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ad Born Blood RAW novel - Chapter (120)
배드 본 블러드-120화(120/197)
120
은월관 방문이 끝났다. 헤일라스는 저녁 식사까지 휴식하라며 나를 방으로 보냈다.
‘루카, 자세한 이야기는 나중에 하도록 하지.’
나는 헤일라스의 마지막 말을 떠올렸다.
개인 시간이 생긴 나는 방에 홀로 앉아서 그라켄 부트를 반복적으로 돌렸다.
휘릭, 휘릭.
그라켄 부트가 내 손아귀에서 회전하며 얄팍한 소리를 냈다.
아가타의 언행이 내 머릿속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아가타 쿠스토리아.’
나는 아가타의 말이 전부 진실이라 가정했다. 뇌의 노화로 죽음을 앞둔 여자다. 정교한 거짓말을 할 정도로 머리가 돌아가진 않을 것이다.
‘그리고 세월로 응축된 그 감정들…… 거짓일 수가 없다.’
살면서 그토록 짙은 색의 감정을 느껴본 적이 없었다. 곁에만 있어도 물드는 것 같았다. 저주와도 같은 한이 서슬 퍼렇게 맺혀 있었다.
키릭.
나는 회전하는 날을 손가락으로 짚으며 멈춰 세웠다.
‘노엘 뮬리즈카, 아가타 쿠스토리아.’
아마도 아가타는 노엘을 좋아했을 것이다. 그리고 마음을 배신당했겠지. 그래서 아가타는 노엘을 배신했다. 그게 노엘의 파멸과 이어졌을 확률이 높다.
‘그리고 노엘을 처분한 공로로 얻은 부귀영화가 쿠스토리아 가문의 시작이겠지.’
어디까지나 추측이다. 과거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좀 더 정확하게 알아야 한다. 그러나 예전에도 조사했을 때 느꼈지만, 그 시절의 상세한 기록은 거의 남지 않았다.
삐걱!
난 그라켄 부트로 나무 탁자를 찍었다. 칼날이 손가락 한 마디만큼 박히면서 탁자가 좌우로 흔들렸다.
‘정리하자, 루카.’
첫째로, 나는 누군가의 클론이 아니며 유전적으로 개량된 인간도 아니다. 적어도 아가타의 말에 따르면 그렇다. 어디까지나 난 내 힘으로 여기까지 올라온 인간이다.
이 사실에서 내가 얻은 안도는 제법 컸다. 내 자긍심이 무너지진 않았으니까. 뭐, 나쁘게 말하면, 난 밑바닥의 인간을 멸시할 자격이 있다.
‘두 번째…….’
아가타 쿠스토리아와 노엘 뮬리즈카는 깊은 관계였다.
정황상, 아가타는 노엘을 배신하고 반란을 진압한 공을 인정받아 귀족이 됐다. 그 반란조차 제국의 음모였을 가능성이 높다.
‘노엘이 나와 닮았다면…… 타인에게 상처를 줄 만한 언행을 많이 했겠지. 아가타가 배신감을 느끼고도 남을 거야.’
나도 내가 지랄맞은 새끼인 건 알고 있다. 그렇다면 노엘도 마찬가지다. 굳이 사서 적을 만드는 병신이라는 소리지.
그리고 당장 내게 중요한 건 세 번째 사실이다.
‘아가타는 내 감시자 직위를 알고도 헤일라스와 원로들에게 말하지 않았다.’
순전히 노엘에 대한 부채 의식 때문이었다. 그녀는 나와 노엘을 동일시했기에 내게 해가 될 만한 행동을 하지 않은 것이다.
……나약하구나, 아가타. 나 때문에 자신의 자손들이 죽을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정보를 숨기다니.
어쨌거나 내겐 좋은 일이다.
‘아가타도 처음에는 강철 같은 의지로 쿠스토리아 가문을 번영으로 이끌었겠지. 노쇠하면서 정신력이 약해지고 판단력도 흐려진 것뿐.’
쿠스토리아의 시조가 윤회 따위를 믿으며 죽은 연인과의 재회를 기다리고 있을 줄이야.
“하하…….”
아가타의 선택과 판단을 비웃어주고 싶었지만, 허탈할 정도로 쓴웃음만 나왔다.
‘하지만 헤일라스는 숨긴다고 아예 모를 사람이 아니다. 도대체 어디까지 아는지 가늠이 되지 않아.’
나는 그저 내가 할 수 있는 준비를 할 뿐이다.
창밖을 보니 해가 저물고 있었다. 난 의자에 앉은 채로 눈을 감으며 짧은 잠을 잤다.
저벅, 저벅.
삼십여 분이 지났고, 바깥에서 하인의 발소리가 났다.
하인이 문을 두드리며 저녁 식사를 알렸다. 나는 다소 맑아진 머리로 눈을 떴다. 방을 나서니 쿠스토리아 가문의 사람들이 하나둘씩 식당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폭풍기를 앞두고 있기에 저택에는 사람이 평소보다 많았다. 식탁의 자리도 여유가 없어 말단은 참석하지도 못했다. 나와 사촌 이내인 가까운 친족만도 삼십 명이 넘었다.
헤일라스는 식사를 앞두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34년 만에 폭풍기가 오고 있군요. 언제나 그랬듯이 각자 맡은 일에 충실하다면 아무런 일없이 지나갈 겁니다. 그리고…….”
그는 말을 끝마치지 못했다.
데엥, 뎅, 뎅.
장엄한 종소리에 유리창이 떨렸다. 은월관에서 시작된 소리였다.
원로의 죽음을 알리는 종이었다.
척.
사람들은 일제히 눈을 감고 고개를 숙이며 조의를 표했다.
‘아가타 쿠스토리아가 죽었다.’
이 식탁에 앉은 사람 중에서 시조가 여태 살아있었다는 걸 감히 누가 알고 있을까.
아가타는 전신의체 귀족의 수명으로도 한계를 넘어선 삶을 살았다. 자신의 자손이 태어나고 죽는 걸 수없이 보았을 것이다. 군인 가문이니 이른 나이에 죽는 이도 많았을 거고.
원로의 죽음은 평이하게 지나갔다. 짧은 묵념이 전부였다. 가문원들도 원로의 존재만 알 뿐이지 얼굴도 보지 못한 자가 대다수다.
헤일라스는 가장 마지막에 눈을 떴다.
“……그럼 이야기를 계속하겠습니다. 제 아들, 루카우스 쿠스토리아는 지금까지 많은 공을 세웠습니다. 이번엔 프란세크 전하까지 암살 위험으로부터 구했습니다. 그냥 넘어갈 공적이 아닙니다. 어린 나이에도 자신의 능력을 입증한 셈이죠.”
사람들의 시선이 내게 모였다. 충분히 이목을 잡아끈 헤일라스가 말을 이어갔다.
“제가 사망하거나 재기불능에 빠지면, 다음 가주가 정식으로 선출되기 전까지는 루카우스가 가주 대행을 맡을 겁니다. 이는 원로와 상의가 끝난…….”
식당 전체가 들썩이는 듯했다. 가주의 말을 자르는 사람도 있었다. 권위가 중요한 집안에서 보기 드문 일이었다.
의자를 밀치듯 자리에서 일어선 자가 다섯 명이고, 식탁을 경솔히 내리친 자가 두 명이다. 앉아있는 사람들도 당혹스러운 감정을 숨기지 못하고 있었다.
그리고 어안이 벙벙한 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당신, 내겐 상의도 없이…….”
가장 반발하는 사람은 양어머니 에바였다.
헤일라스는 에바의 말을 무시하며 앞만 보았다. 그는 반발을 누르듯 눈을 빛냈다.
“이건 독단이 아니라 현 가주의 정당한 권한입니다. 그리고 어디까지나 가주 대행이지, 차기 가주는 아니죠. 다음 가주는 가문의 전통대로 선출로 나올 겁니다.”
헤일라스가 권위로 찍어 누르려 해도 소요는 쉽게 진정되지 않았다. 가벼이 넘길 발언이 아니다.
‘쿠스토리아의 가주직은 선출제라지만, 현 가주의 대행 지정이 영향을 미치지 않을 수는 없어. 그래서 직계 자식 중에서 항상 가주가 나왔지.’
헤일라스는 강력한 권위를 가진 가주다. 그런 그의 대행 지정은 사실상 후계자를 지목한 셈이었다.
‘헤일라스는…… 도대체 무슨 생각인 거지?’
내 안의 혼란은 한없이 커졌다. 그의 의도를 도저히 읽을 수가 없었다.
가주 대행에 대해선 지금까지 내게 언질조차 하지 않았다.
오늘 나와 휴전을 맺은 쥬페조차 인상을 잔뜩 찌푸리고 있었다. 그도 표정 관리를 전혀 하지 못했다.
헤일라스는 나이가 더 많은 친아들이 있는데도 양자인 나를 선택했다. 쥬페의 남은 권위조차 폭삭 무너지는 순간이었다. 오늘이 지나면 쥬페의 지지세력은 반 토막 날 것이다.
음식이 빠르게 나왔다. 헤일라스가 눈짓으로 하인을 독촉한 덕분이었다. 그나마 혼란이 잦아들고 있었다.
친족들은 식사는 하는 둥 마는 둥 했다. 그들은 서로의 귓가에 뭐라 속삭이며 떠들고 있었다.
달그락.
나도 기계적으로 식기를 움직였다. 음식의 맛도 제대로 느끼지 못했다. 난 사람들의 반응을 살피느라 정신이 없었다.
“지난 폭풍기에는 치안의 공백을 틈타 폭도 무리가 귀족 거주지까지 밀고 들어온 적이 있습니다.”
“그래서 당분간은 본가에 체류를…….”
“분위기도 영 이상하니 말이죠.”
치안과 안전이 폭풍기를 앞두고 저택에 모인 이유 중 하나였다. 쿠스토리아 저택은 한적한 교외인지라 폭도 같은 불온한 무리로부터 안전했다. 허가받지 않은 자는 수백 미터 바깥에서부터 벌집이 될 것이다.
“어째서 가주께서는 양자를…….”
“그만해. 내가 보기에는 자격이 있어.”
말다툼도 군데군데 있었다. 모두가 내 가주 대행을 반대하진 않았다. 특히나 백부 아르투르 쿠스토리아 같은 이들은 반기는 기색이었다.
‘아르투르 쿠스토리아.’
잊을 만하면 눈에 띄는 사내였다. 헤일라스의 형이지만, 가주직을 빼앗기다시피 했다. 그의 자그마한 야망은 나와 자신의 딸을 혼인시키는 일이었다.
“가주 대행이 필요한 상황은 집안의 큰 우환이 있을 때지. 해결사가 필요한 순간이라는 이야기야. 더군다나 루카우스는 헤일라스 밑에서 일 처리하는 법을 잘 배웠지 않는가? 문제 될 게 없어!”
아르투르가 남들 들으라는 듯이 크게 말했다. 그는 나를 향해 미소를 내보이며 눈을 찡긋했다. 그 옆엔 그의 딸이 수줍게 앉아있었다. 존재감이 워낙 없어서 이름도 바로 기억나지 않았다.
가문 내에서 아르투르의 영향력은 대단하진 않지만 없지도 않았다. 헤일라스가 그래도 형제 대접은 해주기 때문이었다.
……불편한 저녁 식사가 어떻게든 끝났다.
나는 서재로 들어간 헤일라스를 곧장 찾아갔다. 나만 그런 게 아니었다. 에바와 쥬페도 함께 헤일라스의 서재 앞에 서 있었다. 난간 아래를 보니 다른 친족들도 헤일라스를 찾아갈 기회만 노리고 있었다.
“내가 먼저야, 루카. 협력 약속은 잊지 않았으니 걱정하지 마라.”
쥬페가 문 앞에서 말했다. 그도 극심한 불쾌함을 겨우 억누르며 온화한 말을 내뱉고 있었다.
먼저 온 사람이니 내가 양보해야겠지.
난 그리 생각하며 뒤로 두 걸음 물러났다. 그러나 세상만사가 어디 내 생각대로 된 적이 있던가.
“루카와 먼저 이야기할 게 있네. 나머진 내가 부르면 들어오도록.”
문을 열고 나온 헤일라스가 말했다. 쥬페도 더는 참지 못하고 소리를 질렀다.
“아버지! 이건 아니죠. 너무하신 처사입니다!”
쥬페의 울분은 터트렸다. 그는 헤일라스를 향해 감정을 쏟아냈다.
“……쥬페, 어른답게 굴어라. 니콜라오스라면 이러지 않았을 거다.”
헤일라스는 아들의 감정을 감정으로 회답하지 않았다. 대신, 서늘할 정도로 침착하게 타일렀다.
헤일라스가 턱짓으로 나를 부르며 안으로 들어갔다.
저벅, 저벅.
나는 할 수 없이 앞으로 걸었다. 난 쥬페와 에바를 향해 짧게 머리를 숙여 사과를 표했다.
아버지에게 소통을 거부당한 아들의 심정을 난 모른다. 그러나 지금만큼은 쥬페를 동정한다.
끼익, 쿵.
서재의 문이 닫혔다. 고요한 서재에는 헤일라스가 서 있었다.
“한 가지는 확실히 알겠습니다. 대장님은 좋은 아버지가 되길 포기하셨군요.”
내가 건조하게 말했다.
“자네나 나나 다 아는 사실을 새삼스레 말하는군. 가주의 책임과 의무에는 좋은 아버지가 들어갈 틈이 없네.”
헤일라스가 먼저 자리에 앉았다. 나는 앉지 않고 서서 그를 보았다.
“절 가주 대행으로 삼으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뭐라고 생각하나?”
그는 질문을 질문으로 답했다. 가장 짜증 나는 화법 중 하나다. 상대가 헤일라스만 아니었다면 멱살을 잡고 내던졌을 것이다.
“처음에는 저를 곤란하게 만들려고 그러시는 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주변의 시기와 질투 따윈 제게 아무것도 아니죠. 절 지지하는 이도 생각보다 많았고요.”
“흠, 특히 형님이 자넬 정말 좋아하더군. 오늘도 안나를 꽃단장시켜 왔지.”
헤일라스가 탁자에 놓인 술병을 따며 웃었다. 안나는 아르투르의 딸이다.
“……전 백부님 쪽엔 관심이 없습니다. 어쨌거나 절 가주 대행으로 삼으신 이유를 모르겠습니다. 짚이는 바도 없고요.”
“내게도 큰 도박이네. 그러니 자네도 모를 수밖에 없지.”
헤일라스는 잔에 술을 따르더니 단번에 털어 넣었다. 그는 찬장에서 잔을 하나 더 꺼내더니 술을 두 잔 따랐다.
‘도박?’
무슨 도박이란 말인가.
내 사고는 더 미궁으로 빠졌다. 답이 나오지 않았다. 이마만 뜨거워지고 있었다. 한번 시작된 아키에스 빅티마의 사고는 의식적으로 멈추기 힘들다. 기계처럼 단추 하나를 눌러서 꺼버릴 수도 없다.
머리가 뜨거워진다. 이미 내 뇌는 아가타와 만나면서 무리를 한 상태였다.
삐이이이.
내 귀에서 이명이 퍼졌다. 헤일라스의 모습이 다시 검은 짐승처럼 보일 것 같았다. 빌어먹을 환각이 도지고 있군.
“오늘 타계하신 원로께서는…… 내게 자네를 믿어보라고 하더군. 나도 그 말의 의미가 무엇인지 몰라. 그러니까 그 말의 의미가 무엇인지 함께 알아가세나.”
헤일라스가 술잔을 하나 들더니 내게 뻗었다. 나는 머뭇거리다가 잔을 잡았다.
헤일라스는 뭔가 알고 있다. 그러나 내게 깊이 묻지도 않았다. 도대체 이 괴물은 무슨 생각을 품고 있단 말인가.
내가 그에게 약속할 수 있는 건 하나다.
“……때가 되면, 제 모든 걸 걸고 쿠스토리아 가문을 지키겠습니다.”
“그거면 충분하네.”
헤일라스가 자신의 잔을 들어 뻗었다. 잔이 부딪치며 카랑한 소리가 났다.
……역시 술은 맛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