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ad Born Blood RAW novel - Chapter (12)
배드 본 블러드-12화(12/197)
012
투기장 관리자 알레프는 날렵하게 생긴 사내였다. 그는 너덜너덜하게 갈라진 가죽 의자에 앉은 채로 담배를 뻐끔뻐끔 피워대고 있었다. 그의 등 뒤에는 총기로 무장한 갱이 두 명 서 있었다.
알레프는 턱짓으로 나와 키누안을 맞이했다.
“이 녀석을 경기에 내보내게. 대전료는 받지 않을 거고, 싸우다가 죽어도 괜찮아.”
키누안은 다짜고짜 용무를 꺼냈다. 알레프는 눈썹을 치켜세우더니 손가락을 튕겨 담배꽁초를 키누안에게 날렸다.
휙!
나는 손을 뻗어 담배꽁초를 쳐냈다.
“뭔가 착각하는 것 같은데…… 우린 댁의 부탁을 들어주려고 안으로 들여보낸 게 아니야. 시체를 치우기가 편한 곳으로 부른 거지.”
알레프가 어깨를 들썩이며 웃었다. 뒤의 갱들도 따라 웃으며 방아쇠에 손가락을 걸었다.
“……전임은 어디 간 거지? 토라 말이야.”
토라라는 이름이 나오자 알레프가 움찔했다.
“죽었어. 승부 조작하던 게 들켰거든.”
두 사람이 대화하는 동안, 나는 분위기를 살폈다. 알레프의 말은 일종의 허세다. 우리를 죽일 거라면 진작 공격했을 것이다. 그는 대화와 거래에 응할 생각이 있다.
나는 귀를 기울여 주변의 인기척을 파악했다.
‘문밖에도 무장한 갱이 두 명 있어.’
나는 일이 틀어질 경우를 대비했다. 팔로 머리와 심장을 가리며 전진하면 방안의 갱들을 어찌어찌 제압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총알을 몇 방 맞겠지만 당장 죽진 않을 터다.
‘그다음은…….’
소동이 벌어지면 문밖의 두 명도 들어올 것이다. 그땐 쓰러뜨린 갱의 총으로 반격하면 된다.
흠, 문이 열리기 전에 한 발을 먼저 쏴보고 조준점 오차를 확인해 두는 게 좋겠지. 아무리 나라도 남의 총으로 첫 발부터 머리를 맞힐 자신은 없었다. 일레이라면 가능할지도 모르겠다.
‘약한 몸뚱이는 번거롭군.’
내 원래 의족과 의수라면 생채기 하나 없이 저들을 제압할 자신이 있었다.
의미 없는 상상을 잠깐 해보자면, 처음에는 단단한 철제 책상을 발로 걷어차서 갱들을 날리면서 시야를 가린다. 그리고 내 주먹으로 철제 책상을 관통해 갱의 머리까지 같이 깨부순다. 바깥에 대기하던 갱들은 뒤늦게 문을 열고 들어올 터다. 그때쯤 나는 총을 쥔 채로 벽과 천장을 박차며 문틀 위에 붙어있을 것이다.
‘탕, 탕.’
정수리에 총구를 대고 두 발 쏘면 끝. 근접사격이니 조준점 보정을 할 필요도 없다.
내가 망상하는 사이에, 키누안이 이야기를 계속했다.
“토라는 승부 조작 같은 걸 할 사람이 아니네.”
키누안의 말에 알레프가 인상을 찌푸렸다. 그러나 폭력을 쓰진 않았다.
알레프는 키누안을 선뜻 함부로 대하진 못했다. 위험한 사람이라는 분위기가 키누안의 언행에서 풀풀 풍겼다. 산전수전 다 겪은 자의 아우라가 있었다.
“이봐, 미주알고주알 옛날 사람의 일을 지껄이고 싶다면 길 건너편으로 가지 그래? 거기엔 별 시답잖은 말도 들어주는 여자가 잔뜩 있어. 크레딧만 낸다면 말이지.”
알레프의 경고에도 키누안은 하고 싶은 말을 내뱉었다.
“투기장은 이윤이 많이 남는 사업이지. 자네가 토라를 죽이고 차지했나 보군. 탓할 생각은 없네. 토라도 전임을 죽이고 그 자리에 올라선 거니까. 그게 이 거리와 바닥의 생리지.”
“너 누구야? 뒈지고 싶어? 누가 누굴 죽였다는 거야?”
알레프가 벌떡 일어섰다. 그 뒤의 갱들도 총구를 겨누었다.
“앉게나, 알레프. 자네들도 총을 내리고. 토라의 곁으로 가고 싶지 않다면 말이야. 난 경고를 두 번 하지 않네.”
나는 무표정하게 키누안의 곁에 서 있었다.
솔직히 심정으로는…… 알레프가 키누안을 공격했으면 좋겠다. 나는 키누안이 약한 의체를 가지고 이 상황을 어떻게 타개할 것인지 몹시 궁금했다. 그는 나처럼 총알을 맞는 계획 따윈 세우지 않을 것이다.
“젠장…….”
알레프가 손바닥을 들어서 부하를 제지했다. 그는 자리에 앉았다.
알레프는 뒷골목에서 나름의 지위를 차지할 정도로 역량이 있는 사내였다. 위험을 감지하는 직감 정돈 있을 터다. 그는 키누안을 건드리면 안 될 거라고 본능적으로 판단했다.
‘현명하군.’
알레프는 방금 목숨을 건졌다.
“이 녀석을 투기장 선수로 내보내겠다고? 진심이야?”
알레프가 나를 훑어보며 말했다. 그의 동공이 희미하게 빛나는 게 보였다. 내 팔다리를 분석하고 있겠지.
“이 소년이 죽더라도 책임은 묻지 않겠네. 약속하지.”
내 목숨을 멋대로 걸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아무런 불만을 내뱉지 못했다. 가르침을 청한 건 나다. 뭐, 그게 아니더라도 교관인 키누안에겐 내 생사여탈권이 있었다.
“죽고 사는 게 문제가 아니잖아. 엉터리 경기를 할 순 없다고. 팔다리부터 전투용이 아니잖아. 몸뚱이는 아직 물렁물렁 살덩이고. 시작하면 1초 만에 곤죽이 돼서 날아갈걸. 관객이 납득하겠어?”
음음, 합리적 추론이다. 저 말에 내가 고개를 끄덕이고 싶었다. 조금씩 저 사내가 좋아질 것 같았다.
암시장의 투기장엔 수명을 담보로 불법 개조를 해댄 멍청이들이 득실거릴 터다. 부작용 따윈 신경도 쓰지 않고 오늘내일만 사는 놈들이다. 하지만 그 대가로 힘을 얻긴 하겠지. 정말로 오늘이 내 장례식 날이 될 수도 있다.
“장담하는데…… 나는 자네 장사를 하루 만에 접게 할 수도 있지. 시험해 봐도 좋아. 방아쇠를 당겨도 괜찮고. 지금 내가 부탁을 하는 것 같나?”
키누안이 배짱을 부렸다. 연륜이 철철 흘러넘치는 협박과 명령이다. 내가 저 말을 똑같이 해봐야 총알이 바로 날아올 것이다.
‘키누안의 언행은 처음부터 전부 계산된 거야.’
키누안은 전임 관리자에 대한 이야기를 먼저 꺼냈었다. 그 때문에 알레프는 중후한 분위기의 키누안이 거물일 거라 생각했다.
‘물론 거물이 맞지. 네 상상을 뛰어넘는 거물.’
암시장의 존재를 제국이 모를 리가 없다. 언제든 들이닥쳐서 쓸어버릴 수 있다. 어디까지나 제국의 묵인하에 운영되는 곳이다.
알레프의 손발에 미세한 떨림이 있었다. 동공의 초점도 흐릿했다. 그는 불안해하고 있었다. 그리고 자신의 모든 정보원을 동원해 키누안의 정체를 알아내는 중일 것이다.
헛된 짓이다. 뒷골목의 정보망에 근위대원의 정보가 있을 리가 없을 테니까.
‘키누안에겐 배울 게 많아.’
나는 키누안의 모습도 같이 살폈다. 그는 무력을 동원하지 않고도 상대를 짓누르고 현장을 지배했다. 내겐 저런 언변이 없었다.
“하아, 그 소년과 수준이 맞는 적당한 상대와 붙여 줄게. 그럼 된 거지? 대신에 내게도 뭔가 떨어지는 게 있어야지.”
알레프가 협상의 물꼬를 텄다. 키누안은 기다렸다는 듯이 당근을 내밀었다.
“난 토라의 금고가 어디에 보관되어 있는지 알고 있네. 아마 그쪽이 열쇠가 되는 토라의 안구를 가지고 있겠지?”
알레프는 말문을 잇지 못했다. 그의 동공이 흥분으로 커졌다.
“정말로 당신의 정체가 궁금해지는군. 어디까지 알고 있는 거야, 도대체…….”
“몰라도 되는 과거의 망령이지.”
키누안이 흐릿하게 웃었다. 토라의 금고 이야기가 나오자 알레프는 자세를 고쳤다. 시건방진 태도는 온데간데없었다.
“일단 금고에 대한 정보가 맞는지 확인해도 되겠습니까? 선생님.”
바뀐 태도는 아주 공손했다. 나는 필사적으로 웃음을 참았다.
키누안과 알레프는 속삭이듯 이야기했다. 확인 절차가 끝나자 알레프는 양손으로 키누안의 손을 맞잡았다.
“뭐든 말씀하십쇼. 아, 경기를 보실 거면 VIP석이 있는데 좋은 술과 여자라도…….”
알레프의 아부에 키누안이 손을 저었다.
“술이면 충분하네. 그리고 이 녀석의 상대는 사정 봐줄 필요가 없으니 잘나가는 놈으로 붙여.”
이야기는 일사천리로 끝났다.
“두 시간 뒤다. 몸을 풀어둬.”
투기장 대기실에 도착하자마자 키누안이 말했다. 그는 대기실 구석에 달린 카메라를 비틀어서 떼냈다. 알레프의 살가운 태도를 봐선 사소한 기물파손 정도는 개의치 않아 할 터다.
“토라가 누굽니까?”
“내 옛 친구지.”
“그럼 알레프가 교관님의 친구를 죽인 상대군요.”
“죽을 만했으니 죽은 거야. 투기장 갱단의 우두머리 역할을 했으니 업보도 그만치 쌓이지.”
키누안은 담담하게 말했다. 추측하건대 꽤 친밀한 사이였을 터다. 나라면 속사정이야 어쨌든 알레프를 때려죽였을 것이다.
“토라의 금고라는 게 뭐길래 알레프의 태도가 그렇게 바뀐 겁니까?”
“은닉 자산이야. 반응을 보아하니 지금까지도 찾고 있었던 것 같더군.”
나는 아깝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그냥 그 자리에서 쥐어패고 토라의 눈을 뺏지 그랬습니까? 저라면 그랬을 겁니다.”
“싸움을 벌였다면 나는 몰라도 자네는 총에 맞았겠지.”
차마 부정할 수가 없었다.
“만약 전투가 벌어지는 상황이었다면 어떻게 하실 생각이셨습니까?”
나는 참았던 질문을 내뱉었다.
“그게 궁금했던 모양이로군. 이기고 오면 가르쳐주지.”
키누안이 대기실 한쪽의 화면을 가리켰다. 수십 년은 넘은 고물 디스플레이가 지직거리면서 색 바랜 화면을 띄우고 있었다.
‘철권의 가브리엘.’
양팔이 은색으로 빛나는 우락부락한 투사가 화면에 보였다. 키는 나보다 머리 두 개만큼 더 컸다.
가브리엘의 프로필도 같이 떠올랐다. 키는 2미터 30센치미터고, 몸무게는 300킬로그램이 넘었다. 코는 몇 번이고 부러졌는지 지그재그로 삐뚤어져 있었다. 두드러지는 입술은 찢어지고 낫길 반복하다 보니 기형적으로 두툼했다. 눈도 특이했는데 제조사가 양쪽 모두 달라 크기와 색깔이 다른 짝눈이었다.
참으로 흉측하게 생긴 녀석이었다.
“호오, 여자한테 인기가 많게 생겼군.”
키누안이 웃으며 말했다. 저 말은 비꼬는 게 아니라 진담이다. 저 말이 무슨 의미인지 나는 안다. 나도 하층 구역 출신이니까.
이 동네에서 여자한테 인기가 많은 남자란…… 돈은 잘 벌고 빨리 뒈지는 새끼를 뜻한다.
* * *
“지금 말하는 지침을 기억하게, 루카. 아키에스 전투술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니까.”
경기장에 나서기 전에 키누안이 말했다.
“지침 말입니까?”
나는 경기장으로 나아가는 복도에 우뚝 서서 키누안의 말을 기다렸다.
“……주어진 것에 순응할 것.”
나는 저도 모르게 눈살을 찌푸렸다. 순응은 내가 싫어하는 말이다.
“순응은 패배라 배웠습니다.”
“물은 패배하지 않지, 형태를 바꿀 뿐. 자네에겐 잠재력이 있어. 탄도 예측기도 없이 총알을 튕겨낼 때부터 눈여겨보고 있었지. 스스로 날 찾아왔을 때, 내심 상당히 놀랐네. 적절한 재능을 가진 자가 무언가에 이끌리듯 찾아왔으니까 말이야.”
“갑자기 칭찬하시는군요.”
“어쩌면 이게 자네의 마지막 모습일 수도 있으니까.”
키누안은 살벌하게 말하며 미소를 지었다.
나도 대답 대신에 소리 내어 웃었다. 하층 구역에 온 까닭인지 몰라도 마음이 평소보다 열린 느낌이었다. 아마도 키누안도 마찬가지겠지.
오늘이 지나면 키누안과 좀 더 친해질 수 있을 것 같았다. 그의 말대로 살아남는다면 말이다.
저벅, 저벅.
경기장이 가까워진다. 스피커를 통해 알레프의 목소리가 쩌렁쩌렁 퍼지고 있었다.
-첫 출전으로 감히 철권의 가브리엘에게 도전한다! 소년은 다윗이 될 수 있을 것인가! 아직 동정도 떼지 못한 풋내기, 그 이름은…… 굿, 굿보이!
굿보이라니, 분명히 방금 지어낸 거다.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경기장으로 들어섰다.
“우우우우우! 뭔 병신 같은 새끼가 나왔어?”
“자살하고 싶어서 나온 거냐! 등신아!”
“이게 뭐야? 지금 이걸 경기라고 표를 판 거야?”
대체로 불평불만이 그득했다. 그러나 그 사이로 추악한 욕망의 환희가 희미하게 내 귀로 흘러들어 왔다.
“이야, 좋은 구경 하겠네.”
“오늘은 그건가 본데? 살육쇼. 얼마 만에 보는 거야. 알레프가 이런 걸 할 줄 알았던가?”
타인의 피와 내장을 보고 싶어 하는 인간의 어두운 욕망. 그런 기대가 내 등을 떠밀고 있었다. 내 팔다리가 찢기고 가슴과 배가 뭉개지는 꼴을 어지간히도 보고 싶은 모양이다. 아랫도리까지 움켜잡으며 흥분하는 새끼도 보였다.
나쁘지 않다. 오히려 좋다. 이제야 고향에 돌아온 느낌이다.
나는 미소를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