벗어나 하층 구역의 중앙도로로 나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