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ad Born Blood RAW novel - Chapter (128)
배드 본 블러드-128화(128/197)
128
키누안과의 임무는 고요히 끝났고, 나는 쿠스토리아의 저택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폭풍의 계절이 시작됐다.
첫 주의 시작은 하늘이 흐리고 바람이 거세지는 정도라고 한다. 이땐 아크바란 내의 비행금지령이 떨어지지 않는다.
첫 주가 폭풍기를 준비할 마지막 기회인 셈이었다. 두 번째 주부터는 공중차량과 비행선을 이용하지 못했다.
폭풍의 위력이 정점에 이르는 세 번째 주부터는 사실상 외출 금지나 마찬가지였다. 사상자가 급격히 발생하는 시기다.
나는 쿠스토리아 저택에서 폭풍기의 첫 주를 맞이했다.
덜컹, 덜컹.
나는 거칠게 흔들리는 창문을 응시했다. 바깥은 보이지 않는다. 외부에 철판을 덧대어 보강했기 때문이다.
이번 폭풍기는 첫 주조차 상당한 악천후였다. 바깥소식을 들어보면 공중차량과 비행선, 그리고 드론으로 인한 사고가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었다.
‘두 번째 주부터 비행금지령을 내리는 이유가 있네.’
나는 손가락 하나로 바닥을 짚은 채로 물구나무서기를 하고 있었다. 균형 감각이 만족할 만큼 돌아왔다. 새 의체의 적응도 끝났다는 뜻이다.
‘폭풍기의 셋째 주부터는 네메시스가 상류층 거주지에서 폭동과 테러를 일으킨다. 많은 귀족이 죽겠지.’
특히 황실이 견제하는 가문의 귀족들이 눈에 띄게 죽을 터다.
‘그리고 그 혼란을 틈타 황실도 군부의 주요 인사를 직접 제거한다.’
황실의 어둠을 담당하는 자들이 그때 움직일 것이다. 일단 유치하지만, 놈들을 어둠의 근위대…… 아니, ‘그림자’라고 칭하자. 황실의 그림자.
‘황실의 그림자는 쿠스토리아 가문을 노릴 것인가.’
헤일라스는 제거 대상에 있는 걸까? 있다고 하더라도 헤일라스를 암살할 정도의 실력자가 있을까? 헤일라스 수준의 군인이 폭도에 휘말려 죽는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다. 자연스러운 암살은 어렵다.
‘이반은…… 키누안을 암살할 기회를 내게 만들어 주지 못했다.’
난 키누안과 함께 네메시스와 접촉했다. 그사이에 키누안을 죽일 기회는 없었다.
‘이반과의 협력은 일단 배제한다.’
이반이 어떤 기회를 준다면 내가 알아채고 움직일 수 있으리라. 하지만 일단 없다고 생각하는 게 맞다.
휘릭.
나는 손으로 바닥을 치면서 뛰어올랐다. 한 바퀴 회전한 나는 가뿐히 착지했다.
‘내게 남은 길은 헤일라스를 내치는 것뿐.’
난 키누안의 조언을 곱씹었다.
‘헤일라스는 날 이용하려고 가문에 묶어둔 건가? 계획이라면 언제부터? 아니면 우연인가?’
어쩌면 키누안은 그저 말재간으로 내 마음을 흔든 것일 수도 있다. 키누안은 심리 장악에 능한 인물이다.
‘누굴 믿어야 하고, 누굴 배신해야 하는가.’
선택은 내 몫이다.
‘아가타, 전 노엘의 선택을 보고 배울 기회조차 없었습니다. 정보를 주는 게 너무 늦었어요.’
선택의 시기는 다가오고 있다.
끼릭.
난 방을 나섰다. 바깥에서 인기척을 느꼈기 때문이다.
저택은 붐볐다. 평소에는 상층 구역의 거주지에서 지내다가 폭풍기에만 불상사를 피해 저택으로 오는 친족들 때문이다. 현명한 판단이긴 했다.
“지금 가신다고요? 비행금지령이 언제 떨어질지 모르는 상황이잖아요. 생각보다 폭풍이 거세요.”
복도를 보니 에바가 헤일라스를 말리고 있었다. 내가 느낀 인기척이 이거였다.
헤일라스는 근위대 제복을 입고 있었다. 그는 본부로 외출할 생각인 듯했다.
“중요한 일이 생겼어. 내가 빠져서도 안 되고.”
헤일라스가 강조했다. 설사 업무가 없더라도 그는 저택에 머물러선 안 된다.
폭풍기 동안 저택에 갇혀 지내면 변하는 상황에 대응하지 못한다. 위험하더라도 상층 구역의 도심지에 있어야 한다.
헤일라스와 에바는 나와 눈이 마주쳤다.
“내가 자리를 비운 동안 저택의 책임자는 너다, 루카. 사람들에겐 에바보다 네 명령을 우선하라고 말해뒀어.”
헤일라스가 내 앞에 서며 말했다. 호칭도 묘하게 바뀌었다. ‘자네’가 아니라 ‘너’였다. 다른 자식들처럼 말이다.
나는 빨리 대답하지 못했다.
‘헤일라스를 보는 게 이번이 마지막일 수도 있다.’
속이 울렁거렸다.
“……알겠습니다.”
내가 할 말은 이것뿐이었다.
내겐 시간이 없었다. 제국의 계획과 흐름을 알아차리는 게 너무 늦었다. 내 힘과 행동으로는 거대한 흐름을 바꾸지 못했다.
‘헤일라스가 죽는다면 불명예스러운 사유일 거고, 황실이 그 여죄를 물어 가문이 멸족당할 수도 있다. 멸족을 피하더라도 쿠스토리아는 모든 권세를 잃겠지.’
권세를 잃는다면 몸을 지킬 수단도 사라진다. 쿠스토리아 가문이 권세 아래에 쌓아온 원한과 앙금이 재앙처럼 닥칠 것이다. 그리고 나도 기록과 신원이 말소된 아키에스 도미니로 활동해야겠지.
“루카우스 쿠스토리아, 내 부탁을 기억해 주게.”
헤일라스가 내 어깨를 두드리더니 아래로 내려갔다.
‘나는 자신의 실패를 대비한 보험인 건가?’
내 머릿속에 드는 생각은 하나였다.
‘헤일라스는 내가 감시자인 줄은 모를 거다. 아무리 통찰력이 대단하더라도 한정된 정보에서 황제의 감시자라는 기괴한 직무를 알아채긴 힘들어.’
그러나 헤일라스는 내게서 뭔가를 느끼긴 했을 것이다.
키누안과의 기이한 공존, 생도에게 지나친 공적, 진홍의 황태자 프란세크와의 교류, 그리고 아가타의 집착적인 신뢰.
정황 증거로도 헤일라스는 자신이 이해하지 못하는 어떤 영역에서 내가 활동하는 걸 알 것이다.
‘자신이 실패하더라도 가문을 지킬 가능성이 있는 자가 나라고 생각한 거야. 도박을 건 거지.’
그래서 헤일라스는 나를 수상하게 여기면서도 추궁하지 않았다. 내게 환심을 얻어야 할 테니까. 공을 들여가면서 내가 쿠스토리아 가문에 정을 붙이게끔 상황을 조성했다.
키누안의 조언까지 생각하면 모든 그림이 보였다.
‘헤일라스는 나를 이용하고 있다.’
이건 틀린 말이 아니다. 그는 친자식보다 날 더 아끼는 모습을 연출하면서 은월관까지 같이 들어갔다. 생각해 보면 과할 정도의 특혜와 호의였다.
‘내게 보여준 애정이 전부 거짓은 아니겠지. 하지만 이런 계산이 섞여 있다는 건 분명해.’
나는 입술을 비틀어 웃고 싶었다.
아무리 능력과 재능이 있다고 한들, 하층의 천애 고아인 내게 잘 대해준 이유가 당연히 따로 있겠지!
나도 알곤 있다. 그렇기에 헤일라스의 호의를 계속 불안하게 여긴 것이다. 하지만 막상 그 이면을 깨달으니 입맛이 썼다.
헤일라스는 친족과 가신의 배웅을 받으며 공중차량에 탑승했다.
휘이이이잉!
공중차량은 평소보다 더 흔들리며 하늘로 치솟았다. 엔진의 굉음은 바람 소리도 묻을 정도로 컸고, 추진체의 불꽃은 평소보다 더 길었다. 비행이 쉽지 않다는 뜻이었다.
‘헤일라스는 어떤 결단을 내릴 것인가.’
내 눈으로 보진 못할 것이다, 그가 성공하든 실패하든.
“루카우스.”
배웅을 마친 에바가 나를 불렀다. 나와 그녀는 자리를 이동했다. 그녀가 처음으로 내 방에 들어왔다.
“어머니, 제게 불만이 있으신 건 압니다. 하지만 저는 가주 대행으로…….”
“그런 이야기를 하고 싶은 게 아니란다.”
에바는 피곤하다는 듯이 의자에 앉았다. 그녀가 작은 한숨을 내쉬더니 말을 이어갔다.
“헤일라스, 그이가 살아서 내 곁으로 돌아올 수 있을까? 나보단 네가 더 잘 알 거라 생각하니까 묻는 거야.”
나는 흠칫했다.
에바는 대단한 통찰력을 가지거나 정치 감각이 우수한 건 아니다. 지금까지 행보만 봐도 그랬다. 때론 욕심이 지나쳐 어리석은 짓도 저질렀다.
……하지만 정을 통한 부부는 뭔가 달라도 다르긴 한 모양이다.
헤일라스조차 에바에게 모든 불안을 감추지 못했겠지. 나는 모르지만, 이쪽 생리에 밝은 마르티나 디바나 그레이스의 말에 따르면 침대에서 남자는 비밀을 쉽게 드러낸다고 하니까.
나는 입술을 몇 번이나 달싹였다. 뭐라 말해야 할지 모르겠다. 이런 상황은 처음이다. 위로의 말을 내뱉어야 하나? 아니면 냉정한 현실을?
이딴 고민을 하자니 미칠 것 같다. 차라리 전장으로 날 보내줬으면 좋겠다.
“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냉정하게 가능성만 따지면 낮습니다.”
난 살가운 말을 할 수 있는 놈이 아니다. 가끔은 나도 이런 내가 싫었다.
불편한 상황이다. 에바의 턱을 타고 눈물이 뚝 떨어지면서 침묵이 깨졌다.
“……최악의 사태가 벌어지면 난 신경 쓰지 말고 버리렴. 어차피 난 그이 없이는 살아갈 자신이 없으니까.”
“아버지의 부탁에는 당신도 들어있습니다, 에, 아니, 어머니.”
난 그녀의 이름을 부를 뻔했다.
“터놓고 이야기하자꾸나. 어차피 난 널 아들로 생각하지 않아. 너도 날 어머니라 여기지 않겠지. 하지만 헤일라스가 너를 믿는 이상에야, 내 아이들을 지켜줄 사람은 너밖에 없는 게 맞을 거야. 무슨 일이 생기더라도 내 아이들을 지켜다오.”
“그럴 생각입니다. 이렇게 말씀하시지 않으셔도요.”
에바가 어깨를 들썩였다.
“내 말을 아직 이해하지 못했구나, 루카. 나는 쿠스토리아 가문이 무너지고 다른 가문원이 다 죽는 한이 있어도, 네가 가주 대행의 직무와 의무를 내팽개치더라도…… 내 자식들만큼은 지켜달라고 말하는 거란다.”
에바가 나를 똑바로 보았다. 그녀의 동공 테두리에서 흘러나오는 빛은 광기마저 띠고 있었다.
……헤일라스는 아버지이길 포기했다. 그러나 에바는 어머니였다.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내 침묵은 부정이었다.
“그이가 성공하기만을 바라야겠구나.”
에바는 그리 말하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녀가 내 방에서 나갔다.
내가 헤일라스의 빈자리에 앉은 지 1시간도 지나지 않았다.
‘벌써 힘들군.’
에바가 내게 자존심을 굽혔다. 무리한 요구를 하기 위해서였다. 설사 저 요구를 내가 들어주고 싶더라도 방도가 없었다.
역시 가주 따윈 내 적성과 맞지 않았다. 뗄 수만 있으면 쥬페에게 내던지고 싶었다.
내겐 더 많은 선택지가 필요했다. 지금 상황은 내가 원한 방향이 아니다. 무너지는 쿠스토리아 가문을 책임지고 싶진 않다.
‘……늦은 건가, 늦지 않은 건가.’
나는 주머니를 뒤적여 두 개의 칩을 꺼냈다. 아가타의 칩과 복원 데이터의 칩.
‘난 노엘 뮬리즈카의 선택을 봐야 한다.’
내게 남은 방도는 하나였다.
삑.
난 지젤을 호출했다. 그녀가 들어오자마자 난 용무를 바로 꺼냈다. 그녀의 얼굴을 제대로 본다면 하지 못할 말이다.
“지젤, 바바라와 접촉할 방법이 필요해. 네가 넷에서 신호를 보내면 바바라가 대답할 거야.”
지젤의 안색이 딱딱했다. 그녀의 손끝이 떨리고 있다.
“……내 신호에 대답한다고 치자, 바바라가 우릴 도와줄 이유가 없잖아.”
난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말할 때가 됐다.
“바바라는 제국의 첩자다. 언제 꼬리가 잘릴지 모르는 위태로운 처지지. 내겐 바바라의 생존확률을 높일 수 있는 정보가 있어. 협조를 거부하지 않을 거야.”
지젤은 망가진 컴퓨터처럼 과잉 정보로 멍하니 서 있었다. 그간의 기이한 상황이 그녀의 머리를 단숨에 덮쳤을 것이다.
“잠깐, 바바라가, 아카데미에서 그 사건들이, 그러면…….”
지젤이 중얼거리더니 비틀거렸다. 난 황급히 팔을 뻗어 쓰러지려는 지젤을 지탱했다.
서서히 상황을 이해한 지젤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녀는 내 팔을 잡다 못해 손톱을 세워 팔뚝을 긁었다.
뚜둑, 뚝.
내 팔뚝의 인공 피부가 찢어지고 있었다.
“도대체 아버지와 너는…… 그동안, 나를 뭐라고 생각한 거야?”
사람이라도 찌를 듯한 독기 어린 표정이었다. 이런 지젤의 표정은 간만이었다. 그리고 예전과 달리 이번에는 마음이 아팠다.
“헤일라스와 나는 줄곧 이런 세계에 몸을 담고 있었어. 속는 자는 없고, 속이는 자만 있는 정신 나갈 것 같은 무저갱이지. 넌 지금 입구에 발만 뻗은 거야.”
난 지젤의 분노를 곱게 달랠 생각이 없었다. 이 정도도 설득에 끙끙거려야 한다면 협력은 불가능하다. 그녀를 좋아하지만, 공사는 별개다.
“지젤, 나와 같은 시선으로 어둠을 보고 싶다면 정신을 차리고 내 말을 들어. 만약 버티지 못하겠다면 지금 내 뺨을 치고 여기서 나가면 돼.”
지젤이 한 걸음 물러나더니 손을 들었다. 난 다가올 충격을 예상하며 전투 반사를 억눌렀다.
짝!
눈앞이 번쩍거렸다.
……손이 맵다. 그녀의 팔도 의수인지라 쇳덩이다. 방금 내 어금니가 부러지면서 입안을 돌아다녔다. 턱의 관절도 자리를 이탈해 삐걱거렸다.
“뺨도 치고 이야기도 들을래.”
지젤이 자리에 앉으며 말했다. 그녀가 새초롬한 표정으로 팔짱을 꼈다.
으득!
난 손으로 어긋난 턱을 끼워 맞추며 입을 위아래 좌우로 움직였다.
“으윽, 음. 제3의 선택이로군. 둘 다 하겠다니 욕심이 많네.”
내가 그리 말하며 부러진 어금니 조각을 손가락으로 집어서 꺼냈다. 뭐, 이 정도면 싸게 친 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