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ad Born Blood RAW novel - Chapter (118)
배드 본 블러드-118화(118/197)
118
쿠스토리아 저택은 고요했다. 바깥에서 보자면 사람이 살지 않는 저택처럼 보이기도 했다.
기잉.
나는 공중차량에서 내렸다.
지젤이 하인도 없이 혼자서 비행장에 서 있었다. 일반적으론 가신이나 하인을 몇 명 대동하는 게 보통이었다.
내가 주변을 둘러보자, 지젤이 대답했다.
“다들 바빠서, 혼자 왔어.”
지젤은 말하면서 하늘을 보았다. 내 눈동자도 그녀의 시선을 따라갔다.
하늘은 평소와 다를 바 없이 우중충하다. 아직 폭풍기의 기미는 없었다.
“폭풍 때문에?”
“저택도 준비를 해둬야 하거든. 폭풍이 심할 땐 공중차량도 쓰지 못하니까.”
나는 저택 뒤편의 창고를 응시했다. 그쪽에서 움직임이 많았다. 물자를 비축하는 모양이었다.
“대장님은?”
“슬슬 아버지라고 불러야 하지 않아?”
“아직 입에 익지 않아서.”
나는 지젤 옆으로 다가가며 말했다. 우린 저택까지 가는 길목에 있는 정원을 길게 두르듯 걸었다.
저벅, 저벅.
우리의 걸음은 느릿했다. 그러나 산책은 짧았다.
“저번 가두행렬 사태로 지금 하층 구역은 난리가 났어. 너도 알아둬야 할 것 같아서 말하는 거야. 길다와 가브리엘이…… 내게 하층 구역으로 당분간은 오지 말라고 하더라고.”
지젤이 저택 정문 앞에서 말했다.
‘역시 위험하게 됐군.’
내 신상과 이력이 전부 대중에게 공개됐다. 앞으로 하층 구역에 다니려면 얼굴을 가려야 할 정도였다.
당연히 지젤도 조심해야 한다. 안 그래도 바바라가 신경 쓰였는데 잘됐다 싶기도 했다. 쿠스토리아 저택은 안전하다.
“내 신상이 밝혀진 뒤의 반응은 어때? 가브리엘 쪽 말하는 거야.”
내가 넌지시 물었다.
“가브리엘은 좀 화가 난 것 같고. 길다는 오히려 좋아하는 기색이 있어. 널 왕자님처럼 여기는 경향이 있거든.”
나는 쓰게 웃었다.
“지젤, 가브리엘과 길다의 말대로 너도 하층 구역에 내려가지 마. 시기가 안 좋으니까. 길다는 영리하니까 사업은 알아서 처리하고 있을 거야. 어차피 데이터 정리는 여기서도 할 수 있잖아.”
“하지만…… 아니, 네 말이 맞아. 신중해야지.”
지젤이 여운이 남는 입술로 말했다. 그녀가 손을 뻗어 저택의 문을 열었다.
끼이익.
본가의 저택은 평소와 달리 분주한 기색으로 활기가 있었다. 정말로 폭풍을 준비하느라 바빴다.
쿠스토리아 저택 위치상 바쁠 만했다. 저택은 아크바란의 교외에 있고, 공중차량으로만 오갈 수 있는 지형이다. 폭풍기 동안 쓸 물자를 넉넉하게 비축해 둬야 할 것이다.
“대단한 활약을 했더구나, 루카우스. 자랑스럽기 그지없어. 병문안도 못 간 걸 용서해 주렴. 상황이 여의치 않았거든.”
양어머니 에바가 날 보며 말했다. 그녀는 가문의 하인들에게 지시를 내리고 있었다. 가문의 안주인다운 모습이었다.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나와 그녀는 늘 사무적으로 대화했다. 나도 그녀도 감정적 교류와 유대는 일찌감치 포기했다.
“……해야 할 일을 항상 잊지 말렴. 아버지는 은월관에 계신다. 네가 오면 전해주라고 하더군.”
에바는 뼈가 있는 말을 내뱉었다. 주제를 알라는 소리겠지. 그러나 분함과 질투가 그녀의 언행에서 삐죽 새어 나왔다.
‘은월관.’
쿠스토리아 가문에서 중요한 공간이다. 친아들인 쥬페조차 드나들지 못하는데 나는 수시로 은월관을 방문했다.
마치…… 내가 쿠스토리아 가문의 후계자인 것처럼 느껴진다.
“그럼 저녁 식사 때 뵙겠습니다.”
내가 에바와 떨어지듯 물러나며 말했다. 그리고 지젤에게 눈짓으로 인사하며 거리를 벌렸다.
나는 하인이 오가는 복도를 지나가며 저택의 뒷문으로 향했다.
“아, 도련님. 오랜만입니다.”
“대단한 공을 세우셨더군요.”
하인과 가신이 나를 보자마자 고개를 숙이며 인사했다. 나는 의례적으로 답하며 걸음을 서둘렀다.
이젠 눈 감고도 길을 찾을 정도로 저택이 익숙했다. 처음에는 마냥 어렵고 넓던 저택이었다.
‘누가 뭐래도, 나를 여기까지 끌어 준 건 헤일라스지.’
그 은혜는 크다. 난 키누안을 죽일 각오는 얼마든지 할 수 있다. 하지만 헤일라스만큼은 쉽지 않다.
“루카, 잠시 이야기하지.”
날 부르는 목소리가 사납다. 목소리의 주인공은 쥬페였다.
뒷문에는 쥬페가 팔짱을 끼고 벽에 기대 서 있었다. 꼴을 보니 날 기다리고 있었던 것 같았다.
“지금은 힘듭니다. ‘아버지’와 선약이 있어서요.”
쥬페가 처음에는 얼굴을 잔뜩 찡그렸다. 그러나 그는 적개심을 풀 듯 팔을 내리며 차분히 말했다.
“내가 불편하고 짜증 나겠지만 시간을 내다오.”
이 정도로 간곡히 말하니 나도 무시하기 어려웠다.
“은월관까지 가는 동안이면야 이야기할 수 있죠.”
“그거면 충분해.”
쥬페가 고개를 끄덕이며 뒷문을 열었다. 그리곤 내 편의를 봐주듯 문을 연 채로 내가 지나가길 기다렸다.
……그간의 적대적 태도와는 달랐다. 쥬페의 심경에 어떤 변화가 있는 듯했다.
그래서 나도 발을 빨리 움직이지 않았다. 우린 저택 뒤편에서 은월관까지 이어진 길을 걸었다.
“나도 군인이다, 루카.”
“알고 있습니다.”
“뭔가 심상치 않아. 요즘 분위기가 이상해. 내가 느낄 정도니, 너도 뭔가를 알고 있으리라 생각한다.”
쥬페는 결코 수재가 아니다. 그러나 바보도 아니었다. 그는 어디에나 있는 평범한 사내다. 가지지 못한 걸 질투하고 시기하지만, 때론 현실과 타협도 하는 그런 인간.
눈이 제대로 달려 있다면, 멀리서 오는 먹구름만 봐도 흐린 날씨를 예상할 수 있는 법이다. 거기엔 대단한 통찰력이 필요한 것도 아니었다.
지금의 제국과 군부가 그러하다. 먹구름이 끼고 있다.
군에 몸을 담은 쥬페도 뭐라 형용하기 힘든 불안을 느끼는 듯했다. 그리고 헤일라스는 제대로 된 설명을 해주지 않았겠지.
“폭풍이 오고 있죠.”
난 짧게 답했다.
“……넌 아버지와 친하고 지젤과도 관계가 좋지. 그러니 양자인 네게도 쿠스토리아 가문에 대한 애착이 있을 거라 믿어.”
나는 걸음을 멈췄다. 쥬페도 같이 섰다.
“이제는 여기가 제 집입니다. 싫으나 좋으나 형님도 가족이라고 생각하고 있고요.”
낯 뜨거운 말이지만 확실하게 말할 필요가 있다. 정말 그렇게 생각하니까. 난 쥬페가 싫어도 죽길 바라진 않는다. 에바도 마찬가지고.
“나도 널 싫어하지만 쿠스토리아 가문의 사람이라고 여기고 있다. 가문의 위기가 닥치면 난 기꺼이 너와 협력할 거야. 너도 그럴 거라 생각한다.”
쥬페가 팔을 뻗어 악수를 청했다. 일종의 휴전 요청이었다.
나는 기꺼이 쥬페의 손을 잡았다. 눈을 마주친 쥬페는 고개를 나직이 끄덕이며 손을 뗐다.
‘가족.’
싫고 좋고가 중요한 게 아니었다. 우린 같은 집단 내에 속한 사람이다. 외부의 적이 나타나면 평소의 관계가 어떻든 협력해야 한다.
“아버지가 기다리시겠군. 가봐라.”
쥬페가 날 배웅하고 떠나듯 왔던 길을 되돌아갔다.
나는 쥬페를 뒤로 하고 은월관으로 향했다. 은월관의 낡은 정문은 날 기다리듯 반쯤 열려 있었다.
똑.
난 문을 가볍게 두드리며 안으로 들어갔다.
“루카우스 쿠스토리아입니다.”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이 보였다. 그 아래에는 헤일라스가 서 있었다.
“아, 늦지 않아 다행이로군. 올라가면서 설명하겠네.”
뭐가 늦지 않았다 하는지 모르겠다. 헤일라스는 그 말만 하고선 안내하듯 계단을 올랐다. 그가 2층 복도에 들어서더니 말을 이어갔다.
“원로 중 한 분이 자네를 기다리고 있어.”
“저를 말입니까?”
“누군지는 알겠나?”
스치는 인물이 있었다. 내 양자 입적 때, 은월관에선 두 명은 반대했고 넷은 침묵했으며 한 명만 찬성했다.
“제 입양에 유일한 찬성표를 던지신 분이겠군요.”
오래전의 기억이 떠올랐다. 살갑게 내 뺨을 만지던 원로였다.
‘아이야, 부디 오래 살아남거라. 그러려면 혼돈에 휩쓸리는 게 아니라 삼켜야 한다. 목구멍이 갈기갈기 찢기더라도 말이야.’
그 원로가 내게 했던 말이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는 뭔가 알고 있었던 것 같았다. 단순히 하층 출신 양자의 삶을 뜻하는 게 아니었다.
“그분의 수명이 다해가네. 타계가 얼마 남지 않으셨어. 의지력으로 버티고 있는 거지.”
나는 마음 한구석으로 안도했다.
헤일라스가 날 은월관으로 부른 이유는 내 예상과 달랐다. 솔직히 나는 심문을 당할 준비까지 했었다.
“막연하게…… 전신의체 귀족은 불로불사일 거라 생각했습니다. 수명이 다해 죽는다는 걸 알면서도 실감하지 못했죠.”
전신의체라도 늙어 죽는다. 머리로는 알고 있어도 지금까진 와닿지 않았다.
“루카, 나도 원로에 대해선 아는 게 많이 없네. 나조차도 그분들에겐 한참 어린아이에 불과하니까. 하지만 한 가지는 분명하지. 쿠스토리아 가문은 현자들의 고언 덕분에 버틸 수 있었네. 언제나 저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게.”
“하지만 선택은 우리의 몫이죠. 책임도요.”
헤일라스의 입가에서 주름이 깊어졌다. 내 대답이 만족스러운 듯했다.
2층 복도 끝에는 고풍스러운 문이 있었다. 세월에 찌든 목재 냄새가 났다.
끼이익.
나와 헤일라스는 방으로 들어갔다.
향의 연기가 자욱했다. 그 너머로 검은 베일을 쓴 원로들이 서 있었다. 시커먼 로브는 그림자조차 덮듯이 바닥에 끌렸다. 유령이 눈에 보인다면 저런 모습이 아닐까 싶다.
‘원로는 일곱 명.’
그러나 서 있는 건 여섯 명이었다. 그들은 숙연하게 침대 곁을 지키고 있었다.
죽음을 앞둔 한 명의 원로가 침대에 누워있었다. 의체의 생명 유지를 보조하는 튜브와 케이블이 주렁주렁 침대 옆으로 삐져나왔다.
“때마침 잘 왔소, 가주님. 그리고 루카우스 쿠스토리아.”
목소리가 사방에서 울려서 여섯 명 중에서 누가 말하는지 모르겠다.
“가보게.”
헤일라스가 내 등을 떠밀며 고개를 까닥였다. 내가 다가가자 원로들은 자리를 내어주듯 물러났다.
쉬익, 쉬익.
침대에는 날 찾은 원로가 힘겹게 숨을 쉬고 있었다. 뇌가 보내는 각종 신호가 약해졌기에 인체를 본뜬 전신의체가 스스로 기능하지 못하고 있었다.
“절 부르셨다 들었습니다, 원로님.”
내가 그 침대 옆에 앉으며 말했다. 베일 너머의 눈동자가 나를 보고 있었다. 흐릿하던 안광에 빛이 돌아왔다.
“……손을.”
침대의 원로가 말했다. 난 원로의 손을 잡았다. 전신의체인데도 약해진 게 느껴졌다.
스르륵.
다른 원로들은 뒤로 물러나는 정도가 아니라 하나둘씩 자리를 뜨고 있었다. 헤일라스조차 방에서 나갔다.
어느새 방에는 나와 죽어가는 원로만 남았다.
‘도대체, 왜? 나와 독대하려고 하는 거지?’
아키에스 빅티마의 직관으로도 짚이는 바가 없었다.
지금의 상황이 너무나 이상했다. 그래서 처음에는 쿠스토리아 가문이 날 죽이려는 함정이라도 설치했는가 싶었다. 하지만 그럴 거면 이렇게 번거롭게 굴 이유가 없었다.
“원로님, 제게 어떤 비밀이 있는 겁니까? 유전적으로나…….”
내 사고가 도달한 결론은 하나였다. 예전에도 의심한 적이 있었다. 내가 어떤 목적을 위해 설계된 인간이 아닐까 하는 생각.
그러나 원로는 다 죽어가면서도 어깨를 들썩이며 웃었다. 숨소리가 탁했다.
“아이야, 그 걱정은 접어두어도 좋아. 인간의 재현과 통제는 별을 지배하는 위정자와 신의 영역을 침범한 과학자들조차 실패했지. 들어보렴, 번개가 신의 창이며 화산의 분화가 신의 노여움이라 여길 때부터 무신론을 상식으로 여기며 행성 사이를 오가는 시대까지, 변함없는 사실이 있단다.”
원로의 말이 애틋했다. 어조가 평이한데도 노래하는 듯하다.
“듣고 있습니다.”
“늘 그렇듯, 우리 인간은 인력으로 극복하지 못할 불가항력에 부딪힐 때마다 우주라는 혼돈에 기대며 기도해야 했단다. 필연적으로 운명을 믿게 되지. 루카, 너는 운명이라는 걸 믿고 있느냐?”
나는 입술을 달싹이며 망설이다가 말을 내뱉었다.
“운명은 비과학적이죠. 하지만…… 종종 그 존재를 인지할 때가 있습니다.”
운명이라는 단어 말곤 설명이 힘든 순간들이 있다. 반세기도 살지 못한 나도 안다. 나보다 몇 배를 살았을 사람이라면 더더욱 운명이란 단어를 가깝게 느끼겠지.
“인위적 재현은 불가능해. 유전적으로 같더라도 다른 결말을 맞이하지. 인력이 기적을 만든다는 건 무지의 오만이야. 하지만 이 우주는 다르단다. 혼돈으로 엮어낸 필연이 겹치면 운명이 되고, 그 운명은 거짓말처럼 과거를 재현하고 말지. 그렇기에 나는 윤회라는 걸 믿는다, 아이야. 그게 나약한 의식을 빚어낸 착각일지라도 괜찮아.”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시간이 지나면 알게 될 거야. 마지막으로 널 만날 수 있어서 다행이구나. 더 많은 이야기를 하고 싶지만, 그건 내 만족으로 끝내는 게 좋겠지.”
가슴이 찌릿했다. 운명 따위를 느끼는 게 아니다. 이 자의 감정이 내게 닿는 것 같았다. 죽음조차 지연할 정도의 강렬한 감정이다.
“제가 할 수 있는 게 있으면 하겠습니다.”
난 능력이 닿는다면 그의 부탁을 들어주고 싶었다.
“운명을 곁에 두되, 떠밀리진 마라, 루카우스 쿠스토리아. 내 바람은 이것뿐이니.”
나는 가만히 원로를 응시하다가 손을 뻗었다. 손가락으로 베일을 들어 올렸다. 나도 모르게 한 행동이었다.
원로의 삭막한 안면이 보였다. 인간의 형상이 아니라 인공 피부조차 없는 기계의 안면이다. 쿠스토리아 가문의 원로는 자신의 존재조차 지우며 살아가고 있었다.
그러나 난 그의 이름을 알 것 같아 눈을 감았다.
아키에스 빅티마를 이해하는 듯한 인과적 운명론, 최초의 반란, 노엘 뮬리즈카, 그와 동시대에 쿠스토리아 가문의 인물.
사건과 연도의 조각이 서로 맞물린다. 나는 조각이 어긋날 때마다 판을 엎으며 지식의 모양이 들어맞을 때까지 사고를 처음부터 반복했다.
내 코에서 피가 흘러내렸다. 나는 손등으로 피를 닦으며 눈을 떴다.
……완벽하진 않아도 그럴싸한 그림이 내 머릿속에서 완성됐다. 단 한 명의 이름이 내 혓바닥에 맴돌았고, 나는 조심스레 그 이름을 내뱉었다.
“당신의 이름은 아가타, 아가타 쿠스토리아입니까?”
쿠스토리아 가문의 시작이 된 여자, 시조 아가타 쿠스토리아.
내 말에 ‘그녀’의 안광이 커졌다. 아마도, 눈물을 흘릴 수 있는 기능이 그녀의 의체에 있었다면 흘렀을 것이다.
“아키에스 빅티마로 인한 고속다각 추론의 결과겠지만…… 나는 당신이 날 알아본 거라고 믿고 싶네, ‘노엘’.”
아가타 쿠스토리아는 운명과 윤회를 믿고 싶어 하는 여자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