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ad Born Blood RAW novel - Chapter (140)
배드 본 블러드-140화(140/197)
140
나는 간신히 의식을 붙잡고 있었다. 조금만 집중이 흐트러져도 기절할 것 같았다.
“날 도와주러 왔군, 그레이스. 마지막까지 반신반의했어.”
난 다가오는 그레이스를 보며 말했다. 그녀는 저격총이 된 루이나를 어깨에 멘 채로 나를 내려다봤다.
“루카 님이 죽으면 잠자리가 뒤숭숭해질 것 같아서요. 그리고 절 믿는다고 말하셨으니까요.”
그레이스는 한쪽 무릎을 꿇으며 내 옆에 앉았다.
“하하, 컥, 커억.”
난 웃다가 가슴이 아파서 얼굴을 찡그렸다.
“흠, 상태가 상당히 안 좋으시네요. 화상도 심하고요. 아직 살아있는 게 용하네요. 유언을 남기고 싶으시면 지금 말씀하시죠.”
그레이스가 내 상태를 차분히 살피며 말했다.
“유언은 무슨……. 상대가 누구였는지를 생각해 보면 이 정도는 싸게 친 거야. 그나저나 안대로 가려 뒀던 눈이 예쁘네.”
내가 그레이스의 왼쪽 눈을 보며 말했다. 사실 객관적으로 예쁜 눈은 아니다. 그러나 미적 기준은 대개 주관을 따르는 법이다.
남이 보기엔 기능성만 극단적으로 강조한 흉물에 가까웠다. 그녀의 왼쪽 의안은 상시 사용이 불가능할 정도로 초고성능일 것이다.
“일단은 몸을 숨기는 게 좋을 겁니다. 폭동이 일어나서 아크바란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거든요. 디바도 이상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자기가 경험한 폭풍기 중에서 이번이 가장 혼란하다고 하더군요.”
참고로 폭풍기는 얼추 30년에 한 번꼴로 온다. 그리고 마르티나 디바는 폭풍기를 넘긴 경험이 많다.
어쨌든 나는 지금 몸을 숨겨야 한다. 헤일라스가 깔아 둔 자객은 전부 해치운 듯했으나 언제 다른 위험이 올지 몰랐다.
그레이스는 믿을 수 있어도, 마르티나 디바는 온전히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다. 그리고 디바가 결단을 내리면 그레이스도 어쩔 수 없이 날 배신할 것이다.
그러니 지금의 나를 지켜줄 수 있는 사람은 한 명뿐이었다. 내가 온전히 믿을 수 있는 자, 아니, 정확히 말하면 믿었던 사람이다. 아직도 그가 나를 위해 목숨을 던질지 알 순 없다.
시간이 많이 흘렀다. 내가 변했듯, 그도 변했을 것이다.
“네 단말기로 일레이 카르티카를 불러줘. 고유번호는…….”
나는 의식이 더 탁해지기 전에 서둘러 말했다. 그레이스도 빠르게 단말기 입력을 끝내곤 답신을 기다렸다.
“오겠다고 합니다.”
일레이가 온다는 말에 긴장의 끈이 한 가닥 끊어졌다. 나는 아득하게 멀어지는 의식을 붙잡듯 그레이스의 팔을 잡았다.
“마지막 부탁이다, 그레이스. 일레이가 도착할 때까지 지젤을 보호해줘.”
“그건 서비스로 해드리죠.”
그레이스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그제야 의식을 완전히 놓았다. 억지로 각성한 상태인지라 내 몸은 바로 정지 상태에 이르렀다.
“루카 님? 잠깐……!”
그레이스의 목소리에 당혹감이 섞여 있었다.
나는 좁아지는 시야로 그레이스의 표정이 변하는 걸 보았다. 그녀가 미간을 찡그리며 나를 향해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냉엄한 얼굴은 온데간데없었다.
역시 그레이스는 나를 걱정하고 있구나. 그런 생각을 마지막으로 나는 죽음에 이르렀다.
* * *
단시간에 기절을 몇 번이나 경험하는지 모르겠다. 이번 사태가 끝나면 난 이런저런 후유증에 시달릴 거다.
나는 몸을 험하게 굴리다 못해 혹사하고 있었다. 지쳐서 죽고 싶어 하는 몸뚱이를 내 집착으로 붙잡고 끌고 다니는 느낌이다. 내 몸뚱이라도 미안한 감정이 생길 정도였다.
“젠장, 루카? 도대체 이게…….”
“……심정지 상태로…….”
“강심제를 투여해야…….”
“그러다간 죽어! 출혈부터 해결…….”
“이름을 계속 불러서 자극해! 뇌마저 멈추면 끝장이야.”
내 의식이 희미하게 떠올랐다. 목소리들이 아득히 먼 곳에서 들리는 것 같았다. 그마저도 제대로 들리지 않는다.
내 몸은 들것에 실려 어디론가 가고 있었다.
“헤, 헤일라스에게…….”
난 입이 열릴 때마다 뭐라 말했다. 지금은 아프다고 머뭇거릴 시간이 없었다.
“그 아가리 좀 닥쳐. 이대론 네가 죽는다고! 등신아!”
아마 이건 일레이의 목소리겠지.
내 의식은 가라앉았다. 그리고 다시 깨어났을 땐 다른 목소리가 들렸다.
“지금은 부작용을 신경 쓸 때가 아니잖아?”
“하지만 저번에 그걸 맞은 사람이 이상하게 변했잖아요.”
“당장 뒈지는 것보다야 낫지.”
“아니, 그보다 당신은 재밌어서 그런 거잖아요, 이 사이코.”
“거참, 진짜로 방법이 없다니까. 여기 별다른 시설도 없잖아. 자기야, 그럼 죽게 놔둘까?”
일레이와 그레이스 말고도 다른 목소리가 섞여 있었다. 둘 다 내가 아는 사람일 것이다.
“그게 최선이라면 어쩔 수 없죠. 부탁합니다, 소장님.”
일레이의 목소리다. 그는 소장님이라는 호칭을 붙였다. 나는 한참이 지나서야 소장님이 누군지 인지했다.
아, 진가우 소장이 여기에 있는 모양이다. 그 인간이 날 치료 중이었다.
“루카, 아마 내 말이 들리겠지? 뇌 스캔을 해보니 청각 영역에 반응이 계속 있어. 지금부터 재생 유도를 시작하겠네. 세포 분열 가속이니 뭐니 말해도 모를 테니까…… 그냥 초재생이라고 생각하면 돼.”
진가우는 뭔가를 준비하듯 잠시 말을 멈췄다. 잠시 뒤, 그가 말을 이어 갔다.
“내가 비록 의사는 아니지만, 윤리적 의무를 중요시하는 성격인지라 사전고지는 하겠네. 이건 위험한 시술이야.”
윤리적 의무를 중요시한다라…… 농담을 던진 거면 꽤 성공했다. 제법 웃겼으니까.
나는 진가우의 설명을 계속 들었다. 대부분은 이해가 가지 않았다. 내 인지 능력이 떨어진 탓이 컸다.
“……좀 더 제대로 된 시설이 있거나 부상이 덜했다면 재생 부위를 통제할 수 있겠지. 하지만 지금은 자네의 상태가 워낙 나빠 전신 재생이 필요한 데다가, 특히 심장에도 손상이 있어서 약물의 흐름을 통제할 수가 없네. 노력은 해보겠지만 나조차도 치료의 결과를 예측할 수 없어. 고지를 알아들었고 동의했다면 침묵하게. 싫다면 눈이든 입이든 뭐든 움직여서 반응하고.”
어차피 동의는 하겠지만…… 실험체가 된 기분이었다.
“아, 동의해 줘서 고맙네. 나도 해보고 싶었던 시술이거든.”
실험체가 맞군.
“그리고 설명 하나를 까먹었군. 이번 시술은 진짜 더럽게 아플 거야. 장담하는데…… 자네도 견디기 힘들 거네. 이봐, 재갈을 가져와!”
진가우가 저리 말할 정도면 얼마나 통증이 끔찍할지 상상도 되지 않는다. 만약 내가 움직일 수 있었다면 몸부림을 쳤을 것이다. 이건 좀 생각해 봐야 하는 문제니까.
진가우는 내 가슴에 뭔가를 꽂았다. 아마 주사기일 것이다. 굵직한 바늘이 내 심장까지 들어오더니 알싸한 약물을 내뱉었다.
처음에는 별다른 느낌이 없었다. 이 고요함이 더 불안했다.
우득!
소리가 났다. 무슨 소리인지는 나도 모르겠다.
스으윽.
시간이 지나자 둔탁했던 감각이 선명해지고 있었다. 부상으로 인한 갖은 통증이 날 감쌌다.
깜빡.
나는 눈을 떴다. 가장 먼저 보이는 건 안경을 쓴 진가우였다. 그는 황금빛 수가 놓인 화려한 가운을 입고 있었다. 집 안에는 가운 못지않게 호사스러운 장식이 가득했다.
“여긴 라비앙로즈의 VIP저택이야. 지금은 내 전용이긴 하지.”
진가우가 히쭉 웃으며 말했다. 좀 더 떨어진 곳에 마르티나 디바가 얇은 옷만 입은 채로 서 있었다. 그리고 일레이와 그레이스도 보였다.
“지젤도 치료를 받고 있어. 너보단 상태가 훨씬 좋으니 걱정 마.”
일레이가 내게 다가오며 말했다.
철썩!
그가 양손으로 내 뺨을 치듯이 붙잡았다. 그의 푸른 눈동자가 타오르듯 나를 응시했다.
“날 불러 줘서 고맙다, 루카. 그리고 살아서 보자.”
일레이가 내 뺨을 툭툭 치며 뒤로 물러났다. 그리고 본격적인 치료가 시작됐다.
꾸욱!
진가우가 내 몸뚱이에 약물을 연거푸 주사했다. 그는 복잡한 그래프가 오가는 화면을 주시했다. 장난스럽기만 했던 그의 눈동자가 간혹 진지하게 가늘어졌다.
우득!
소리가 난 건 내 몸 안쪽에서다.
아프다.
누가 내 몸에 손을 넣어서 뼈를 부러뜨린 느낌이었다. 아직 이건 버틸 만하다.
으적, 으적.
이빨이 달린 벌레가 내 몸속을 돌아다니며 살을 파먹는 느낌이다. 서서히 버티기 힘들다. 이건 낯선 통증이었다.
찌지지직!
신경계를 한 올 한 올 찢어 버리는 듯한 미세한 통증이 얽히며 올라왔다. 이건 적응할 수 있는 부류의 통증이 아니다.
그러니까, 좀 추해도 어쩔 도리가 없다.
덜컹!
구속구 때문에 팔다리는 꿈쩍도 하지 않고, 내 몸뚱이만 들썩였다.
통증 내성 훈련이란 기본적으로 통각에 둔감해지는 것이다. 나아가 사소한 부상으로 죽지 않는다는 걸 뇌에 학습시키는 과정이기도 했다.
그래서 우린 전장에서 겪을 만한 통증을 훈련으로 미리 경험한다. 이 정도 통증으로 죽지 않는다는 걸 반복해서 뇌에 각인시키면, 어지간한 부상과 고통은 무시할 수 있고 공황에도 빠지지 않는다.
다른 말로…… 경험하지 못한 부류의 통증에 대해선 내성이 미약하다는 뜻이다.
‘이대로 있으면 죽는다.’
그런 착각마저 들 정도였다. 치료라지만 몸속에서 끔찍한 소리가 났다. 뼈가 급격히 들러붙었고 상처도 기이한 속도로 아물었다.
“어이쿠, 잘못 붙었잖아. 톱하고 망치가 어딨더라…….”
통제가 힘든 초재생 치료였다. 진가우는 잘못 붙은 내 뼈를 다시 부러뜨렸다. 그의 손이 닿는 곳마다 피가 분수처럼 튀었다.
“흠, 인간의 콩팥이 원래 세 개였나? 농담이야, 농담. 많이 쓴 건 제거하겠네. 새로 자라난 걸 쓰게나. 꼭 재생이 유전자 지도를 따라 이뤄지는 건 아니었군. 불필요한 증식도 하는 걸 보니 말이야.”
도대체 내 몸에서 무슨 짓이 일어나고 있단 말인가!
덜커덩!
내 눈은 시뻘겋게 충혈됐을 것이다. 그리고 진가우도 내 피로 흠뻑 젖어 있었다.
퓻!
진가우가 메스를 들더니 내 목을 그었다. 나는 순간 혈액이 왕창 빠져나가는 걸 느꼈다. 과다출혈로 죽을 것 같았다.
“약물이 뇌로 더 가는 걸 막기 위해선 어쩔 수 없네. 혈액 투석기를 연결해 돌릴 테니까 버텨 보게.”
진가우는 차분히 설명하며 투석관을 내 목에 쑤셔 넣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는지 모르겠다. 익숙해지지 않는 통각이 번갈아 내 뇌를 쿡쿡 찔렀다. 기절하고 싶어도 정신이 또렷했다.
말이 많던 진가우도 입을 다물곤 수술에 집중했다. 그도 떠들 기력이 없어진 모양이었다.
“거의 끝나 가. 나도 나지만, 자네도 참 대단하군. 솔직히 이래도 되나 싶을 정도로 손을 막 댔거든. 죽어도 된다는 생각으로 과감하게 수술했단 말이야. 하여튼 목숨을 건지거든 허튼 곳에 쓰지 말게. 힘들 게 살린 사람이 금방 죽는 꼴을 보긴 싫거든.”
묘하게 뼈가 있는 말이다.
진가우도 제국의 어둠에 대해 무지한 건 아닐 것이다. 혼란의 시기에 그가 왜 여기에 있는지도 의문이었다.
* * *
나는 기적과도 같은 치료를 받고 살아남았다.
온몸이 두들겨 맞은 듯이 뻐근했고, 내 몸을 찢어발긴 흉터도 벌겋게 익어 있었다. 그러나 죽음에 이르렀던 중상이 반나절 만에 나았다는 게 중요했다.
지끈지끈.
나는 극심한 두통 때문에 눈을 찡그렸다. 그리고 회복이 끝났는데도 몸에서는 통증이 느껴졌다. 간헐적으로 누가 내 몸을 찌르고 베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후유증.’
내 뇌와 몸에 새겨진 후유증은 영구적으로 남을 것이다. 앞뒤 안 가리는 극단적 치료를 받은 탓이다.
“정밀검사는 하지 않겠네. 그럴 설비도 없고 여유도 없을 것 같으니까.”
진가우가 나신으로 말했다. 그는 저택의 중심에서 샤워하며 피를 씻어 내고 있었다. 왜 샤워 설비가 1층 홀 중앙에 있는지는…… 별로 알고 싶지 않다. 여긴 라비앙로즈 소유의 저택이다.
“치료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중간엔 소장님을 죽이고 싶다는 충동이 몇 번 있었지만요.”
나는 비틀거리며 간이 수술대에서 내려왔다.
내 몸은 누가 칼로 그림을 그린 듯이 흉터로 빼곡했다. 원래도 흉터가 많았지만, 지금은 그 정도를 넘어섰다.
“자네가 무얼 하는지 난 모르네. 신경 쓰고 싶지도 않아. 제국의 암투 따윈 나와 관련이 없는 이야기지. 누군가가 날 찾아와 물어본다면, 난 전부 대답할 거야. 그러니 내게 다른 도움을 청하지도 말고, 속에 있는 비밀도 털어놓지 말게. 이해했나?”
진가우가 능숙하게 나와 선을 그었다. 괜히 제국에서 오랫동안 살아남은 게 아니었다. 그에게도 나름의 처세술이 있었다. 마냥 눈치를 보지 않는 괴짜가 아니었다.
마르티나 디바가 2층에서 1층으로 내려오고 있었다. 그녀는 진가우가 갈아입을 옷을 들고 있었다.
“용케도 살았네, 도련님. 역시 자기의 실력이 대단하긴 해. 난 시체청소부를 부를까 말까 생각 중이었는데.”
나는 지젤과 일레이를 찾아 동공을 움직였다. 당장은 내 시야에서 그들이 보이지 않았다.
“지젤은?”
“위층에서 자고 있으니까 안심해. 카르티카 도련님이 잘 지키고 있어. 생각보다 인덕을 잘 쌓았나 봐? 주변에서 도와주는 사람이 많네. 그레이스도 아무런 대가를 받지 않고 나섰잖아.”
“그건 그레이스가 착해서 그래.”
내가 별거 아니라는 듯이 말했다. 그레이스에 대한 이야기는 마르티나와 피하고 싶은 주제다. 그러나 마르티나는 집요했다.
“아니, 그렇지 않아. 우린 갱단이고, 착하기만 한 사람은 간부로 버틸 수 없지. 지인이 위험하다고 해서 만사를 제쳐 두고 달려 나가지 않아. 그런데 그레이스가 왜 그랬을까? 간단한 이유지. 이성을 마비시키는 건 언제나 사랑이야. 그레이스는 도련님을 좋아해. 그 감정을 눈치채고 이용한 거지? 제법이네.”
나는 입을 다물었다.
마르티나의 말은 사실이다. 그레이스가 날 도와준 이유는 감정적 사유가 전부다. 내게 어떤 대가를 바라고 한 게 아니다.
“……어쨌든 도와줘서 고맙다, 마르티나.”
“난 그레이스의 부탁을 들어준 거야. 그러니 그 아이에게 감사하다고 말해. 이제 그레이스는 평생 내 손아귀에 있을 거야. 라비앙로즈에서 영영 벗어나지 못하겠지. 책임감만큼은 투철하니까.”
나는 한 손으로 가슴을 매만졌다. 쑤신 건지 아린 건지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