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ad Born Blood RAW novel - Chapter (126)
배드 본 블러드-126화(126/197)
126
“아, 아파, 으으, 너무 아프잖아. 피, 피가 멈추지 않아.”
소파에 누운 엔리코가 징징거렸다. 엔리코의 여자는 얼음주머니를 가져와 엔리코의 뺨에 대었다.
“자기야, 괜찮아?”
“아파 죽겠어. 세상에, 이, 이렇게 아픈 건 처음이야. 나, 이대로 죽으면, 어, 어떡해.”
염병도 지랄이다. 엔리코의 여자도 웃음을 참지 못했는지 실소를 풋 터트렸다.
“사람은 그 정도로 안 죽어. 그러니까 안심해.”
엔리코의 여자는 투철한 직업의식을 발휘하며 엔리코를 안았다. 풍만한 가슴에 안긴 엔리코는 안정됐는지 눈을 감으며 숨을 들썩였다.
“루카, 너, 진짜, 날, 이렇게 때리고도…… 무사하긴 하겠지.”
엔리코가 습관적으로 나를 협박하려다가 현실을 깨닫곤 기어가는 목소리를 냈다.
“엔리코, 잘 모르는 것 같은데 아까 넌 군중에게 맞아 죽을 수도 있는 상황이었어.”
내가 팔짱을 낀 채로 창밖을 응시했다. 바깥에는 인파가 떠들썩하게 돌아다녔다.
‘여긴 라비앙로즈의 안전가옥.’
지금 나와 엔리코가 있는 곳이었다. 겉보기엔 중산층 가정집처럼 보였다. 그러나 찬장에는 구하기 힘든 의료용품도 다수 있었다. 이 정도면 간이수술도 가능할 정도다.
엔리코 때문에 하층 구역의 인파가 나를 떠받들듯 쫓아다녔다. 그러던 찰나에 그레이스가 나타나 나와 엔리코를 안전가옥으로 빼돌렸다.
나와 엔리코는 안전가옥에서 숨을 돌리고 있고, 그레이스는 우릴 대신해 바깥에서 뒤처리하는 중이었다.
“당신이 그레이스에게 연락한 겁니까?”
내가 엔리코의 여자에게 말했다. 라비앙로즈 소속의 직업여성답게 일이 터지자마자 그레이스를 부른 모양이었다.
“아, 네. 위급한 상황에서는 호출기를 누르면 그레이스 님이 금방 달려오시거든요, 동화 속 왕자님처럼요. 저희가 하층 구역에서 귀족분들을 모실 때는 항상 가지고 다녀요.”
그녀의 말투는 엔리코를 대할 때와 달랐다. 어벙한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지금까지 엔리코의 지적 수준에 맞춰서 연기한 듯했다.
“잘했습니다.”
내가 중얼거렸다. 그레이스 없이 나 혼자서는 인파를 헤쳐 나가기 까다로웠을 것이다.
“소문의 루카 님에게 칭찬을 받으니 기분이 묘하네요. 지금 본인이 한창 화제의 인물인 거 아시죠?”
여자가 내게 호의를 드러내며 말했다.
“와전된 게 많습니다. 전 알려진 것과는 다른 사람이죠.”
내 말에 다 죽어가던 엔리코가 거들었다.
“맞아, 맞아. 말보단 폭력이 먼저 나가는 놈이야! 누가 하층 출신 아니랄까 봐. 봐봐, 날 반쯤 죽여 놨잖아.”
내가 정말로 널 반쯤 죽일 생각이었으면 이미 산송장이 됐을 텐데…….
우리가 떠드는 사이에 창밖에서 누군가 걸어오고 있었다. 안대를 찬 여자, 그레이스였다.
저벅.
그레이스가 안전가옥으로 들어오며 두건을 젖혔다.
“루카 님과 비슷한 체구의 부하를 시켜서 인파를 유인했습니다. 이십여 분 후에 움직이시면 될 겁니다. 그리고 엔리코 님은 제가 댁까지 안전히 모셔다드리겠습니다.”
그레이스는 일 처리만큼이나 깔끔하게 설명을 마쳤다.
“으으, 당분간은 하층 구역에 안 내려올 거야! 야만인들은 이제 지긋지긋해.”
“잘 생각했어, 엔리코. 오래 살고 싶다면 내려오지 않는 게 좋아.”
내가 퉁명스레 말했다. 하지만 엔리코는 마지막까지 방아쇠를 당기지 않았다. 바보에다가 머저리긴 해도 악인의 그릇은 아니었다.
나는 창밖을 보며 팔짱을 끼었다. 인파가 적당히 빠지면 움직일 생각이었다.
“루카 님은 제 생각 이상으로 거물이셨군요. 아니, 거물이 됐다고 하는 게 맞을까요?”
그레이스가 내 옆에 서며 말했다. 그녀는 벽에 등을 기대며 나를 게슴츠레 응시했다. 희미한 미소가 보인다.
“너도 시시껄렁한 소문에 휩쓸리는 부류였나?”
“아니 땐 굴뚝에 연기가 나진 않습니다. 소문만큼은 아니라도 귀족 나리를 몇 명 죽이셨겠죠.”
이건 부정하기 힘들다. 반군이긴 하지만, 라모네스 일가를 처리한 것도 나다. 바오 자카난도 내가 죽인 거고.
“전부 임무였어. 다른 의도가 있었던 건 아니야. 애초에 하층 구역의 영웅 따위가 되고 싶지도 않았고.”
“하지만 지금은 그렇게 움직이고 계시는군요. 이번 사건으로 당신은 귀족의 폭압으로부터 아이들을 구한 영웅이 됐습니다. 아, 엔리코 님. 농담이 아니라 정말로 당분간은 내려오시면 안 됩니다. 라비앙로즈에서도 당신을 지켜주기 힘든 상황입니다.”
그레이스가 엔리코에게 재차 강조했다.
“안 내려올 거라고!”
엔리코가 소리를 버럭 질렀다.
“라간 가문에도 제정신이 박힌 사람이 있을 테니까, 엔리코에게 외출 금지령을 내리겠지.”
나도 한마디 거들었다. 엔리코는 눈을 찌푸리다가 고개를 휙 돌렸다.
찰나의 침묵이 일었다. 그레이스는 나를 염탐하듯 관찰했다. 지금만큼은 그녀가 껄끄러웠다.
‘나도 이번에는 대중이 원하는 대로 움직였다.’
상징성을 갖추기 위해서였다. 황실은 하층 구역의 민심에 신경을 쓰고 있다.
‘하층 구역에서 인기가 많은 나를 쉽게 처분하지 못할 거다.’
어차피 물은 엎어졌다. 날 숨기는 게 힘들어졌다면 오히려 더 드러내야 안전하다.
‘노엘…….’
난 간담이 서늘했다.
노엘 뮬리즈카, 그도 분명히 나처럼 하층민 위주의 지지와 인기를 얻었을 것이다. 지금 내 행보가 노엘과 얼마나 비슷한지 궁금했다.
나는 노엘의 행보와 당시의 역사를 알아내야 한다. 한 줄로 요약한 게 아니라 상세한 기록이 필요하다.
‘아가타의 칩에 당시의 기록이 있을 거야.’
나는 주머니에 손을 넣어 칩 두 개를 매만졌다. 한 개는 아가타의 오래된 칩, 다른 하나는 데이터를 복원한 칩이다.
그레이스의 외눈이 잠시 빛났다. 그녀는 누군가와 통신을 하고 있었다.
“……디바의 전언이 있습니다. 당신에게 필요한 게 있다면 라비앙로즈에선 뭐든 지원할 생각입니다. 당신은 꽤 중요한 사람이 될 것 같으니까요. 미리 투자하는 셈이죠.”
나는 속이 들끓는 걸 느꼈다. 이 와중에 마르티나 디바는 숟가락 하나를 냉큼 얹으려 했다.
“거, 듣던 중 반가운 소식이네. 하층의 일개 갱단 따위가 얼마나 도울 수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한쪽 입술을 씰룩이며 말했다. 그레이스는 내 독설에 익숙하기에 눈꼬리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무력으론 힘들어도 다른 방면으로는 도울 수 있겠죠. 신경이 날카로운 건 이해합니다만, 비합리적인 언행으로 우군을 적으로 만드실 필요는 없을 겁니다.”
침착한 조언이다. 그레이스는 라비앙로즈에 적을 두기에는 아까운 인물이다. 근위대 적성으로 뽑힌 이유가 있었다.
“너도 적당히 하고 라비앙로즈에서 나오는 게 좋을 거다. 이 정도면 은혜는 갚은 셈이야.”
“은혜를 갚았는지는 타인이 아니라 당사자인 제가 판단할 일입니다.”
음, 이것도 맞는 말이다.
난 머리가 식어가는 걸 느꼈다. 그레이스와 이야기하면 이런 면이 좋았다. 이성이 먼저 작동한다. 아마 그레이스가 이성적인 태도를 견지하기 때문일 터다.
내 안의 감정이 정지했다. 이성적 사고가 빠르게 굴러갔다. 나는 눈을 감았다가 떴다.
“그레이스, 네 사격 실력은 어느 정도지?”
“근접 전투보단 사격에 자신이 있는 편입니다. 생도 시절에는 사격술 수석이었고요.”
그럴 것 같았다. 대개 차분한 성격인 녀석들이 사격을 잘한다. 근접 전투는 다소 격정적인 놈들이 잘하고.
휘릭.
나는 외투 안쪽에서 충격권총 루이나를 꺼냈다. 그레이스가 눈을 크게 떴다. 제국 공방의 물건이라는 건 그녀도 알아챘을 것이다.
“네게 ‘루이나’를 당분간 맡기겠다. 너라면 중요한 순간에 날 도울 수 있을 테니까.”
난 그레이스를 통해 포석을 깔았다. 이 수를 나중에 쓸지 안 쓸지는 나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은 멀리 보고 행동할 때였다. 내가 괴물들과 싸우려면 이 정도로 과감하게 내다봐야 했다.
“제가 남의 애인을 탐하는 부류의 인간이 아니지만…… 이건 좀 멋지네요.”
그레이스가 루이나를 받아 들더니 제원을 확인했다. 그녀가 부드럽게 루이나를 쓰다듬다가 품에 집어넣었다.
끼익.
여분의 탄환까지 넘긴 나는 문을 열며 바깥을 확인했다. 이젠 나가도 될 것 같았다.
“제게 이걸 맡기는 게 현명한 판단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저는 가브리엘이 아닙니다. 당신과 라비앙로즈는 상호 이익에 따라 협력하는 관계죠.”
그레이스는 나가려는 나를 보며 말했다.
“알아. 그래서 난 라비앙로즈가 아니라 네게 맡기는 거야, 그레이스.”
그녀는 말문이 막힌 듯이 움찔했다. 나는 고개만 나직이 끄덕이곤 안전가옥을 나섰다.
난 그레이스의 감정을 이용할 생각이다. 나쁘다고 생각해도 어쩔 수 없다. 쓸 수 있는 건 다 써야 하니까.
* * *
엔리코 사건으로부터 사흘이 지났다.
나를 보는 사람들의 시선이 바뀌었다. 근위대 본부에서도 날 보고 수군거리는 이가 늘었다.
‘반귀족의 상징, 루카우스 쿠스토리아.’
이게 꼬리표처럼 붙어 있었다. 근위대의 분위기가 이 정도라면, 일반적인 귀족 사회에서 나를 경계하는 이가 급속도로 늘고 있을 것이다.
날 품고 있는 쿠스토리아 가문의 입장도 꽤 곤혹스러울 것이다.
‘너는 우리의 편이 맞는 거냐?’
사람들이 그런 시선으로 나를 보는 듯했다.
‘내가 쿠스토리아 가문만 아니었다면…… 아마 좋지 않은 꼴을 당했겠지.’
내가 직접적인 모욕이나 신문을 당하지 않는 건 쿠스토리아 가문이라는 후광 덕분이었다.
쿠스토리아 가문의 양자에게 반귀족의 첨병이냐고 추궁하긴 힘들다. 그건 곧 쿠스토리아 가문에 대한 의심이니까.
나는 가문의 후광을 제대로 누리고 있었다. 헤일라스 만세, 쿠스토리아 만세다.
……난 실없는 생각을 하며 휴게실의 일레이와 마주했다.
“이야, 귀족 사냥꾼 님이잖아. 어이쿠, 노려보지 마. 무서우니까.”
내 실없는 생각만큼이나 얼빠진 농담이 일레이의 입에서 나왔다.
“내가 없는 자리에서는 다들 날 어떻게 생각하고 있어?”
난 바로 본론을 꺼냈다. 일레이도 농을 집어넣고선 주변을 살폈다.
“동기나 너와 가까운 이들은 별로 신경 쓰진 않아. 네 성격을 잘 알고 있으니까.”
“그건 다행이네. 다른 사람들은?”
“하층의 고아를 귀족 사회가 받아 줬더니 은혜도 모른다니 뭐니 욕하며 술안주로 삼고 있지. 마치 자기들이 네게 호혜를 베푼 것처럼 굴어.”
“뭐, 예상대로네. 말로만 떠드는 거면 차라리 다행이지.”
“프란세크 전하는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널 이 지경에 빠뜨린 거야? 너, 큰 실수라도 했어? 웃긴 건 그 직후에 네가 암살자로부터 전하를 구하기도 했고, 흐음.”
일레이도 빠르게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부족한 정보로 전체를 보긴 어려울 터다.
“됐어. 그보다 너희 집안 분위기는 어때?”
“카타콤 광산 건으로 떠들썩해. 우리 집안에 어르신 몇 분은 연금이 늘어났다고 좋아하기도 하고…….”
일레이는 나를 응시하며 말꼬리를 끌었다. 그도 군부의 분위기가 이상한 건 알 것이다. 카르티카 가문에는 고위 군인이 많으니까.
“……루카. 카타콤 광산 이권을 상이군인 기금으로 돌린 건 황실의 의지가 아니지?”
이 정도는 큰 비밀이 아니다. 군부의 핵심 인사는 다 아는 내용이니까. 군인 가문의 차기 가주인 일레이의 위치라면 추론 가능한 내용이었다.
“군부가 불온한 행동을 한 거지.”
“옛날엔 나만 불온한 줄 알았는데…… 참 웃기네. 지금 생각해 보면 아케인 요새에서 우리가 했던 짓도 근위대장님은 알고 계시지?”
일레이의 추측이 여기까지 미쳤다. 이건 그가 몰랐으면 했다.
“맞아, 그것도 알면서 넘어간 거야. 그런 일로 너와 나를 처분하기엔 아까웠다고 하더군. 근위대에서 용납 가능한 일탈이었던 거지.”
일레이는 순간적으로 어두운 미소를 지었다. 그의 비틀린 입술 아래에선 턱의 핏줄이 두드러졌다. 손끝도 떨렸다.
“하, 하하. 그래, 어쩌면 릴리안을…….”
“진정해, 일레이. 지난 일이야. 당시엔 최선의 판단이었다.”
내 말이 무색할 정도로 일레이는 감정을 빠르게 내려놓았다. 그가 깍지를 끼며 손의 떨림을 지웠다.
“알아. 다 지난 일이지. 곧 혼란이 아크바란을 덮칠 거야. 너도 그렇게 생각하지?”
“아마도.”
“이번 혼란은 우리에겐 기회야. 너와 내겐 출세할 기회.”
출세라는 단어가 일레이의 입에서 나왔다. 원래라면 내 입에서 나올 단어다.
예전에 나는 일레이가 불온한 생각을 접었으면 하는 생각을 했다. 그러나 막상…… 제국의 질서에 순응한 듯한 일레이를 보니 낯설었다.
내 시선의 의미를 알아챈 듯이, 일레이가 난간에 등을 기대며 웃었다.
“너무 그렇게 울지 마, 루카. 난 아직도 제국이 이상하다고 생각해. 여긴 잘못된 사회야. 하지만 그걸 바꾸려면 출세하는 방법밖에 없잖아? 아직은 난 네가 기억하는 일레이 카르티카야.”
“운 적 없어, 멍청아.”
일레이가 능글맞게 웃었다. 그가 난간 아래로 뛰어내리고선 나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뭘 하든 몸조심해라, 루카.”
난 일레이가 사라지는 걸 바라봤다.
……그럼 나도 슬슬 가봐야 할 것 같았다. 오늘은 키누안이 나를 호출했다. 때가 된 모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