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ad Born Blood RAW novel - Chapter (136)
배드 본 블러드-136화(136/197)
136
“감시자는 황제 폐하의 종사이지만 비공식 직위야…….”
나는 담담하게 설명했다.
지젤은 숨조차 멈춘 듯이 고요히 내 말을 들었다. 내 말끝이 흐려질 때마다 비바람 소리가 건물을 두드렸다.
“……결국, 나는 쿠스토리아와 군부를 무너뜨리기 위한 첩자가 된 셈이지. 아마도 내가 근위대 생도로 막 들어왔을 때부터 시작된 계획일 거야.”
내가 배우지도 않은 탄도통제술을 사용했을 때부터 시작된 계획이겠지. 황제 유리 크라치아든 키누안이든 간에, 그때부터 날 유심히 지켜봤을 것이다.
“루카, 넌 아버지를 배신하지 않은 거지?”
지젤이 주먹을 쥔 손을 자신의 무릎에 올리며 말했다. 나는 잠시 생각을 정리하곤 말을 내뱉었다.
“지금 우리 세계에선 누가 배신하고 속였는지 따지는 건 무의미해. 그저 내게 이득이 되는지가 중요할 뿐. 지금 생각해 보면 헤일라스는 내가 자신을 속이든 말든 아무 신경 쓰지도 않은 거야. ‘루카’라는 패가 자신에게 이득인지가 훨씬 중요했지. 배신감을 느끼고 말고 할 상황이 아니었을 거야. 여기선 누구나 타인을 속이고 있으니까.”
나는 순간적으로 머릿속에서 폭죽이 터지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파르르.
내 눈꺼풀이 깜빡이다 못해 떨릴 정도였다. 말로 꺼내다 보니 내 사고와 관점이 순식간에 괴물들과 같은 선상에 도달했다.
아군과 적군은 관념에 불과한 감정적인 구분이다. 피아식별은 위치와 관점에 따라 달라지며 매 순간 실시간으로 이뤄져야 한다.
헤일라스, 키누안, 황실.
그들에겐 피아의 경계란 흐릿하다. 각자의 목적에 따라 내린 최적의 판단이 맞물려 돌아갈 뿐이었다. 목적에 맞닿으면 협력하고 아니면 등을 돌렸다.
‘배신했기에 싫어하는 게 아니라 도움이 되지 않기에 싫어하는 것이지. 도움만 된다면 자신을 배신하더라도 받아들인다. 그 배신조차 이용하면 되니까. 이득이 된다면 그게 좋은 것이다.’
상위인지적 판단이다.
‘우리의 세계에서는, 누군가 자신을 속이고 있다고 해서 그 사람을 싫어할 이유가 없다.’
저들의 사고가 더 쉽게 이해가 된다. 나는 늘 내 정체와 비밀이 들켜 타인이 나를 처분할까 봐 두려워했다.
심지어 그들은 나를 처분하겠다고 매번 협박했지.
‘그 협박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었어.’
저들은 그딴 이유로 유용한 패를 처분하지 않는다. 정말 처분할 생각이면 그런 말을 입 밖으로 꺼내지도 않는다.
‘내가 이걸 더 빨리 이해했다면…….’
내 존재를 드러내 더 효율적으로 균형을 이끌어 갈 수 있었으리라.
사고의 관점을 끊임없이 바꿔야 한다. 유연하다 못해 녹아내릴 정도 사고가 흐물흐물해졌다.
“루카, 이해가 되지 않아. 그래서 넌 누구의 편이라는 거야?”
지젤의 동공이 떨렸다.
대다수의 사람은 지젤과 같다. 명확한 답을 요구하고, 아군과 적을 구분한다. 그래야 인지적인 평온을 얻기 때문이다.
상위인지적 판단을 하는 헤일라스, 키누안, 황실은 ‘비인간적’으로 보인다. 일반인은 상식과 직관에서 벗어나는 언행을 비인간적으로 느끼기 때문이다.
‘내가 저들을 괴물처럼 느낀 이유도 마찬가지지.’
그러나 결과론적 관점으로 보면 그들의 동기와 목적은 지극히 인간적이었다.
나도 이제야 그들과 같은 선상에 섰다. 늦어도 너무나 늦었군. 노엘의 기억을 본 덕분에 지금이라도 여기에 도달한 것이다.
“……절망하지 않는 사람의 편.”
내가 중얼거렸다. 지젤은 더욱 이해하기 힘들다는 듯이 나를 보았다.
“장난하고 싶지 않아, 루카! 아버지가 죽을 수도 있다는 뜻이잖아. 우리 가문도 멸족당하기 직전이라면…….”
지젤이 눈을 질끈 감았다. 참다못한 눈물이 턱을 타고 손등까지 뚝뚝 떨어졌다.
“지젤, 나와 헤일라스가 노력한다고 해서 지금의 위기를 헤쳐 나갈 가능성은 희박해. 이건 명백한 사실이야. 하지만 헤일라스가 포기하지 않았다면…… 내가 도울 길이 있겠지.”
우린 기나긴 침묵을 가졌다. 건물의 외벽을 때리는 비바람 소리가 불티처럼 튀었다.
지젤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녀는 철판을 덧댄 창문으로 걸어가더니 비좁은 틈새로 바깥을 보았다.
“내게 이런 이야기를 전부 말해 주는 이유가 뭐야? 원래는 말할 생각이 없었잖아.”
“그냥 말하고 싶었어. 만약 일이 잘못된다면 넌 나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거잖아. 내가 어떤 사람이고, 왜 그런 행동을 했는지 너에게 말해 주고 싶었어.”
나는 노엘과 다른 판단을 내렸다. 노엘은 카트린과 아가타에게 그 무엇도 말하지 않았다.
노엘은 아가타에게 끝까지 숨기며 혼자 모든 걸 짊어지고 죽었다. 아가타는 그 때문에 저주를 짊어진 삶을 살았다.
난 지젤이 아가타와 같은 저주를 받길 원하지 않는다. 설사 내가 실패해 죽더라도, 그녀는 앞으로 나아갔으면 한다.
“난 네게 특별한 존재야?”
지젤이 말했다.
애달픈 그녀의 모습을 보니 내 호르몬이 날뛰었다. 내 안의 사나운 기질에 몸을 맡기고 싶을 정도였다.
남녀의 애정은 일시적인 충동이다. 그러나 지금만큼은 이게 영원할 거라 믿고 싶다.
이것 또한 나의 미숙함이다. 처음 겪는 강렬한 감정에 휘둘리고 있다. 그걸 알면서도 어쩔 수 없었다.
“지젤, 네가 이 모든 혼란에서 벗어나고 싶다면…… 나는 지금 당장 널 데리고 아크바란, 아니, 제국을 떠날 거야. 네가 내게 특별한지는 아직 잘 모르겠어. 하지만 네가 원하는 게 있으면 뭐든 해주고 싶다. 그게 내 가치관에 반하는 일이라도 괜찮아.”
나도 내가 이런 말을 할 줄은 몰랐다. 이런 건 바보나 하는 말이라고 생각했다.
“……그게 특별하다는 거야, 루카. 나도 그렇거든.”
지젤이 안심했다는 듯이 웃었다. 나는 눈을 살짝 크게 뜨며 그녀의 미소를 보았다.
지젤은 나 때문에 내키지 않은 일을 연거푸 겪었다. 그녀는 불만을 드러내면서도 거절하지 않고 꿋꿋이 인내했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그녀가 나를 좋아하기 때문이다.
* * *
우리, 정확히 말하면 나는 하룻밤은 푹 쉬어야 했다.
노엘의 기억 때문에, 내 머릿속은 엉망진창이었다. 집중하려고 해도 기름칠을 하지 않은 기계처럼 사고가 삐걱거렸다.
후우웅! 쿵!
간혹 건물 밖에서 소리가 났다. 바람에 날린 잔해가 외벽을 쿵쿵 두드리는 듯했다. 아니면 사람일 수도 있었다. 귀를 기울이면 총성도 멀리서 간간이 들렸다.
나는 침대에 누운 채로 천장을 보았다. 젖은 옷은 벽에 걸린 채로 물을 한 방울씩 떨구고 있었다.
‘우린 내일 헤일라스를 찾아간다.’
정면돌파 할 셈이었다. 헤일라스에게 앞으로 무얼 할지 물어볼 것이다. 내가 황제의 감시자인 걸 안다면 헤일라스는 어떻게든 더 나은 수를 짜낼 것이다.
진즉 헤일라스와 협력하는 그림을 그렸어야 했다. 내가 감시자인 걸 안다고 해서, 헤일라스가 나를 적대하거나 죽이지 않을 것이다. 지레 겁을 먹은 건 나다.
지금의 상태로는 이 정도 사고까지가 한계였다. 자고 일어나면 더 좋은 방책도 떠오를 것이다.
‘……우리에게 희망이 있는 건가.’
나는 침대에 누운 채로 눈을 가늘게 떴다. 붉은 간접 조명이 아른거렸다.
스륵.
지젤의 기척이 들렸다. 바람 소리에 깬 모양이었다. 깊게 잠들기 힘든 밤이긴 했다.
나는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내 곁에 누워 있는 지젤이 눈꺼풀을 달싹이다가 떴다. 그녀는 화들짝 놀라며 상체를 들었다.
“아, 루, 루카? 어째서? 아, 하, 하하. 꿈이 아니었구나…….”
지젤이 어색하게 웃으며 붉어진 얼굴을 돌렸다. 그녀가 슬그머니 이불을 들더니 하반신의 상태를 확인했다.
지젤이 크나큰 한숨을 내뱉더니 투덜거렸다.
“……젠장, 그러면 여기가 우리의 추억 장소가 된 거야? 아, 진짜, 이딴 똥 덩어리 같은 곳이? 평생 남을 추억이라고?”
“네가 선택한 거야. 다시 말하지만, 난 다른 좋은 곳으로 가자고 했어. 이럴 것 같기도 했거든.”
“뭐라고? 너, 너 그렇게 음흉한 계획을!”
지젤이 눈을 찌푸렸다.
“농담이야. 내가 준비를 하고 온 것 같아?”
내 말에도 지젤은 의심의 눈초리로 날 응시했다. 곧 그녀는 뭔가 생각났다는 듯이 황급히 시선을 피했다. 네 시간 전의 일이 떠오른 모양이다.
“나, 나는. 이런 일에 대해 잘 모르지만…… 루카, 너 처음치곤 좀 잘하는 거 아니야? 진짜, 처음이 맞아?”
그건 노엘의 가상 시뮬레이션 덕분이다. 감사합니다, 노엘. 그리고 요령은 고맙다, 차드.
지젤의 칭찬은 싸움에서 이긴 것만큼 기뻤다. 이 생각을 말로 내뱉으면 안 되겠지. 이걸 싸움과 비교하다니 정말 기가 찰 노릇이다.
“잠이나 더 자둬. 앞으로 며칠은 제대로 자지 못할 수도 있으니까.”
“하지만 우린 이게 처음이자 마지막일 수도 있잖아.”
지젤이 손가락을 뻗어 내 명치를 톡톡 두드렸다. 그녀의 손가락은 내 가슴을 지나 배꼽, 그리고 그 아래에서 멈췄다.
“그렇긴 하네.”
처음이 어렵지, 두 번, 세 번은 쉽다.
……그러니까 두 번은 더 했다는 소리다.
* * *
헤일라스의 거취를 알아내는 건 어렵지 않았다. 그 정도 거물이 숨어서 뭔가를 꾸미진 못한다.
헤일라스는 군부의 장성들과 마라톤 회의를 하고 있었다. 근위대 내부 네트워크에도 일정이 나와 있었다.
명목상으론 폭풍기의 비상대책회의였다. 회의가 길게 이어지는 것도 언제든 사태에 대응하기 위해 대기하고 있는 탓이다.
군부 장성까지 참여하는 자리인데도 근위대 본부가 회의 장소였다. 이번 회의의 중심이 근위대와 헤일라스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삑.
난 헤일라스에게 찾아가겠다고 메시지를 보냈다. 그도 나와 지젤이 쿠스토리아 저택을 떠났다는 건 알고 있을 것이다.
‘내가 언제 올지 기다리고 있겠지.’
나와 지젤은 근위대 본부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쏴아아아.
비가 여전히 사납게 쏟아졌다. 우리의 옷은 어제부터 제대로 마르지 않아서 눅눅했다. 좋지 않은 냄새까지 났다.
나는 열악한 환경에 익숙하지만, 지젤에겐 고욕일 것이다.
“간만이로군, 루카. 그리고 지젤.”
이스칸이 본부 입구에 서서 우리를 마중했다. 그는 헤일라스의 측근 중 하나다.
지젤은 이스칸을 잘 알고 있는지 나보다 먼저 인사했다.
“오랜만이네요, 아저씨.”
“아, 많이 컸구나. 순간 몰라봤다.”
이스칸은 문을 열며 우리를 기다렸다. 우린 이스칸의 배려를 받으며 건물 내부로 들어섰다.
끼익.
문이 닫히자, 폭우의 소음도 사라졌다. 나와 지젤은 두건과 마스크를 벗으며 숨을 골랐다.
“대장님도 널 기다리고 있다.”
나는 이스칸을 관찰하듯 말을 걸었다.
“혹시 대장님이 화나신 것 같던가요? 명령을 어기고 찾아왔거든요.”
“뭐, 그 양반이 화났어도 표현하는 사람이던가?”
이스칸이 능청스레 어깨만 으쓱했다.
“그건 아니죠.”
우린 이스칸의 안내를 따라 회의실로 천천히 올라갔다. 군인이 아닌 지젤이 따라오는데도 이스칸은 별말을 하지 않았다.
“시기가 나쁘다, 루카.”
“알곤 있습니다. 각오도 다졌고요.”
올라가던 승강기가 멈췄다. 문이 열리자 차분한 복도가 보인다. 그 끝엔 회의장으로 들어가는 양문형 출입구가 있었다.
나는 감각을 끌어 올렸다. 어제 잠을 좀 설치긴 했어도 상태는 나쁘지 않다. 아니, 오히려 적당히 즐겁게 움직인 탓에 스트레스 수치는 평균보다 낮은 느낌이었다. 지젤에게 감사해야 할 것 같군.
치이익.
앞까지 도착하니 자동 양문이 좌우로 열렸다.
‘몇 명이지?’
문이 열리자마자 난 내부를 인지했다. 내 오감이 회의실을 덧칠하듯 훑고 지나갔다. 열일곱 쌍의 눈동자가 날 향해 움직였다.
그러나 그중에서 제일 중요한 눈동자는 헤일라스가 아니었다. 정말로 의외의 인물이 있었다.
움찔.
난 회의실로 바로 들어가지 않았다. 내 망설임은 찰나였으나 헤일라스나 이스칸 정도의 실력자라면 이상하게 여길 것이다.
‘이반 크라치아.’
회의실 상석엔 이반이 앉아 있었다. 무척이나 당당하게 다리를 꼰 채로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소곤소곤.
이반이 헤일라스를 부르더니 귓가에 뭐라 속삭였다. 헤일라스가 눈빛으로 이스칸에게 명령을…….
……염병, 나도 바로 대응하려 했다.
휘릭!
이스칸은 내 품에 있는 그라켄 부트를 빼앗아 들더니 내 목덜미에 댔다. 역시 상급 근위대원다운 실력이로군.
스륵.
난 조용히 투항하듯 양손을 들었다.
“루카우스 쿠스토리아는 아버지의 첩자입니다. 여러분을 내부에서부터 무너뜨리러 온 거죠.”
이반의 미성이 잔잔하게 퍼졌다. 회의실의 장성과 고위 장교들은 놀라는 기색도 없이 기계처럼 앉아 있었다.
‘제법이군, 이반.’
나는 이반을 응시했다. 찬물을 끼얹은 듯이 내 머리가 쌩쌩 돌아갔다.
‘내가 프란세크를 지킨 순간부터…… 이반은 날 버린 거다. 다른 계획을 세운 거지.’
키누안을 죽인다는 내 계획에 동조한 이반의 들뜬 모습은 거짓이었다.
난 놀라지도 않았다. 충격받을 것도 없지. 이제 이런 건 익숙하니까.
내겐 변론의 기회조차 없었다.
“루카, 절대 입을 떼지 마라. 그 어떤 말도 하지 마. 널 죽이고 싶지 않으니까.”
이스칸이 속삭였다. 이건 진심일 것이다. 날 죽이고 싶지 않다는 것도, 날 죽이겠다는 것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