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ad Born Blood RAW novel - Chapter (130)
배드 본 블러드-130화(130/197)
130
나와 지젤은 결단을 내렸기에 망설일 건 없다. 나는 이제 머뭇거리지 않을 것이다.
“어머니, 저도 자리를 비우겠습니다. 급한 일이 생겼습니다.”
내가 에바를 찾아가 말했다.
가주 대행인 내가 자리를 비우면 다음 책임자는 에바였다. 그녀는 나를 쳐다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에바는 당황하지 않았다. 그저 얼음장 같은 눈으로 나를 보았다. 안주인다운 위엄이 있었다.
“무슨 일인지는 몰라도, 네 아버지를 돕는 일이면 좋겠구나.”
난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나도 내 행동의 결과가 누구에게 도움이 될지 모른다.
“그리고 지젤도 같이 갈 겁니다. 지젤의 도움도 필요합니다.”
이번엔 침묵이 잠시 일었다. 에바가 아랫입술을 살짝 깨물었다가 입을 열었다.
“……필요한 일이라면 어쩔 수 없지. 무슨 일이 있어도 그 아이를 지켜라.”
이건 확실하게 답할 수 있었다.
“그럴 생각입니다. 제가 죽는 한이 있어도요.”
나와 지젤은 본채를 벗어나 비행장으로 향했다. 지젤도 단단히 준비했는지 옷이 무거웠다. 흔들리는 외투 안쪽에는 권총과 개인장비가 보였다.
후우우우웅!
폭풍기답게 바람이 거셌다. 가만히 서 있어도 몸이 휘청거릴 정도였다.
‘쥬페?’
쥬페가 바람을 맞으며 비행장 앞에 서 있었다. 그는 나와 지젤을 보더니 바람을 뚫고 걸어왔다.
“루카, 내가 준비할 게 있다면 말해라. 최악의 상황이 벌어지면 우린 뭘 해야 하는 거지?”
나는 그를 가만히 응시했다.
솔직히 쥬페를 신뢰할 수 없다. 그의 성품이나 성격이 문제가 아니었다. 난 쥬페의 능력을 높게 평가하지 못했다.
‘맡긴다고 쥬페가 해낼 수 있을까?’
하지만 지금은 쥬페를 믿어야 할 것 같았다. 적어도 그는 책임감이 없는 인간은 아니었다. 자신의 능력 내에서 최선을 다하겠지.
“폭풍기가 끝나기 전에…… 저와 아버지가 돌아오지 못하거나 연락이 없다면 망명을 준비하셔야 할 겁니다, 형님.”
쥬페의 건장한 신체에서 감정의 신호가 흘러나왔다. 동공의 초점, 손끝의 떨림, 움찔하는 다리, 입술 깨물기와 같은 사소한 자해. 그는 겁에 질렸다.
“망명을 대비해야 한다면, 그래, 그런 거로군. 아버지는 끝까지 내게 언질을 주시지 않았지. 그렇게 내가 믿을 수 없는 아들이었나…….”
헤일라스의 판단은 옳다. 쥬페는 지금의 혼란에서 큰 도움이 되지 않는다. 오히려 기밀이 노출될 우려까지 있었다.
그래, 헤일라스가 옳다는 게 가장 큰 문제다. 그는 자식에게 큰 상처를 입히면서까지 올바른 판단을 내렸다.
“가봐라, 루카. 아버지께 네 도움이 필요하다면, 여긴 내가 어떻게든 지킬 테니까.”
나와 지젤은 고개를 끄덕이며 쥬페를 지나쳤다.
우린 공중차량에 올라탔다. 기계에 밝은 지젤이 운전석에 앉아서 차량을 조작했다. 기동음이 진동으로 들렸다.
“이런 시기에 니콜라오스가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지젤이 중얼거렸다. 그녀조차 살아 있는 쥬페에게 기대기보다 죽은 니콜라오스를 그리워했다.
니콜라오스는 어두운 혼란을 이해하고 헤쳐 갈 능력이 있는 사내였다. 쿠스토리아의 이름을 단지 얼마 안 된 나조차도 그의 공백이 아쉬웠다.
‘쥬페가 노력하지 않은 건 아니야. 엔리코 라간과 비교하기 미안할 정도의 노력가다.’
다만, 쥬페는 현실의 벽을 넘지 못했다. 나는 그를 동정한다. 이 감정마저 그에겐 상처겠지. 그래서 내색하지 않았다.
열다섯 살의 루카는 약자를 동정하지 않았다. 경멸하며 깔봤다.
그러나 열여덟 살의 루카우스 쿠스토리아는 약자를 이해하고 있다. 그들의 아픔과 좌절이 자신의 잘못만이 아니라는 걸 안다.
열다섯 살의 나와 지금의 나. 누가 더 강하고 약한 것인가.
가끔 내 안의 소년은 나약해진 나를 탓했다. 칼날처럼 뾰족한 소년은 무뎌진 나를 비난하고 있다.
그 소년의 비난은 옳다. 전력으로 달려도 부족할 판에 나는 여기저기 오가며 오지랖을 부리고 있다. 이대로 있다간 내 모가지가 날아갈 것이다.
결단의 순간이 올수록 내 안의 모순이 커진다. 미칠 것 같다. 견딜 수 없이 괴롭다. 아득할 정도로 어두운 감정이 내 안을 채웠다.
“루카…….”
문득 지젤이 내 이름을 불렀다. 내가 한참이나 말없이 앉아 있던 모양이었다. 그녀가 앞만 보며 말을 이어갔다.
“……울지 마.”
운 적은 없다, 아마도.
* * *
폭풍기 첫 주부터 혼란은 미풍처럼 일고 있었다.
하층 구역 곳곳에선 강도와 도둑질이 빈번했다. 사나운 고함과 총성도 수 분마다 들렸다. 난 지젤의 팔목을 잡은 채로 하층 구역을 가로질렀다.
나는 일부러 미로와 같은 경로를 골랐다. 혹여나 추적이 붙을까 봐 방향도 이리저리 꼬며 수시로 감각을 일깨워 주변을 인지했다.
“여기로군.”
내가 걸음을 멈췄다. 네온사인조차 고장 난 간판이 보였다.
우리가 도착한 곳은 밑바닥의 불법 시술소였다. 어떤 시술인지 물어본다면 ‘전부’라고 말할 수 있다. 생체 개조부터 사이버네틱 강화, 신경계, 의체까지 모조리 다 손대는 곳이다. 당연히 전문성이라곤 없다.
제정신이 박힌 인간이라면 이런 곳에 자신의 몸을 맡기진 않는다. 바닥 중에서도 바닥이 오는 곳이다. 죽기 아니면 까무러치기라는 마음으로 오겠지.
끼이익.
우린 문을 밀고 안으로 들어갔다. 사중 잠금장치는 박살 나 있었다. 부서진 잠금장치 단면에 먼지가 없는 걸 봐선 얼마 전에 부순 것이다.
스으으으.
시술소 내부에선 화학 약품과 피비린내가 뒤섞여 오묘한 냄새가 났다. 한쪽 구석엔 공업 기름까지 고여 있어서 속이 더욱 울렁거렸다.
문을 여니 수술대에 앉아서 홀로그램 게임을 하는 여자가 보였다. 하얀 가운을 입은 그녀가 우리를 보더니 활짝 웃었다. 정확히 말해서 지젤을 보고 웃은 것이다.
“아, 왔구나! 지젤! 정말 보고 싶었어! 나야, 나! 바바라!”
자칭 바바라라고 하는 여자가 지젤에게 달려들었다. 나는 보급권총을 겨누며 여자를 제지했다.
“바, 바바라…….”
지젤은 여자, 즉 바바라의 꼴을 보더니 얼굴을 찡그렸다.
나도 바바라의 모습을 보니 생리적 혐오감을 참기 힘들었다. 미친 건 알고 있었지만, 광인을 넘어서 인간이 아닌 느낌이었다.
“또 몸을 바꾼 거냐, 바바라.”
지금 바바라가 쓰고 있는 전신의체는 시술소 의사의 것이었다.
‘타인의 전신의체.’
전신의체는 의족과 의수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정교하다. 인간의 생체 기관을 완전히 모방했기 때문이다. 섬세한 조율과 힘든 재활 훈련을 거치고 나서야 뇌가 전신의체를 자신의 것으로 인식한다.
그렇기에 타인의 전신의체를 쓴다는 건 정신 나간 짓이다. 불일치와 괴리감으로 뇌는 혼란에 빠진다. 한마디로 미쳐 버린다는 뜻이다.
‘그리고 저건 바바라가 이전에 쓰던 전신의체로군.’
나는 수술대 아래에 엎어진 전신의체를 보았다. 남성형 전신의체였는데, 머리의 상부가 깔끔하게 제거되어 있었다. 수술의 흔적이었다.
혼자 여기서 수술을 한 듯했다.
“정체를 숨기고 감시를 피하기에는 이것만 한 방법이 없더라고, 히히. 지젤, 지젤! 이제 내 정체를 알지? 난 테러리스트가 아니라 제국의 사람이야. 그러니까 더는 날 두려워하지 마.”
바바라가 손가락으로 입꼬리를 밀며 말했다. 저 행동을 보니 영락없는 바바라였다. 타인의 의체라서 표정이 마음대로 통제되지 않는 듯했다.
“바바라, 착각하지 마. 난 네가 두려운 게 아니야. 경멸하고 혐오하는 거지.”
“에이, 내게 허튼 거짓말은 통하지 않아. 그리고 두려움이 언제나 나쁜 것만은 아니야. 적당한 두려움은 오히려 관계에 도움이 되지. 그렇지 않아? 루카?”
이게 바바라가 무서운 점이다. 미치광이면서 이성적 사고를 했다. 심지어 타인의 마음을 읽고 짚어 내서 이용도 한다.
나는 바바라의 질문을 무시하며 용건을 꺼냈다.
“이 시설에서 데이터 변환이 가능한 건가? 참고로 장소 이동을 제안한다면 협상은 결렬이야.”
여기도 굉장히 위험하다. 들어오기 전에 난 감시와 매복이 있는지 철저하게 조사했다.
“그렇게 날 선 반응을 보일 필요는 없어. 난 네 역량을 잘 알아, 루카. 내가 아무리 함정을 준비해 봐야 여차하면 넌 지젤을 데리고 빠져나가겠지. 봐봐, 좋은 게 좋은 거야. 난 이렇게라도 지젤을 봐서 행복한걸.”
바바라의 속내를 읽기 힘들다. 키누안과 헤일라스와는 다른 의미로 어렵다.
키누안과 헤일라스는 감정 신호를 쉽게 발산하지 않는다. 그나마 내보이는 감정조차 거짓인 경우가 많다.
츠즈즈즈.
난 눈을 가늘게 뜨며 바바라를 노려봤다. 내 모든 감각을 동원해 그녀를 읽어 내려 했다.
‘언행에서 새어 나오는 감정의 신호가 너무나 많아.’
그래서 속내가 보이지 않았다. 거짓 감정으로 짜낸 실로 자신을 감싼 것 같았다. 과잉된 감정 신호를 남발하는 탓에 무엇이 진짜 감정인지 알 수가 없었다.
철컥, 철컥.
바바라가 묵직한 가방을 꺼냈다. 열어 보니 가방 모습의 컴퓨터 단말기였다. 상당한 고성능인 듯했다.
“크기는 작아도 어지간한 연구소의 메인 컴퓨터 수준은 돼. 지젤, 나 좀 도와줄래? 그쪽 전선 다발을 이쪽까지 끌어서 연결해 줘. 예전엔 이렇게 이것저것 같이 작업했잖아. 갑자기 그립네.”
내가 지젤을 대신해서 전선을 옮기려 했다.
“내가 할게. 넌 바바라를 감시하고 있어.”
지젤이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바바라 곁에 다가갔다.
“바바라, 난 널 죽이는데 1초도 쓰지 않을 거야. 허튼수작은 부리지 마. 수상한 행동만 해도 그 똑똑한 뇌가 고깃덩이로 변하겠지.”
“살벌하니 짜릿한 걸, 루카. 역시 네 이런 면이 참 좋아.”
바바라가 어깨만 살포시 떨며 말했다. 나도 안다. 그녀에게 협박은 통하진 않을 것이다.
바바라는 전력 다발을 컴퓨터에 연결했다. 전류가 튀면서 시술소의 전등이 꺼졌다.
치직! 칙!
시술소의 전력이 일시적으로 나갈 정도로 컴퓨터가 전력을 끌어 쓰고 있었다.
기이이잉.
복잡한 숫자와 기호가 컴퓨터 화면에 떠올랐다. 보안절차만 수십여 단계였는데 끝나는 건 십여 초도 걸리지 않았다.
“많이 예뻐졌네, 지젤. 남자친구라도 생겼어? 아, 생겼으면 말해. 내가 죽여버릴 테니까.”
바바라가 컴퓨터를 조작하며 말했다.
“남자친구? 마침 네 옆에 서 있네. 죽일 테면 죽여 보던가.”
지젤은 벽에 달린 전력계를 확인하면서 시큰둥하게 대답했다.
바바라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내 얼굴을 쳐다봤다. 그녀의 손가락은 계속 움직이고 있다.
“흐음, 내가 루카를 참 좋아하지만…… 방금은 좀 말도 안 되는 소리잖아. 얘는 여자보다 싸움을 좋아하는 정신병자야. 너, 공격성과 성욕을 구분할 수 있긴 해? 아마 같은 색깔의 감정으로 느껴질걸.”
누가 누구한테 정신병자라고 하는지 모르겠군. 아무튼, 바바라는 나와 지젤의 관계를 모르는 듯했다.
……그리고 나는 새어 나오는 감정을 드러내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바바라의 말은 꽤 예리했다. 예기치 못하게 날 쿡쿡 찔렀다.
달그락.
내가 복원 데이터가 담긴 칩을 탁자에 던졌다.
“시작해라, 바바라.”
“루카, 혹시 해서 말하는데 일이 끝나자마자, 날 죽이면…… 좋지 않은 일이 벌어질 거야. 나도 대비책 없이 온 건 아니거든.”
말하지 않아도 안다. 바바라는 나와 키누안과 동류다. 혼란 사이에서 자신의 영역을 확보하는 자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난 바바라에게 어느 정도의 동질감을 느끼고 있다. 이건 불쾌한 사실이다.
“난 약속은 지켜.”
“그건 나와 똑같네. 나도 약속은 지키거든.”
바바라가 칩을 컴퓨터에 집어넣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