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ad Born Blood RAW novel - Chapter (14)
배드 본 블러드-14화(14/197)
014
가브리엘의 꼴은 처참했다. 침대에 누운 그는 혓바닥으로 디스플레이를 누르며 카탈로그에서 인공 척추 제품을 고르고 있었다. 제대로 치료를 받지 못하면 평생 불구로 살 터다.
침대 옆에는 의사가 서 있었다.
“아, 이건 신호 대역폭이 좁아서 고객님이 쓰고 계신 사이버네틱 의체와 호환이 되지 않을 겁니다. 지금 쓰시는 게 워낙 출력이 높아서요. 억지로 연결하더라도 출력이 예전처럼 안 나올 거고요. 간혹 오작동이나 마비 현상도 일어날 겁니다. 흠, 저는 제오닉 사의 하이퍼 린델 9번 제품을 추천합니다.”
의사가 유창하게 카탈로그를 조작했다. 의사인지 영업원인지 모를 태도였다. 하기야 이쪽 바닥에선 그게 그거지.
“최, 최신 제품이잖아! 내가 이걸 어떻게 사? 날 속여먹는 거지? 이 개자식아! 다른 놈들은 싸구려로도 잘만 돌아다니던데?”
가브리엘이 소리를 버럭 지르며 항의했다. 그러나 의사는 눈 하나 깜빡하지 않았다.
“그야 그 사람들은 고객님처럼 과하게 개조하지 않았으니까요. 하다못해 팔다리의 제조사라도 같거나 호환성을 맞췄으면 신호 대역폭이 일정해서 구형 제품으로도 문제없었을 겁니다.”
“그땐 돈, 돈이 없었으니까. 일단 구할 수 있는 것부터 붙인 거지.”
“그러면 지금 팔다리를 제가 매입하고, 그 금액에 맞춰서 다른 팔다리를 붙여드리겠습니다. 그럼 구형 척추로도 거동에 문제가 없을 테고요.”
“최소한 전투용으로…….”
그토록 난폭하던 가브리엘이 쩔쩔매고 있었다. 그야 그럴 것이다. 저 의사의 손에 자신의 운명이 달려있었다.
“무슨 소릴 하시는 겁니까? 전투용이 아니라 일상용도 중고밖에 못 구해요. 지금 쓰시는 건 개조를 너무 많이 해서 중고로 팔아도 아무도 못 씁니다. 그냥 부품값 정도만 받는 거죠.”
의사의 눈에서 탐욕이 잠시나마 번뜩였다. 저건 거짓말이다.
“너, 너 이게 얼마짜리인 줄 알아?”
“거참, 우리가 투기장 전속 업체라서 그나마 투명하게 장사하는 거죠. 다른 데 가면 그냥 뼛속까지 뜯어먹힐 겁니다.”
설사 잇속을 챙기려는 목적일지라도 구구절절 맞는 말이었다. 조금이라도 더 양심적인 사기꾼에게 뜯기는 게 낫지.
……그리고 드디어 가브리엘이 날 발견했다. 그는 깨진 안구에서 피눈물이 나올 정도로 극렬하게 분노했다.
“이 개자식아아아!”
가브리엘이 목의 핏대를 빠닥빠닥 세웠다. 목 아래로는 마비된 주제에 기운이 남아 있는 모양이었다.
“병신이 된 주제에 소리를 지르면 어쩔 건데?”
나는 가브리엘의 곁에 다가가서 그의 뺨을 툭툭 쳤다.
콰득!
가브리엘이 내 손가락을 씹어 먹으려고 했다. 나는 손을 잽싸게 빼며 고민했다.
‘키누안이 적을 만들지 말라고 했지만…….’
적의를 내뿜는 상대에게 호의를 베푸는 건 쉽지 않았다.
“죽, 죽여버릴 거야! 반드시! 널 죽일 거라고!”
“말만 하지 말고 지금 해보든가.”
내가 말하고도 아차 싶었다. 내 입에선 습관적인 도발이 나왔다.
가브리엘과 입씨름해 봐야 욕설만 오갈 터다. 나는 가브리엘을 무시하며 의사에게 말을 걸었다.
“아까 말한 하이퍼 린델 9번 제품은 얼마입니까?”
“네?”
의사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는 내 말의 의도를 몰라 어리둥절해했다. 설마 내가 가브리엘의 치료비를 낼 거라곤 상상도 못 할 것이다. 이런 밑바닥 사회에 그런 성자가 있을 리가 없으니까.
나는 얼타는 의사를 밀치며 카탈로그 디스플레이를 빼앗다시피 했다.
“이 정도면 충분하겠네.”
가격을 확인한 나는 크레딧칩을 가브리엘의 가슴팍에 던졌다.
가브리엘은 두 눈을 휘둥그레 뜨더니 크레딧칩과 나를 몇 번이고 번갈아 보며 확인했다.
“이, 이게 무슨 뜻이지? 날 놀리는 거야?”
“보면 몰라? 치료비를 대납하고 있잖아.”
“네가…… 왜?”
가브리엘의 동공이 흔들렸다. 불같이 화내던 모습은 그 어디에도 없었다. 오히려 내가 말을 바꿀까 봐 벌벌 떨고 있었다.
“오늘의 빚을 기억해 둬, 가브리엘. 나중에 받으러 올 테니까.”
이 행동이 훗날 내게 도움이 될지 안 될지 나는 모른다. 하지만 키누안의 말을 빌리자면 씨앗을 뿌리는 것이다.
“너, 정, 정말 굿보이인 거냐?”
“내 이름은 루카다, 등신아. 내 마음이 바뀌기 전에 빨리 결제하는 게 좋을걸.”
나는 짜증스레 말했다. 가브리엘도 허겁지겁 의사를 재촉하며 카탈로그를 혓바닥으로 쿡쿡 눌렀다.
“굿, 아니, 루카…….”
결제를 마친 가브리엘이 나를 바라봤다. 그의 목소리는 차분했고 눈동자는 부드러웠다. 그가 머뭇거리다가 말을 이어갔다.
“……무슨 변덕으로 이러는지는 모르겠지만, 내 도움이 필요한 일이 생기면 언제든 말해라. 힘이 닿는 한 도와주지.”
나는 가브리엘을 빤히 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기분이 썩 나쁘진 않군.
* * *
투기장의 경험은 내 전투술의 근간을 뒤흔들었다. 지금까지 쌓아온 기술이 한 방울의 정수로 압축된 기분이었다.
기이잉.
투기장에서 쓰던 고물 팔다리를 내던진 나는 반가운 울림을 들었다. 내 뜻대로 팔다리가 반응하며 출력이 높아졌다가 낮아졌다.
그러나 예전처럼 출력을 항상 높게 유지할 필요가 없었다.
‘적의 힘과 주변의 환경조차 나의 무기가 될 수 있어.’
전장의 모든 걸 나의 것으로 만든다. 시야가 넓어지면서 여유가 생겼다. 치열한 공방에서도 힘의 흐름이 궤적과 선으로 보이는 것 같았다.
“일레이, 오늘은 좀 다를 수 있어.”
내가 중얼거리며 일레이 앞에 섰다. 일레이는 나와 수석과 차석을 다투는 우등생이다. 격투술에서 내가 우위에 있을지라도 압도할 수준은 아니었다.
일레이가 내 머리를 노리고 발차기를 날렸다.
나는 일레이의 발차기를 쳐내며 밀었다. 힘의 방향이 뒤틀린 일레이는 균형을 잃었다. 이어서 내가 발을 뻗어 일레이의 정강이를 바깥쪽으로 걷어찼다.
일레이를 이끄는 힘의 방향이 엇갈렸다. 그의 상체는 왼쪽으로 쏠렸고, 하체는 오른쪽으로 쏠렸다. 중심을 잡는 힘이 흐트러지면서 자랑하는 고출력 의체 성능은 무의미해졌다.
나는 작은 힘으로도 일레이를 완벽하게 무너뜨렸다.
“……루카, 방금 무슨 짓을 한 거야?”
일레이는 자빠진 상태로 나를 올려다봤다. 그는 믿기 힘들다는 표정을 지었다. 허무하리만큼 쉽게 내 노림수에 당했다.
‘힘의 활용법을 바꾸는 것만으로도 이렇게 차이가 날 줄이야.’
나는 힘을 거머쥔 내 손바닥을 가만히 보고 있었다. 시야가 트인 것처럼 머리가 맑았다. 기분 좋은 오싹함이 내 등골을 스치고 지나갔다.
‘더 좋은 의체로 바꾸지 않고도 힘을 손에 넣었어.’
내 힘에 도취되지 않았다면 거짓말이리라. 고작 한 달 넘는 기간 동안 키누안 밑에서 배우며 얻어낸 힘이 이 정도였다.
‘내 판단이 옳았어.’
다시 나는 자신을 증명했다, 보육원에서도 그랬듯이.
“키누안 교관님에게서 배운 거야.”
숨길 이유도 없었다. 대단한 비밀은 아니니까.
“격투술 교관 말이야? 근데 이건 교범에 있는 격투술은 아닌 것 같은데…….”
일레이도 우수하기에 대번 알아챘다. 아키에스 전투술은 제국의 교범과 근간부터 다르다.
제국의 전투 교리는 힘과 속도로 압도하는 게 기본이었다. 상대보다 내가 더 힘이 세고 빠르다고 전제하고 있다. 그래서 직선적이며 효율적이었다. 좋게 말하자면 잔재주를 부릴 필요가 없다.
나는 아키에스 전투술을 일레이에게 언급했다.
“농담이지? 아키에스?”
당연한 반응이 일레이의 입에서 나왔다. 우리가 아는 아키에스 전투술은 하층 구역 갱의 전유물이다.
“진짜야.”
“아키에스라면…… 그냥 양아치들의 길거리 싸움법이잖아. 넘어지면 모래를 움켜잡아 흩뿌리고, 유리 조각을 주먹 사이에 끼워서 찌르는 거 말이야.”
일반적으로 알려진 아키에스 전투술은 얄팍한 겉면이다.
주변 환경과 사물을 이용하고 적에 맞춰 유연하게 대응해라. 그러니까 속된 말로 ‘비겁하고 치사해도 좋으니까 일단 이기고 봐라.’ 이런 뜻이었다. 그러니 갱들이 좋아할 수밖에 없다.
“나도 믿기 힘들지만, 가르쳐준 사람이 아키에스 전투술이라고 말하니까 믿어야지.”
“루카, 한 번 더 붙어.”
일레이가 드물게 호승심을 불태웠다. 평소에는 그다지 열정적으로 훈련을 받는 녀석이 아니다. 녀석은 적당히 해도 나와 엇비슷한 수준에 이르는 수재다. 재능으로 따지면 일레이가 나보다 위에 있을 터다.
다시 자세를 잡은 우리가 교차했다.
키이이이잉!
나는 의체의 출력을 순간적으로 최대치까지 높였다. 일레이는 균형을 무너뜨리는 내 기술을 경계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강타다. 내 주먹이 일레이의 옆구리를 노렸다. 간신히 팔꿈치를 내려 방어한 일레이의 몸이 살짝 허공에 떴다.
쿠- 웅!
아키에스 전투술이라고 항상 약한 힘으로 강한 힘을 제압하는 건 아니다. 그건 하나의 방편일 뿐이었다.
강약의 기술을 둘 다 사용할 수 있다면 교차해서 쓴다. 단단한 금속조차 온도의 차이로 갈라지고 쪼개진다. 극단적인 두 가지 방식이 적을 효과적으로 무너뜨린다.
“야, 이…….”
일레이의 당혹감이 보였다.
나는 그의 시선 방향과 전투 반사의 예비 동작을 감지했다. 가브리엘과 싸울 때처럼 녀석의 다음 동작이 보였다.
‘일레이의 수준이 가브리엘처럼 낮아서 예상되는 건 아니야.’
나는 일레이의 버릇과 전투방식을 잘 알고 있다. 그래서 다음 동작을 쉽게 예측할 수 있었다.
정석적인 제국의 전투술이라면, 여기서 내가 선수를 쳐서 일레이의 공격 자체를 봉쇄하는 것이다. 더 빠르고 강하다면 공격할 틈조차 주지 않고 제압하면 된다.
하지만 나는 일레이의 공격을 유도하고 그 공백을 받아쳤다.
휙!
일레이가 몸의 균형을 잡자마자 오른쪽 주먹을 뻗어 반격했다.
나는 그걸 피하며 일레이의 팔꿈치를 밑에서 위로 후려쳤다. 미리 읽고 있으면 약점을 정확히 노릴 수 있었다.
콰직!
일레이의 팔꿈치 관절이 부서졌다. 깔끔하게 부쉈기에 안드로이드 정비만으로 수리할 수 있을 터다.
“……강해졌네, 루카.”
일레이는 넘어진 상태로 앉아있다가 말했다. 나는 손을 뻗어 그를 부축하려 했다. 일레이는 평소와 달리 머뭇거리다가 내 손을 잡았다. 그의 반응이 묘하게 냉담했다.
‘실수했다.’
나는 일레이의 반응을 보곤 지금까지 내게 추월당한 아이들을 떠올렸다. 그들의 자존심은 내 앞에서 뭉개졌었다.
지금까지 일레이와 나는 특정 분야의 우열이 있더라도 일방적으로 격차가 나진 않았다. 일레이가 무력의 우열에 대해서 무던한 타입일지라도, 오늘만큼은 자존심이 무척이나 상했을 것이다.
‘내가 너무 신이 났어. 애새끼처럼 굴었지.’
힘을 가지면 써먹고 싶어진다. 사실 이건 어른이나 애나 마찬가지다.
여기서 내가 미안한 기색을 보인다면 일레이의 자존심을 더 짓밟는 셈이다. 그리고 우린 그런 조잡한 가식으로 엮인 관계가 아니다.
“……쪽도 못 쓰고 당해서 삐졌냐?”
내가 한쪽 입술을 비틀면서 말했다.
“그래. 삐졌다, 새끼야.”
일어선 일레이가 팔꿈치로 내 가슴을 치며 웃었다. 나는 가슴에 피멍이 드는 걸 느꼈다. 윽, 제대로 삐진 모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