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ad Born Blood RAW novel - Chapter (138)
배드 본 블러드-138화(138/197)
138
“‘저택으로 돌아가 의무와 책임을 수행해라, 루카우스 쿠스토리아.’라고 주인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장비를 몸에 걸며 파이곤의 말을 들었다.
“아버지께선 어디까지 예상하신 거죠?”
내가 묻자, 파이곤은 주름진 입가를 끌어 올리며 빙긋 웃었다.
“그야 저는 모르죠.”
나이가 많은 파이곤은 그만큼 노련하다. 언변으론 그를 이기기 힘들다.
“본가의 저택까지 돌아갈 방법이 있습니까? 공중차량도 뜨지 못하지 않습니까?”
“육로 가는 게 불가능하진 않습니다. 이어진 도로가 없을 뿐이지, 섬은 아니니까요.”
나는 외투를 걸쳤다. 그라켄 부트가 제자리에 없었다.
‘이스칸이 그라켄 부트를 가져갔군.’
그래도 크루시스는 내 허리에 달려 있었다. 무기가 있으니 안정감이 들었다.
“만약, 제가 저택으로 돌아가지 않겠다면요?”
파이곤이 고개를 들어 나를 보았다. 그의 의안은 일자형 고글로 대체된 상태다. 그 때문에 동공이나 눈빛으로 감정선이 보이지 않는다.
“주인님께선 도련님의 돌발 행동을 탐탁지 않게 여기셨습니다. 나타나서 안 될 곳까지 오셨죠. 지금은 주인님을 믿고 기다리셔야 합니다.”
나는 눈을 감았다가 뜨며 파이곤을 응시했다.
‘……요즘 귀족 아이들을 보면 세상이 자기에게 유리하게 돌아갈 거라고 믿는 분들이 많답니다. 아무런 근거도 없는 낙관적인 믿음이죠.’
파이곤이 예전에 나를 칭찬하며 했던 말이 떠올랐다.
“가만히 기다린다고 문제가 해결될 만큼…… 세상이 제게 호의적일 리가 없죠.”
내가 오른손으로 칼자루를 잡았다. 파이곤의 언성도 노기를 띠었다.
“주인님의 명을 두 번이나 어기시겠다는 겁니까? 그렇게도 아버님을 믿지 못하십니까?”
……이제 알겠다, 모두가 저지른 실수가 뭔지.
“아버지는 제게 많은 걸 숨겼습니다. 탓하는 건 아닙니다. 저도 그랬으니까요. 그래서 저와 ‘헤일라스’는 서로를 믿지 못하게 된 겁니다.”
이게 노엘와 헤일라스, 그리고 내가 저지른 실수다.
나는 지젤에게 모든 걸 말했다. 거짓말의 의도가 선의든 악의든 상관없다. 진실을 내뱉지 않는 자의 말을 누가 믿겠는가.
믿음을 원한다면 진실을 말해야 한다.
노엘은 아가타와 카트린에게 진실을 말하지 않았기에 믿음을 얻지 못했다. 그게 모두의 파국으로 이어졌고, 아가타는 죽을 때까지 진정한 행복을 찾지 못했다. 카트린은 마지막 순간까지 노엘을 증오했다.
헤일라스와 나도 서로에게 진실을 말하지 않았기에 온전히 믿지 못했다. 둘 중 하나라도 서로에게 터놓고 말했다면 일이 이렇게 꼬이지 않았을 것이다. 우리 사이의 유대는 분명히 존재했으나 신뢰는 없었다.
‘내 안위와 보신을 위해선 약점을 숨겨야 한다. 항상 비밀을 가지고 있는 게 생존에는 유리해.’
어디까지나 생존만이 목적이라면 그렇단 소리다.
지금 내 목적은 단순히 생존이 아니다. 내 앞에 닥친 문제를 여럿 타개해야 한다. 목적이 바뀌었으니 전략의 수정도 당연하다. 날 도와줄 사람을 만들려면 약점을 드러내고 비밀을 공유해야 했다.
물론, 약점을 드러내고 비밀을 속삭이는 건 위험한 일이다. 그러나 세상에 거저 얻는 건 없다.
‘생각해 보면 일레이와 내 사이가 다소 소원해진 것도 서로에게 비밀이 생기면서였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자면 내가 많은 비밀을 숨기면서부터야.’
내가 아무것도 몰랐던 생도 시절에는 일레이와 나는 모든 걸 공유했다. 서로에 대해선 사소한 것조차 알았다.
심지어 일레이는 자신의 치명적인 약점이자 비밀인 ‘불온한 사상’조차 내게 터놓고 말했다. 내가 발설하지 않을 거라 믿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도 일레이의 신뢰와 믿음에 보답하듯 릴리안 라모네스 구출이라는 위험한 계획에 동반했다. 만약, 내가 일레이의 불온한 사상을 뒤늦게 자력으로 눈치챘다면…… 배신감을 느낀 나는 그를 돕지 않았을 것이다.
‘어느 순간부터 내가 솔직하게 말하지 않으니, 일레이도 자신에 대해 말하지 않았지.’
그러면서 우리 사이에는 벽이 차츰차츰 쌓였다.
‘반대로…… 가브리엘과 나는 서로에 대해 알게 되면서 점차 친해졌지.’
내 비밀이 풀릴 때마다 가브리엘과 나는 더욱 가까워졌다. 지금의 가브리엘은 기꺼이 나를 위해 위험조차 무릅쓸 것이다.
츠즈즈즈.
귓가에서 기분 좋은 백색 소음이 들렸다. 지식과 깨달음이 내 뇌를 자극했다. 막연하게 엉켜 있던 실타래가 하나씩 풀렸다.
“……지젤 아가씨, 이쪽으로 오시죠.”
파이곤이 중얼거렸다. 그의 손은 외투 안쪽에 들어간 상태였다. 저기서 무슨 무기가 나올지는 나도 모른다.
꾹.
지젤이 내 옷자락을 잡으며 고개를 저었다. 파이곤의 일자 고글이 붉게 빛났다.
기이잉.
나는 파이곤의 의체에서 출력이 올라가는 걸 알아채곤 경고를 날렸다.
“관두는 게 좋을 겁니다. 전투가 주특기는 아니잖아요. 아버지께 우릴 안내하시죠.”
파이곤은 머리 회전이 빠르다. 그리고 진정한 의미로 헤일라스가 믿는 사람이다. 헤일라스는 중요한 기밀 임무가 있을 때마다 가족보다 먼저 파이곤을 부른다.
“도련님, 그럼 제가 문제를 하나 내겠습니다. 이걸 맞히시면 순순히 명을 따르죠.”
내가 턱짓하며 그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주인님의 다음 계획을 알고 계십니까?”
파이곤이 내 답변을 기다렸다. 내 입술이 꿈틀거렸다.
신경계 화학 처리를 받은 내 사고는 일반인보다 훨씬 빠르다. 파이곤이 뻔한 대답을 기대하며 물어본 건 아닐 것이다.
‘노엘의 오판이 아가타의 실수를 만들었다.’
아가타는 노엘의 환생을 기다렸다. 그녀는 잘못된 집착 때문에 정작 중요한 걸 보지 못했다. 정작 자신의 슬하에 또 다른 노엘이 있다는 걸 몰랐다.
‘노엘과 가까운 건 내가 아니라…… 헤일라스다.’
헤일라스는 뛰어난 통찰력을 지녔으며 책임과 의무에서 도망치지 않았다. 밑바닥 출신은 아니지만, 차남으로 태어나 가주의 자리를 쟁취했다. 군부에서 줄곧 승승장구했고, 쌓인 인맥과 경험도 노엘보다 더 많으면 많았지 덜하진 않다.
……그리고 헤일라스는 자기희생이 가능하다. 가족과 부하만 사지로 내던지는 게 아니다. 그는 가주이자 근위대장인 자신조차 가문과 제국을 위해 미끼로 사용했다.
‘최선은 진작 사라지고, 차악과 최악을 선택해야 하는 딜레마.’
본질적으로 노엘과 똑같은 상황에 놓인 건 헤일라스다. 그렇다면 그가 선택할 방법도 하나였다.
쿠데타는 그의 진짜 목적이 아니다!
‘자신이 모든 불꽃을 끌어안고 폭사한다.’
노엘과 똑같은 선택을 할 헤일라스가 보였다. 반란을 같이 획책한 군부의 장성을 모두 죽이고, 이반 크라치아의 목도 베어 버릴 것이다. 황제에게 바치는 공물이었다.
그리고 본인도 목숨을 끊겠지.
황제는 헤일라스가 바친 공물의 의도를 알아챌 것이다. 노엘의 희생으로 아가타가 권세 가문의 시조로 남았듯이, 헤일라스의 희생으로 쿠스토리아 가문이 살아남을 것이다.
가주로서의 책임도 다하고, 근위대장의 의무도 다하는 유일한 답.
‘아가타, 당신은 헤일라스에게 모든 걸 말해주고 보여줘야 했습니다. 노엘의 과오를 보고 다른 답을 찾아야 하는 사람은 제가 아니라 헤일라스니까요.’
나는 아랫입술이 피가 나도록 깨물었다. 이 모든 게 안타까웠다. 내가 아니라 헤일라스가 노엘의 기억을 봐야 했다.
“그분의 선택은 희생이군요.”
파이곤이 한숨을 내쉬었다. 안도인지 한탄인지 모를 숨이다. 그가 천천히 입술을 움직였다.
“정답입니다, 도련님.”
파이곤의 팔이 움찔거렸고, 나는 망설이지 않는다.
탕!
나는 곧장 보급권총을 뽑아서 파이곤의 정수리를 쐈다. 그의 머리가 뒤로 잠깐 휘청거렸지만 죽진 않았다.
“그러니, 보, 보내드릴 수, 없, 습니다.”
난 크루시스를 뽑으려다가 움찔했다.
딸깍.
파이곤이 품에서 무언가를 눌렀다. 그의 피부와 몸이 갈라지듯 빛나고 있었다. 과열된 열기로 인해 인공 피부가 녹았고 옷자락은 불타올랐다.
‘자폭.’
폭발이 일어나기 직전이었다.
……충실하구나, 파이곤.
헤일라스와 파이곤의 유대가 얼마나 깊은지 알 수 있었다. 파이곤은 희생을 선택한 주인의 뜻마저 존중하며 죽음으로 날 막으려 했다.
휘릭!
내가 지젤의 뒷덜미를 잡아당기며 양팔로 껴안았다. 그녀는 지금의 상황을 제대로 인지하지 못했다.
되도록 폭발의 범위에서 벗어나고 싶지만 쉽지 않을 것이다. 아니, 불가능하다.
끼이이잇!
난 바닥을 긁듯이 모퉁이를 돌았다. 그리곤 지젤을 감싸듯 안으며 몸을 웅크렸다, 내가 죽더라도 그녀만큼은 목숨을 건질 수 있길 바라면서.
“루…….”
지젤의 목소리는 폭발음에 묻혔다.
쿠아아아앙!
폭발로 일어난 불꽃이 복도를 뒤덮으며 모퉁이를 돌아왔다. 불꽃으로 이뤄진 뱀이 나와 지젤을 덮쳤다.
* * *
깊게 가라앉아 있던 내 정신이 실낱같은 빛을 겨우 붙잡았다.
“……제발, 죽지 마, 루카, 날 두고 가지 말라고.”
목소리가 들린다. 대답할 힘이 없다.
“넌 강하잖아. 어떤 상황에서도 죽지 않을 것처럼 굴었잖아…….”
누군가 날 끌고 간다. 내 몸이 바닥에 끌리고 있다. 누가 내게 말을 거는지도 모르겠다.
내 의식이 몹시도 혼란스럽다. 인지 능력이 저하될 정도로 내 상태가 나빴다.
현재 내 부상은 심각할 것이다. 그러나 통증은 느끼지 못했다. 뭐, 이게 더 위험하다는 신호이긴 하다. 중상에도 통증을 느끼지 못한다는 건 문제가 있다.
내 이름은 루카다.
나는 내게 말을 걸었다.
정신을 차려. 뇌가 부서진 게 아니라면 어떻게든 의식을 점으로 모아봐.
난 힘겹게 짜낸 의식을 뾰족하게 모았다. 창처럼 여며진 자의식이 현실로 향하는 장막을 연거푸 찔렀다.
여기서 쓰러질 거면 뭐 하러 피똥 싸며 구른 거냐, 멍청아.
자신에게 욕까지 내뱉었다. 현실의 장막은 쉽게 뚫리지 않았다. 그래도 미미하게 효과가 있는지 외부 감각이 더 열렸다.
쿠웅, 쿵. 츠즈즈즈.
목소리 말고도 다른 소리가 들린다. 내 몸이 바닥에 끌리는 소리였다. 그리고 눅눅한 비바람도 흐릿하게 느껴졌다.
“여기서 죽게 내버려 두지 않을 거야.”
지젤, 그녀의 목소리가 선명하게 들린다. 그녀가 나를 계속 부르고 있었다. 덕분에 내 의식이 조금이라도 현실에 가까워졌다.
난 상황을 정리하고 싶었다. 그러나 사고 기능의 저하 상태인 내게 불가능한 일이다.
지금의 나는 내가 왜 부상을 입었고…… 지젤이 왜 나를 끌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저 위험하다는 것만 직감적으로 깨닫고 있다.
여기가 어디인 걸까? 지젤이 제법 날 오랫동안 끌고 다닌 것 같았다.
“당, 당신은?”
지젤이 누군가와 마주한 모양이다.
“내가 피하고 싶었던 미래가 현실로 일어났군.”
불안하다. 제발, 움직여, 움직이라고.
“이, 이스칸 아저씨, 부탁이에요. 루카를 치료…….”
이스칸, 이스칸이 누구였지?
“미안하다, 지젤. 너는 몰라도 루카를 살려둘 순 없어. 대장님의 명이다. 나도 이 녀석을 좋아하지만, 그 전에 헤일라스가 내게 먼저거든. 폭발이 일어난 뒤에 너희가 나타나면…… 뭐, 됐어. 여기서 설명한다고 무엇이 달라질까.”
이스칸이라 불린 자가 다가오고 있다.
“루카를 죽이시려면 저부터 상대하시죠.”
“널 상대하는 건 어린아이의 손목을 분지르는 것보다 쉽지. 넌 머리가 좋지 않으냐? 너는 날 막…….”
“아뇨. 한 걸음이라도 더 다가오면 제가 목숨을 끊겠다는 뜻입니다.”
위험하다. 지젤의 말은 허세가 아니다.
나는 눈을 뜨려 했다. 그러나 수많은 안전장치에 막혀 의식이 현실까지 도달하지 못했다.
죽음에 이르는 부상을 입으면 뇌는 생존을 위해 불필요한 기능을 꺼뜨린다. 나는 피도 많이 흘렸고 뇌로 보낼 에너지도 별로 없었다. 내 육체는 회복해야 하는 상황에서 뇌를 쓰게 놔두지 않을 터다.
뇌와 육체가 합작해서 내 의식을 바닥 깊숙이 가라앉혔다. 그간 나 때문에 고생했으니 이참에 파업이라도 하는 것이리라.
어차피 여기서 정신 차리지 못하면 죽어! 모든 게 허사라고! 그러니까 내 말을 들어. 이 빌어먹을 병신들아!
내가 소리를 질렀다.
으드득!
혀가 시원스레 씹혔다. 나는 눈을 떴다.
끼릭, 끼릭.
내 몸 상태를 확인할 여유조차 없었다. 움직이는지 아닌지도 모르겠지만, 일단은 의체에 신호를 보내서 크루시스를 뽑았다.
끼이익!
나는 크루시스로 땅을 찍으며 일어섰다.
“그간의 정을 생각해서 정신을 차릴 때까지 기다려 주마.”
이스칸이 말했다. 나는 감길 것 같은 시야로 그를 응시했다.
기이잉.
내 뇌가 사고를 시작했다. 뒈질 것 같다. 고장 나다 못해 불타고 있는 컴퓨터를 강제로 실행하는 느낌이다.
‘상급 근위대원 이스칸, 헤일라스의 측근이자 친구.’
나는 이스칸이 누군지 인지했다. 그는 담담하게 서 있었다.
‘파이곤의 실패를 대비해 이스칸마저…….’
난 두 번이나 헤일라스의 명령을 거슬렀다. 살길을 만들어 줬는데도 바득바득 기어오른 건 나다. 그러니 나를 죽일 수밖에 없겠지.
“지젤, 물러나.”
“너 지금 상태가…….”
“닥치고 내 말 들어. 내가 죽어도…… 넌 살아라. 그간 미안했다.”
내 손등이 지젤의 턱을 가볍게 두드렸다. 그녀의 동공이 흐릿해졌다. 난 그녀를 받치며 조심스레 내려놓았다.
이윽고, 내 시야와 초점은 이스칸에게로 향했다.
“기다려 줘서 고맙습니다. 그리고 덤벼라, 이스칸.”
내가 크루시스를 앞으로 뻗었다.
“역시 너도 사내로구나.”
이스칸이 호쾌하게 웃었다. 그가 허리춤에서 단봉을 꺼내 휘둘렀다.
키리릭! 촥!
단봉이 늘어나면서 창대로 변했고, 그 끝에선 날이 뾰족하게 튀어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