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ad Born Blood RAW novel - Chapter (132)
배드 본 블러드-132화(132/197)
132
나는 뮬리즈카 가문의 데릴사위가 됐다. 그것도 차기 가주의 남편이니 대단한 출세였다.
내 출신이 비천한지라 뮬리즈카 가문 내부에서는 반대가 많았다. 그러나 카트린의 입지와 의지가 확고했기에 일은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나는 아가타의 집 앞까지 찾아가 직접 청첩장을 전달했다. 그녀는 나와 카트린이 만나는지도 모르고 있었을 것이다.
“노엘, 넌 여자에게 관심이 없는 줄 알았는데…….”
아가타가 멍하니 날 보았다. 청첩장을 펼치니 나와 카트린의 홀로그램이 떠올랐다.
“나도 남자잖아. 자리를 잡을 나이도 됐고.”
나는 덤덤하게 말했다. 아가타는 텁텁한 머리를 긁적였다.
“그렇긴 하지. 하지만 의외네. 대장과 네가 그런 사이였을 줄은 몰랐어. 누가 먼저 고백한 거야?”
“잘 모르겠어. 어쩌다 보니 이렇게 된 거라서.”
“출세했네. 축하해. 노엘.”
“손님을 세워만 둘 거야?”
내가 안으로 들어가려 했다. 그러나 아가타가 문을 붙잡은 채로 나를 쳐다봤다.
“……아, 미안. 저녁에 남자친구가 오기로 해서.”
“얼마 전에 헤어졌다면서? 그사이에 또 사귄 거야?”
“응.”
아가타가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문틀을 잡던 손을 놓았다.
“좋은 시간 보내라.”
“너도 결혼 준비로 바쁠 텐데 고생해.”
우린 그렇게 헤어졌다.
나는 복도를 지나쳐 승강기로 향했다. 한 발자국을 걸을 때마다 과거로 돌아가듯 상념이 스치고 지나갔다.
‘아가타.’
그녀는 밑바닥에서 여기까지 함께했던 동반자다.
어린 시절의 기억이 떠올랐다. 내가 망을 보면 아가타가 담벼락을 넘어 도둑질했다. 길바닥에서 같이 어울리던 아이들은 쉽게 배신했다. 그러나 아가타는 끝까지 내 곁에 남았다. 우린 사소한 것 하나하나조차 나눴다.
‘노엘, 이건 너와 내가 같이 찌른 거야. 죄가 있다면 우리 둘에게 있는 거지.’
첫 살인도 둘이서 같이 했다. 아마 열두 살 정도였을 것이다. 우린 칼자루를 같이 쥔 채로 겁에 질린 사내의 가슴을 찔렀다.
입대도 함께했다. 우린 어떤 상황에서도 서로를 지켰다. 설사 부대원이 전멸하더라도 아가타와 나만 살아남으면 그만이었다.
스륵.
승강기에 들어선 나는 얼굴을 손바닥으로 쓸어내렸다.
‘이제 내 동반자는 아가타가 아니라 카트린이다.’
추억은 책과 같다. 생각날 때마다 읽고 다시 덮으면 끝이다.
중요한 건 미래, 선택하고 바꿀 수 있는 건 과거가 아니라 미래다.
* * *
나와 카트린은 성대한 결혼식을 앞두고 있었다.
나는 상의할 것이 있어 카트린을 찾아갔다가 몸을 숨겼다. 카트린의 집무실 앞에는 아가타가 있었다.
“……대장님, 노엘은 꼭 행복하게 해주세요!”
아가타가 허리까지 깊게 숙이며 말했다. 카트린조차 당황하더니 아가타의 상체와 머리를 들어 올리려 했다.
“녀석은 지금까지 고생만 실컷 했어요. 사람을 잘 믿지 못해서 연애도 안 할 줄 알았거든요. 그런 녀석이 결혼까지 결심했으니 대장님을 무척 좋아하는 걸 거예요. 노엘을 잘 부탁드립니다.”
아가타는 굳건하게 허리와 머리를 숙이고 있었다.
“고마워, 아가타. 그리고 부탁한 건 처리했어. 그쪽에서도 널 계속 탐내고 있었거든. 우수한 야전 장교가 필요했다고 하더라고.”
“감사합니다.”
아가타는 그제야 상체를 들어 올렸다.
“아니, 내가 미안하지. 절친한 친구를 빼앗아 간 셈이니까.”
“대장님이라면 괜찮아요. 저는 노엘만큼이나 대장님도 좋아하니까요. 아, 이젠 대장님이 아니네요, 카트린.”
아가타가 쑥스럽다는 듯이 머뭇거리다가 카트린을 안았다. 카트린도 웃으며 그녀의 포옹을 받아들였다.
나는 아가타가 떠날 때까지 기다리다가 카트린의 집무실로 들어갔다. 집무실 의자에 앉은 카트린이 머리를 살짝 기울이며 날 쳐다봤다.
“아가타는 뮬리즈카예거를 떠나는 겁니까?”
“으음, 네게 말하지 않았나 보네. 몰래 찾아온 걸 보니 그럴 것 같긴 했어.”
“왜 허락하셨죠?”
내 목소리가 조금 달아올랐다. 카트린도 속눈썹이 동공을 가릴 만큼이나 눈을 옅게 떴다.
“아가타에게서 널 빼앗아서 미안했으니까.”
“하지만 다른 부대의 지휘관은 아가타를 도구로 쓸 겁니다. 기껏해야 잘 드는 칼처럼 취급하겠죠. 뮬리즈카예거에 있는 게…….”
“노엘, 너도 아가타에게서 떨어져 자립했잖아. 그러니 아가타의 자립도 지켜봐야지. 방금은 너답지 않게 생각이 짧은 발언이었어.”
나는 말문이 막혔다. 동반자이길 먼저 포기한 건 나였다.
보름 뒤 우린 결혼식을 올렸고, 나는 정식으로 뮬리즈카의 이름을 받을 수 있었다.
* * *
시뮬레이션 내부의 시간은 빠르게 흘러갔다.
나는 감각을 바깥으로 돌리며 체감 시간을 확인했다. 아마 현실에선 이십여 분이 지났을 것이다. 방대한 시뮬레이션이라 정신적으로도 피로감이 있었다.
하지만 난 휴식할 시간도 아까웠기에 다시금 집중했다.
이번엔 나와 노엘 간의 동일성 수치가 굉장히 낮았다. 그렇기에 노엘의 시점과 내면이 아니라 영상처럼 장면이 보였다.
지금 내 시점은 자유로이 움직이고 있었다. 시점을 빠르게 옮기면 연산이 따라오지 못해서 주변이 시커멓게 보이곤 했다.
노엘의 시야 바깥의 장면은 시뮬레이션과 컴퓨터가 적당히 재구성한 것에 불과했다. 어디까지나 이건 노엘의 기억이니까.
기잉, 기잉.
쇳소리가 들렸다.
뮬리즈카예거 부대의 연병장에는 초기 형태의 전갑의체가 움직이고 있었다. 나는 누구의 뇌가 저 안에 들어 있는지 바로 알 수 있었다.
노엘은 전갑의체로 뇌를 옮긴 상태였다. 이 때문에 동일성 수치의 괴리가 커진 것이었다.
‘전갑의체.’
지금은 노엘의 심리 상태와 사고 구조는 인간에게서 멀어졌다. 인간보단 기계에 가까운 존재가 된 것이다. 그의 뇌는 전갑의체의 부품으로 작동하는 중이다.
오랫동안 전갑의체에 몸을 담고 있으면 인간적인 기능을 하나둘씩 영구히 상실할 것이다.
끼릭, 투웅!
전갑의체는 한 손으로 중화기를 들고 사격했다. 포격이라도 떨어진 것처럼 표적지를 박살 냈다.
-노엘, 버틸 수 있겠어?
카트린의 목소리가 스피커에서 퍼졌다.
-아직은 괜찮습니다. 하지만 어지간하면 안 쓰는 게 좋겠습니다. 이건…… 인간을 잡아먹는 괴물입니다.
-기술이 더 발전하면 괜찮아질 거야. 이미 실전에 투입한 부대도 있어. 성과가 말도 안 되는 수준이더라고.
-성과는 몰라도, 전갑의체 사용자가 멀쩡하진 않을 거라는 건 알겠습니다.
노엘은 무미건조한 기계음으로 말했다.
-맞아. 며칠 정도 사용했을 뿐인데 전쟁터에서 수년을 구른 것보다도 정신 상태가 안 좋아졌어. 물리적으로도 뇌 손상이 심했고.
-전투에 더 효율적인 형태를 놔두고…… 인간 형태의 의체를 우리가 쓰는 이유가 있습니다. 전갑의체는 바보 같은 발상입니다.
노엘은 전갑의체에 대해 부정적인 의견을 내뱉었다.
-그나마 이건 인간의 형태를 취하고 있잖아. 효율성은 입증됐으니 부작용을 줄이는 방향으로 발전할 거야. 누가 뭐래도 전갑의체가 아크레시아의 미래다, 노엘.
이건 카트린의 말이 맞았다. 우수한 노엘이라도 언제나 올바른 판단과 정확한 예상만 하는 건 아니었다.
2세기가 지나면 전갑의체는 제국의 핵심 병과가 된다. 그리고 더 미래에는 모든 군인이 전갑의체를 사용하는 시대가 올 것이다.
노엘도 다루기 힘겨워하는 초기 전갑의체는 내 시대의 양산형인 미르미돈보다도 못한 성능이었다. 기술의 발전이 얼마나 빠른지 느껴지는 대목이었다.
‘노엘은 과학자가 아니니 기술의 발전까지 예상하긴 힘들었겠지.’
아키에스 빅티마는 초능력이 아니다. 어디까지나 자신이 가진 정보와 지식에서 미래를 추론할 뿐이다.
끼릭, 끼릭.
생리적으로 받아들이기 힘든 장면이 이어졌다.
전갑의체가 격납고 들어갔다. 전갑의체의 헬멧이 열리면서 노엘의 뇌가 담긴 금속 상자가 나왔다.
로봇 팔이 노엘의 뇌를 옮겼다. 뇌는 원래의 전신의체로 향했다.
끼릭.
전신의체의 후두부가 활짝 열리며 뇌를 받아들였다. 전기신호가 찌릿하게 뇌를 자극하고, 의체와 뇌를 매끄럽게 이어주는 화학물질도 쏟아졌다.
쿵!
노엘이 눈을 떴다. 그리고 동일성 수치가 높아지면서 내 시점은 노엘에게 빨려 들어가듯 겹쳤다.
“카악, 컥.”
나는 유리관에서 나오자마자 등과 허리를 구부리며 기침했다. 전갑의체에 적응했던 뇌가 전신의체를 낯설어하고 있었다.
일상적인 호흡조차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부교감 신경계가 비정상적으로 작동해서 하나하나 의식을 집중해 조율해야 했다.
동공의 축소와 확대, 심박과 호흡, 그리고 배설 기관. 이 모든 게 오작동한다. 부끄럽게도 방금 아랫도리가 젖어서 축축했다. 염병할 노릇이다.
“후우, 후우.”
나는 호흡부터 안정화했다. 바짝 독이 오른 신경계를 다스려야 했다.
“참관한 과학자들은 네가 괴물이라고 수군거리고 있어. 비정상적으로 뇌의 탄력성이 좋다고 하더라고.”
카트린이 내게 다가오며 말했다. 그녀는 자신의 외투를 벗더니 내 허리에 둘렀다. 덕분에 내 하반신의 지저분한 꼴이 가려졌다.
“괴물은 제가 아니라 저놈이죠.”
내가 눈짓으로 전갑의체를 가리켰다. 곧 문이 열리면서 연구진이 들어왔다.
끼잇, 힛, 낏낏.
키가 작은 외계종족이 전갑의체 정비를 위해 달려들었다. 나보다 머리 하나는 더 작은 이들이라서 나름 귀엽게 보이기도 했다.
‘타르파.’
타르파라고 불리는 종족이다. 한 쌍의 뿔이 머리에 달려 있었고 피부는 파란색이었다. 덩치는 작고 힘도 약하다. 그들은 장성해도 인간으로 치면 어린애 같은 외모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타르파의 과학 기술력만큼은 인류보다 훨씬 앞서가 있었다.
‘타르파 종족과 처음 조우한 인류 국가는 아크레시아였고, 덕분에 타르파의 우월한 기술력을 흡수할 수 있었다.’
노엘의 사고를 따라가던 나는 잠시 심리적 거리를 두고 생각했다.
‘내 시대에서 내 눈으로 타르파 종족을 본 적이 없어.’
제국은 외계종족을 박해한다. 그렇기에 평범한 제국민은 외계종족을 볼 일이 거의 없었다.
타르파도 제국의 다른 외계종족처럼 모습을 드러내지 않을 뿐이지 어딘가에 있을 것이다.
기이잉.
다시 내 시점은 노엘과 합쳐졌다.
“노엘 뮬리즈카 씨. 회복되면 이야기를 좀 하고 싶네요.”
타르파 여성 한 명이 노엘에게 말을 걸었다. 그녀는 다른 타르파보다 덩치가 더 컸고 뿔도 길었다.
“이야기라면 지금 해도 괜찮습니다.”
“저는 켈이라고 불러 주시면 됩니다. 원래 이름은 말하기 어려울 테니까요.”
켈과 나는 통성명을 했다. 의례적이 인사가 오가고 나서 켈은 용건을 꺼냈다.
“저와 제 팀은 뮬리즈카 가문을 전속으로 지원하고 싶습니다.”
나는 물론이고 카트린도 놀란 듯이 켈을 보았다.
“타르파의 육감입니까?”
카트린이 짚이는 게 있는지 중얼거렸다. 켈은 무언가 생각하듯 눈을 감았다가 뜨며 말을 내뱉었다.
“아마 노엘 씨는 대단한 사람이 될 겁니다. 그러니 친분을 쌓아 두고 싶군요.”
카트린이 팔짱을 끼며 미소를 지었다.
“흠, 타르파의 육감에 선택받은 사람이라…… 내가 신랑은 확실히 잘 둔 것 같네.”
켈의 육감은 맞아떨어졌다.
그 후에도, 나는 십 년 동안 승승장구했다. 뮬리즈카 차기 가주의 데릴사위이기에 신분의 장벽도 넘었다. 뮬리즈카라는 이름의 날개를 단 나는 합당한 대우를 받을 수 있었다.
‘탄도통제술, 적응형 입체기동…….’
내가 고안한 몇몇 전투술은 실전성을 인정받아 제식 전투술 교본에 들어갔다. 명성이 올라가니 다른 부대에서도 내게 장교를 파견해 교육을 맡겼다.
군부에서의 내 영향력은 자연스레 커졌고, 뮬리즈카예거 소속을 벗어나 군의 비상임 고문 역할까지 맡게 됐다.
뮬리즈카 가문 내부에도 내 출신을 문제 삼는 사람이 없어졌다.
내가 군부에 인정받으니 카트린도 예상보다 더 빨리 가주가 될 수 있었다. 아버지가 일찍 물러났기 때문이었다. 아마도 그 배경에는 카트린의 입김이 있었을 것이다.
“모두가 당신을 우러러보고 있어. 어쩌면 당신은 작은 빛이 아니라 큰 빛이 될지도 모르겠네.”
카트린이 나를 뒤에서 껴안으며 말했다.
침실은 고요했고, 창밖은 삐죽삐죽한 첨탑의 도시가 보였다. 밑바닥은 여전히 어둡다. 나는 가만히 아래를 응시했다. 내겐 저들이 보이지 않는다.
저 어둠에 잠긴 이들도 나를 우러러보고 있는 걸까. 저기서 내가 보이긴 하는 걸까. 내가 저들의 빛이 될 순 있을까.
난, 저들의 이정표가 되고 싶었다. 시궁창에서 벗어나 더 나은 삶을 선택할 수 있다는 증거. 나 같은 이들이 많아지면 위에 있는 자들도 고개를 내려 아래를 보겠지.
나는 눈을 감았다. 그리고 머지않아 기회가 왔다. 아크레시아의 군주, 크라치아 폐하의 알현일이 잡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