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ad Born Blood RAW novel - Chapter (133)
배드 본 블러드-133화(133/197)
133
크라치아 폐하의 알현부터 가상 시뮬레이션이 이상 반응을 일으켰다.
치직, 칙.
감각의 잡음이 심했다. 처음에는 데이터의 소실이 있는 줄 알았다.
‘그게 아니야.’
시뮬레이션의 가속이 비정상적으로 빨랐다.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파악이 힘들 정도였다. 나는 의식적으로 시간을 감속하려 했으나 소용이 없었다.
‘노엘의 짓이다.’
노엘은 중요 기억을 보안 처리했다. 가속이 빠른 데다가 공백도 많았다.
장면은 흐릿하고 빠르게 지나갔다. 소리도 웅얼거리듯 멀어진다. 아무리 집중해도 들을 수가 없었다.
‘노엘과 당시의 황제가 이야기하고 있어.’
이때도 황제의 감시자, 아키에스 도미니라는 개념이 있었을까? 명칭은 없더라도 비슷한 개념은 존재했을 터다.
이때부터 노엘도 황제의 감시자가 됐겠지.
구우웅.
갑자기 내 시야에서 이해할 수 없는 광경이 스치고 지나갔다.
별과 우주가 보였다. 그리고 뼈와 살점으로 건조한 듯한 함대가 괴이한 어둠을 내뿜으며 진군하고 있었다.
함선은 생명체의 내외부를 뒤집은 듯이 검붉었고, 혈관이 꿈틀거리는 외피는 숨을 쉬듯 꾸물거렸다. 당장이라도 피가 뚝뚝 떨어질 것 같았다. 꽁무니의 추진체는 빛과 불꽃 대신에 어둠을 뿌리고 있었다.
기억의 편린으로 보아도 꺼림칙했다. 본능적으로 거부감이 일었다.
‘코라도 벨라토도 아니야…….’
그 어디에서도 본 적이 없는 건조양식의 함선이다. 애초에 유기물로 건조한 함선이었다. 내가 알기론 인류는 물론이고 외계 함선 중에서도 저런 양식은 없었다.
죽음으로 엮어낸 듯한 함대는 보고만 있어도 숨이 막힐 것 같았다. 가슴이 짓눌리는 느낌이었다.
팟!
눈앞이 아득하게 번쩍였다. 참지 못한 나는 의식과 감각을 바깥 세계로 꺼냈다.
“하아, 하아.”
잠수했다가 떠오른 것처럼 숨이 거칠었다. 나는 이마를 더듬어 쓰고 있던 시뮬레이션 기기를 벗었다.
“루카?”
“아가, 아니, 지젤. 물 좀 줘.”
나는 지젤을 보고 아가타라고 부를 뻔했다. 아직 혼란스러웠다. 내가 노엘인지 루카인지도 헷갈릴 정도였다. 여기가 내가 알던 시대가 맞는지 확신도 들지 않았다. 어쩌면 루카로서의 삶이 한낱 꿈일지도 모른다.
‘붕 뜬 현실감. 흐릿한 정체성.’
내게 해리 장애가 발생했다. 심도가 낮은 시뮬레이션인데도 부작용이 심했다. 가상과 현실이 모호하게 느껴졌다.
‘그만큼 나와 노엘의 동일성 수치가 높았다는 거다.’
내 상태가 심상치 않음을 느낀 지젤은 군말 없이 물을 가져왔다.
“미안하지만, 거울도.”
지젤도 가상 시뮬레이션에 대한 지식이 있다. 그녀는 내가 해리 장애를 겪는 걸 알아채곤 재빨리 손거울을 가져왔다.
‘나는 루카다.’
하층 구역, 제72보육원 출신의 루카.
‘근위대 생도.’
수료를 앞두고 있다. 무공훈장도 받았다.
‘지금은 루카우스 쿠스토리아.’
이건 꿈이 아니다. 쿠스토리아라는 이름은 내 힘으로 거머쥔 성과다. 의식을 현실로 가져와. 내가 살아가는 세상은 여기야. 과거에 매몰되지 마.
‘키누안, 헤일라스, 지젤, 가브리엘, 길다……. 그레이스, 마르티나 디바…….’
나는 타인이 나를 어떻게 보는지 떠올렸다. 타인이 보는 나도 자아의 일부다. 나는 내외부의 루카를 끌어모아서 흩어지려는 자아와 정체성을 붙잡았다.
달그락, 달그락.
내가 든 손거울이 계속 떨렸다. 내 손이 떨리기 때문이었다.
‘난 노엘이 아니라 루카야.’
하지만 내 주장과 의지를 뇌가 거부하고 있었다. 거울 속에 비친 나는 노엘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꽤 상태가 심각하다. 내 뇌가 나를 노엘로 인식하고 있었다.
의식과 인지의 괴리가 생겼다.
“지젤.”
내가 과호흡을 억누르며 말했다.
“말해.”
“날 좋아한다고 말해줘. 여기가 현실이라고 느낄 수 있게.”
지젤은 손을 뻗어 내 뺨을 붙잡았다. 그리고는 머리를 기울이며 입술을 포갰다.
“……여기가 현실이야, 루카.”
흐트러진 호흡이 가라앉았다. 지젤의 동공에 비친 나는 노엘이 아닌 루카였다.
“말보단 효과가 좋네.”
나는 눈을 감았다가 뜨며 말했다. 뇌가 현실을 받아들이자마자 내 상태는 극적으로 안정됐다.
“도대체 뭘 본 거야?”
“나도 모르겠지만, 노엘이 좌절한 원인 중 하나겠지. 바바라는…… 아직 시뮬레이션 내부로군.”
정신이 없어서 바바라가 옆에 있다는 생각조차 못 했다. 바바라는 잠든 듯이 시뮬레이션을 헤매고 있었다. 그녀의 눈꺼풀과 손끝이 간헐적으로 떨렸다.
바바라는 나보다 진도가 훨씬 늦을 터다. 동일성 수치가 낮을수록 타인의 기억을 해석하고 받아들이는 데 시간이 더 걸린다. 나보다 얻는 정보도 적겠지.
‘바바라는 방금 내가 본 함대를 못 봤을 수도 있어.’
내가 억지로 깨어난 것도 보안 처리된 기억을 엿봤기 때문이었다. 동일성 수치가 높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노엘과 내가 비슷한 건 사실이로군.’
나도 뼈저리게 느꼈다. 시뮬레이션 돌입이 망설여질 정도였다. 노엘의 시점이 아니라 관찰자로 본다면 이런 부작용이 없을 터다.
‘하지만 바바라보다 먼저 시뮬레이션을 끝내야 해. 시간도 많이 없고.’
그리고 노엘의 시점이 아니면 기억의 완성도가 떨어진다. 내가 놓치는 부분이 많아질 것이다.
노엘의 선택과 판단에서 무언가를 얻어 내려면 그의 시점으로 시뮬레이션을 봐야 한다.
끼릭.
내가 시뮬레이션 기기를 붙잡았다. 지젤은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으면서도 말리지 않았다.
나는 눈을 감고 가상 시뮬레이션을 이어갔다.
* * *
황제와 노엘이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는 모른다.
그러나 그 흐름과 윤곽만큼은 나도 알 수 있었다. 지금의 제국과 비슷한 상황이기 때문일 것이다.
‘외부의 강대한 적.’
패배하면 국가의 존속이 위태로운 판국이다. 국가가 무너지면 귀족이고 빈민층이고 할 것 없이 죽어 나갈 것이고 살아도 노예 신세로 전락한다.
국가의 존속 문제에 비하면 빈부격차와 계급 갈등은 사소한 문제다.
“……저들의 구심점이 되어 주시오, 노엘 뮬리즈카.”
얼굴도 드러내지 않는 황제가 마지막 말을 내뱉었다. 이건 또렷하게 들렸다. 노엘이 의도적으로 남긴 장면이다.
‘아가타도 이 장면을 봤겠지. 바바라도 이걸 볼 것이고.’
이건 중요한 기억이다. 최초의 반란이 황실의 계략이었다는 것.
‘이 정보만으로도 바바라의 생존확률은 비약적으로 높아진다. 제국의 약점을 하나 잡은 셈이니까.’
황제는 내부의 안정을 도모하지 못하면 아크레시아가 살아남을 수 없다고 노엘에게 말했을 것이다. 그리고 영특한 노엘조차 부정할 수 없을 정도로 명백한 증거를 들이밀었겠지.
“제가 거절한다면 어쩌실 겁니까? 이 자리에서 절 죽이실 겁니까?”
“마음대로 하시오. 어차피 방도를 찾지 못하면 우린 멸망할 거고, 아크 행성이 우리의 무덤이 될 거요. 경의 목숨을 여기서 거두든 말든 큰 흐름에는 아무런 의미가 없지. 눈꺼풀을 닫고 귀를 막은 채로 행복을 누리시오. 범인의 인생이란 그런 거니까.”
황제가 손을 뻗었고, 알현실을 나가는 문이 저절로 벌컥 열렸다. 그러나 노엘은 나가지 않았다.
“……저는 더 나은 삶을 선택할 수 있다는 증거가 되고 싶었습니다.”
“모두가 풍요로운 삶을 살 순 없소. 우린 모든 게 부족하니까. 하물며 우린 욕심을 버릴 수 없는 인간이지. 사람들은 가진 걸 버릴지언정 나누진 않을 거요.”
나는 서서히 노엘의 시점으로 빨려 들어갔다.
“저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저 아래에선 희망이 없기에 사람들이 절망에 짓눌려 죽어 갑니다. 모두가 나은 삶을 살 수 없더라도, 희망과 믿음만으로도 우린 고통을 견딜 힘을 얻을 수 있죠. 비록 제가 저 아래를 밝힐 빛이 되지 못하더라도, 이정표로서 한 줄기의 빛은 될 수 있을 거라 생각했습니다.”
내 말을 들은 황제는 팔걸이에 팔꿈치를 놓더니 턱을 괴었다.
“경이라면 사람들의 마음을 구원할 작은 빛은 될 수 있겠지. 그러나 결국에는 모두 절규하며 죽을 거요. 아까도 말했다시피 자기만족이라면 얼마든지 해도 좋소. 굳이 그대를 방해하진 않을 테니, 경도 날 방해하지 마시오. 난 저들의 마음이 아니라 생명을 구해야 하니까. 그게 통치자의 책무이지.”
역광이 드리운 황제의 얼굴에서는 푸른 불꽃과도 같은 안광이 피어올랐다.
눈을 감지 않아도 세상이 어둡게 보였다. 아키에스 빅티마의 직관이었다. 세상은 더 어두워질 것이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을 만큼 새카맣게, 더욱 검게.
그러나 우린 빛을 잃고 어둠을 헤매더라도 살아가야 한다.
노엘의 아득한 절망이 나를 튕겨냈다. 나는 망령처럼 노엘의 뒤에서 그를 보았다.
“받아들이겠습니다, 폐하.”
이윽고, 노엘마저 검게 물들었다.
* * *
노엘의 소년과 청년기 기억은 길었다. 아마도 잊고 싶지 않을 정도로 행복하고 달콤했던 시절이었기 때문이리라.
하지만 장년의 기억은 단편적이었다. 점만 찍듯 빠르게 넘어갔다. 그리고 노엘의 심상을 나타내듯 풍경과 배경은 늘 우울하고 어두웠다.
나와 노엘의 동일성도 극도로 떨어지다 못해 별개 인물로 분리됐다. 내가 이 시기의 노엘이 느끼는 감정과 고뇌를 온전히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노에에에에엘-!!”
카트린이 울부짖는다. 뮬리즈카 가문은 몰락의 길을 걷고 있었다. 하필이면 그들의 데릴사위가 천인공노할 범죄자가 되었기 때문이었다.
심지어 노엘은 뮬리즈카예거에서 자신을 따르는 군인을 빼돌리기까지 했다. 초기 반군의 주축은 뮬리즈카예거 출신이 많았다.
오명으로 점철된 뮬리즈카 가문은 귀족 사회에서 배척당하며 밑바닥까지 추락했다. 그들에게 남은 길은 노엘을 죽이는 것뿐이었다.
분노에 찬 카트린이 자신의 부대를 이끌고 노엘과 반군을 급습했다. 뮬리즈카의 모든 자산을 털어 넣은 전투였다.
‘카트린.’
회한에 찬 노엘의 심정이 내게 보였다.
뮬리즈카 가문도 황제의 숙청 대상이었다. 뮬리즈카만 그런 게 아니었다. 정규군으로 편성된 귀족의 사병부대는 노엘의 반군과 교전하면서 차례대로 증발할 것이다.
‘귀족 가문의 영향력을 줄이기 위한 방책.’
큰 계획을 추진하려면 반대를 억누를 힘이 필요하다. 황제는 그 힘을 거머쥐기 위해 내부를 정리했다.
카트린 부대와 노엘의 반군이 벌인 전투는 빠르게 지나갔다.
노엘의 아키에스 빅티마는 완성 단계에 있었다. 그의 가르침을 받은 반군의 장교들도 정규군을 압도했다.
“하, 하하. 난 네게 모든 걸 다 줬어. 네 꿈이란 걸 보고 싶었거든. 그런데 네가 추구하던 빛이란 게 고작 이거였어? 아주 환하게 타오르긴 하네. 모두를 배신하면서까지 네가 쌓은 모든 걸 불살랐으니까! 아아, 빛나는구나! 노엘!”
생포당한 카트린이 절규했다.
“카트린, 나는…….”
노엘은 말을 하다가 머뭇거렸다. 그녀에게 무슨 말이 필요할까. 그가 눈을 가늘게 뜨며 말을 이어갔다.
“……이게 내가 원하던 일이야. 밑바닥에서부터 세상을 바꾸는 것이지. 위에서는 불가능하다는 걸 깨달았어.”
노엘이 비정하게 등을 돌렸다. 그리고 카트린은 감옥에서 자결했다.
‘빛은 없다.’
노엘은 빛이 되지 못했다. 오히려 작은 빛조차 빨아들이는 블랙홀이 되고 말았다. 그는 제국의 모든 빛을 끌어안고 삼키다가 죽을 것이다.
황제와 노엘의 계획은 순조롭게 흘러가는 것 같았다. 황실과 반군, 양면에서 두드리니 제국은 단단하게 여며지고 있었다.
그러나 세상사는 계획대로만 흐르지 않는다.
두 사내의 철두철미한 계획을 찢어발기는 사나운 천재가 있었다.
한 전장에 이질적인 존재가 나타났다. 그 존재는 갑주를 두른 인간의 모습이었다. 그것만이라면 색다를 건 없다. 전갑의체는 종종 실전에 쓰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존재가 이질적인 것은…… 순수하게 압도적인 폭력 때문이었다. 기존의 전투의체와 군인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다른 전갑의체와도 차원이 달랐다.
애정은 빈약하다. 증오는 공허하다. 그러나 애증은 질기면서도 강인했다.
애증으로 벼려 낸 정신력과 투쟁심은 마음 없는 기계에 짓눌리지 않았다. 모든 잠재력을 전부 끌어내면서도 자아를 잃지 않았다.
이질적인 전갑의체는 반군을 관통하듯 질주했다. 파괴라는 관념을 지상에 현현한 듯한 위용이었다. 날고 기는 역전의 용사들마저 장난감처럼 바스러졌다.
-황제 폐하와 제국 신민을 대신해 너를 심판하겠다, 노엘 뮬리즈카.
전갑의체에 새겨진 글자는 스킬라였다. 기계음이지만 노엘은 그녀가 누군지 알았다.
“……아가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