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ad Born Blood RAW novel - Chapter (115)
배드 본 블러드-115화(115/197)
115
“어이, 다 보인다고.”
내가 일어서며 말했다.
치직, 치직.
어둠이 흐트러지고 있었다. 전류가 간헐적으로 튀더니 위장변색 전투복이 모습을 드러냈다. 밀폐형 전신 전투복이라 얼굴이 드러나진 않았다.
위장변색 전신 전투복을 보니 릭 실바 누네즈가 생각났다. 그러나 내 눈앞의 적은 릭보다 훨씬 체구가 작았다. 나와 엇비슷한 수준이었다.
“너는 암살 대상이 아니로군. 살고 싶다면 비켜.”
놈의 헬멧 안광이 새빨갛게 빛났다. 기계음으로 변조된 목소리라 감정이 느껴지지 않았다. 난 헛웃음이 흘렸다.
“간만이로군. 첫 만남부터 날 이렇게 깔보는 녀석은.”
“깔보는 게 아니지. 난 프로거든. 목표 외엔 죽이지 않으려고 노력하고 있지.”
뒷방의 소리에 귀를 기울여 보니 프란세크와 렌은 한창 뒹구는 중이었다. 내가 적과 마주한 줄은 모르고 있었다.
‘묘하게 이상해.’
뭔가 조각이 맞지 않았다. 그 작은 위화감 때문에 난 적과 이야기하고 있었다.
‘프란세크의 말만 들어보면, 삼류 암살자를 고용한 느낌이었어.’
그러나 눈앞의 암살자는 성격이 좀 이상한 것 같지만 삼류처럼 보이진 않았다.
놈은 비싼 위장변색 전투복을 갖췄으며 걸음걸이의 균형도 몹시 뛰어났다. 가벼운 발끝을 보니 내가 총을 쏘더라도 맞지 않을 것 같았다.
무엇보다 근접하기 전까지 놈이 집안에 들어온 줄 몰랐다. 다른 누구도 아닌 내가 말이다.
전투적 직감은 대개 맞아떨어진다. 틀리는 경우는 잘 없었다. 틀린 상황이 생긴다면 내가 중상을 입거나 사망할 테니까.
“너, 이 벽 너머의 남자가 누군지는 알고 있는 거냐?”
내가 크루시스를 천천히 뽑으며 말했다. 난 의도적으로 ‘사람’이 아니라 ‘남자’라고 지칭했다.
‘프란세크가 준비한 암살자는 렌 이타노리를 죽이기 위해 고용됐다.’
암살자는 남자라는 말에 의아해하지 않았다. 놈은 프란세크가 고용한 암살자가 아니라는 소리다.
“알고 있지. 하지만 난 상관하지 않아. 마지막 기회다, 소년. 비켜. 목격자를 최대한 남겨두라는 요청도 받았으니까.”
암살자가 양손을 허리춤에 대며 쌍검을 뽑았다. 그는 역수로 칼을 쥐더니 자세를 잡았다.
변칙적인 쌍수 무기다. 칼날 중 하나는 팔뚝 길이 정도였고, 다른 하나는 어깨까지 닿을 정도로 길었다. 길이가 각각 달라서 대처가 까다로울 것 같았다.
‘렌 이타노리를 죽이러 온 놈이 아니라면…….’
눈앞에 암살자는 다른 사람의 사주를 받고 여기에 왔다. 아마도 프란세크가 구한 암살자는 뒷골목의 시체가 됐을 터다.
‘이놈은 이반 크라치아가 보낸 거다.’
나는 이반의 사고를 상상해 따라가며 흐름을 파악했다.
‘황제와 키누안의 계획을 망치려면 프란세크를 정해진 시점보다 훨씬 빨리 죽여야 한다.’
그럼 황제와 키누안의 대계가 무너진다. 거대한 혼란이 제국을 덮칠 것이다.
혼란, 혼란, 혼란…….
내 사고는 골인 지점에 도달하고 있었다. 쌍수 암살자가 어디서 왔는지도 알 것 같았다.
‘황족이라는 것도 개의치 않는 언행과 자신감. 그리고 이반 입장에서 더 큰 혼란을 끌어내는 방법은…….’
……저 암살자는 제국에 속한 자가 아니다. 벨라토나 코라의 사람이다.
벨라토나 코라 출신의 사람이 제국의 황태자를 암살한다면…… 바로 전쟁이다. 특히나 대중에게 인기가 많은 프란세크라면 말할 것도 없다.
‘황제와 키누안도, 프란세크를 전쟁의 방아쇠로 쓰려고 했군! 이 미친 영감탱이들이!’
욕이 절로 나왔다. 프란세크는 전쟁을 앞두고 ‘제국의 단합’을 끌어낼 제물이었다. 자국의 황태자가 타국의 사람에게 죽는다면, 제국민은 두말할 것도 없이 일치단결하여 전쟁을 수행할 것이다.
지금 상황은 이반의 안배였다.
‘이반이 모종의 경로를 통해 타국의 암살자를 제국의 심장까지 끌어들였겠지.’
이반의 눈이 날 들여다보는 것 같았다. 그의 불길한 안광이 자꾸만 떠올랐다.
‘이반의 계획대로 일이 진행되도 전쟁이다. 그것도 황제과 키누안의 계획보다도 더 빨리!’
그간의 간헐적인 국지전과 다르다. 국력을 쏟아붓는 전면전이다. 전쟁의 업화가 대륙과 행성을 불사를 것이다.
하지만…… 지금 전쟁이 시작된다면 쿠스토리아 가문은 살아남을 수 있다. 헤일라스의 생존도 보장된다. 전면전을 앞두고 군부의 주요 인사를 숙청할 순 없지.
전쟁 이후에는 어떻게 될지 모르지만 말이다. 하지만 그때는 나도 성장할 것이고, 이반도 황제에 즉위했을 수도 있다.
시간만 벌면 황제와 키누안의 시대는 지나고, 나와 이반의 시대가 온다. 그들은 약해질 것이고, 우린 강해질 거니까.
‘때가 되면 역할을 수행해. 넌 그 누구의 것도 아닌 나의 감시자야.’
이반의 말이 떠올랐다. 때가 되었고, 나는 이반의 뜻을 이해했다. 그가 내게 맡긴 임무도 알았다.
킹.
내 팔이 느슨하게 떨어지면서 칼날의 끝이 바닥에 닿았다.
프란세크가 죽는다면, 나는 경호 실패로 문책을 당할 것이다. 어쩌면 죽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간의 공도 있고 쿠스토리아라는 배경도 있다. 무엇보다 이반이 어떻게든 날 살려내려고 하겠지. 내 판단이 틀렸다면 죽는 거고.
“훌륭한 판단이야. 내 입으로 말하기 뭐하지만, 난 엄청 강해. 이 나라에서는 날 모르지만…….”
암살자는 늘어뜨린 내 팔을 보고선 천천히 다가왔다. 그가 나를 지나치려 했다.
“얼마나 받은 거지?”
내 물음에 암살자가 걸음을 멈췄다. 그가 고개를 옆으로 기울였다. 헬멧 너머에선 얼굴이 웃고 있을 것 같았다.
“나만이 아니라 수많은 사람의 인생이 바뀔 정도는 돼.”
“하지만 전쟁이 일어날 거다.”
난 전투는 알아도 전쟁을 경험한 적은 없다. 그러나 전투 따위로도 수많은 비극이 생겼다. 전쟁이 불러올 재앙의 크기가 어느 정도인지는 안다.
“그건 내 알 바 아니지.”
암살자가 시큰둥하게 대답했다.
“……그렇군.”
내가 대답하며 호흡을 작게 내뱉었다. 시간은 짧으나 사고는 길다. 많은 사람이 내 뇌리를 스쳐갔다.
키잉.
내가 들어 올린 크루시스가 암살자의 앞을 막아섰다.
“역시 널 막아야겠어. 이건 옳지 않아.”
난 결단을 내렸다. 암살자는 삐딱하게 기울인 시선으로 나를 응시했다.
“세상에 옳고 그른 건 없어, 꼬맹아.”
나도 안다, 세상이 옳고 그름으로 설명하기 힘들 정도로 복잡하다는 것 정돈.
“옳고 그름이란 게, 세상에는 없고 너에게도 없겠지만…… 내겐 있어.”
그러니까 무엇이 옳은지는 내가 정한다.
“결국은 아시타비(我是他非)로다. 청춘이구나, 소년아. 하지만 덧없이 짧은, 봄꽃 같은 청춘이, 내 칼 아래에서 저물겠군.”
암살자가 시를 읊듯 중얼거렸다. 그는 가볍게 톡톡 걸으며 뒤로 물러났다.
“입 다물고 덤벼, 병신아.”
내가 히쭉 웃으며 말했다. 거리를 벌린 암살자가 사라지듯 흔들렸다.
캉!
우린 충돌했다.
* * *
나, 루카우스 쿠스토리아는 낯선 암살자와 충돌했다.
결론을 말하자면, 일 분도 되지 않아서 내 왼쪽 의수는 잘린 채로 바닥을 뒹굴었다. 변명할 것도 없었다. 순수하게 실력으로 근접전에서 밀린 탓이었다.
일 분도 되지 않는 시간이었지만 나는 며칠 동안 잠도 자지 않고 싸운 기분이었다. 그만큼 체감 시간은 길었고 피로가 내 머리를 짓눌렀다.
“후우우…….”
싸움을 시작하고 처음으로 호흡을 가다듬을 수 있었다.
자, 주변을 파악하며 지금의 상황을 다시 정리해 보자.
첫 번째로, 싸움터가 된 집 안은 개판이었다. 벽은 조각나고 창문은 부서졌다. 우리가 싸울 때마다 집안의 가구와 벽이 부서지면서 넓은 공터처럼 변했다. 바닥에는 내 월급보다 비싼 물건들이 부서져 있었다.
“도대체, 이게…….”
프란세크의 경악이 내 등 뒤에서 흘렀다. 벽이 일부 부서진 탓에 그 틈으로 우리가 보일 것이다.
프란세크도 지금 같은 상황은 전혀 예측하지 못한 모양이었다. 렌은 진작 비명을 지르다가 혼절했다.
난 여전히 프란세크를 지키며 싸워야 한다. 지원이 오려면 얼마나 걸릴지 모르겠다.
두 번째로 놀란 점은 암살자의 정체였다. 이름과 신원을 알아낸 건 아니다.
‘여자…….’
반쯤 부서진 헬멧 사이로 여자의 얼굴이 보였다. 전투복의 굴곡이 투박해서 남자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여자의 얼굴은 여느 베테랑 전사나 군인처럼 흉터로 빼곡했다.
‘……그리고 저 여자의 육체는 피와 살이다. 팔다리조차 기계가 아니야.’
전투복의 보조가 뛰어난 건지 생물학적 강화가 있는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그녀는 기계로 대체하지 않은 육체로 근접전에서 날 상회했다.
아키에스 빅티마가 없었다면, 난 죽었을 것이다. 저 암살자는 생도 수준을 까마득하게 넘어선 전투력을 가지고 있었다. 상급 근위대원 수준이거나 그 이상이라고 봐도 무방했다.
치직, 치직.
왼팔이 날아간 절단면에선 전류가 튀고 있었다.
다행히 호흡을 고르는 건 나만이 아니었다. 암살자도 고속 전투를 펼쳤기에 호흡이 필요한 건 마찬가지였다.
어쨌거나 우리의 첫 충돌은 내 왼팔의 손실로 끝났다. 호흡을 다 고르고 나면, 나는 불리한 상황에서 싸워야 한다.
“너 이상하게 싸우는군. 제국의 전투술도 아니고…….”
암살자가 안면의 일부가 깨진 헬멧을 내던지며 말했다. 기계음이 사라진 목소리는 카랑카랑했다.
다행인 점이 아직 있었다. 암살자는 아키에스 전투술에 대해 모른다. 내 전투법과 동작 최적화에 위화감을 크게 느끼고 있는지 섣불리 덤벼들지 않았다.
“전하, 솔직히 말해서 제가 질 수도 있습니다. 여기서 시간을 벌 테니 도망가시죠.”
나는 뒤도 보지 않고 말했다.
휘우우우웅.
깨진 유리와 부서진 벽 때문에 고층 특유의 바람이 집안을 휩쓸었다.
‘염병.’
운이 나쁘게도…… 가루가 섞인 먼지 더미가 내 안면을 덮쳐왔다. 나는 오른쪽 의안만 부릅뜨며 반대편 눈을 잠시 감았다.
그리고 상대는 경험이 풍부한 전사였다. 내 시야가 일시적으로 좁아진 틈을 타서 왼쪽으로 달려들었다.
‘빠르고 정확한 판단.’
스스로 강하다고 자부할 만했다.
휘릭!
내 왼편으로 접근한 암살자가 도약하며 회전했다. 내가 왼쪽 눈을 떠서 그 모습을 직접 본 건 아니다. 그림자와 소리만으로 그렇게 판단한 거다.
난 고개를 숙이며 적의 칼날을 피했다. 그리고 발을 끌어 올려서 암살자를 걷어차려 했다.
내 발이 베여도 좋다는 심정이었다. 순수한 실력과 경험에서 밀린다. 인정할 건 인정해야 적의 허를 찌를 수 있다.
그리고 내 강점은 아키에스 빅티마와 팔다리 의체라는 특수성이다. 의체 손실이 있더라도 변수를 끊임없이 만들어서 아키에스 전투술에게 유리한 상황을 창조해야 한다.
‘내 다리를 베어라.’
그러면 내 칼이 너의 몸통을 찢어버릴 테니까. 순결한 내장이 처음으로 바깥세상을 구경하겠지.
지금 내가 날린 발차기는 함정이고, 내 진짜 공격은 빙글 돌면서 가하는 참격이다. 저 여자가 내 참격을 피하려고 뒷걸음질을 친다면, 나는 크루시스를 걸치듯 휘둘러서 부메랑처럼 쓸 생각이었다.
내 이중사고는 단시간에 상대를 외통까지 몰아갈 준비를 마쳤다. 짧은 시간 내에 덫을 이중으로 깔았다.
퉁!
하지만 암살자는 내 예상과 다른 행동을 했다. 그녀는 내 발끝에 걸치듯 부딪히며 충격을 이용했다.
후- 웅!
내 발에 스치듯 맞은 암살자가 외벽까지 날아가고 있었다. 이 거리면 크루시스를 던지더라도 맞지 않을 것이다.
‘이 약아빠진……!’
암살자는 아키에스 빅티마를 익힌 것도 아니다. 얼마나 많은 실전 경험을 쌓았기에 저런 판단을 할 수 있는 걸까. 내 욕설은 감탄이나 다름없었다.
날아간 암살자의 동공이 잠시나마 프란세크를 향했다.
퓻!
암살자의 손에서 빛이 났다. 바늘과도 같은 투척 무기가 프란세크에게 날아갔다.
휙!
프란세크가 렌을 안으며 투척 무기를 피했다. 그도 황실의 일원이며 황태자다. 의체의 성능도 뛰어나고, 기본적인 전투 훈련은 받았을 것이다. 어설픈 공격은 피할 수 있었다.
“쯧.”
외벽까지 날아간 암살자가 혀를 차며 드러난 철골을 붙잡았다. 그는 건물 외벽을 타고 프란세크의 방안으로 진입하려 했다.
카아아앙!
나는 재빨리 크루시스를 내던졌다. 크루시스가 잔해와 벽, 창문 따윌 다 깨부수며 암살자를 향해 날아갔다.
암살자는 팔을 길게 뻗어 다른 골조를 잡으며 크루시스를 피했다. 애초에 이걸로 죽일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저지만 해서 시간만 벌면 된다.
나는 그라켄 부트를 입에 물고선 내달렸다. 그리고 오른팔을 뻗어 벽을 부수며 길을 만들었다.
“어이, 너…….”
내 의도를 알아챈 암살자가 눈을 크게 떴다. 난 그라켄 부트를 입에 문 채로 씨익 웃었다. 칼날에 입가가 조금 찢어졌다.
콰르르륵!
내가 도약하며 발꿈치로 바닥을 찍었다. 고출력에 회전까지 더한 내려치기에 건물 일부가 지진이라도 일어난 듯이 무너졌다.
암살자가 붙잡은 외벽이 무너지면서 바깥으로 떨어지고 있다. 그러나 암살자의 민첩성이면 무너지는 잔해를 타고 여기까지 올라올 것이다.
‘그렇기에, 내가 길동무가 되어주마.’
나는 암살자에게 몸을 내던졌다. 함께 자유낙하를 할 생각이었다.
기잉!
나는 오른팔을 뻗어 예열해 둔 충격권총을 꺼냈다. 암살자를 조준했다.
콰- 앙!
암살자가 총구를 보더니 옆으로 크게 뛰었다. 그녀는 충격권총의 위력을 가늠하지도 못했을 텐데도 피해반경을 넓게 잡아두고 피했다. 역시 노련하다.
하지만 내 충격권총은 발판이 되던 잔해를 날렸다. 이걸로 우리의 발아래를 지지하는 바닥은 없어졌다.
우린 한없이 떨어진다.
휘릭!
난 떨어지면서 공중제비를 돌았다. 그 사이에 신발을 벗어 던지고, 입에 물고 있던 그라켄 부트를 발로 쥐었다. 남은 오른손으론 충격권총의 조준점을 계속 옮겼다. 왼팔이 없으니 이렇게라도 싸워야 한다.
나와 암살자는 매섭게 떨어지고 있다. 세상의 풍경이 거짓말처럼 내려앉고 있다.
‘루이나, 이번에 한 건 제대로 해줘. 내가 크루시스만 좋아하는 게 아니야.’
아니, 사실은 크루시스를 좀 편애하긴 하지.
투-웅! 퉁!
나는 연달아 충격권총을 쐈다. 암살자는 발판도 없는 허공에 이리저리 움직였다. 어떤 원리인지는 몰라도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어떻게든 급변하는 상황까지 이끌었는데도 암살자의 전투력은 여전했다. 그녀는 아키에스 빅티마를 익힌 나처럼 빠르게 변하는 환경과 상황에 적응했다.
“탄창이 비었나 보네?”
쾌속의 바람 속에서 암살자가 중얼거렸다. 그녀는 외벽을 칼로 긁으며 낙하 속도를 떨어뜨리더니 나와 높이를 맞췄다.
사실은 한 발 남았다.
나는 충격권총의 총구를 내리는 척하다가 다시 들어 올렸다. 내 예상대로 가까워졌다. 기회가 왔다.
루이나는 내 전용 무기다. 저 여자가 루이나의 탄창에 몇 발이 들어가는지 알 리가 없지. 탄창 하나 다 비우기 전이기에 쓸 수 있는 속임수다. 우리 수준의 전투에서 탄환 개수를 세는 건 일도 아니니까.
탄환 속이기는 조잡한 임기응변이다. 하지만 상황이 워낙 급변하기에 이것도 훌륭한 속임수가 된다.
상황이 혼란할수록 모든 변수와 상황을 전제하며 싸우기란 힘들다. 이럴 땐 오히려 기초적인 속임수를 무의식적으로 배제하곤 한다.
루이나의 총구와 암살자가 일직선으로 겹쳤다. 난 간절한 마음을 담아 방아쇠를 당기려 했다. 이 공격이 성공하면 앞으로 나는 루이나를 크루시스보다 먼저 손질할 것이다.
우득!
그러나 내 검지가 방아쇠에 들어가기도 전에 부러졌다. 암살자가 발끝을 휘둘러 내 손을 스치듯 지나간 탓이었다. 정교하기 짝이 없는 체술이었다.
“너, 정말 귀엽네. 내 혼잣말을 믿었어?”
암살자가 여유를 내보였다. 기초적인 속임수에 속은 건 나였다.
‘탄창이 비었나 보네?’
……지금 생각해 보니 저 말을 믿은 내가 더럽게 멍청해서 화가 났다.
그리고 지상이 가까워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