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ad Born Blood RAW novel - Chapter (119)
배드 본 블러드-119화(119/197)
119
향로의 연기가 나와 아가타를 감싸듯 피어오르며 흐느적거렸다.
‘아가타 쿠스토리아.’
그 이름을 내뱉은 나조차도 믿기 힘들었다.
침대에 누워있는 원로의 정체는 아가타 쿠스토리아다. 이백 년도 지난 과거의 존재였다. 아무리 전신의체 귀족이라도 2세기 넘게 사는 경우는 드물었다. 대충 계산해 봐도 아가타는 3세기 가깝게 장수한 셈이다.
‘아가타는 나를 노엘이라 불렀어. 내가 노엘의 환생일 거라고 믿고 있다.’
윤회와 환생은 말도 안 되는 소리다. 죽으면 모든 게 증발한다. 의식은 전기와 화학 작용의 현상일 뿐이다.
아가타는 미신적인 개념을 믿고 싶은 것이다. 그녀의 나약한 의식이 빚어낸 착각이다. 무엇보다 아가타 본인도 나약해졌기에 자신이 미신을 믿는 거라 말했다.
‘그러나 나는 아가타의 호의를 이용해야 한다.’
나는 눈을 게슴츠레 뜨며 아가타의 손을 감싸듯 쥐었다.
“노엘이라면, 노엘 뮬리즈카를 말하는 겁니까?”
“……뮬리즈카는 뒤늦게 붙은 이름이지. 노엘은 그저 노엘이란다. 난 뮬리즈카라는 이름을 좋아하지 않아.”
혼란스럽다. 생각을 정리하는 것도 벅찼다. 그러나 시간이 많지 않았다. 아가타는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았다.
‘아가타는 어디서 어디까지 아는 거지? 그리고…… 다른 원로와 헤일라스는?’
아가타는 내가 황제의 감시자인 줄 알고 있는 걸까? 그리고 노엘 뮬리즈카도…… 황제의 감시자였던 걸까?
오랜 의문이 내 의식 위로 떠올랐다.
‘노엘 뮬리즈카가 일으킨 최초의 반란.’
내가 들여다본 제국의 깊이라면, 제국이 노엘을 이용해 반란을 유도했어도 이상하지 않았다. 반란의 불꽃이 더 커지기 전에 미리 정리한 셈이다.
‘반란의 주동자 역할을 맡은 노엘은 키누안처럼 황제의 감시자였을 것이고.’
그렇게 생각하면 모든 게 맞아떨어진다, 아키에스 빅티마가 감시자의 조건인 이유도. 그러니 감시자의 이명이 아키에스 도미니인 것이다.
“그렇게 생각에 잠긴 모습을 보니 정말로 노엘과 똑같구나.”
“유전적 연관성이 없다면, 닮진 않았을 겁니다.”
“외모를 말하는 게 아니야. 네 영혼을 말하는 거지.”
어처구니가 없는 소리다. 길거리의 부랑자가 저런 말을 한다면 무시했을 것이다.
“영혼의 존재를 믿진 않지만, 있더라도 볼 수 있는 게 아니죠.”
그녀의 탁한 웃음이 이어졌다. 잡음이 섞인 기계음이 났다.
“내면과 외면을 따로 나눌 필요가 없지. 우리의 영혼은 안에 있는 게 아니라 바깥에 있단다. 영혼의 형태는 내면의 사고가 아니라 외면으로 표출된 행동으로 정해져.”
“저를 지금까지 지켜보고 있으셨습니까?”
내 말이 날카로운 건 착각이 아니다.
내가 품은 비밀들은 날 지켜주는 방패다. 그러나 새어 나가는 순간부터는 내 심장을 찌르는 칼이 된다.
아가타가 내 비밀을 알고 있다면 나는 지금 몹시도 위험한 상태다. 헤일라스가 문 뒤에서 무장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난 내 자손이 번영하길 원해. 하지만 그렇다고 당신을 두 번 배신하고 싶진 않아. 이걸로 네 의문과 두려움에 대한 답이 됐길 바란단다.”
아가타의 말은 기이했다. 그녀는 나와 노엘을 겹쳐서 보고 있었다. 나는 입술을 달싹였다.
“저도 쿠스토리아 가문을 지키고 싶습니다. 지금 제가 알아야 할 게 있다면 알려 주셔야 합니다.”
침묵이 일었다. 아가타의 금속 얼굴에서는 안광이 꺼질 듯이 점멸했다. 난 이대로 그녀의 의식이 사라질까 봐 두려웠다.
여기서 난 선택을 해야 한다. 그녀에게 답을 얻어내려면 나도 비밀의 일부를 내주어야 할 것이다.
“……황제가 쿠스토리아 가문을 무너뜨리려 합니다. 제겐 당신의 고언이 필요합니다. 피는 섞이지 않았으나 쿠스토리아의 이름을 받은 후손으로서 부탁드립니다.”
아가타의 안광이 커졌다. 그녀가 힘겹게 떨면서 상체를 일으켰다.
“황제가 쿠스토리아 가문을 축출하려는 건 대단한 비밀도 아니지. 너는 내게 도움을 청하기 전에 자신이 황제의 감시자라는 것부터 밝혀야 했어. 너도 자신의 비밀을 숨기면서…… 내게 도움만 청하는구나, 노엘처럼!”
그녀는 전부 알고 있었다.
아가타의 입에서 처음으로 증오가 엿보였다. 난 가슴이 철렁거렸다. 심장이 뛰는 걸 걷잡을 수 없었다.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르는 것 같다.
내 선택은 방금 틀렸다. 그녀의 마음 밑바닥에 가라앉아 있던 증오를 일으켜 세웠다.
‘노엘을 향한 감정은 애증.’
노엘과 아가타 사이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내가 알 순 없다. 간단하게 설명되는 관계도 아니었을 것이다.
“헤일라스도…… 감시자의 존재를 알고 있습니까?”
난 이 사실부터 확인해야 한다.
아가타는 내 말을 듣더니 한 손으로 자신의 안면을 짚었다. 마치 우는 것 같았다. 울고 싶어도 울지 못하는 기계 신체다.
“난 두 번 배신하고 싶지 않다고 이미 말했다, 아이야. 더는 날 비참하게 만들지 마라.”
“중립을 지키셨군요.”
아가타의 마음을 짓밟더라도 어쩔 수 없다. 그녀의 감정보다 중요한 일이 내 앞에 수두룩하다.
자칫하면 문밖을 나가자마자 헤일라스와 싸워야 할 수도 있다. 내가 가정한 상황 중에서 최악이었다.
“노엘, 당신은 결국 같은 일을 되풀이하네. 대의를 좇다가 모든 걸 잃어버리겠지.”
아가타의 안광이 흐려지다가 짙어지길 반복했다. 그녀가 지금 제정신인지조차 의문이었다.
으득.
나는 이를 갈았다. 사납게 눈을 치켜뜨며 아가타를 노려봤다.
“제가 더 나은 선택을 하려면 과거를 알아야 합니다. 노엘이 무엇을 실수했는지도요. 회한의 탄식을 내뱉고 싶다면 얼마든지 하셔도 됩니다만 혼자 하시죠. 저는 여기서 일어서겠습니다. 당신은 곧 죽을 사람입니다. 그러나 저는 내일도 그다음 날도 살아가야 하죠. 뜬구름 같은 망자의 넋두리에 시간을 낭비하기 싫습니다.”
내가 일어섰다. 그리고 서서히 의체에 전투 신호를 보냈다. 감각을 일깨우며 확장했다. 뇌는 충분히 뜨거웠기에 집중력이 금방 최고조까지 이르렀다.
스륵.
나는 안주머니에 손을 넣어서 루이나의 예열을 시작하려 했다.
여기서 아가타가 헤일라스를 호출한다면…… 난 저 문을 향해 루이나를 쏠 것이다.
‘최악의 적과 맞닥뜨린다는 것에 절망할 건 없다, 루카.’
인생에 좋은 건 드물다. 대개 최악과 차악만 있지. 오늘은 운이 더 나빴기에 최악이 나타난 것뿐.
“아이야, 진정하거라. 헤일라스는 감시자의 존재를 모른다, 다른 원로들도.”
내 등 뒤에서 아가타가 말했다. 그녀의 목소리가 한결 차분했다. 감정이 느껴지지 않았다.
“왜 알리지 않았습니까? 쿠스토리아 가문의 생존에 중요한 정보일 텐데요.”
“알게 되면 죽으니까. 능력이 뛰어나고 예리한 게 생존에 항상 유리한 것만은 아니야. 때론 무능하고 둔감한 게 훨씬 유리할 때가 있지. 헤일라스는 옛날부터 감이 좋은 아이였거든. 단서를 준다면 알아선 안 될 걸 알아내겠지. 지금도 자력으로 황실의 음모를 알아채고 준비하고 있어. 그 아이가 죽는다면 우수하기에 죽는 거야.”
모순된 것처럼 들리나 사실이다.
황실은 헤일라스가 우수하기에 견제한다. 뛰어난 헤일라스는 그 음모를 알아챈다. 그렇기에 갈등이 생긴다. 갈등의 결과로 내전이 일어날 수 있기에 황실은 헤일라스를 축출하려고 견제한다.
원인과 결과가 맞물리며 순환한다.
황실의 판단은 틀리지 않았다. 헤일라스는 잠재적 위험이다. 그의 견실한 충성심조차 결국은 인간의 의지에 불과하다. 의지와 마음은 물리적 현상이고, 현상은 변인에 영향을 받는다.
기계는 변하지 않으나 인간은 변한다. 그리고 헤일라스도 나도 인간이다.
“저라면 알렸을 겁니다. 헤일라스는 제가 아는 사람 중에서 가장 우수한 군인입니다. 그 역량이 가늠되지 않을 정도로요. 어떻게든 방책을 짜냈을 겁니다.”
“너는 모른다, 루카. 쿠스토리아가 무슨 짓을 하더라도 황실을 이기지 못해. 쿠스토리아가 더 대비할수록 제국은 내전으로 인해 더 취약해질 거고, 제국이 외적에게 약점을 드러낸다는 결과만 남고 말지.
난 그래서 헤일라스의 가주 임명을 반대했단다. 그러나 기어코 그 아이는 자신의 힘으로 가주 자리를 쟁취했어. 그게 자신의 운명이라는 듯이 말이야. 그래, 막을 수 없기에 운명이지.”
또 운명을 언급한다. 난 이제부터 그 단어가 싫어질 것 같았다.
“운명을 인정하고 남는 게 패배와 체념이라면, 저는 운명을 인정하고 싶지 않군요.”
내 말을 들은 아가타는 기계음으로 웃었다. 묘하게 섬뜩하다.
“노엘과 똑같은 말을 하는구나, 아이야. 그러면 가서 노엘의 선택을 보고 배워라. 미래를 보고 있기에 차악을 고를 수밖에 없었던 절망과 고뇌를 말이다.”
아가타는 기력이 남아있었다는 듯이 침상에서 일어섰다. 그녀가 몸에 붙이고 있던 케이블과 튜브가 툭툭 떨어졌다.
그녀는 배회하는 유령처럼 내 등 뒤에 섰다. 차가운 손이 내 목을 감더니 가슴까지 내려왔다.
“당신이 노엘이라면, 더 나은 선택을 위해 돌아온 거라 믿어야겠지.”
“저는 노엘이 아닙니다.”
“오래전, 코라, 아니 코르타에서 온 신비한 방랑자가 내게 말했어. 캄캄한 세월을 버티고 나면, 그리운 이를 다시 보게 될 거라고. 난 그 말만 믿으며 지금까지 버텨온 거야…….”
바닥이 비친 아가타의 안광이 붉었다.
“……그러니까 너는 노엘이어야 해.”
엇나간 믿음의 광신이로다. 그녀는 자신이 보고 싶은 걸 보고, 믿고 싶은 걸 믿는다.
화조차 나지 않았다. 한때는 그 누구보다 강인했을 여인이 이리도 약해진 게 안타까울 뿐이었다.
난 눈을 감았다가 떴다. 아가타는 당장이라도 쓰러질 듯이 휘청거렸다.
끼이익.
난 넘어지는 아가타를 감싸며 안았다. 뒤로 돌아선 나는 그녀를 침대에 눕혔다.
“우리에겐 시간이 없습니다, 아가타. 제 존재가 당신에게 위안이 됐다면, 당신도 제게 도움이 돼야 합니다. 그래야 공정하죠.”
아마 노엘도 나와 같은 상황에서 이렇게 말했으리라.
아가타가 금속 입술을 뻥긋거렸다. 나는 귀를 가까이 댔다. 그녀는 오랜 비밀을 내게 속삭였다.
“……감사합니다.”
나는 상체를 들며 고개를 까닥였다. 아가타의 손은 미련이라도 남은 듯이 내 목을 감으려다가 가라앉았다.
아가타는 오늘을 넘기지 못할 것이다. 지금까지 버틴 것도 초인적인 정신력이었다. 그녀는 망가졌고, 버틸 이유조차 방금 잃었다.
“잘 가, 노엘.”
아가타가 중얼거렸다. 기계 얼굴 너머에는 노파가 아닌 소녀가 있었다.
그녀는 오랫동안 밤마다 울었을 것이다. 그렇기에 더는 눈물을 흘리지 않기 위해, 슬픔을 표현하는 기능을 의체에서 제거했으리라.
“좋은 꿈을 꾸시길.”
나는 머리를 숙여 그녀의 이마에 입을 맞췄다.
* * *
끼익.
내가 문을 열고 나왔다.
복도를 지나서 2층 난간에 도착했다. 아래를 보니 헤일라스와 원로들이 1층에 서 있었다. 도청이나 엿듣기는 없었을 것이다.
원로 중 일부는 지금 죽어가는 자가 가문의 시조인 걸 알 것이다. 쿠스토리아 가문의 성향으로 보면 그들은 아가타에게 절대적인 존경을 표하고 있을 것이고, 그 권위를 의심하는 짓을 하지 않을 터다.
내가 원로들과 처음 만났을 때도 아가타의 존재감과 발언권이 가장 컸다.
‘가장 오래된 원로가 죽기 전에 날 찾았다.’
나는 가주도 아니고 혈통을 이은 후계자도 아니다. 그런 나를 죽기 전에 찾는 게 이상할 만하다.
‘이제 저들은 나를 어떻게 생각할 것인가?’
나는 계단을 내려오며 원로와 헤일라스를 응시했다. 그들도 날 봤다.
스르륵.
원로들은 내 곁을 지나가더니 아가타에게 돌아갔다. 그들은 아가타의 최후를 지켜볼 것이다.
터벅, 터벅.
나는 계단을 내려갔다. 헤일라스가 나를 기다리다가 말했다.
“무슨 이야기를 했지?”
“제가 첫사랑과 닮았다고 하더군요.”
“흠, 그분이 여자일 거라곤 예상했지.”
우리의 대화는 그게 끝이었다.
헤일라스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게 한없이 나를 불안케 했다.
하지만 속으면 안 된다. 이건 헤일라스의 특기다. 짐짓 아는 척하며 넘겨짚어 상대의 반응으로부터 진실을 끌어내는 것.
‘헤일라스는 모른다.’
아가타를 믿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