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ad Born Blood RAW novel - Chapter (121)
배드 본 블러드-121화(121/197)
121
서재에서 나는 헤일라스에게 현재 근위대의 상황에 대해 들었다.
“자네도 알겠지만, 군부는 현재 황실과 몇 가지 갈등을 빚고 있네. 카타콤 광산의 이권을 군부가 가져온 것도 그 때문이지.”
헤일라스에서 입으로 불충한 발언이 나왔다. 지금 그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이념과 사상이 아니라 현실의 정치였다.
‘군부와 근위대가 황실과 갈등을 빚고 있다.’
하층민은 이런 갈등이 있으리라 상상도 못 할 것이다. 나도 얼마 전까지는 그랬다. 제국의 모든 기관이 황제 아래에서 충성으로 단합되어 있으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불온한 사실을 말하자면, 황제도 모든 걸 통제하지 못한다. 그의 손이 닿지 않는 영역이 제국엔 있었다.
‘애초에 제도적으로 완벽하게 통제 가능했다면…… 감시자와 첩자 따윈 쓰지도 않았겠지.’
제도와 체제만으로 완벽한 통치가 불가능하다. 그래서 황실조차 편법을 쓸 수밖에 없는 것이다.
제국은 완벽하지 않다. 삐걱거리면서도 어떻게든 굴러가고 있을 뿐이다.
“근위대는 황제 폐하의 직속부대입니다. 군부 직할이 아니죠. 우리가 편들어야 할 대상은 군부가 아닌 황실이 아닙니까?”
내가 따갑게 말했다. 가식이 아니라 진심도 섞여 있었다.
“원칙적으론 그렇지. 근위대 설립 초창기에는 자네의 말이 맞아. 철저하게 황제 폐하께 충성하고 복종하는 조직으로 굴러갔었지. 나아가 오히려 근위대가 군부를 견제하는 역할을 했네.”
“원칙적이라면 지금은 아니라는 뜻입니까?”
헤일라스도 신중히 대답하려는 듯이 오랫동안 침묵했다. 지금부터 내뱉는 말들은 근위대가 해선 안 될 말일 것이다.
“루카, 오해하지 말고 잘 듣게. 근위대의 역사는 오래됐네. 군부 최상부에는 근위대 출신의 장성이 항상 있고, 군부의 핵심 인사는 근위대 출신으로 수두룩해. 시간이 지날수록 군부와 근위대는 별개의 조직일 수가 없는 상황이지.”
“근위대 출신의 군부 진출을 막…….”
난 말하다가도 말았다. 내가 생각해도 말이 안 되는 전제였다.
근위대원이 민간 시장에 풀려도 문제였다. 막대한 양성비용도 아까울뿐더러, 민간 시장에 나간 근위대원을 통제하는 건 무척 힘든 일이다.
그렇다고 근위대 내부에서 죽을 때까지 혹사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그랬다간 충성심이 강한 근위대원 사이에서도 불만이 어마어마하게 쌓일 것이다.
어쨌거나 근위대원이 혹독한 훈련을 받고 위험한 임무를 수행하는 건…… 은퇴 이후의 부귀영화가 목적이다. 충성심이 강하더라도 덧없이 죽고 싶은 자는 없을 것이다.
“자연스레 시간이 지나자, 근위대는 군부의 견제 역할을 수행하지 못하게 됐네. 황실 입장에선 극단적 개편이 필요한 상황까지 왔지. 그러려면 근위대의 이권을 빼앗아야 해. 자넨 모르겠지만…… 황실의 직속부대는 근위대가 처음이 아니야. 우리 이전에도 근위대와 비슷한 황실 직속부대가 있었네.”
아마도 이름도 모를 직속부대의 끝은 좋지 않았을 것이다.
지금 상황에는 잘잘못과 옳고 그름을 논할 여지조차 없었다. 더 근본적인 문제였다.
‘생존의 문제.’
근위대와 군부는 자신의 이권을 지키며 살아남으려고 발버둥 치고 있었다. 황실도 통치의 안정을 위해선 근위대와 군부를 손봐야 했다.
“이건 불충과 불경의 문제가 아니야. 그저 균형이 무너진 거네. 그 때문에 천칭이 기울었지.”
하지만 아무리 포장해도 불충과 불경이 맞다. 수십 년을 복무한 자들은 기억조차 흐릿하겠지만, 생도인 나는 얼마 전까지만 해도 세뇌에 가까운 정신 교육을 받았다.
‘그 어떤 이유가 있더라도 근위대의 칼날은 제국 내부와 황실로 향해선 안 된다.’
그렇게 우릴 가르친 자들이 되려 황실을 향해 송곳니를 드러내고 있다. 곰곰이 생각해 보면 웃길 따름이다. 이 세상은 아이러니한 일로 가득하다.
“그래서 어떻게 균형을 다시 맞추실 생각이십니까?”
“……설명은 여기까지네, 루카. 자넨 생도에 불과해. 지금까지 말한 건 근위대 내부에서도 젊은 대원은 모르는 내용이네. 막 완성된 근위대원은 지나치게 맹목적이니까.”
나이가 어린 근위대원일수록 황실에 충성할 것이다. 그러나 복무 기간이 길고 얽힌 게 많은 근위대원일수록…… 황실보단 자신과 가문, 근위대 전우의 안녕을 먼저 생각하겠지.
“입은 굳게 다물겠습니다. 그럼 이만…….”
헤일라스가 손사래를 쳤다.
“잠시만 더 있게나. 술을 마실 시간이 필요해. 제정신으론 에바의 잔소리를 버티기 힘들거든.”
내가 나가면 에바와 쥬페가 들어올 것이다. 나는 충분히 이해한다는 듯이 술을 걸치는 헤일라스를 기다렸다.
헤일라스가 술잔을 빠르게 비웠다. 그는 내가 상상도 못 할 중압감에 시달리고 있을 것이다. 초인인 그에게도 휴식이 필요하겠지.
휙.
나는 헤일라스의 손짓을 보고선 서재를 나갔다. 복도에 놓인 소파에는 에바와 쥬페가 앉아있었다.
벌떡 일어선 에바의 표정은 몹시 사나웠다. 그녀가 문을 박살 낼 기세로 걸어오고 있었다.
“할 말이 있습니다, ‘어머니’.”
내가 에바의 앞을 막았다.
에바의 안색이 극심한 분노로 달아올랐다. 그러나 명문가의 안주인답게 곧 표정을 갈무리했다.
“……말하렴.”
에바는 감정을 억양이 싣지 않기 위해 짧게 대답했다.
“아버지께선 추궁이 아니라 위로가 필요할 겁니다.”
“어느새 내게 조언하는 위치까지 왔구나, 루카우스.”
가시를 톡 쏘아 내뱉는 듯한 말이었다.
“지금은 아버지, 가주의 판단을 믿어야 할 때입니다. 저는 어머니가 현명하신 분이라 믿습니다. 힘든 일을 겪는 남편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누구보다 잘 아시겠죠.”
에바는 날 밀치지 않았다. 그녀는 아랫입술을 튕기듯 깨물었다.
나는 그녀가 대답할 때까지 막아서듯 자리를 지켰다. 그녀가 눈을 감았다가 뜨며 고개를 끄덕였다.
“……니콜라오스가 살아있었다면 너와 똑같은 말을 했겠지. 이 상황에선 네 말이 맞는 것 같구나.”
에바의 눈에서 아득한 그리움이 스쳤다. 그녀는 쥬페가 아니라 니콜라오스를 지지했을 것이다, 겉으론 두 아들을 평등하게 대했을지라도.
“감사합니다.”
내가 정중히 고개를 숙이며 그녀의 옆을 지나갔다.
딱.
에바는 상의의 윗단추를 풀면서 서재로 들어갔다.
일이 부부의 영역으로 넘어갔으니, 당연히 쥬페는 서재로 들어가지 못했다. 그는 나와 계단을 같이 내려갔다.
나도 쥬페와 같이 있으니 서먹했다. 오늘 낮까지만 해도, 그와 나는 악수하며 휴전했다. 그러나 지금은 우리 둘 사이에 전쟁이 나도 이상하지 않았다.
자세한 사정을 모르는 쥬페는 내게 엄청난 배신감을 느꼈을 것이다.
난 쥬페가 손찌검해도 맞아 줄 준비를 하고 있었다. 몸의 전투 반사를 최대한 억제했다.
“루카.”
계단을 다 내려온 쥬페가 내 이름을 불렀다. 그는 만감이 교차하는 눈빛을 숨기더니 건조하게 말했다.
“난 아직 포기하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은 네가 앞서간 걸 인정해야겠군.”
“얕은 수작을 부린 건 아닙니다. 저도 아버지가 이런 결정을 하실 줄은 몰랐습니다.”
“알아. 네가 그런 부류의 인간은 아니지. 그랬다면 아버지가 너를 총애하지도 않았을 거고.”
쥬페는 마음을 가다듬듯이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그가 눈을 부릅뜨며 내 어깨를 툭툭 쳤다.
“……폭풍과 혼란이 잦아들 때까진 우리의 약속은 유효할 거다. 지금은 가문이 우선이니까.”
난 처음으로 온전하게 쿠스토리아 가문의 일원이 된 느낌이 들었다. 심지어 에바에게서조차 희미한 유대가 이어진 걸 느꼈다.
내가 세상을 오래 살진 않았지만, 그 말이 맞는 것 같다.
세상은 오래 살고 볼 일이다.
* * *
긴 하루가 끝나가고 있다. 하늘은 어둠에 잠겼다.
나는 내 방으로 돌아가서 가벼운 훈련을 시작했다. 의수와 의족을 새로 이식받았기에 당분간은 아무리 바빠도 훈련을 거르면 안 된다.
나는 한 손으로 물구나무서기 같은 고난도 체조 동작으로 균형 감각과 반응 검사를 마쳤다. 고급 의체라도 이식한 지 얼마 안 돼서 동작이 완벽하진 않았다. 몇몇 동작은 비틀거리기도 했다.
아직까진 내 뇌와 의체가 완전한 협응을 이루지 못했다. 아무리 사이버네틱 기술이 발달하더라도 결국은 뇌가 의체를 통제해야 한다.
자주 쓰던 물건조차 새 걸 사면 손에 익지 않는 법이다. 하물며 새로운 의체는 말할 것도 없다.
저벅, 저벅.
누가 내 방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처음에는 방문자가 지젤이라고 예상했다. 내 훈련이 끝날 즈음에 그녀에게 호출 메시지를 보냈기 때문이다.
‘발자국이 둘. 하나는 무겁다.’
나는 땀을 닦을 여유도 없이 셔츠만 걸쳤다.
똑, 똑.
방문자가 문을 두드렸다.
끼익.
문을 여니 낯익은 얼굴이 보였다. 그러나 반갑진 않았다.
‘아르투르와…… 안나.’
내 백부와 사촌이다.
귀찮은 방문자 두 명이 내 방문 앞에 서 있었다. 그리고 안나의 꼴은 심상치 않았다. 향긋한 분내가 났고 옷도 살결의 노출이 있었다.
‘도대체 이 인간은 자신의 딸을 뭐라고 생각하는 거지?’
혐오감이 치솟았다. 하지만 귀족 사회에선 흔한 일이다.
릴리안 라모네스를 생각해라, 루카. 안나 정도면 취급이 좋은 거지.
난 무덤덤해진 마음으로 그들을 맞이했다.
“단련하고 있었나? 역시 차기 가주다워. 벌써 믿음직스럽군.”
아르투르가 나를 보며 온갖 칭찬을 내뱉었다.
“남들이 오해할 말은 안 하셨으면 합니다. 가주의 부재 시, 대행하는 것뿐이니까요.”
“그렇게 내뺄 것 없네. 이미 다들 알고 있어. 헤일라스가 괜히 자네를 지목했겠나? 자, 자, 안나, 안으로 들어가서 듬직한 사촌 동생에게 물이나 한잔 따라줘.”
안나가 고개를 숙이며 방으로 들어왔다. 그녀는 자신의 방인 것처럼 냉장고를 뒤지더니 물병을 꺼냈다.
“루, 루카우스? 루카라고 부르면 되지? 둘이서 이야기를 해보는 건 처음이네.”
안나가 배시시 웃으며 잔에 물을 따랐다. 지금 보니 안나를 동정할 것도 없다. 부녀가 작정하고 내게 질척거리고 있다.
탁.
안나가 물잔을 내 앞에 내려놓았다. 난 마지못해 물을 마시곤 안나를 쳐다봤다.
나는 안나와 아르투르를 어떻게 쫓아낼지 고심 중이었다, 그것도 아주 맹렬하게.
안나가 더운 듯이 손으로 부채질했다. 그녀는 한 발자국 더 다가오며 자신의 윗옷에 손가락을 댔다.
스륵.
안나는 윗옷의 단추에 손가락을 걸었다. 난 오늘의 에바가 했던 행동을 떠올리고선 재빨리 손을 뻗었다.
척!
내가 안나의 손목을 잡아서 단추를 푸는 걸 막았다. 이 집안은 유혹의 시작이 단추 풀기인 모양이다.
“조, 조금 더워서.”
안나는 당황과 민망함이 섞인 얼굴로 말했다.
“그럼 창문을 열어드리죠.”
나는 창문을 열며 유리창에 비친 그들의 행동을 살폈다.
이 와중에 안나는 아르투르의 눈치를 보고 있었다. 아르투르는 뭐라도 하라는 듯이 신호를 보냈다.
저들은 내가 못 보고 있다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어처구니없는 촌극이었다.
“참, 루카, 저번에 내가 했던 말 기억하고 있나? 내 딸아이가 자네와 친해지고 싶다고 한 것 말일세.”
기억하곤 있다, 마음에 담진 않았지만.
“나, 나도 너하고 얼른 친해지고 싶어!”
안나가 내 곁에 붙으며 말했다.
‘이를 어쩐다.’
여기서 저들에게 망신을 준다 해서 별일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험하게 대하고 싶진 않았다. 오늘은 기분이 썩 나쁘지 않은 날이었다. 특히나 쿠스토리아 가문 사람에겐 더더욱 모진 행동을 하고 싶지 않았다.
“아까 움직여보니까 의체 조율이 좀 맞지 않았습니다. 쿠스토리아 가문의 여자들은 대체로 사이버네틱 공학과 기계에 밝으니…….”
내가 자리에 앉으며 팔을 탁자에 올렸다. 그리곤 왼팔 안쪽의 인공 피부 일부를 잡아당겼다. 바깥과 연결할 수 있는 단자가 드러났다.
“……잠깐만 제 의체를 봐주시면 금방 친해질 수 있을 것 같네요.”
난 감시자의 데이터베이스에 접속해 안나의 이력을 보았다. 그녀도 쿠스토리아의 여식답게 기계공학을 배운 적이 있다.
그러나 안나는 최상위 교육기관인 크라치아 아카데미에 입학을 못 했고, 다른 교육기관에서도 하위권 성적이었다. 그러니 고출력 의체의 조율은 손도 못 댈 것이다.
“아, 저기, 음, 아, 아빠?”
안나가 뭘 해야 할지 몰라서 아르투르를 쳐다봤다. 엉터리로 손댔다간 본전도 못 챙기겠지.
“그건 제가 하죠. 제 실력이 아무래도 안나보단 나을 테니까요.”
문 옆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지젤이 아르투르 뒤에 나타났다. 난 그녀가 온 걸 이미 알고 있었다.
“으음, 지, 지젤의 실력이 내 딸아이보다는 낫지.”
“아, 아빠!”
“아니, 사실이잖느냐. 그럼 다음에 보도록 하지, 루카.”
아르투르는 이때다 싶었는지 안나를 데리고 자리를 빠져나갔다.
지젤은 그들이 나가고 나서야 내 방으로 들어왔다. 그녀는 눈짓으로 문을 가리켰다.
“저 사람들은 뭘 하러 온 거야?”
“칙칙한 집안사람들에게 웃음이라도 주고 싶었나 보지.”
내 말에 지젤이 옅게 웃었다. 뭐, 농담이 먹힌 모양이다.
“그나저나 조율이 필요한 건 맞아? 그럼 해줄게.”
“필요하긴 해. 새 의체라서 길이 덜 들었거든.”
지젤은 탁자 맞은편에 앉더니 단말기와 간이정비 도구를 꺼냈다.
딱.
그녀는 작업에 앞서서 윗옷 단추를 하나 풀었다. 난 움찔하며 그녀를 쳐다봤다.
“왜?”
지젤이 내 반응에 눈을 들었다.
“아니, 뭐. 아무것도.”
난 고개를 돌려 열린 창문을 바라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