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ad Born Blood RAW novel - Chapter (135)
배드 본 블러드-135화(135/197)
135
나와 바바라는 노엘의 기억을 보았다.
‘바바라는 내가 노엘과 비슷한 처지라는 걸 파악했을 거야. 그러고도 남을 여자지.’
나는 결단을 내려야 한다. 바바라는 몹시도 위험한 존재였다.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약속을 어기는 한이 있어도 이 자리에서 죽여야 한다.
까득.
내 손가락 마디마디가 끌어 올린 출력으로 삐걱거렸다. 여차하면 바바라의 목을 쥐어짜고 머리통을 터트릴 수 있었다. 찰나면 충분하다.
‘여기서 바바라를 죽이는 게 우리에게 이득일까? 더 큰 재앙을 불러오는 건 아닐까?’
바바라가 자신의 죽음을 대비해 무얼 준비했는지 추론조차 어려웠다.
나는 바바라의 역량을 정확히 모르기 때문에 함부로 그녀를 죽일 수가 없었다. 바바라도 그걸 알기에 과감히 현실에서 나와 마주한 것이다.
“흐응, 너도…… 복잡한 처지네.”
바바라가 말했다. 그녀는 몸을 추스르며 진료 의자에서 일어섰다.
“바바라, 난 네가 제국에 충성하는 사람으로 보이지 않아. 어떤 개인적인 목적을 가지고 움직이는 거겠지. 아니면 제국의 상부와 거래를 했던가.”
내가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바바라를 이해하려면 그녀의 목적을 알아야 한다. 목적을 알면 행동 원리도 파악할 수 있다.
“내가 내 약점을 실토할 것 같아? 너도 알잖아, 제국에서 살아남으려면 진의와 목적을 숨겨야 해. 지금 같은 시기라면 더욱 그렇지. 난 바짝 몸을 웅크리고 폭풍이 지나갈 때까지 숨조차 쉬지 않을 거야.”
바바라는 미쳤지만 현명하다. 이성으로 광기를 통제할 수 있는 여자다. 그녀는 이번 사태를 관망하고 있었다.
‘그렇다는 건 바바라의 목적은 어디까지나 자기 보신과 생존이다.’
제국을 휘감는 혼란은 어찌 보면 출세의 기회였다. 고요히 관망한다는 건 부귀영화나 권력에 욕심이 있는 건 아니라는 뜻이다.
나도 바바라가 내 질문에 대답할 거라곤 생각하지 않았다. 어디까지나 질문을 던져 화제를 끌어내 소거법으로 추론하려고 한 것이다.
‘보신이 바바라의 목적이라면 내게도 다행이다. 오늘 얻은 정보를 제국에 보고하진 않을 테니까. 언젠가 제국과 거래하기 위한 정보로 사용하겠지.’
당장은 노엘의 기억이 바깥으로 새어 나가지 않는다는 뜻이다.
내 사고는 길었으나 물리적 시간은 찰나였다.
바바라는 옷깃을 가다듬더니 지젤을 보았다. 지젤은 뒤로 한 걸음 물러나며 권총을 바바라에게 겨누었다.
“루카가 널 살려 준다고 해서, 내가 널 죽이지 않는다는 뜻은 아니야. 이대로 문을 열고 조용히 꺼져.”
지젤의 말은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떨림과 동요조차 바깥으로 나오지 않았다. 전투 훈련받지 않은 사람치고는 훌륭했다. 바바라만 없었다면 칭찬해 줬을 것이다.
“피잇, 매정하게 굴지 마. 너도 이제 내 처지를 알잖아. 아카데미에서는 어쩔 수 없었어. 그럴 수밖에 없었던 내 사정을 이해해줘, 지젤.”
바바라는 눈썹이 휠 정도로 쓴웃음을 지었다. 그러나 어딘가 기괴하리만큼 어색했다. 자신의 의체가 아니라서 그런 것일 수도 있고, 원래 감정 표현에 어떤 장애가 있을 수도 있다.
“아니, 넌 사이코가 맞아.”
지젤이 방아쇠를 당겼다. 나도 그녀의 결단력에 놀라 살짝 당황했다.
탕!
총알이 바바라의 왼쪽 어깨를 관통했다. 충격으로 휘청거리던 바바라가 두 발자국 물러났다.
치직.
바바라의 왼쪽 어깨에서는 냉매 재질의 붉은 체액이 흘렀다.
“날 쐈네? 아, 아, 그래, 지젤.”
바바라가 총상과 지젤을 번갈아 보며 말했다. 우는 건지 웃는 건지도 모를 표정이었다.
“다음은 머리야.”
지젤이 총구와 시선을 같은 위치에 두며 말했다. 총구는 바바라의 미간과 일직선이었다.
“넌 날 쏘지 못해. 살인을 저지를 비위가 없잖아.”
바바라가 한 발자국 앞으로 나아가려 했다.
휘릭!
내가 그라켄 부트를 뽑아서 바바라의 뒷덜미를 겨누었다. 그녀의 머리카락을 파고든 그라켄 부트가 새하얗게 빛났다.
바바라의 행동이 멈췄다. 나는 그녀의 뒤에서 차분히 말했다.
“하지만 내게 살인은 일상이지. 내 인내심을 시험하고 싶다면, 어디 한번 그 발을 앞으로 뻗어봐.”
“루카, 루카, 루카. 분명히 날 죽이지 않겠다고 약속했잖아.”
“그래서 죽이지 않고 있잖아. 도의상, 네 다리도 분지르지 않고 있고. 여기서 내가 더 참아야 할 이유를 말해봐.”
바바라는 조심스레 뒤로 돌며 내 그라켄 부트를 손가락으로 밀었다.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
바바라가 출입문으로 걸어갔다. 그녀는 문을 삐걱 열면서 마지막 말을 던졌다.
“루카, 지젤. 만나서 반가웠어. 난 제법 너희들을 좋아하는 것 같아. 내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 연락해. 대등하고 좋은 거래였잖아.”
“좋은 거래였다, 바바라. 그러니 좋은 기억만 가지고 끝내자고.”
내가 시큰둥하게 대꾸했다.
바바라는 손가락을 권총 모양으로 만들더니 자신의 턱에 댔다. 그녀는 자살하는 듯한 시늉을 했다.
“빵! 처음이 어렵지. 두 번은 쉬워. 뭐든 그렇지. 살인도 금기도 말이야. 그래서 지젤의 처음만큼은 내가 가져가고 싶었어. 처음 죽인 사람만큼은 평생 기억하는 법이거든.”
말을 마친 바바라는 문을 쿵 하고 닫았다.
털썩.
다리에 힘이 풀린 지젤이 주저앉았다.
* * *
나와 지젤도 불법 시술소를 벗어났다. 바깥 날씨는 들어올 때보다 더욱 안 좋아졌다.
쏴아아아아!
비도 쏟아지고 있었다. 강풍을 동반한 비인지라 어디에 있든 간에 쫄딱 맞아야 했다.
위이이잉! 위이이잉!
상공에서는 사이렌 경보가 퍼졌다. 공중차량의 비행금지령이 떨어졌다. 이젠 정말로 쿠스토리아 저택으로 돌아갈 방법이 없었다.
‘지젤만큼은 본가로 돌려보내고 싶었는데…….’
운이 좋다면, 하루 이틀 정도는 비행 가능한 날씨가 다시 올 것이다. 아니라면 앞으로 보름 넘게 공중차량이 뜨지 못한다.
‘안전한 곳이 없다.’
지앤지 공업소나 갱단 사무실도 위험하긴 마찬가지다. 그 어디에도 지젤을 맡길 수 없었다.
후두두둑!
눌러쓴 두건에 부딪히는 물방울이 묵직했다. 나와 지젤은 하관을 가리는 마스크를 쓴 채로 골목길로 들어갔다.
“이제 어떡할 거야?”
지젤이 오수가 고인 웅덩이를 피하며 말했다.
“비부터 피해야겠지. 생각을 정리할 시간도 필요하고.”
“그럼, 저기로 들어가.”
지젤은 골목길 바깥에 있는 낡은 숙박업소를 가리켰다. 4층짜리 건물이었는데 얼핏 봐도 지은 지 백 년은 된 것 같았다.
“크레딧칩으로 결제하면 위치가 발각될 수도 있어.”
“누구한테?”
지젤이 정곡을 찌르듯 말했다.
“……누구에게든.”
“그럼 현물로 결제해. 이거면 충분하겠지.”
지젤이 귀걸이를 빼더니 내게 건넸다. 숙박비로 쓰기엔 아까운 귀금속이다.
“저기보다 더 괜찮은 곳이 있을 거야.”
“비를 더 맞았다간 감기 걸릴걸. 우린 전신의체가 아니잖아. 특히 나는 더 취약하고.”
맞는 말이다. 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나든 간에 최고의 컨디션을 유지해야 한다. 나는 군말 없이 앞장섰다.
딸깍.
숙박업소의 입구에선 손바닥 크기의 창문만 열렸다. 나름의 보안절차였다. 여긴 부랑배와 강도가 판치는 곳이니까.
“돈은 있습니까?”
숙박업소 주인이 우리를 훑어보며 말했다. 내가 지젤의 귀걸이를 들어 올렸다.
삐걱.
사람 하나 지나갈 정도로만 문이 열렸다. 비를 맞던 노숙자들이 혹시 모를 빈틈을 노리며 눈을 빛냈다.
덜그럭!
숙박업소 주인은 냉큼 문을 닫으며 걸어 잠갔다. 건물 내부는 전쟁을 앞둔 민가처럼 여기저기 철판을 덧댄 상태였다. 굳게 잠긴 창문은 총알 세례마저 버텨낼 것 같았다.
“폭풍기 대비용입니다. 이 시기에 밖에 있다간 죽기 십상이죠. 어떻게든 지붕 아래로 기어들어 오려는 놈들이 있습니다.”
주인이 묵직한 산탄총을 툭툭 두드리며 말했다. 복도를 걷던 그는 바닥에 눌어붙은 핏자국 앞에서 잠시 섰다.
“여기 핏자국 보이시죠? 전 주인이 지난 폭풍기에 노숙자 몇 명을 불쌍하다고 들여보내 줬다가 살해당했습니다. 쓰레기들에게 베풀 자비는 없다는 교훈을 잊지 않기 위해 남겨둔 거죠.”
주인이 누런 이를 드러냈다. 우리에게 범죄를 저지르지 말라는 경고이기도 했다.
주인은 계단을 올라가더니 방문 앞까지 우릴 안내했다. 그가 열쇠를 우리에게 건네며 귀걸이를 숙박비로 받아 갔다.
“그럼 당분간…….”
내가 장기숙박 일정을 정하려고 했다. 그러나 주인이 씨익 웃더니 고개를 저었다.
“어허, 손님. 이걸로는 하루 숙박비 정도죠. 지금이 대목이잖습니까.”
난 그의 앞니를 다 털어 버리고 싶은 충동을 참았다. 처음부터 귀걸이를 넘겨주는 게 아니었다. 날짜를 조율하고 귀걸이를 줬어야 했다.
그러나 괜한 마찰을 빚을 필요는 없다. 우리가 돈이 궁한 처지도 아니니 말이다.
여전히 나는 미숙했다. 경험이 없는 분야에선 한없이 부족하다. 가브리엘조차 뒷골목 흥정에 능하니 이렇게 맥없이 당하진 않았을 것이다.
“내부 보안은?”
“뭐, 없습니다. 싹 다 아날로그입죠. 뭐라도 놔뒀다간 죄다 훔쳐 가니까요.”
주인이 그리 말하며 문을 열었다. 방 안은 허름한 가구와 소음을 내는 냉장고 정도가 전부였다. 그 흔한 홀로그램 투사장치조차 없었다. 말 그대로 비바람만 피할 수 있는 수준이다.
기잉.
나는 습관적으로 내부를 점검했다. 걸리는 건 없었다.
“좋은 시간 보내시길.”
주인은 시설 안내도 없이 사라졌다.
끼익, 쿵.
문이 닫혔다. 지젤이 천장의 전등을 켜려 했다.
딸깍, 딸깍.
전등의 불빛이 들어오지 않았다.
“불러도 안 고쳐 주겠지?”
지젤이 민망하다는 듯이 말했다.
“하는 꼴을 보니 그럴걸. 아니면 팔다리라도 분질러서 끌고 올까?”
내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 지젤은 어깨를 으쓱하더니 벽면을 더듬었다.
딸깍.
다행히 다른 전등도 있었다. 흠, 이걸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는 모르겠다.
은은한 붉은빛이 천장 테두리를 따라 퍼졌다. 무드를 위한 보조등이었다. 지젤이 조명 때문에 붉은 얼굴로 날 보았다.
“없는 것보단 낫겠지?”
“뭐, 안 보이는 것보단 낫지.”
머쓱한 분위기를 즐길 처지도 아니었다. 우린 몹시 피곤했다.
털썩.
나는 소파에 앉아서 천장을 응시했다.
‘나는 노엘과 다른 선택을 할 수 있을까?’
난 마지막 패까지 모두 뽑았고, 타인이 내보인 패도 확인했다. 남은 건 내 판단과 결단이다. 내가 만들 수 있는 최고의 족보를 찾아야 했다.
“진짜 엉망이네! 이런데도 돈을 받아?”
샤워실로 들어간 지젤이 화를 버럭 냈다. 그녀는 짜증스레 수전을 걷어찼다.
“고장 나면 추가 요금이 붙어.”
“고장 날 것도 없어! 시커먼 녹물이잖아. 씻지도 못해! 마실 물은 또 어떡하고!”
샤워 불가에서 지젤의 마지막 인내심이 바닥난 모양이었다. 귀족들은 청결에 신경을 쓰는 편이니까.
“건물 외관을 보고 생각했어야지. 배관도 바꾸지 않은 지 백 년도 지났을걸. 내가 다른 곳으로 가자고 했잖아.”
“그래, 그래. 네 말이 다 맞지. 잘났어, 정말.”
지젤은 팔짱을 끼며 내 맞은편에 앉았다.
난 생각에 잠긴 채로 눈을 감았다. 시뮬레이션의 피로가 아직도 뇌에 남아 있었다. 노엘의 자취가 유령처럼 내 머릿속을 배회했다.
‘난 네가 아니야, 노엘. 그러니 꺼져.’
분명히 나와 노엘의 행보는 비슷했다. 그러나 같진 않다.
‘우린 어디가 다른 걸까.’
그게 아마도 다른 결단을 내릴 수 있는 핵심이겠지.
꼬르륵.
내 배에서 나는 소리가 아니었다.
지젤이 아랫입술을 깨물며 딴청을 피웠다. 음, 나도 미쳤는지 저 모습이 귀엽게 보여서 헛웃음이 나왔다.
난 일어서면서 바 형태의 간이식과 음수 필터가 달린 접이식 물병을 품에서 꺼냈다. 녹물을 물병에 담아 지젤에게 건넸다.
“항상 그걸 가지고 다녀? 으음, 물맛이 괜찮네.”
지젤이 음수 필터가 달린 물병을 들며 말했다. 그녀는 취수관에 입을 대고 물을 마셨다. 병에 담긴 녹물이 위로 빨려 들어갔다.
“군인이라면 다들 가지고 다녀. 기본 소양이지. 받아, 이 정도만 먹어도 하루 정돈 버틸 거야.”
나는 바를 반으로 잘라서 지젤에게 던졌다.
생체 소화기관을 가진 군인에게 열량이 높은 식사와 깨끗한 물은 필수다. 기아나 물갈이를 의지력으로 버티는 것도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윽, 맛없어. 넌 이걸 아카데미 생활 내내 먹은 거야?”
지젤이 바를 한 입 깨물더니 인상을 찌푸렸다. 그녀는 점심마다 벤치에서 이걸 먹던 내 모습이 떠오른 모양이다.
“네가 항상 날 놔두고 식당에 혼자 갔으니까 어쩔 수 없었지. 난 식당 이용법도 몰랐는걸.”
내가 짓궂게 말했다. 지젤이 입가의 부스러기를 훔치며 얼굴을 붉혔다.
“아니, 그땐, 네가 좀, 미웠으니까. 그랬지. 아씨, 미안해. 됐어?”
나는 지젤을 빤히 쳐다봤다. 역시 노엘의 잔영 때문에 아가타가 떠올랐다. 닮았으면서도 다르다. 지젤은 아가타가 아니다. 착각하면 안 된다.
죽은 아가타는 나를 노엘에 투영했다. 그래서 실수를 저질렀다.
‘아가타는 내가 노엘이 아닌데도 보호하려 했어. 노엘에 대한 감정 때문에 판단을 그르친 거지.’
쿠스토리아 가문의 시조로서 실수한 것이다. 자손을 모두 위태롭게 만들었으니까 말이다. 난 결코 노엘이 아니다.
……그렇기에 난 노엘과 같은 실수를 저지르지 않을 것이다.
노엘 뮬리즈카는 아가타에게 그 무엇도 말하지 않았다. 아가타를 위한답시고 그 무엇도 말하지 않았지. 무척이나 이기적인 행동이다. 그 때문에 아가타는 2세기 넘게 고통을 받았다.
“지젤.”
내가 입을 뗐다.
이건 나의 치기 어린 오판일 수도 있다. 어쨌거나 난 노엘보다 경험도 부족하고 미숙하니까.
“또 왜? 사과했잖아. 그리고 먹다 보니 먹을 만하네.”
지젤이 투덜거렸다. 난 희미하게 웃었다.
지금 내 선택이 더 나은 판단을 할 수 있는 조건인지는 모르겠다. 아니, 그런 계산으로 하는 게 아니니 상관없지.
난 지젤을 더는 속이고 싶지 않았다. 선의의 거짓말은 내 취향이 아니다.
“나는 아키에스 도미니, 황제의 감시자라는 직무를 수행하고 있어.”
운명의 주사위가 굴러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