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ad Born Blood RAW novel - Chapter (125)
배드 본 블러드-125화(125/197)
125
“이건 가상 시뮬레이션 프로그램 같아요. 어렵게 됐네요.”
길다가 복원한 데이터를 홀로그램에 띄우며 말했다. 알아먹기 힘든 복잡한 글자가 폭포처럼 주르륵 흘러내리고 있었다.
“실행할 수 있나요?”
“정말 도와주고 싶지만…… 제 역량에서 벗어난 일이네요. 데이터를 현세대 기기에 맞게 변환하거나 당시의 가상기기를 구해야 해요. 후자는 불가능에 가까우니 전자가 유일한 방법이죠.”
길다는 기술자이자 정비사다. 해커나 프로그래머는 아니었다.
‘지젤도 공학 분야이고.’
나는 아가타 쿠스토리아가 노망이 들었다고 확신했다.
‘칩을 줄 거면 열람도 할 수 있게 해줘야지!’
슬슬 짜증이 났다. 이 데이터가 나에게 얼마만치 도움이 될지 모른다. 어쩌면 해가 될 수도 있었다.
“이런 데이터를 변환하려면 어느 수준의 능력이 필요하죠? 전문 용어 빼고, 제가 알아먹을 수 있을 정도로 설명해 주세요.”
길다가 팔을 괸 채로 턱을 만지더니 짧게 대답했다.
“일류.”
길다가 검지 하나를 치켜들었다. 정말 알아먹기 쉬운 말이었다.
이쪽 분야에서 내가 아는 일류는 두 사람밖에 없었다.
‘진가우 소장…… 그리고 마녀 바바라.’
문제는 둘 다 믿을 만한 인간이 아니라는 점이다.
“나머진 제가 어떻게든 해보겠습니다.”
내가 탁자에 크레딧칩을 놓으며 말했다. 숫자를 본 길다는 동공이 커졌다.
“보수가 과하다고 생각되지만, 거절하진 않을게요.”
나는 아가타의 칩과 복원 데이터가 담긴 칩을 둘 다 챙겼다.
“당분간 몸조심하세요, 길다. 폭풍이 온다니까요.”
“루카도요.”
작별 인사를 마친 나는 공업소를 나섰다. 바깥은 어둡고 서늘했다.
끼릭, 끼릭.
나는 전자식 마스크를 하관에 댔다. 확장된 마스크가 들러붙으면서 내 턱과 입을 가렸다.
하층 구역은 건물과 골목이 미로처럼 얽혀 있었다. 외지인이면 길을 잃기 십상이다. 특히 어두운 밤이면 더욱 그랬다.
난 평소와 달리 번화가와 대로를 따라 움직였다. 좀 돌아가더라도 그 편이 낫다고 생각했다. 지금은 사고에 휘말리거나 눈에 띄어서 좋을 게 없다.
“탕! 탕! 내가 귀족 사냥꾼 루카다!”
“병신아! 루카 님은 총이 아니라 칼을 쓴다고!”
“너도 틀렸어! 사냥꾼이니까 활을 쓰겠지! 얍!”
번화가인지라 아이들이 뛰어놀고 있었다. 나는 그 광경을 흘러가듯 응시했다.
아이들은 플라스틱과 골판지를 엮어 만든 전투복을 입고 있었다. 나에 대한 소문만 무성하기에 각자 마음에 드는 무기를 들고 ‘내가 루카다!’라며 외치고 다녔다.
다시 말하지만,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이런 분위기는 아크바란에서 용납되지 않았다.
하층 구역이라고 귀족이 없는 게 아니었다. 기분을 상하게 했다는 이유만으로 죽을 수도 있다.
지금은 아주 특이한 경우였다.
‘아크바란은 폭풍기를 앞두고 있다.’
다른 사람의 말을 들어보면 폭풍기에는 일부 지역에서 종종 소요나 폭동이 일어나는 듯했다. 혼란을 틈타서 하층 구역 사람들이 상층 거주민을 습격하기도 했다. 그 잘난 귀족들도 몸을 사려야 하는 시기다.
‘……그리고 가두행렬 이후로 반귀족 분위기가 험악하게 형성됐어.’
광기를 머금은 군중은 비이성적으로 행동하는 법이다.
혹여나 귀족이 저 아이들을 혼냈다간 하층의 인파에게 맞아 죽을 수도 있다. 현 분위기에서 그런 바보 같은 행동을 할 귀족은 없겠지만…….
“뭐, 귀족 사냥꾼이라고? 귀족을 사냥한다는 말은 그렇게 입에 쉽게 올려선 안 돼! 알겠어?”
그림에 그린 듯한 머저리 귀족이 저기에 있었다.
“음…….”
난 입술을 닫으며 한숨을 삼켰다.
익숙한 귀족 청년이 보였다. 이 정도면 놈과 나 사이에 어떤 인연이 있는 게 아닌가 싶기도 했다.
‘엔리코 라간.’
엔리코가 길거리 아이들에게 시비를 걸고 있었다.
툭!
엔리코는 아이들의 무기를 뺏더니 그대로 박살 냈다. 엔리코의 무릎에 부딪힌 플라스틱 칼이 형편없이 깨졌다.
‘쪼잔하기 짝이 없구나, 엔리코. 감탄이 나올 정도야.’
난 엔리코의 좁디좁은 그릇에 놀랐다.
“자기야, 그, 그만해! 애들 장난이잖아.”
엔리코 옆에는 예쁜 여자가 붙어있었다. 겉보기엔 중산층의 아가씨 같았으나 난 그녀가 어디 소속인지 알고 있다.
‘라비앙로즈 소속의 인형.’
인형은 라비앙로즈의 직업여성을 뜻한다.
카르티카 빌딩 사건 이후, 나는 라비앙로즈에게 연락해 엔리코와 이어줬었다. 마르티나 디바는 옳다구나 하면서 적당한 여자를 엔리코에게 붙였을 것이다.
그 적당한 여자가 지금 엔리코 곁에 있는 여인이다.
“애들 장난? 귀족을 죽인다는 말이 장난처럼 들려? 요즘 분위기가 아주 이상해! 아주 이상하다고! 그리고 루카우스는 내가 잘 알아. 나와 절친한 사이거든! 그 녀석은 너희 같은 하층민의 편이 아니야!”
언제부터 내가 엔리코의 절친한 친구였던 걸까, 나도 몰랐던 사실을 알게 됐다.
어쨌든 엔리코는 멍청한 짓만 골라서 하고 있었다. 인파의 이목이 그에게 쏠렸고, 그중에선 적개심 서린 눈초리도 섞여 있었다.
‘올해의 머저리 상이라도 타고 싶은 거냐…….’
엔리코 옆의 여자는 필사적으로 엔리코의 팔을 잡아당겼다.
“그냥 가자니까. 이러다가 큰일 나!”
여자는 발을 동동 구르고 있었다. 안절부절못했다.
“성인은 아니지만, 나도 라간 가문의 사내야. 이런 불온한 애들을 보고 그냥 넘길 순 없어. 제대로 교육해야지. 그게 귀족의 의무야, 하층민인 너는 모르겠지만.”
어떻게 저런 말만 골라서 하는지 신기할 따름이다. 밉상 귀족이 되는 법이라는 과목을 만들어 가르친다면 돈을 쓸어 담을 재능이지.
나는 손뼉이라도 치고 싶은 심정을 참으며 저 촌극을 지켜봤다.
‘엔리코, 난 저번에 무장헬기로부터 네 목숨을 구했어. 넌 기억하지 못하겠지만 말이야.’
이번엔 사달이 나더라도 구해 줄 생각이 없다. 엔리코라도 여기서 집단 구타를 당하고 나면 정신을 좀 차리겠지. 운이 나쁘면 죽을 거고.
“아! 라간 가문의 도련님이셨군요! 나리, 나리! 예전부터 저는 라간 가문의 귀족분들을 무척 존경하고 있었습니다.”
인파를 뚫고 건들거리는 사내가 나타났다. 언뜻 보면 흔한 불량배 같았으나 균형을 잘 이룬 걸음새를 보니 훈련을 받은 자였다.
“넌 뭐야?”
엔리코가 인상을 찌푸렸다. 건들거리던 불량배는 괴악한 미소를 지으며 아이들 뒤에 섰다. 일부러 악당처럼 웃는 것 같았다.
“요즘 분위기가 탐탁지 않은 사람 중 하나라고 알아주시죠. 누가 뭐래도 지금까지 아크레시아 제국을 이끈 건 귀족 나리들입죠. 그런데 길거리에서 귀족 나리가 무시당하는 걸 보니 참기 힘들어서 나섰습니다. 자, 자, 엔리코 님이라고 하셨죠?”
불량배에게서 흐르는 불온함을 먼저 눈치챈 건 엔리코의 여자였다.
“자기야, 빨리 가자. 조금 있다가 자기가 하고 싶은 거 다 해줄게! 저번에 그거 하고 싶다고 했…… 아악!”
불량배는 여자의 뺨을 냅다 후려쳤다.
“창녀 주제에 끼어들지 마라. 고귀한 귀족은 그딴 저열한 욕망으로 움직이지 않으니까. 그렇죠, 도련님?”
불량배가 뾰족한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폭력적인 위압감이 흐르고 있었다.
“그, 그렇지. 너, 너! 나를 어떻게 보고! 그런 말을 하는 거냐?”
엔리코는 불량배에게 짓눌려 자신의 여자를 타박하고 있었다. 저리도 못난 놈이 세상에 있을 줄이야.
“엔리코 라간 님. 총을 가지고 계시죠? 아, 여기에 있네. 두 손으로 꽉 쥐시고요. 본보기로 한 녀석만 쏩시다. 다신 귀족 사냥꾼이니 뭐니 그런 말을 하지 못하게요.”
사태가 심상치 않게 돌아갔다. 불량배가 엔리코에게 살인을 독려했다.
“어? 뭐? 아니, 그, 그 정도까지 할 필요는 없잖아.”
“에이, 아니죠. 이런 애들이 자라면 폭동이나 일으키는 반동분자가 될 겁니다. 지금 한 명을 죽여서 싹을 자르는 게 제국을 위한 길입니다. 이게 귀족의 의무죠.”
미친 소리를 잘도 지껄이고 있었다. 주변 인파도 술렁거렸다. 누군가 엔리코와 불량배를 막으려고 했다.
끼릭!
불량배가 잽싸게 권총을 뽑아서 나서는 자를 겨누었다. 나서던 이가 두 손을 들며 물러났다.
“이봐, 뒈지고 싶지 않으면 끼어들지 마. 난 귀족 가문의 경호역으로 들어간 가신이다. 그게 무슨 의미인지 알겠지? 너희들이 전부 덤벼도 내 상대가 안 된다는 뜻이야.”
불량배가 험악하게 협박했다. 그러나 하층 구역의 사람도 만만치 않았다. 불량배의 뒤를 노리던 덩치 큰 사내가 슬금슬금 움직였다.
탕!
불량배가 보지도 않고 뒤를 조준해 사격했다. 덩치의 사내는 무릎에 총알을 맞고선 그대로 고꾸라졌다.
놈의 실력이 제법이었다. 뒷골목 수준은 아니다.
총성을 들은 엔리코의 입술과 손이 발발 떨렸다. 불량배가 그의 곁으로 다가갔다.
“너, 너, 어느 가문의 사람이야? 내가 아는 가문이라면…….”
“지금 그게 중요합니까? 도련님, 방아쇠를 당기세요. 어서요.”
엔리코는 떠밀리고 있었다. 그는 뭐가 뭔지도 모르면서 총구를 아이에게 겨누었다.
자세한 사유야 어쨌든 간에, 지금 같은 분위기에서 귀족이 길거리의 아이를 죽인다면 끔찍한 폭동으로 이어질 수도 있었다. 목격자도 너무나 많았다.
‘저 사내는 선동을 위한 바람잡이다. 누구의 사주를 받은 거지?’
난 데이터베이스에 접속해 사내의 신원을 확인했다. 그러나 별다른 특이점이 이력으로 나오진 않았다. 귀족 가문의 가신이 아닌 건 확실했다. 어쨌거나 거짓말쟁이라는 거다.
주르륵.
엔리코의 바지가 생리현상으로 젖어가고 있었다. 그의 다리가 눈에 띄게 후들후들 떨렸다.
“난, 난 못 하겠…….”
“입 다물고 쏘라고, 등신아.”
불량배가 엔리코의 귀에 속삭이며 권총을 같이 잡았다. 나는 놈의 입술 움직임으로 말을 읽을 수 있었다.
저벅, 저벅.
내가 앞으로 나섰다. 이건 엔리코를 구하는 행동이 아니다. 저 불량배의 배경이 궁금할 뿐이다.
“엉? 넌 또 뭐야? 한 발자국만 더……,”
불량배는 자신의 권총을 들더니 내 다리에 겨누었다. 그의 경고가 끝나기도 전에 내가 나아갔다.
탕!
불량배가 방아쇠를 당겼다. 놈은 아까부터 사람을 쏘는 데 거리낌이 없었다.
탁!
난 몸을 빙글 돌리며 총알을 피했다. 머리나 몸통이 아닌 다리를 노리는 총격은 우스울 따름이다. 설사 명중했더라도 내 의족에는 별 타격이 없었을 것이다.
“쳇.”
불량배가 눈을 크게 뜨며 혀를 찼다. 총알을 피하는 내 움직임을 보고선 격차를 느꼈는지 그는 냅다 도망가려 했다.
빠른 판단을 보니 역시 전투에 능한 놈이다.
으드득!
나는 허리와 무릎을 숙이며 출력을 높였다. 내 발끝은 땅을 짓누르고 있다.
콰- 직!
땅바닥을 긁어내듯 내가 뛰어나갔다. 이십여 미터를 뛰어오르니 단번에 불량배가 가까워졌다. 놈의 뒷덜미에 내 손이 닿았다.
“아, 안, 안 돼. 제발!”
불량배가 눈에 띄게 나를 두려워했다. 아니, 그가 두려워하는 건 내가 아니었다.
삐, 삐삐빅! 삑!
목 보호대처럼 보이던 불량배의 목걸이가 반짝이기 시작했다. 매캐한 연기가 목걸이 이음새에서 새어 나왔다.
불길함을 느낀 나는 팔로 머리를 가리면서 불량배를 밀치듯 놓았다.
퍼- 엉!
불량배의 머리가 덧없이 터졌다. 폭발 때문에 나도 수어 미터 밀려났다.
‘폭탄 목걸이?’
내가 붙잡자마자 불량배의 목걸이가 터졌다. 누군가 이 광경을 보고선 폭탄을 작동시킨 것이다.
“뭐, 뭐야!”
“죽은 거지? 왜 죽은 거야?”
“저 사람이 죽인 건가? 손에 닿자마자 폭발했잖아.”
인파가 술렁거렸다. 하층 구역 사람답게 사람이 죽었다고 비명을 크게 지르는 이는 없었다.
나는 옷에 묻은 인간의 파편을 툭툭 털며 일어섰다. 죽음의 비린내는 익숙하다.
“루카?”
내 뒷모습을 본 엔리코가 말했다. 낯익은 사람이니까 알아본 모양이다. 이럴 땐 왜 눈치가 빠른지 모르겠다.
엔리코가 말을 이어갔다.
“루, 루카우스 쿠스토리아! 내 친구여! 날 구하러 왔구나!”
엔리코가 벌떡 일어섰다. 젖은 바지에는 누런 액체가 칠칠찮게 흐르고 있다.
“너도…… 참 눈치가 더럽게 없네.”
나는 주변을 둘러봤다. 엔리코의 말을 들은 인파가 웅성거리고 있었다.
“루, 루카우스 쿠스토리아?”
“루카 님이잖아, 진홍의 황태자님을 구한 그 루카!”
“루카! 루카!”
찰나 동안 내 머릿속에선 온갖 생각이 오갔다.
지금 넘어진 아이들에게 귀족 모욕죄를 물으며 멱살을 잡고 뺨을 때릴 수도 있었다. 그리고 하층민을 멸시하는 말을 내뱉으며 저들의 오해를 불식시키는 방법도 있다. 이 자리에서 내가 귀족 편이라는 걸 확실히 해둔다면 헛소문이 사라질 거다.
……하지만 나는 내 악명과도 같은 위명을 이용하기로 했다, 이게 더 나은 판단이길 바라면서.
“엔리코.”
내가 엔리코를 보며 미소를 지었다. 아마도 제법 살벌할 것이다.
“으, 응? 친구야.”
“이 악다물어라.”
나는 주먹에 적당히 힘을 주곤 엔리코의 얼굴을 후려쳤다.
콰직!
기분이 상쾌해지는 소리가 났다.
엔리코는 벌러덩 넘어졌고, 잇몸을 이탈한 이빨이 핏빛 꼬리를 끌며 위로 치솟았다.
“와아아아아아!”
“루우우카아아아아! 만세!”
함성이 내 뒤에서 쏟아졌다.
“어, 어째서? 루, 루카?”
엔리코는 피투성이가 된 얼굴로 나를 보다가 울먹였다. 배신이라도 당한 표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