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ad Born Blood RAW novel - Chapter (131)
배드 본 블러드-131화(131/197)
131
“이건 지금 기준으로 심도 2단계의 가상 시뮬레이션 프로그램이야. 가상 시뮬레이션이라기보다는 체감형 영상에 가깝다고 보면 돼. 내부에서 별도의 조작은 불가능해.”
바바라가 빠르게 말을 내뱉었다. 그녀의 동공과 손가락은 쉬지 않고 움직였다.
화면에서는 흩어진 글자와 기호가 이리저리 얽히며 일정한 형식으로 정렬했다. 복원 중에 깨진 부분은 맥락에 따라 바바라가 코드를 일일이 끼워 맞춰서 실행 여부를 확인했다.
기초적인 지식을 가진 내가 봐도 바바라의 실력은 수준급이었다.
“한 가지 조언하자면, 넌 원본부터 내게 빨리 가져왔어야 해. 실력이 나쁜 사람이 데이터를 복원해서 손실이 커. 덕분에 불필요하게 손이 많이 가고 있지. 그쪽에서 상당히 무식한 방법으로 복원했거든. 전문적인 프로그래머가 아니었지?”
바바라는 복원 데이터의 흔적만으로도 과정을 유추했다. 나는 부정하지 않고 지켜보기만 했다.
“오늘 안에는 끝낼 수 있…….”
“이미 끝냈어. 이런 작업은 일곱 살 때 물리도록 했었거든.”
상대가 바바라만 아니었다면 칭찬해 주고 싶을 정도의 일 처리였다.
우린 가상 시뮬레이션 기기를 꺼냈다. 이마를 감싸는 고리 형태의 간이장치였다. 프로그램의 심도 단계가 낮아서 이 정도면 충분했다.
기잉.
시뮬레이션 기기를 머리에 쓰자 고글이 앞으로 툭 튀어나왔다. 최면이라도 걸듯이 화면이 빙빙 돌다가 물감처럼 색이 번졌다. 관자놀이에 닿는 금속 접촉부에서 일어난 진동은 내 뇌에 스며들듯 윙윙 울렸다.
가상 시뮬레이션에 진입하는 건 바바라도 마찬가지였다.
“내 감각의 일부를 밖에 두고 감시하겠지만, 바바라가 수상하게 굴면 바로 쏴버려.”
내가 지젤에게 당부하며 눈을 감았다.
기이잉.
귓가의 진동음이 불쾌하다. 뇌에 전달된 진동과 소음이 중추신경계를 타고 전신으로 퍼지는 느낌이다.
끼긱, 끽끽.
시뮬레이션 돌입 과정은 매끄럽지 않았다. 옛 데이터인지라 모래 먼지를 마시듯 감각이 꺼끌꺼끌하고 텁텁했다.
내 감각과 인지는 어설픈 시뮬레이션을 거부하고 있었다. 나는 잠에 빠지기 직전처럼 감각의 민감성을 낮췄다.
내 의식은 더 아래로 가라앉혔다. 가수면처럼 의식이 현실에서 멀어진다. 수영장에 가라앉은 채로 밖을 응시하는 듯한 감각. 그렇다고 바닥까지 내려갈 필요는 없다. 이 정도가 딱 적당했다.
-노엘.
“노엘.”
집중하자, 아직 시뮬레이션이 거짓으로 느껴진다.
“노엘?”
그래, 이제 돌입했다.
나는 눈을 감았다가 떴다.
가장 먼저 보이는 건 지젤이었다. 아니, 지젤이 아니다. 지젤과 닮은 여자였다. 나는 그녀가 누구인지 대번 알아챘다.
‘아가타 쿠스토리아.’
아가타가 나를 보고 있다. 정확히 말하면 ‘노엘’의 체험을 하고 있는 나다.
“정신 차려, 등신아.”
아가타는 다짜고짜 내게 욕을 갈겼다.
피- 슝!
총성이 일었다.
‘노엘의 기억을 추출해 재구성한 시뮬레이션.’
나도 상황을 파악했다. 기억은 전장에서 시작됐다.
* * *
가상 시뮬레이션의 완성도는 높지 않았다. 조금만 집중하면 쉽게 의식이 시뮬레이션을 이탈할 것이다. 데이터가 불완전하기에 배경과 사물의 테두리가 알록달록한 형광으로 반짝였다. 그래도 몰입할 수 있을 정도는 된다.
나는 시뮬레이션의 흐름에 의식을 맡겼다. 시뮬레이션이 보내는 감각 신호가 현실처럼 내게 스며들었다. 흙과 화약 냄새가 느껴졌다.
‘여긴 전장.’
나, 노엘은 병사였다. 지금 기준으로는 골동품 같은 총을 든 채로 엄폐물에 등을 기대고 있다.
‘우리의 적은?’
벨라토인지 코라인지도 모르겠다. 그저 사람이라는 것만 알 수 있었다. 그들은 우리를 향해 사격을 퍼붓고 있었다.
주변에는 공황에 빠진 병사도 보였다. 뭔지는 몰라도 우리가 불리한 상황인 듯했다.
“노엘, 계획은?”
전투복 차림의 아가타가 내게 물었다. 지젤과 닮아 있으니 기분이 묘했다.
그러나 자세히 보니 지젤과 엄연히 달랐다. 분위기부터 거칠고 야성적이었다. 그리고 전장의 흔적이 흉터로 남아 있었다. 그녀의 팔다리는 의체지만 몸통은 생체였다.
‘아가타는 전사이자 군인.’
노엘, 아니, 나. 흠, 꼴에 가상 시뮬레이션이라고 나도 헷갈리기 시작한다.
내가 곧 노엘이다, 그렇게 생각하는 게 편하다. 노엘과 나를 동일시하면 정신건강에 좋지 않은 영향이 갈 것 같지만…… 지금은 몰입이 먼저다. 기억 재현을 구성하는 신호 데이터를 깊게 받아들일수록 노엘의 사고와 감정도 또렷하게 느낄 수 있다.
하여튼 나는 전황을 살피곤 혼잣말하듯 웅얼거렸다. 이윽고, 생각을 끝낸 내가 아가타와 주변 병사에게 지시를 내렸다.
“아가타와 3번대는 왼쪽에서 매복하고, 4번대는 날 따라서 오른쪽으로 이동해. 곧 지원이 올 테니 그때 치고 나가자.”
밀리는 상황이라고 믿기 힘들 정도로 나는 침착했다.
“지원이 온다고? 통신도 끊어졌는데? 상부에서 이쪽 상황을 어떻게 알아?”
아가타가 내 판단에 반문했다.
“지금 후방부대의 지휘관은 카트린 뮬리즈카잖아. 그 사람이라면 충분히 전황을 파악하겠지.”
“카트린 뮬리즈카? 아는 사람이야?”
“아니, 몰라. 지휘 기록과 이력만 봤어.”
아가타가 어이없다는 표정을 짓더니 소리를 버럭 질렀다.
“그럼 후퇴해야지! 이대로 있다간 우린 포위당해! 전부 죽을 거야!”
이 시절의 그녀는 말년과 달리 곧잘 흥분했던 모양이다. 다혈질적인 면모가 보였다.
“최악의 상황이 벌어져도 너와 나는 빠져나갈 수 있을 거야. 아가타, 네 전투력이면 돌파구를 만들 수 있어.”
다르게 보자면, 최악의 상황에서는 나와 아가타 말고는 다 죽을 거라는 뜻이다.
나는 아가타 말고는 다른 병사를 동료로 여기지 않는 듯했다. 확실히 얼핏 둘러봐도 끈끈한 유대가 보이진 않았다. 강제로 끌려온 징집병 같았다.
위이이잉!
머지않아 하늘에서 굉음이 퍼졌다. 수송선의 그림자가 전장을 가렸다. 수송선의 하부가 열리면서 오십여 명의 병사가 추락하듯 강하했다.
드디어 지원이 도착했다.
쿠웅! 쿵!
수송선에서 떨어진 병사들이 전장 깊숙이 박혔다. 그들은 하나둘씩 일어섰다. 의체 비중이 높은 자들인지 무리한 강하에도 별다른 타격을 입지 않은 듯했다. 일부는 아예 전신의체인 듯했다.
휙!
내가 손을 앞으로 뻗으며 신호를 보냈다. 우리도 준비해 뒀기에 지원부대와 손을 맞춰서 좌우를 쓸어 담듯 진격했다.
지원부대가 중앙에서 적을 무너뜨렸다. 그리고 우리는 후퇴하는 적을 좌우에서 가두듯 제압했다. 적은 전열을 새로 추스를 여유도 없이 괴멸에 가까운 타격을 입었다.
‘아가타가 눈에 띄네. 역시 쿠스토리아의 시조로군.’
현대 기준으로 아가타는 대단한 실력자가 아니다.
그러나 2세기 전의 기준으로 아가타는 압도적인 전사였다. 다른 병사의 전투력을 보니 아가타가 더욱 대단하게 보였다. 그녀는 부족한 성능의 의체와 강화되지 않은 신경계로도 곡예에 가까운 전투를 펼쳤다.
아가타는 좌측 선두에서 적을 제압했다. 보지도 않고 총을 휘두르듯 쏘는데도 명중률이 기이할 정도로 높았고, 근접전에서는 물을 만난 물고기처럼 날뛰었다. 그녀의 단검이 지나갈 때마다 사람들이 픽픽 쓰러졌다.
전투가 끝났다. 우리의 승리였다.
나는 집중해서 시뮬레이션의 시간 흐름을 가속했다. 전후 정리가 끝나고 나서, 나와 아가타는 상부의 호출을 받았다.
우린 지휘관 막사를 찾아갔다. 귀족 장교가 우리를 보고 있었다. 그녀의 이름은 ‘카트린 뮬리즈카’다.
‘그렇군.’
노엘은 이렇게 뮬리즈카 가문에 얽히게 된 것이다.
은발의 카트린은 불만이 섞인 얼굴로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그녀의 동공 테두리가 빛나고 있었다.
“넌 내가 올 줄 알았다는 것처럼 굴었어. 사전에 작전 계획을 조율한 것처럼 말이야.”
“도박 수를 던져서 성공한 것뿐입니다. 운이 좋았죠.”
나는 경직된 허리춤에 손을 댄 채로 대답했다. 카트린은 내 대답이 마음에 들지 않는 듯했다.
“똑바로 말해라, 노엘 상등병. 내 성격이 그리 좋지 않다는 걸 알아두고.”
“대위님의 지휘 기록을 본 적이 있기에 이쪽으로 오실 거라 생각했습니다. 귀족 구성원의 부대를 돕기보다 전략적 요충지를 항상 우선시하셨죠. 공적에 비해 승진이 늦으신 이유도 이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사족이 상당히 건방졌다. 일개 병사가 장교에게 할 말은 아니었다.
카트린은 인상을 찌푸리면서 삐딱하게 고개를 기울였다. 그녀가 팔짱을 낀 채로 나와 아가타 앞에 섰다.
“방금 내가 분명히 말했지, 내 성격이 그리 좋지 않다고 말이야.”
안절부절못하는 건 내 옆의 아가타였다. 이 시절에도 귀족의 권위는 대단했던 모양이다.
“저도 성격이 좋은 편은 아닙니다.”
내가 말했다, 나, 아니, 노엘, 이놈도 어지간히 미친 새끼였다! 깜짝 놀라서 동일성이 깨질 정도였다.
콰직!
카트린의 주먹이 내 배에 꽂혔다. 나는 허리를 굽히며 앞으로 고꾸라졌다. 입에서는 비릿한 피가 왈칵 쏟아졌다.
내부 장기의 손상이 있을 정도의 중상이었다. 어떻게 아냐면…… 통증 신호를 통해 간접적으로나마 고통이 내게 전해졌기 때문이다.
“노, 엘? 너……!”
아가타가 당황하더니 곧 분노에 찬 표정으로 카트린을 노려봤다. 당장이라도 덤빌 기세였다.
“괜찮, 아, 아가타.”
나는 아가타의 옷을 잡으며 일어섰다. 이건 정말로 근성이다. 이땐 통증 내성 훈련도 없었다. 그저 정신력으로 쇼크사할 것 같은 고통을 버틴 것이다.
카트린이 나를 내려다보더니 옅게 웃었다.
“노엘, 아가타. 뮬리즈카예거에 온 걸 환영한다. 너희는 지금부터 내 부대원이다.”
이 시기에는 귀족 가문의 전속부대가 군 편제에 존재했다. 뮬리즈카예거도 그런 부대였다. 사실상 귀족 가문의 사병집단을 국가의 정규군으로 취급하고 지원한 것이다. 지방 군벌화가 된 귀족 가문이 많기 때문이었다.
나는 시뮬레이션을 가속했다. 노엘의 기억이라지만 인생 전체는 아닌지라 가속하면 몇 달, 수년은 순식간에 지나갔다.
‘차기 가주로 내정된 카트린 뮬리즈카.’
카트린은 우수한 여자였다. 가문 내에서는 능력을 인정받아 젊은 나이에도 가문의 전속부대를 이끌고 전장을 누볐다. 다만, 고집스러운 성격 덕분에 군부 내의 인사평가는 좋지 않았다.
시간의 흐름이 느려졌다. 나와 아가타는 뮬리즈카예거에서 오 년 정도 복무한 시기였다.
나와 아가타는 눈에 띄는 활약을 하며 공적을 쌓았다. 아가타는 선임소대장까지 승승장구했고, 나는 참모역으로 카트린의 전속부관까지 승진했다.
뮬리즈카예거의 핵심 인사가 된 우리는 자연스레 전신의체 시술도 받았다.
전신의체 재활을 끝낸 내가 카트린 곁으로 출근했다.
“한 달 만에 전신의체 적응을 끝냈단 말이지?”
카트린이 나를 보며 눈을 찡그렸다. 믿기 힘든 모양이었다.
“담당 의사의 말로는 문제가 없다고 하더군요.”
“……따라와라, 노엘.”
카트린은 외투를 벗으며 대련장으로 내려갔다. 그녀는 나를 시험하듯 주먹을 뻗고 발을 휘둘렀다.
내 반응은 느리지 않았다. 뻑뻑한 의체로도 용케 이리저리 피하며 반격했다.
휘릭, 끽.
그리고 나아가 내가 카트린의 등을 무릎으로 누르며 팔을 꺾었다. 완벽한 제압이었다.
“너, 몸 쓰는 건 약한 줄 알았는데 아니었네. 아가타보다 강하다는 걸 숨기고 있었던 거냐?”
“숨긴 적은 없습니다. 요즘 깨달은 게 좀 있어서 시험해 본 겁니다.”
전투 이론가의 재능이 개화하고 있었다.
“상부에서 진행 중인 연구가 있다. 신경계를 강화할 새로운 방법을 찾았다고 하더군. 원래는 아가타만 보내려 했는데…… 너도 갔다 와라, 노엘.”
나는 내키지 않았다, 아가타를 보내는 것도.
“흐음, 약물 실험입니까? 보나 마나 폐인이 될 건데요? 뻔하잖아요.”
“그거라면 너희를 보내지 않겠지. 이번엔 뭔가 좀 다르다더군. 다른 가문에서도 우수한 부하를 보내고 있어. 그나저나 언제까지 내 등을 누를 셈이냐?”
“읏차, 실례.”
먼저 일어난 내가 카트린을 부축했다.
세 달이 지났다. 전신의체 적응을 마친 아가타도 현장에 복귀했다. 복귀를 기념해 나와 아가타는 술집을 들렀다. 나름의 출세와 성공을 기리는 기념비적인 날인지라 평소보다 비싼 곳을 골랐다.
술집으로 들어선 아가타가 내 어깨를 팔꿈치로 툭툭 쳤다.
“노엘, 저거 봐봐. 대장님 아니야? 잘하면 얻어먹을 수도 있겠는걸.”
아가타가 활기차게 말했다. 나도 그녀의 시선을 따라갔다.
혼자 바에 앉아 있는 카트린이 보였다. 그녀는 술을 마시면서 통유리창을 보고 있었다. 그 너머로 도시의 풍경이 보였다. 첨탑이 삐죽삐죽 솟아 있었다.
첨탑 도시가 끝나는 경계부터는 회백색 황무지가 이어졌다. 아크바란의 풍경과 명백하게 달랐다.
‘여긴 아크 행성.’
나는 이물감을 느꼈다. 시뮬레이션 동일성 수치가 감소하면서 풍경이 일시적으로 흐려지듯 여러 겹으로 보였다.
그래, 이제야 실감이 간다. 여긴 우리가 노바스 행성을 정착하기 전의 시대다. 지평선 끄트머리에서는 뇌우가 몰아치고 있었다.
“합석해도 될까요, 대장님?”
아가타가 카트린에게 다가가며 말했다.
고독하게 술을 마시던 카트린이 우리를 힐끗 보더니 손가락을 튕겼다. 바텐더가 우리 앞으로 다가왔다.
“멋대로 해. 계산은 내 앞에 달아 두고. 복귀 선물이다, 아가타.”
“역시 우리 대장님이 최고로 멋져.”
아가타가 아부하며 카트린 옆에 앉았다.
탁.
술이 나왔다. 나는 한 잔의 가격이 내 일급인 술을 복잡한 심경으로 바라봤다. 내 옆의 아가타는 겁대가리도 없이 술잔을 휙휙 비워 댔다. 어찌나 잘 마시는지 뒤통수를 때리고 싶을 정도였다.
카트린은 우리를 빤히 보더니 피식 웃었다. 그녀의 미소는 보기 드물었다.
“너흰 언제 결혼하냐?”
카트린의 발언에 나와 아가타는 동시에 부정했다.
“에이, 저랑 노엘은 그런 사이가 아니에요. 어릴 때부터 알고 지낸걸요. 남매라면 몰라도 연인은 무리죠.”
“뭐, 제 취향이 남자라면 아가타에게 가능성이 있을지도요.”
“야, 죽을래!”
우리의 촌극을 본 카트린은 어깨를 으쓱했다.
“그래, 그렇군.”
우린 밤새 술집에서 시간을 보냈다. 의식이 흐릿할 정도로 흥청망청 마셔 댔다. 아마 카트린에게 삿대질하며 반말도 했던 것 같다.
* * *
노엘의 기억은 방대했다. 비싼 칩에 담아 둔 이유가 있었다.
다시, 나는 시뮬레이션에 집중했다. 되도록 바바라보다 먼저 체험을 끝내고 싶었다.
나와 아가타는 새로운 강화 시술을 받았다. 우리와 비슷한 처지인 사람들이 병동에 주르륵 누워있었다. 몇몇은 괴성을 지르며 자해를 하고 있었다.
의료진이 나를 보고 있었다. 가장 앞에 있던 의사가 의료 차트를 보며 말했다.
“가벼운 조증부터 시작해 환각과 정신착란과 같은 증상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이상 반응이 일어나면 보고하세요.”
우린 척수액 교체 시술을 받았다. 나는 방금까지 관과 연결됐던 뒷덜미를 매만졌다. 반투명한 액체가 몸속으로 스멀스멀 들어오는 느낌은 꽤 섬뜩했었다.
시술의 효과는 뭐라 한마디로 형용하기 힘들다. 세상이 선명해지는 느낌이고, 강박증처럼 세상의 정보를 모조리 빨아들였다. 정신을 차려 보면 바닥 타일의 개수조차 일일이 세고 있었다.
불필요한 정보조차 무시하지 못했기에 며칠은 제대로 잠도 자지 못했다. 민감해진 감각 때문에 사소한 소음에도 극심한 스트레스를 받았다.
재활하는 동안은 휴가였다. 어느 정도 회복이 된 내가 아가타를 찾아갔다.
“염병, 진짜로 뒈질 것 같네. 노엘, 넌 어떻게 걸어 다니는 거야? 난 천장과 땅바닥도 헷갈려. 미치겠어, 진짜. 회복되지 않는 숙취가 더 날 졸졸 쫓아다니는 것 같아.”
아가타가 어깨로 현관문을 밀며 말했다. 그녀는 헝클어진 머리를 벅벅 긁더니 안으로 들어갔다.
“근데 왜 벌거벗고 있어? 혹시 남자친구가 왔으면 가볼게. 그쪽에서 날 싫어하는 것 같더라.”
내가 심드렁하게 말했다.
아가타는 천 쪼가리도 걸치지 않고 있었다. 그 때문에 비틀거리는 아가타의 뒤태가 훤히 보였다. 그녀의 전신의체는 날렵하면서도 매끄럽다.
“그 질척거리는 등신 새끼는 진작 찼어. 나도 다음부터는 여자랑 사귀든가 해야지, 나 원. 그리고 왜 알몸이냐고? 몰라서 물어? 지금 감각이 예민해서 옷도 걸치기 힘들다고! 뭐라도 피부에 닿으면 벌레가 무는 것 같아.”
아가타가 짜증스레 말했다. 나보다 전투 감각이 예민한 만큼 다른 쪽으로 부작용이 심한 듯했다.
안으로 들어간 나는 그녀의 침대를 응시했다. 찢어진 이불이 보였다. 잠자리만 그런 게 아니었다. 아가타의 집 안은 짐승이 할퀴고 간 것처럼 엉망이었다.
“아가타, 과각성 상태에서 벗어나야 해. 호흡을 가다듬고 감각과 사고를 다른 곳으로 돌려 봐. 좀 나을 테니까.”
“난 그딴 거 못 하니까, 너나 해. 아씨, 머리가 아파 죽겠다고. 뭐가 최고 엘리트 과학자야. 싹 다 돌팔이 새끼들 같던데.”
아가타는 투덜거렸다. 다행히 치명적인 문제는 없어 보였다.
“건강한 것 같으니 됐어. 가볼게.”
내가 물만 얻어 마시며 말했다. 얻어 마신 것도 아니긴 하다. 직접 냉장고를 뒤적여 꺼낸 거니까.
“벌써 가게? 정말로 내가 걱정돼서 보러 온 거야? 예전부터 생각했는데, 너도 참 은근히 착하단 말이지. 세상 냉정한 척은 다 하면서 말이야.”
“네가 죽으면 유능하면서도 믿을 수 있는 동료가 사라지잖아. 내게도 손실이지.”
“나불거리긴. 그냥 친구가 걱정돼서 왔다고 말해.”
아가타가 눈을 가늘게 뜨며 시시덕 웃었다.
나는 아가타의 상태를 확인하고선 집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한 달 정도는 처박혀서 지냈다. 내 상태도 그리 좋진 않았기 때문이다. 향상된 감각과 인지 능력을 점검할 필요도 있었다.
휙!
나는 방에서 혼자 주먹을 뻗었다. 이어서 낫을 휘두르듯 돌려차기를 했다. 발꿈치가 매섭게 허공을 갈랐다.
내 머릿속에선 가지가 뻗어 나가듯 무수히 많은 생각이 교차하며 얽혔다. 선택지가 너무 많다 보니 무한한 가능성처럼 보였다.
‘무엇이 최적의 판단일까.’
나는 가상의 적을 구상해 움직였다. 새장을 탈출한 것처럼 머리가 가벼웠다.
인간은 기술 발전으로 생물학적 한계를 넘었다. 그 때문에 기존의 전투법은 도태된다. 종래의 방식이 무용하진 않으나 가장 효과적이진 않다.
인류의 역사는 전쟁과 투쟁이었으나 그 전환점이 도래했다. 신체는 피와 살에서 벗어났다. 의식의 속도는 빛을 쫓듯 빠르다.
‘새로운 방식.’
처음에는 기존의 방식에 비해 비효율적일 것이다. 그러나 새로이 더 넓은 토대를 닦아야 결국은 더 높게 쌓을 수 있는 법이다. 새로운 방식이 고점은 더 높을 것이다.
‘급할 건 없다. 지금은 토대를 닦는 시기니까.’
그리고 실천 없는 이론은 탁상공론에 불과하다.
몸을 추스른 나는 밤마다 골목길로 나갔다. 아크 행성은 극심한 빈부격차로 도시의 밑바닥은 끔찍했다. 나와 아가타가 군에 투신한 것도 여길 벗어나기 위해서였다.
강도가 내 앞을 가로막았다. 그는 협박도 하지 않고 총구부터 겨누었다.
타- 앙!
총성이 울린다. 그러나 나는 고개를 미리 비틀어 피했다.
총알은 내 뺨을 스치듯 지나갔다. 방아쇠를 당긴 강도가 나를 보며 눈을 크게 떴다.
“피, 피해?”
성공했다.
나는 이론을 현실로 증명했다. 총구의 방향을 계속 인식하면서 방아쇠를 당기는 순간을 읽었기에 가능한 묘기였다.
전장에서 전투 자극제를 투여한 베테랑 군인이 종종 총알을 인지하고 피했다는 기록이 있긴 했다.
사람들도 처음에는 단순히 착각이나 헛소문일 거라 생각했다. 그러나 기록과 데이터가 쌓인 지금은 극소수의 군인에겐 가능한 일로 취급하고 있다.
‘이제 나아가서는 학습과 훈련으로 재현 가능한 기술이 되겠지.’
인간은 진보하고 있었다. 그러나 진보가 항상 옳은 것만은 아닐 것이다.
진보가 좋은 방향인지 나쁜 방향인지는 아무도 모른다. 과거의 인류는 지금보다 더 평화롭게 살았다. 전쟁과 살인, 폭력을 경험하지도 못하고 살다 죽는 이도 있다고 했다. 믿기 힘들지만 사실이다.
성간비행이 가능할 정도로 기술이 발전했다. 인류는 지구를 떠나 행성을 점령하고 다닌다. 그러나 절망의 총량은 결코 줄지 않았다.
빈곤한 자가 겪는 고통은 더 심해지면 심해졌지 덜하진 않다.
우득!
나는 강도의 목을 잡아서 꺾었다. 쇳덩이 팔로 뼈와 살을 비트는 건 너무나 쉬웠다. 생명이 덧없이 꺾였다.
‘넌 살 자격이 없다.’
이 강도는 더 살아 봐야 불행만 낳을 것이다.
‘더 나은 세상.’
나, 노엘은 흐느적거리는 시선으로 도시의 아래에서 위를 보았다.
치직.
동일성이 깨지면서 도시의 풍경이 부서지듯 흔들렸다. 그가 무엇을 꿈꾸는지 나도 알았다.
* * *
시간이 지났다.
나와 아가타는 강화 시술의 후유증에서 제법 벗어났다. 듣기론 부작용으로 맛이 간 자가 꽤 많다고 들었다. 과학자들이 안전하다고 떠벌렸으나 귀족들이 시술을 먼저 받지 않는 이유가 역시 있었다.
이날, 나와 카트린은 함께 어느 공장으로 견학을 갔다.
기잉, 기잉.
나는 갑주 형태의 무언가를 보고 있었다. 카트린이 흥미롭다는 듯이 시제품을 응시했다.
“의체에 덧대는 외골격입니까?”
내가 묻자 카트린이 웃었다.
“전갑의체라는 거다. 전투의 필요한 기능만 남긴, 진정한 의미의 전투의체지. 뮬리즈카 가문에서도 한 기 정돈 주문할 생각이야.”
난 망막 디스플레이에 떠오른 제원을 확인했다. 전갑의체는 인간적인 행위에 필요한 모든 기관이 제거된 기계였다.
전갑의체는 먹지도 못하고 웃지도 못한다. 불필요한 감각 정보로 인한 뇌 연산의 비효율과 통각에 의한 전투력 손실을 없애려고 감각 신호조차 차단했다. 차단으로 둔해진 반응은 보조 연산장치와 장갑의 방어력으로 메웠다.
‘저 전투기계에서 인간의 역할은 다변화에 대응하는 판단력뿐이로군.’
전갑의체의 사용자는 타인의 온기도 느끼지 못한다. 그저 센서로 파악한 데이터를 통해 사람의 체온을 숫자로 볼 뿐이다. 의체가 손상을 입는다면 파손과 충격을 그림과 수치로 보여줄 것이다.
“꽤 비인간적이군요. 저 의체를 버틸 수 있는 사람은 몇 없을 겁니다.”
“어차피 전투 시에만 사용하는 거야. 상시 사용을 생각하고 만든 물건은 아니니 걱정 마.”
“그걸 감안해도 대단한 정신력이 필요할 겁니다.”
“너나 아가타는 버티겠지.”
나는 카트린의 옆얼굴을 바라봤다. 언제나 자신만만한 여자다. 하늘 아래에 자신보다 높은 사람은 없다는 듯이 굴었다.
“……한 기만 주문하신다면, 제 전용의체로 정해 주시죠.”
아가타보단 내가 더 잘 적응할 것이다. 아니, 그게 아니더라도 나는 자진해서 나섰겠지.
“가끔 넌 귀여울 정도로 착하네, 노엘.”
카트린이 여우처럼 눈을 얇게 뜨며 키득키득 웃었다.
조금 우습게 보인 것 같았다. 그래, 유약해 보이는 말을 하긴 했지. 아가타를 위해 자진해서 위험을 무릅썼으니까.
“요즘 여자한테 착하다는 소리를 자주 듣는군요. 인기 많긴 글렀나 봅니다.”
내가 어깨를 으쓱거리며 투덜거렸다. 카트린이 소리 내어 웃었다.
“나쁜 남자가 인기 많다는 속설 때문에?”
“저번에 차드가 말하던데, 남자는 착해 보이면 끝장이라고 하더라고요.”
“그건 차드가 질 나쁜 여자하고만 만나서 그렇지. 한 달마다 여자친구가 바뀌잖아.”
“그래도 여자한테 인기가 많으니 매번 바뀌는 거겠죠.”
전갑의체의 시연이 끝나면서 전등이 꺼졌다. 주변이 어두워졌다. 우린 출구로 걸어갔다.
“나는 착한 남자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해. 말을 잘 들으니 편하고 좋잖아.”
어두운 복도에서는 출구로 향하는 안내선이 초록빛으로 점멸했다.
“……그건 상관으로서 부하를 좋아하시는 거죠.”
“내겐 그게 그거야. 남자에게든 부하에게든 지는 건 싫어하니까.”
“저는 상관은 몰라도 여자에게 지는 건 싫어합니다.”
카트린이 같잖다는 웃음을 흘리더니 내 손목을 잡아당겼다. 나는 일부러 비틀거리며 끌려갔다.
내가 순순히 끌려가자 카트린의 힘이 느슨해졌다. 난 이때를 노렸다.
끼릭!
나는 끌려가는 몸에 제동을 걸며 역으로 카트린을 당겼다.
휘릭, 쿵!
내게 끌려온 카트린이 벽까지 밀려났다. 나는 그녀의 양 손목을 봉쇄하듯 잡으며 위로 밀어 올렸다.
어둠 속에서 카트린의 눈동자가 빛났다. 그녀의 웃음소리가 나직이 들렸다.
“상관에게 무례하구나, 노엘.”
내가 고개를 옆으로 기울이며 얼굴을 가까이 댔다. 숨이 코에 닿는다.
“뭐, 지금은 상관이 아니라 여자시니까요.”
난 카트린의 대꾸도 듣지 않고 입을 맞췄다.
카트린도 거부하지 않았다. 자연스레 나는 그녀의 손목을 놓았다. 내려온 그녀의 손이 내 허리를 감았다.
……가속한 시뮬레이션의 시간은 증발하다시피 했다. 노엘의 모든 기억이 남아있는 건 아니다. 중요한 장면만 듬성듬성 이어졌다.
카트린과 나는 잠자리까지 가지는 관계를 유지했다. 사귀는지 아닌지도 애매모호했다. 연인 특유의 격정적인 감정이 없었고, 잠자리에서도 애틋한 말이 오가지 않았다.
특히 나, 노엘은 시뮬레이션인 걸 감안해도 카트린에 대한 감정이 담담했다.
몇 달이 더 지났다. 나는 열흘 중에 사나흘은 카트린의 집에서 잠을 잤다.
스륵.
먼저 일어난 카트린이 반투명한 가운만 걸친 채로 술을 마시고 있었다. 아직 새벽이라 어두웠다.
“나 때문에 깼나?”
소파에 앉은 카트린이 한쪽 무릎을 턱까지 끌어 올렸다.
“아뇨, 딱히 그렇진 않습니다.”
나는 목을 매만지며 일어섰다. 사실은 카트린 때문에 깬 게 맞다.
“착하네. 침대에선 이기려고만 드는 나쁜 남자지만. 뭐, 그편이 좋긴 하지.”
“말을 잘 듣는 착한 남자를 좋아하신다면서요?”
“너 때문에 취향이 바뀐 모양이야. 이런 것도 나쁘진 않네.”
카트린이 뺨을 무릎에 대며 창밖을 보았다. 어두운 도시가 저 아래에 깔려 있었다.
나와 카트린이 고고한 여유를 부리는 이 순간에도, 저 밑바닥에선 불행이 곰팡이처럼 증식하고 있을 것이다.
괜히 마음이 조급해진다.
“……우리도 내일은 근사한 곳에서 식사나 하죠. 매번 집에서만 보는 것도 그러니까요.”
카트린이 갑자기 웃었다. 내 말에는 웃을 게 없을 텐데 말이다.
“무리할 것 없어, 노엘. 넌 날 좋아하지 않잖아.”
날카로운 정곡이 나를 찔렀다.
“그건 아닙니다.”
“적어도 여자로 좋아하는 건 아니겠지. 너와 이런 걸로 말장난하고 싶진 않아. 같은 침대를 쓴 여자를 바보 취급하고 싶다면 어디 계속 지껄여봐.”
나는 할 말이 없어서 입을 다물었다. 카트린이 부드러운 미소로 말을 이어갔다.
“우리의 신체가 기계일지라도 부대끼는 감정마저 거짓은 아니지. 진심이 아니라면 결국 들통나는 법이야, 노엘. 그리고 너, 나 말고 여자 경험이 없었지? 그래서 더 티가 났어.”
“흠, 경험의 공백을 메꾸려고 나름 노력했습니다. 차드에게도 요령을 물어봤고요.”
“모범생의 노력이 가상해서 그동안 내가 져준 거야.”
나는 턱을 긁적이며 한숨을 쉬었다.
“그럼 우린 끝입니까? 이렇게 이야기하는 걸 보니 제가 지겨워지신 모양이군요.”
“아니, 그런 의미로 이야기를 꺼낸 게 아니야. 일단 내게 접근한 목적을 말해. 관계가 어떻게 될지는 내가 판단할 거니까.”
나는 꺼끌꺼끌한 말을 목구멍 밖으로 내뱉었다.
“……출세하고 싶습니다. 제 처지에서 더 올라갈 방법은 그리 많지 않지요. 그래서 대장님께 접근했습니다.”
“그래, 예상은 했어. 네게 실망한 건 아니니 안심해. 그래서 출세를 해서 뭐가 하고 싶은 건데? 단순히 출세가 목적이라기엔 넌 복잡한 인간이야.”
나는 카트린의 시선을 받으며 통유리로 된 벽으로 걸어갔다. 창밖의 도시가 내 발치에서 보였다.
“여기선 도시가 잘 보이죠. 하지만 제가 태어난 밑바닥까진 보이지 않아요. 저 아래는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한없이 어둡기만 하죠. 제가 바라는 건 빛입니다.”
“세상이라도 바꾸고 싶은 거냐?”
“아뇨. 태양을 바닥까지 끌어내릴 생각은 없습니다. 그저 저 아래에도 사람이 있다는 걸 알리고 싶을 뿐입니다. 윤곽이라도 밝힐 작은 빛이면 만족합니다.”
카트린은 기계가 정지하듯 나를 가만히 바라봤다. 그녀도 깊게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이윽고, 유리알처럼 멈춘 동공이 깜빡이면서 입술도 움직였다.
“넌 참 재밌는 남자야, 노엘…… 뮬리즈카.”
나는 뒤돌아서며 카트린에게 머리를 까딱였다.
“감사합니다.”
나와 카트린은 혼인을 약속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