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ad Born Blood RAW novel - Chapter (129)
배드 본 블러드-129화(129/197)
129
나는 지젤에게 바바라의 정체를 설명했다.
바바라는 제국이 십수 년을 준비해 투입한 첩자다. 네메시스의 내부를 들여다보기 위해 준비한 인재. 반사회적이나 제국에 순응하며, 광기를 머금고 있으나 이성이 빛나는 존재.
“……그게 바바라야. 그러니까 네메시스조차 바바라가 제국의 첩자일 거라 예상하지 못하는 거지. 누가 봐도 테러리스트에 어울리는 미치광이 마녀니까.”
내 말이 끝났다.
마음의 각오를 굳힌 지젤조차 안색이 몇 번이나 바뀌었다. 불안과 초조, 분노…… 그리고 배신감. 그녀의 감정이 내겐 고스란히 보였다.
“아카데미의 일을 아버지는 예전부터 알고 계셨던 거네. 내가 그렇게 고통받는 걸 알면서도…….”
“지켜볼 수밖에 없었던 거야. 바바라는 제국이 공들여 준비한 첩자니까. 제국의 상층부가 바바라 주변을 맴돈다면 네메시스가 데려가지 않았겠지.”
지젤도 머리로는 이해할 것이다.
“바바라가 크라치아 아카데미를 가지고 놀 수 있었던 것도 제국이 방관해서였구나. 이제야 이해가 돼. 바바라는 ‘트로이 목마’였네.”
지젤의 손가락은 불안을 드러내듯 가만히 있지 못했다. 이야기를 들을수록 불만과 궁금증만 더 커졌으리라.
“바닥을 파헤치고 들여다볼수록 의문은 커지고 불안과 공포는 걷어 낼 수가 없을 거야. 명확한 답은 나도 내줄 수 없어.”
나는 지젤의 심정을 읽듯 말했다. 설명한다고 끝나는 일이었다면 진작 말했을 것이다.
“바바라가 내게 집착하는 이유도?”
“그건 지젤, 네가 알아내야 해. 네 과거 행동에 원인이 있을 거야. 아니면 그저 바바라가 미친 걸지도 모르지. 광인의 행동에는 합리적인 이유가 없어도 되니까.”
지젤은 탁자에 놓인 물잔에 손을 뻗었다. 그녀는 메마른 입술을 축이더니 고요히 눈을 감았다.
“난 바바라가 무서워, 루카. 그 애의 속내조차 이해할 수 없지. 나를 좋아하는지 증오하는지조차도 모르겠어.”
내 생각엔 증오는 아닐 거라 생각한다. 나도 엇나간 인간이기에 알 수 있다. 바바라는 호의와 애정을 뒤틀린 방식으로 표현하는 것이다. 흠, 굳이 이런 내 생각을 말할 필요는 없겠지.
지젤이 눈을 뜨며 단말기를 꺼냈다. 홀로그램 화면에서 네트워크 아이디 입력이 떠올랐다.
“너는 바바라와 협상이 가능할 거라 생각해?”
지젤이 동공의 시선으로 글자를 입력하며 말했다.
“바바라는 미치광이지만 최후에는 언제나 이성적 판단으로 행동해. 그게 더 괴이한 점이긴 하지. 이익이라고 생각한다면 내 거래를 받아들일 거야.”
“이 거래가 아버지와 가문에게 정말로 이득이 되고?”
아이디 입력을 끝낸 지젤이 접속을 망설이며 물었다.
“쉽게 말할게. 아버지와 쿠스토리아 가문은 지금 위기야. 아버지, 헤일라스는 살아서 우리 곁에 돌아오지 못할 수도 있어.”
“황실과 대립 중이라는 게 사실이었나 보네…….”
지젤도 어디선가 들은 게 있었던 모양이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홀로그램 화면을 쳐다봤다. 지젤이 나직이 고개를 끄덕이며 네트워크에 접속했다.
* * *
네트워크와 전자전은 내 특기와 관심사가 아니다. 하지만 제국 네트워크의 분류 정돈 알고 있다.
하층민도 접속이 가능한 하위 네트워크들. 민간회사에서 운영하는 자유로운 망이다. 그리고 오염된 데이터와 질이 낮은 정보가 대다수였다.
하위 네트워크는 제국 공용으로 하층민도 이용하는 만큼 가격이 싸지만, 보안 개념이 없다시피 했다. 보안 등급이 낮은 단말기는 접속만 해도 바이러스로 엉망진창이 된다.
일반적인 제국 상류층은 근위대 내부망처럼 기관과 회사, 가문에서 독자적으로 관리하는 사설 네트워크를 사용한다. 각 집단의 소속원이 이용하며 엄선된 정보와 데이터가 있는 만큼 안전하며 신뢰도도 높다.
‘대신, 항상 상위 기관의 검열과 감시 아래에 있지.’
그리고 황실이 관리하는 최상위 네트워크가 있다. 고위 관료와 최상류층만 열람과 접근 허가를 받을 수 있었다. 내가 황제의 감시자 권한으로 접속하는 망도 상위 네트워크였다.
‘하위, 내부, 상위.’
일반인은 크게 세 가지로 분류하지만, 해커와 같은 전자전 전문가들은 더 복잡하게 나눈다고 들었다. 애초에 그런 전기쟁이들은 외계종족의 서버로 우회해 코라, 벨라토의 서버와 네트워크도 접근하기도 했다. 뭐, 난 그쪽 세계는 관심도 없고 이해도 어렵다.
“지젤은 네트워크에서 널 항상 추적해 두고 있을 거야.”
내가 지젤의 곁에 서서 말했다. 지젤은 앉은 채로 홀로그램 화면을 조작했다.
“알아. 그래서 나도 네트워크에 내 아이디로 접속한 적이 없어.”
우린 홀로그램 화면을 쳐다봤다.
공용으로 쓰는 하위 네트워크에 접속하자마자 방화벽이 작동했다. 단말기의 보안 방화벽이 수백 개에 달하는 바이러스와 불법 프로그램을 제거하고 있었다. 말 그대로 불태우는 중이다.
삑, 삑! 삐삐삐삐삑!
접속하자마자 알람이 무지막지하게 떠올랐다.
-오해가 있으면 이야기했으면 해.
-우린 친구잖아.
-내가 널 보호했어! 왜 그걸 이해하지 못하는 거야?
-접속해, 접속해, 접속해, 접속해, 접속해, 접속해…….
메시지의 발신자는 매번 달랐다. 그러나 전부 바바라의 메시지라는 건 누가 봐도 알 수가 있었다.
얼핏 봐도 수백 개가 넘는 메시지가 중첩돼서 화면을 빼곡하게 메웠다. 무슨 수작을 부렸는지 몰라도 일괄 제거조차 불가능했다.
일일이 눌러서 메시지를 전부 제거해야 했다. 눈을 감지 않는 이상에야 볼 수밖에 없다는 뜻이다.
-루카우스 쿠스토리아를 믿지 마.
나는 움찔했다. 그리고 이어진 메시지는 가관이었다.
-루카는 뒷골목에서 남자들과 뒹구는 변태야! 내가 봤다고. 이게 그 증거야!
합성한 조작 사진이 떠올랐다. 끔찍한 장면이었다. 내 얼굴을 한 누군가가 말로 설명하기 싫은 짓을 하고 있었다.
“……가짜지?”
지젤이 사진과 나를 번갈아 보며 물었다. 그녀의 뺨에 떠오른 묘한 홍조가 내 착각이었으면 좋겠다.
“당연하지. 장난해?”
난 인상을 찌푸리며 대답했다.
-히히, 지젤. 간만에 얼굴을 봐서 좋았어. 여전히 사랑스럽구나.
메시지가 최근으로 가까워졌다.
-일레이 카르티카? 지금 제정신이야? 그런 쓰레기와 혼인한다고? 거짓말이지?
-지젤? 지젤? 지젤? 지젤? 지젤? 지젤? 지젤?
-왜 네 널 볼 수 없는 거야? 무슨 짓을 한 거냐고!
격앙된 메시지가 있었다. 헤일라스의 조치 덕분에 스토킹이 힘들어진 모양이었다. 헤일라스도 나름대로 계속 지젤을 지키고 있었다.
-나, 갑자기 내가 무서워, 네가 미워질 것 같다는 생각마저 들었거든. 그러니까 연락해, 지젤. 당장!
상위 기관에서 검열하더라도 흔해 빠진 악질 스토커 정도로만 보였다. 실제로도 스토커가 맞긴 하다.
-폭풍의 계절이 온다네, 몸조심해. 나도 잘 있으니까 걱정 말고.
이 메시지를 끝으로 연락이 오랫동안 없었다.
‘바바라도 네메시스 내부에 있으니 상당히 바쁘겠지.’
제국의 의도대로라면 바바라는 네메시스에서도 중책을 맡고 있을 것이다.
삑.
그리고 새로운 메시지가 떠올랐다.
-지젤! 제발, 대답해 줘. 나, 요새 너무 힘들어. 예전처럼 나와 이야기해 줘. 제발, 제발, 제발! 도망가지 마. 나쁘게 대하진 않을게.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나는 상체를 숙이며 탁자를 손으로 짚었다.
“내가 대신 이야기할게.”
나는 홀로그램 인터페이스를 당겨서 내 쪽으로 옮겼다.
-오랜만이야.
메시지 전송. 그리고 바로 오는 답신.
-넌 누구야? 누군데 지젤의 아이디를 쓰는 거지? 반드시 찾아서 죽여버릴 거야. 한 침대에 있는 거 아니지? 안 돼, 지젤. 넌 내 여신이야! 여신은 순결해야 해!
-난 남자랑 뒹구는 변태니까, 그건 걱정 마. 지젤의 정조는 내가 보증하지.
메시지를 본 지젤이 나를 흘겨보더니 옆구리를 꼬집었다. 음, 피멍이 든 것 같다.
삑.
메시지에는 글자가 없었다. 대신에 이상한 코드가 보였다. 단말기는 해당 코드를 외부 네트워크 출입구로 인식했다.
우린 쓰지 않는 구형 단말기를 가져와서 코드를 입력했다. 이것도 사실 불안하긴 했다. 바바라와 네트워크에서 접촉하는 건 몹시도 위험한 짓이다. 그쪽 세계는 바바라의 전장이다.
현실에서 내가 바바라의 목을 꺾는 데 1초도 걸리지 않는다. 그러나 네트워크에선 그 반대다. 내게 조그마한 보안의 허점만 생겨도 바바라는 우리의 단말기를 1초 만에 털어 버릴 것이다.
위이이잉!
구형 단말기가 코드를 해석하고 있었다. 구형이라지만 나름 고급형이라 방화벽도 꽤 튼튼하다. 바이러스가 검출되지 않는 거 보니 일단은 안심할 수 있었다.
“처음 보는 글자로군.”
내가 화면을 보며 중얼거렸다. 눈에 익지도 않은 이상한 글자가 길게 이어졌다. 점과 선으로 이어진 글자는 희한하기 짝이 없었다.
“타지룬의 문자야. 타지룬의 서버를 빌려서 우회했나 보네. 돈독이 오른 놈들이라 한두 푼으로 해주는 게 아닐 텐데……”
나보다 먼저 글자를 알아본 지젤이 말했다.
……타지룬, 솔직히 낯선 단어다. 난 배움을 떠올리려고 악착같이 뇌를 쥐어짰다. 오래된 창고 구석에서 먼지가 잔뜩 쌓인 책을 꺼내는 느낌이었다.
‘상업의 타지룬.’
드디어 생각났다.
타지룬이라는 종족이 있다. 뱀처럼 생겼으며 종족 전체가 무역과 상업에 종사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놈들이다.
에퀘시안이 용병 종족이라면 타지룬은 상인 종족이었다. 군인인 내겐 정보의 중요성이 낮은 종족이다. 상인 종족답게 교활하고 비겁하다는 것 정도만 안다.
-이쪽 네트워크는 내가 사재를 다 털어도 오 분밖에 쓰지 못해. 용건이 있으면 빨리 말해, 루카. 중요하지 않은 일로 날 부른 거라면 후회하게 될 거야.
-거래하고 싶다.
-후후, 저번과는 상황이 달라. 그때 나는 네게 붙잡힌 상태였기에 협력한 것뿐이야. 여기선 내가 너보다 강해. 우월한 위치에 있지. 거래해야 할 이유가 없어. 그러니까 서둘러 날 꼬셔 봐.
나는 손가락을 빨리 움직여 단어를 조합했다. 언제 바바라가 사라질지 모른다.
-노엘 뮬리즈카의 기록이 가상 시뮬레이션 데이터 형태로 내게 있다. 이걸 현세대 형식으로 변환해 주면 네게도 주지. 분명히 도움이 될 거다.
노엘 뮬리즈카라는 말에 바바라도 바로 답신하지 않았다.
“노엘?”
지젤이 고개를 갸웃하며 반문했다.
제국은 노엘 뮬리즈카를 의도적으로 가르치지 않는다. 낯선 게 당연했다.
노엘에 대해 따로 찾아보더라도 반란 주동자라는 정보만 간략하게 나온다.
-이건 좀 흥미롭네. 너 정체가 뭐야? 설마 나와 동류인 건 아니지?
-그건 네 알 바 아니지. 직접 만나서 전달하겠다.
-조건이 있어. 지젤도 같이 와.
나는 지젤을 흘깃 보았다. 지젤이 내 손등에 손바닥을 얹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우린 시간과 장소를 정했다. 바바라는 우리가 예상치 못한 모습으로 나타날 것이다. 그녀는 이제 전신의체니까.
바바라와의 통신이 끝났다. 바바라는 모아둔 돈의 절반을 썼다며 투덜거렸다.
“루카, 약속 하나만 해줄 수 있어?”
“내용을 알기 전엔 약속할 수 없어.”
“이번 폭풍이 지나가고 나면, 네가 겪은 일을 전부 말해줘. 그게 무엇이든 받아들일 각오가 됐으니까.”
말할 수 없다. 내 침묵은 부정이다.
스륵.
지젤이 내 손가락을 잡고 있던 손을 뗐다. 나는 손가락을 움찔했다가 주먹을 쥐었다.
“내 역할에 충실하겠지만 이건 알아둬. 나는 순종적인 어머니와 달라. 속내를 터놓지 않은 사람을 끝까지 사랑할 순 없을 거야.”
나는 아직 노엘의 선택과 고뇌를 모른다. 그러나 헤일라스의 고뇌는 알 것 같았다.
두 가지 역할을 동시에 수행하는 건 힘들다. 가주와 아버지든, 감시자와 연인이든 말이다. 어느 한쪽에 충실하면 다른 쪽은 소홀히 할 수밖에 없었다.
헤일라스의 심정을 똑똑히 알겠다.
……지키려면 미움을 받아도 어쩔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