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ad Born Blood RAW novel - Chapter (124)
배드 본 블러드-124화(124/197)
124
“와, 진짜 오랜만이에요! 아저씨.”
길다가 하던 일도 멈추고 키누안을 반겼다.
“바쁜 것 같으니 커피는 내가 타지. 탕비실이 이쪽이었나? 뭔가 내부가 좀 바뀌었군.”
“간판 보셨죠? 지앤지 공업으로 사업을 시작했어요. 설비도 좀 바꿨고요.”
“호오, 항상 응원하고 있겠네.”
키누안은 지앤지 공업과 지젤의 협업 등등을 이미 알면서도 모른 척했다.
‘진정해. 동요를 드러내지 마. 평상시처럼 굴어.’
나는 눈을 반쯤 감으며 신체를 제어했다. 의식적으로 감정 신호를 통제하며 몸에서 드러나는 불안을 차단했다.
“하층 구역에 내려오실 줄은 몰랐습니다, 교관님.”
나는 탕비실에 있는 키누안에게 말했다. 그는 시커먼 커피에 이것저것 넣으며 자신만의 레시피로 커피를 만들었다. 팔팔 끓는 기름과 커피가 섞이면서 기묘한 향이 났다.
“간만에 시간이 나서 온 거네. 자네가 있을 줄은 몰랐어.”
키누안은 내가 있을 줄 몰랐다고 말한다. 그게 진실인지 거짓인지 알 도리는 없었다.
‘우연인가, 아니면 노림수가 있는 걸까?’
당장 생각해 봐야 답은 나오지 않는다. 내게 주어진 정보는 한정적이다.
키누안은 감정 통제의 달인이다. 릭 실바 누네즈 같은 백전용사도 키누안의 속내를 읽지 못해서 당했다.
……그렇다면 늘 그렇듯 최악을 가정해야 했다.
‘키누안은 아가타의 칩 때문에 여기에 온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는 게 현명한 태도겠지.
“아저씨, 그거 아세요? 루카는 하층 구역의 유명 인사가 됐어요.”
길다도 작업을 느슨하게 하며 대화에 끼어들었다. 그녀는 키누안을 상당히 좋아했다.
“아아, 알고 있지. 별명도 생긴 것 같던데…… 뭐였더라?”
키누안이 제조가 끝난 커피를 들고 자리에 앉았다.
“귀족 사냥꾼 루카라고 부르더라고요.”
대답은 내가 했다.
“위험한 별명이 붙었군. 자네도 고생이 많겠어.”
키누안은 커피잔에 입을 대더니 한 모금 홀짝였다.
“여러모로 예상 밖의 일이 벌어진 거죠. 요즘 느끼는데 계획이 많이 어긋나는 것 같습니다.”
“어디 세상사가 계획대로 되는 게 있던가? 우리에게 필요한 건 계획성이 아니라 임기응변이네. 누구나 길에서 벗어날 순 있어. 그러나 그대로 탕아가 되느냐, 정도로 돌아오느냐 이게 중요한 거지.”
“……노력은 하고 있습니다.”
난 키누안의 감정 신호를 읽어내려고 오감을 뾰족하게 세웠다. 내 오감을 눈으로 볼 수 있다면 촉수처럼 키누안을 구석구석 훑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놀라울 정도로 키누안은 무미건조했다. 조각상을 보는 듯했다.
‘감정 통제가 완벽하다.’
키누안은 그 어떤 감정 신호도 외면으로 드러내지 않았다. 간간이 드러나는 미소와 여유는 거짓 신호였다. 그는 기만의 방패로 자신을 보호하고, 진실의 창으로 남을 찌른다. 이중 첩자로 이보다 잘 어울리는 사람이 없었다.
그리고 내가 살아남으려면 키누안 같은 인간이 돼야 한다. 누가 뭐래도 그는 나의 스승이다.
“그래, 루카. 일은 잘돼 가고 있나? 곧 생도 생활도 끝나겠군. 자네처럼 파란만장한 생도는 근위대 역사상 없었을 거야.”
“성과도 조만간 나올 겁니다.”
그 성과가 무엇이든 간에.
‘키누안을 죽여서 황제 폐하의 눈을 가린다.’
‘헤일라스를 축출하고, 내가 쿠스토리아의 가주가 된다.’
두 가지 중 하나는 내 손으로 해야 한다. 그래야 나와 쿠스토리아 가문이 건사할 수 있다.
둘 다 내겐 어려운 도전이다. 그렇기에 기회가 먼저 오는 쪽으로 선택해야 한다. 어느 쪽이든 기회가 오는 순간 망설이면 안 된다.
‘내가 키누안을 이길 수 있을까?’
키누안은 고장 난 뇌를 가졌으나 그 바닥과 여력은 가늠이 되지 않았다. 섣불리 행동했다간 내가 당할 터다.
‘헤일라스는 말할 것도 없어. 강철과도 같은 군인이지.’
너무 골몰히 생각하지 마라, 루카. 고뇌의 여취가 바깥으로 흘러나오니까.
“그나저나 길다의 작업대가 거창하군.”
올 것이 왔다. 키누안의 호기심이 길다의 작업으로 향했다.
“제가 의뢰한 작업입니다.”
어차피 속여봐야 의미가 없다. 길다와 사전에 입을 맞춘 것도 아니니까.
“근위대 본부의 기술팀을 놔두고, 길다에게? 아, 길다. 자네를 폄하하는 건 아니야. 어디까지나 사실이니까.”
작업하던 길다는 뾰로통한 표정으로 고개를 들었다.
“그게 폄하하는 거죠! 참나. 물론, 제 실력이 상층 구역 엘리트들보다 부족한 건 맞죠. 이건 루카가 저한테 용돈이나 주려고 맡긴 일이에요. 친분을 겸사겸사해서요. 제가 루카의 여동생분이랑 일하거든요.”
길다가 천연덕스레 말했다. 나는 속으로 놀랐다.
‘길다는 나를 위해 거짓말을 했다.’
당장이라도 길다를 껴안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녀가 이 정도로 영리하게 대응해 줄지는 꿈에도 몰랐다.
‘길다도 칩 해석이 기밀 보장이 필요한 일이라는 걸 눈치챘겠지. 똑똑한 여자니까.’
그렇다고 길다가 굳이 거짓말까지 할 이유는 없었다. 키누안과 나의 대화를 듣던 그녀가 눈치껏 나를 위해 행동한 것이다.
가슴이 울렁거린다. 뭐라 형용하기 힘들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자, 솔직히 감동했다, 젠장.
“길다에게 일부러 일을 맡긴 거로군. 예전부터 생각했는데, 역시 자네는…….”
키누안이 장난스레 웃으며 말을 끌었다.
“착하다고요?”
“……굿보이야.”
“그 말이 맞다고 치죠. 하나하나 반박하는 것도 힘드니까요.”
내가 툴툴거렸다. 우린 그 뒤로 잡다한 이야기를 나눴다. 프란세크 황태자에 대한 언급도 짧게 스쳐 갔다.
“저번 가두행렬 사건과 귀족 사냥꾼이라는 별명. 자네의 목숨을 노리는 이가 많을 거야. 별다른 원한이 없는데도 자네를 싫어하는 사람도 늘 거고.”
“절 노리는 사람이 한 트럭에서 두 트럭 정도 늘어난 셈이죠. 그래서 항상 무장한 채로 다니고 있습니다.”
난 외투를 옆으로 젖혀서 무기를 노출했다. 크루시스와 루이나가 드러났다.
“그리고 이렇게 만난 김에 말해두는 게 좋겠군. 폭풍이 오기 전에 자네와 나, 둘이서 접견해야 할 무리가 있네. 조만간 호출하겠네.”
나는 본능적으로 느꼈다. 이건 어떤 기회다. 전환점이 될 수도 있었다.
‘드디어 키누안과 내가 단둘이서 움직인다.’
이반이 안배한 기회일 수도 있었다. 나는 동요와 흥분을 억눌렀다.
“루카, 데이터 이전과 복구가 끝났어요!”
길다가 장비 너머에서 고개를 들며 외쳤다. 정말로 내가 맡긴 칩의 데이터 복원이 끝난 건 아닐 것이다.
‘길다를 믿어야 한다.’
나는 일어서서 길다에게 다가갔다.
길다가 홀로그램 인터페이스를 조작하다가 손을 멈췄다.
“데이터 형식을 보니까, 어떤 영상 같은데…… 재생해 볼까요?”
“아, 뭐, 확인해 보죠.”
난 대수롭지 않게 고개를 끄덕였다.
키누안도 커피를 마시며 우리를 보고 있었다. 그의 눈초리가 묘하게 매서웠다.
삑.
대형 홀로그램 화면이 벽면에 투영됐다. 그리고 몇 차례의 잡음이 일더니 영상이 흐릿하게 나왔다.
-하아, 헉, 아항.
야릇한 소리가 불길하게 퍼졌다. 그리고 또렷해진 영상에선 두 명의 남녀가 거칠게 뒹구는 모습이 나왔다.
조각처럼 잘생긴 남성과 비현실적으로 비율이 좋은 여자가 보인다. 피부는 젖은 듯이 반들거렸다. 화면만으로도 눅눅한 공기가 느껴지는 듯했다.
이쪽 분야에 문외한인 내가 봐도 꽤 많이…… 야릇했다. 오히려 예술적이라고 느껴질 정도로 관능적인 영상이었다.
그리고 성적 기능성 향상을 위해 개조한 전신의체의 관계에는 비정상적인 면모가 있었다. 남녀가 문어와 뱀처럼 뒤엉켰다. 서로를 먹잇감으로 여기듯 행위가 표독스럽고 맹렬했다.
“……아, 이런 거네요.”
길다가 어깨를 으쓱하더니 영상을 종료했다. 나는 괜히 민망해서 길다에게서 두 걸음 떨어졌다.
“이런 데이터인 줄은 몰랐습니다, 정말로요.”
“아뇨, 아뇨. 이런 경우가 많아요. 이상할 정도로 보안을 철저하게 해 둔 칩이라서, 숨겨둔 재산이라도 있는 줄 알고 복구했더니…… 뭐, 아시죠? 컬렉션부터, 부모님이나 뭐, 젊은 시절의 추억과 기록 등등 그런 거요.”
길다는 배시시 웃으며 괜찮다는 투로 말했다.
“어쨌든 제겐 필요 없는 데이터 같습니다.”
“그럼 처분할까요?”
“칩의 주인도 그걸 원할 겁니다. 명예를 지켜주고 싶군요.”
키누안이 우릴 보다가 느슨하게 일어섰다. 그는 웃으면서 내게 다가왔다.
“내용물을 보니 근위대 내부에 맡기지 않길 잘했군. 누구의 칩인지 물어봐도 되겠나?”
“……니콜라오스의 것입니다.”
이름을 팔아서 미안하다, 니콜라오스.
하지만 추측하건대 니콜라오스의 성벽은 보통이 아니었을 것이다. 이 정도는 불명예도 아니겠지……라고 나는 스스로 합리화하는 중이다.
“커피 잘 마셨네, 길다. 그리고 루카, 하층 구역에 오래 머물지 않는 게 좋아. 자네를 노리는 이가 있다는 정보가 있으니까.”
“충고 감사합니다.”
“그럼 먼저 가보겠네.”
키누안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벌써 가시게요? 저도 방금 일 끝났잖아요. 좀 더 놀다가 가세요.”
길다는 못내 아쉽다는 듯이 붙잡으려 했으나, 키누안은 미안하다는 듯이 거절했다.
“나도 일이 많아서 말이야. 오늘은 하층 구역에 볼일이 있어서 온 거네. 겸사겸사 자넬 보러 온 거고.”
키누안은 바닥이 드러난 커피잔만 남긴 채로 공업소를 나섰다.
쿵.
공업소의 문이 닫혔다.
‘키누안도 뭔가 자세히 알고 찾아온 건 아니야. 지금 같은 민감한 시기에, 내가 하층 구역에 방문한 게 이상해서 쫓아왔겠지. 오늘은 넌지시 찔러본 거다.’
나는 묘한 쾌감마저 느꼈다. 이건 확신에 가까웠다. 키누안을 속이는 데 성공했다. 난 그의 속셈을 파악하고 방어했다!
물론, 이건 내 힘만으로 한 건 아니다.
‘키누안조차 길다가 나를 이렇게 도와줄 거라고 예상하진 못할 거야.’
예상치 못한 도움 덕분이다. 그러니까 키누안도 감쪽같이 넘어간 것이다.
“고마워요, 길다.”
길다는 싱긋 웃었다. 그녀는 자신의 어깨로 내 어깨를 가벼이 쳤다.
“진짜 데이터 복구도 금방 끝날 거니까 거기서 기다려요. 무슨 사정인지 모르겠지만…… 저는 루카를 응원할게요.”
“저를 믿으시는 건가요?”
“지젤과 일하면서 더욱 확신했어요. 루카는 좋은 사람이에요.”
나는 쓴웃음을 지었다.
“전 길다가 생각하는 것만큼 좋은 사람이 아닐 겁니다.”
“누군가에겐 그럴지도 모르죠. 하지만 제겐 좋은 사람이 맞아요.”
길다는 가장 최신 단말기를 조작했다. 데이터 복원 작업도 막바지에 이른 듯했다.
“아까 순간적인 재치가 대단했어요. 갑자기 그런 영상을 구하느라 고생했겠네요.”
내가 길다의 공을 치하하며 말했다. 난 크레딧칩을 꺼내 숫자를 입력하고 있었다. 내가 해줄 수 있는 사례는 이 정도였다.
“아, 그건 제가 소장한 컬렉션이에요. 더 보고 싶으면 보내줄게요. 엄선된 것만 모아뒀거든요. 사실 납치 사건 이후로, 한동안 성욕이 아예 없었는데…… 요즘은 많이 좋아져서 다시 즐기면서 살고 있어요.”
길다가 태연하게 말했다. 난 순간적으로 말문이 막혔다. 그녀도 끔찍한 과거의 경험에서 벗어나느라 남몰래 발버둥 쳤을 것이다.
……예전부터 생각했지만 길다도 보통내기가 아니었다. 단단하진 않지만, 부러지지 않는 정신력의 소유자였다. 어떤 풍파를 겪더라도 결국은 다시 일어설 것 같았다.
나는 문득 가브리엘이 오늘도 공업소에 있었다는 걸 떠올렸다. 경비 때문에 온 거겠지만, 난 괜스레 불안했다.
“길다, 혹시 가브리엘과…….”
“저번에도 말했지만, 가비와 저는 그런 사이가 아니라고요. 전 얼굴 본다니까요.”
내가 가브리엘을 싫어하는 건 아니다. 그래도 왠지 길다처럼 좋은 여자는 놈에게 아까웠다. 흠, 역시 내 심보가 뒤틀린 탓이리라.
딸깍, 삑.
기계음이 차례대로 들렸다. 길다는 땀을 닦으며 상체를 세우더니 나를 향해 엄지를 치켜세웠다.
데이터 복원이 끝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