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ad Born Blood RAW novel - Chapter (123)
배드 본 블러드-123화(123/197)
123
기술의 발전에는 가속이 붙는다.
어느 업계든 마찬가지다. 새로운 규격이 나오면 전 세대의 호환성은 점차 떨어진다.
특히 데이터칩 분야는 세대교체와 규격 변화가 원체 빠른지라 십수 년만 지나도 일반인은 손도 대지 못한다.
하물며 내가 가져온 칩은 아가타 쿠스토리아와 노엘 뮬리즈카가 현역으로 활동하던 시기의 물건이다.
길다는 홀로그램 화면을 응시하며 네트워크에서 칩의 제원을 검색했다. 그러나 좀처럼 단서가 없는지 길다의 눈이 가늘어지기만 했다.
“넷에도 정보가 나오지 않을 정도면…… 흐음.”
“아, 아마도 제국이 노바스 행성에 정착하기 전에 생산한 칩일 겁니다.”
내가 말을 덧댔다. 길다는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드물게 이맛살을 찌푸렸다.
“그런 건 진작 말해야죠! 일, 이백 년도 아니고…… 3세기 전쯤에 쓰던 물건이잖아요. 어쨌거나 도전 의식이 좀 타오르네요.”
길다가 팔을 걷어붙이더니 창고로 들어갔다. 그녀는 먼지 냄새가 풀풀 나는 책을 한 아름 안고 나왔다.
쿵!
길다는 책더미를 탁자에 떨어뜨리듯 올려뒀다. 먼지가 나풀나풀 피어올랐다.
“똑같이 생겼거나 비슷한 물건, 그리고 여기 숫자랑 철자가 보이죠? 이게 겹치는 모델이 보이면 바로 말해요. 같은 회사나 규격이 같은 제품일 테니까요.”
표지와 제목을 보니 전부 전자기기에 관련된 서적들이었다.
나와 길다는 책을 펼치곤 동공만 이리저리 굴렸다.
촤르르르.
책을 넘기는 속도는 내가 훨씬 빨랐다. 길다가 놀란 얼굴로 날 힐끗 보다가 자신의 책에 집중했다.
나는 책 한 권을 삼십여 초 만에 끝냈다. 아무리 나라도 이 속도로 정독하는 건 불가능하다. 하지만 철자와 사진을 대조하고 찾는 거라면 문제가 없었다.
“으으, 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그 사이에 가브리엘이 머리를 잡으며 일어섰다.
“너 아까 잔뜩 취해서 넘어졌어. 술 좀 적당히 마셔.”
나는 책을 넘기며 말했다. 가브리엘은 하관이 뻐근한지 턱을 매만지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 그래? 넘어져서 기절한 건가? 아니, 뭔가 중요한 게 있었던 것 같은데…… 아씨, 뭐였지?”
가브리엘은 눈만 깜빡였다. 나는 책을 놈에게 던지며 길다의 설명을 고스란히 읊었다.
“일단 이것부터 찾아. 중요한 일이야.”
가브리엘은 정신없는 와중에 굵직한 손가락으로 책을 넘겼다.
책장을 넘기던 길다의 손이 느려졌다. 그녀가 칩과 책을 번갈아 보았다.
“찾은 것 같아요. 잠시만요.”
가장 먼저 단서를 찾은 건 길다였다. 그녀는 낡은 책을 펼쳐둔 채로 홀로그램 화면 앞에 앉았다. 그녀는 홀로그램 화면을 이리저리 끌어다가 당기며 정보를 화면 하나에 중첩했다.
“이러니까 안 나오지! 당시 기준으로 최고 보안 등급까지 가볍게 통과했고, 용량도 체결적층식으로 쌓아서 무지막지하네요.
체결적층은 적층식인데 퍼즐처럼 빈 공간에 끼워서 쌓은 거라 두께가…… 아, 뭐, 관심 없으시겠죠. 하여튼 과할 정도로 당대의 기술력을 집약한 칩이에요.
가격대가 가격대만큼 수요도 거의 없어서 소량 생산만 했죠. 사실상 기술력 자랑을 하려고 만든 물건이라는 느낌이에요.
그래서 생산한 회사에선 오파츠 등급이라고 따로 최상위 카테고리를 만들어서 이 칩을 구분했네요. 지금에야 길거리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수준의 칩이지만요.”
길다가 흥분하며 말했다. 그리고 상당히 비싼 가격으로 거래될 수 있다는 말도 덧붙였다.
“하여튼 비싸다는 이야기지?”
멍하게 듣던 가브리엘은 사족에 관심을 가지며 눈을 빛냈다.
“그래서 데이터를 빼낼 수 있겠어요?”
나 관심사는 오로지 내용물이었다.
“컴퓨터 단말기를 세대별로 쫙 늘어놓고 호환되는 규격으로 차례대로 옮기면 되긴 할 거예요. 한 백 년이나 오십 년 전의 규격까지만 변환하면 그 뒤엔 열람에 문제가 없죠. 하지만 데이터 손실과 변질은 있을 거예요. 내용물이 뭔지는 몰라도, 프로그램이라면 정상적으로 작동하지 않을 가능성이 있어요. 그리고 보안체계가 지금과…….”
길다는 작업이 길어지는 이유도 덧붙였으나 내가 굳이 귀담아들을 정도는 아니었다. 그녀에게 전적으로 맡길 생각이었다.
“아! 생각났다! 루카, 너, 이 자식!”
가브리엘이 이제야 정신을 차렸는지 소리를 질렀다.
“한 대 패고 싶으면 때려. 맞아줄 테니까.”
“그런 의미가 아니잖아! 하여튼 뭐, 이번엔 봐주마. 네가, 그, 잘난 입으로! 미안하다고! 했으니까!”
가브리엘이 꾹꾹 눌러서 강조하며 말했다. 나는 내 발언을 취소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하지만 내뱉은 말은 주워 담을 수 없는 법이다.
콰직! 쿵!
길다가 창고에서 골동품이나 다름없는 전자장비를 꺼내느라 바빴다. 그녀는 우리에게 신경도 쓰지 않고 작업에 열중했다.
“너, 그럼 보육원 출신이면서 귀족 가문의 양자가 된 거잖아. 진짜 대단한 새끼네. 어쩐지 귀족 도련님 같은 분위기가 아니다 싶었어. 아무리 봐도 하층 출신인 새끼가 자칭 귀족이라고 하니 이상했다니까.”
가브리엘이 어깨로 날 툭툭 밀며 말했다. 그는 지겹지도 않은지 맥주를 또 꺼냈다. 그리고 내게도 한 병을 내밀었다.
“설명하자니 복잡해서 말하지 않은 거야.”
나도 목이 탔기에 맥주를 마셨다. 다른 술보단 음료수 같아서 마실 만했다. 취하는 느낌도 없었다.
“그래도 나한텐 말해줄 수 있었잖아, 루카. 섭섭했다고.”
가브리엘은 화가 다 풀렸는지 시시덕거렸다.
‘가브리엘은 하층 구역의 실패자다.’
처음 만났을 때의 가브리엘은 의체의 균형이 무너져 있었다. 언제 고장이나 오작동이 일어나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였다. 그렇게 살다가는 2, 3년도 버티지 못하고 죽었겠지. 뻔한 결말이다.
‘허구한 날 술 마시며 노는 걸 좋아하고, 어쩌다 목돈이 생기면 며칠 만에 탕진하지. 근시안적인 사고방식을 가진 머저리.’
그러니 가브리엘이 위로 올라가지 못하고 실패자의 인생을 사는 거다. 내가 가장 싫어하는 부류의 인간 중 하나다.
교류와 유대가 없었다면, 나는 가브리엘을 같은 인간으로 여기지도 않았을 것이다. 실제로도 나는 그렇게 행동했었다.
……하지만 지금의 나는 가브리엘을 싫어하지 않는다. 그의 삶을 업신여기고 싶지도 않다.
‘모든 게 웃길 따름이지.’
나와 친하게 알고 지낸다는 이유만으로 그 사람의 단점을 덮고 넘길 수 있게 된다. 한때, 나는 그런 태도를 경멸하며 속물이라 여겼다.
‘뭐, 지금도 가브리엘이 때때로 한심하게 보이지만…… 아니, 때때로가 아니라 거의, 항상.’
그 한심한 가브리엘조차 썩 나쁘진 않았다.
이 복잡한 심경을 쉽게 말하자면 간단하다. 가브리엘이 죽으면 나는 슬플 것이다.
“루카, 내 날개 문신이 보여?”
가브리엘이 외투를 내리며 등을 내보였다. 흉터로 범벅인 어깨에는 어울리지 않게 날개 문신이 있었다.
“굳이 보여주지 않아도 돼. 남자의 등짝을 보고 싶진 않으니까.”
“가브리엘이라는 이름이 흔하잖아. 그래서 엄마가 날 찾으려고 새긴 문신이야. 가브리엘이라는 이름이 원래 천사의 이름이라나 뭐라나.”
“퍽이나 잘 어울리네. 잘은 몰라도 천사들은 다들 너처럼 미남인가 봐.”
“나도 얼굴이 망가지기 전엔 꽤 잘생겼어. 안면함몰과 골절 수술을 세 번 정도 받으면 너도 이렇게 될걸.”
“못생길 핑계가 있어서 다행이군.”
“하, 씨, 진짜 너 존나 패고 싶네. 나보다 약하기만 했어도, 아주 그냥…….”
가브리엘이 주먹을 쥐었다 펴며 분을 삭였다.
“뭐, 엄마 얼굴이라도 기억하니 다행이네. 아, 부럽다는 소리는 아니야. 내가 그 정도로 감수성이 넘치진 않거든.”
“난 원래 아크바란 태생이 아니야. 정확히 말하면 제국은 내 고향이 아니지.”
내가 주춤거리며 가브리엘의 옆얼굴을 보았다.
이건 좀 색다른 이야기였다. 제국의 데이터베이스라고 해서 하층민의 이력까지 꼼꼼하게 기록된 건 아니다. 그 정도로 제국의 정보망이 세세하진 않다.
“코라나 벨라토 출신이라는 거냐?”
“그것도 아니야…….”
가브리엘이 씨익 웃으며 뜸을 들였다. 날 답답하게 만들 생각인 모양이다.
“……난 황무지에서 태어났어. 자유로운 삶을 사는 노마드 출신이지.”
가브리엘은 자부심이 드러내며 말했다. 난 괜히 심술이 나서 짓밟아주고 싶었다.
“그 제대로 된 집도 없이 사는 거렁뱅이들 말하는 거지?”
“야, 이!”
“농담이야. 나도 알아. 의외긴 하네, 노마드라니.”
거의 들을 일이 없는 단어였다.
노바스 행성에서 그 어느 국가에 속하지 않은 방랑 집단이 있다. 그 세력이 노마드였다. 세력이라고도 부르기 뭣한 것이 여러 소규모 공동체를 통틀어 노마드라고 불렀다. 그렇기에 존재감도 없었다.
무엇보다 노마드의 구성원은 인류가 일부라고 할 정도로 다종족 집단이었다. 인류 우선주의인 제국에겐 교류할 필요가 없는 불순 세력이다.
나도 노마드라는 집단이 있다는 것 정도만 알 뿐이다.
“그땐 나도 네, 다섯 살 정도라서 기억이 거의 없어. 곰곰이 생각해 보면 내가 속한 집단은 위험한 일을 앞두고 있었던 것 같아. 그래서 날 아크바란의 보육원에 돈 주고 맡긴 거고. 이십 년 넘게 연락이 없는 걸 보면 아마 다들 죽었겠지.”
다행인 점은 노마드 출신의 비제국민으로 취급받아 보육원에서 쫓겨나진 않았다는 것이다. ‘가브리엘’이라는 동명의 소년이 사고로 죽었고, 보육원장은 지원금을 계속 받기 위해 가브리엘의 신분을 위장해 편입시킨 것이다. 흔히 있는 비리와 꼼수였다.
그 이후, 가브리엘의 삶은 아크바란의 여느 소년과 다를 바가 없었다.
선별검사에서 가브리엘은 군인 적성도 미달이라 직업학교로 배정을 받았다. 짧은 교육을 받고 건설회사의 현장에 투입됐으나 사고로 두 다리를 잃고 쫓겨날 처지가 됐었다.
‘이것도 처음 듣는 이야기네.’
가브리엘은 자신의 이야기를 차분히 내뱉었다.
“그래서 홧김에 사장의 금고를 털었어. 다리도 없으니까 몸이 가벼워서 벽을 타고 기어 올라가기 편했거든. 어쨌든 그 돈으로 다리도 전투용으로 달았지. 이것저것 적합성을 계산할 것도 없이 급하니까 그냥 달아달라고 한 거였어. 지금 생각하면 운이 좋았네. 그 다리로 날 죽이겠다고 달려온 직원도 때려눕혔고.”
그렇게 이리저리 치이다가 여기까지 온 것이다.
“나도 싸움엔 제법 자신이 있었다. 널 만나기 전까진 말이야. 그렇게 처참하게 깨진 건 처음이었어.”
가브리엘이 자신의 손을 응시했다. 투박한 쇳덩이가 그의 팔이었다. 그도 더 강해지기 위해서 팔다리를 계속 교체한 것이다.
나는 가브리엘의 이야기를 들으며 맥주만 마셨다.
가브리엘이 이런 이야기를 하는 까닭은 간단했다. 경로야 어쨌든 그도 내 과거사를 알았기에, 자신의 과거도 이야기해 주는 것이었다.
“그건 네가 운이 나빴던 거지. 나 같은 놈을 하층 구역에서 보긴 쉽지 않으니까.”
내가 빈 맥주병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아니, 난 운이 좋았다고 생각해. 어쨌든 결과가 이렇게 됐으니까. 다음에 보자, 귀족 사냥꾼 루카.”
가브리엘이 실없는 말을 내뱉으며 일어섰다. 그는 커다란 손을 외투 주머니에 쑤셔 박으며 공업소를 나섰다.
나는 가브리엘이 나간 문을 빤히 바라보며 여러 가지 생각에 잠겼다.
끼이익.
십여 분 뒤에 문이 다시 열렸다. 처음에는 가브리엘이 뭔가 놔두고 가서 다시 들어오나 싶었다.
쏴아아아.
열린 문으로 바람이 차갑게 들어왔다. 해가 지고 있기 때문이리라. 그러나 그게 아니더라도 난 간담이 서늘했다.
따스하게 달아올랐던 심장이 꽝꽝 얼어붙는 것 같았다. 나는 눈을 게슴츠레 뜨며 문 앞에 선 사내를 응시했다.
‘……키누안.’
키누안이 태연히 외투를 벗으며 공업소 내부로 한 발 내디뎠다.
“아, 루카. 자네도 있었군. 길다, 간만이야. 작업으로 바쁜 것 같지만 내 인사는 받아주게나.”
내 곁을 스쳐 지나간 키누안이 자리에 앉았다.
……생각해라, 루카. 저 괴물이 왜 여기에 왔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