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ad Born Blood RAW novel - Chapter (142)
배드 본 블러드-142화(142/197)
142
일레이는 깍지를 낀 양손의 엄지만 톡톡 맞부딪쳤다. 그는 내 말을 귀담아들으며 고속 사고를 하고 있었다. 그의 동공 테두리가 사고의 속도를 대변하듯 점멸했다.
“지금까지 의아했던 키누안과 너의 관계도 이해가 돼. 키누안의 정체는 의외로군. 네가 이 정도로 복잡하게 얽혀 있었을 줄이야. 그간의 네 이상 행동도 그런 이유 때문이었군.”
내가 꼼꼼하게 설명할 필요가 없었다. 일레이는 우수했고 맥락만으로도 상황을 확장해서 파악했다.
“난 이미 감시자로서 실격이다. 다음에 만나면 키누안이 날 죽이려고 들 거야.”
일레이도 생각을 한참 정리하다가 입을 열었다.
“……상황이 너무 어렵잖아. 라모네스 때와는 차원이 달라. 네가 왜 여태 말하지 않았는지도 알겠지만, 이건 너 혼자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야.”
일레이가 참았던 숨을 깊게 내뱉었다. 나는 현재 상황에 대한 설명을 덧붙였다.
“헤일라스는 반기를 꾸미는 척하며 군부와 근위대의 불온분자를 한곳에 모을 거야. 그리고 그자들을 숙청해 공물로 황실에 진상하겠지. 그게 쿠스토리아 가문을 살리고, 근위대도 존속시킬 유일한 방법이니까.”
“황실이 헤일라스의 공물을 받아들이더라도…… 루카, 넌 살아남기 힘들어. 지금부터 망명을 준비해. 폭풍기가 끝나면 빠져나가지도 못할 거야.”
일레이의 제안도 하나의 선택지다.
헤일라스가 죽고, 나는 망명한다. 그리고 쿠스토리아 가문은 존속하겠지.
……그러나 형용하기 힘든 감정이 내 안에서 몰아치고 있었다. 난 곧 죽어도 저 선택지를 택할 수 없었다. 저 선택지를 택하는 순간, 나란 존재가 변질할 것만 같았다.
“아직 결말은 나지 않았어. 헤일라스에겐 본인도 모르는 패가 더 남아있지. 아가타가 여태 꽉 쥐고 보여주지 않은 패야.”
내 모든 지식과 정보를 헤일라스와 공유한다. 헤일라스는 확장된 지식과 정보로 새로운 선택지를 짜낼 것이다.
“헤일라스 대장님께 연락은?”
“되지 않아. 통신이 끊어졌는지, 받지 않는 건지는 알 수 없어. 그러나 날 이미 적으로 생각하고 있을 거다. 명령을 연달아 어기고 최측근을 둘이나 죽였으니까. 이반은 나와 헤일라스가 접촉하는 걸 꺼리고 있을 거고.”
“루카, 내 이야기 똑똑히 들어. 나는 헤일라스와 접촉한다는 계획에 반대한다. 헤일라스는 불리한 상황이고, 널 적대하고 있지. 조건부 항복까지 결심한 헤일라스와 손을 잡는다는 건 비합리적인 판단이야. 헤일라스가 더 나은 계책을 짜낼 거라는 확신도 없잖아.”
나도 알고 있다. 지금 내 계획은 빈틈투성이다. 심지어 내 생존확률조차 낮았다. 누구도 선택하지 않을 최악의 선택지다.
지금 내겐 ‘최악’을 선택할 결단력이 필요하다.
“하지만 이게 내가 원하는 결과에 가장 가까운 선택지야.”
“모두가 원하는 걸 가지진 못하지. 그건 나보다 네가 더 잘 알잖아? 난 내 친구가 무의미한 고생만 하다가 죽길 바라지 않아.”
일레이가 나를 노려봤다. 그도 쉽게 물러서지 않았다.
“그럼 릴리안 라모네스를 구한다는 선택은 현실적이었나 보네.”
내가 빈정거리자, 일레이의 안색이 변했다.
“루카, 그 이야기는 여기서 할 것 없다.”
일레이가 짚고 있던 식탁이 쩍쩍 갈라지고 있었다. 원목으로 된 식탁이 쪼개지면서 음식과 그릇이 아래로 쏠리며 쏟아졌다.
“어려운 건 없어, 일레이 카르티카. 내가 불구덩이로 뛰어들어 가는 걸 뒷짐 지고 구경하던가, 나와 같이 뛰어들던가…… 둘 중 하나를 선택해.”
내가 눈을 게슴츠레 뜬 채로 일레이를 응시했다. 일레이가 허리춤에 손을 가져가더니 칼자루를 잡았다.
“여기서 널 제압한다는 선택도 있지.”
“관두는 게 좋을걸. 예전에도 비슷한 상황이 있었던 것 같은데? 그땐 누가 이겼더라?”
나는 턱을 오만하게 치켜들며 뺨을 긁적였다.
사나운 침묵이 일었다. 칼자루를 잡은 일레이의 손가락만이 꼼지락거렸다.
“허세는 집어치워. 넌 중상에서 막 회복했잖아. 여기서 널 때려눕히고 벨라토로 가는 화물선에 실어주마.”
난 여기서 확신했다.
……일레이 카르티카는 믿을 수 있다.
친구를 시험한 것 같아서 죄책감이 들긴 했다.
“부탁한다, 일레이. 지금 날 도와줄 사람은 너밖에 없어.”
일레이가 아랫입술을 깨물며 얼굴을 찡그렸다. 칼자루를 더듬던 그의 손가락도 떨렸다.
나는 고개를 숙였다. 내 머리와 목이 무방비하게 드러났다.
“루카, 제발, 이러지 마. 이건 자살이나 마찬가지야. 넌 싸구려 정의감에 취해 행동하는 사람이 아니잖아.”
울 것 같은 목소리가 들린다. 나는 눈을 감고 생각했다.
“정의감은 아니야. 승산도 있다. 계획을 들어보고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여기서 날 때려눕히든 말든 마음대로 해. 어차피 이건 네 협력 없인 성립할 수 없어.”
내가 머리를 들며 말했다. 코에서 흐른 피가 바닥으로 뚝뚝 떨어졌다. 난 피를 거칠게 닦아내며 눈을 떴다.
콧잔등이 욱신거렸다. 이마는 몸살이라도 걸린 것처럼 뜨겁다. 과열된 머리는 멈추지 않는다.
치지직.
내 의안에서 잡음이 일었다. 의안이 고장 난 건 아니다. 내 뇌의 상태가 문제다.
……연이은 혹사와 아키에스 빅티마로 인해 내 뇌 신경계가 망가지고 있다. 그러나 이젠 멈출 수 없다.
퓻!
내 왼쪽 생체 안구에서 핏줄이 터지는 소리가 났다. 시야가 붉었다. 붉은 눈물이 내 뺨을 따라 흘렀다.
“루카? 야, 너 지금…….”
일레이조차 말을 잇지 못했다.
“올 게 왔을 뿐이야. 어차피 내 앞에 닥친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면 내 뇌는 멈추지 않아. 이건 저주나 마찬가지거든.”
아키에스 빅티마의 수준이 높아진 대가다.
내 뇌는 내 주변의 모든 위험과 문제를 감지하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 언제나 높은 수준의 집중을 상시 유지한다. 인지와 오감, 통찰력도 예민해지고 높아진 탓에 사소한 변수와 위험조차 무신경하게 넘기지 못했다.
‘포크는 네 개, 숟가락 셋, 접시는 여덟, 깨진 건 셋. 그중에…….’
이 와중에 나는 강박적으로 바닥에 떨어진 식기를 셌다. 이건 내 의지와 무관했다. 그저 시야의 모든 걸 뇌가 기계적으로 입력하고 있었다.
의식의 초점이 조금만 흐려져도 나는 뇌를 쓸데없이 소모했다. 의식을 외부 감각이 아니라 내면으로 돌려야 한다.
젠장, 미치겠군. 아니, 이미 난 미쳐 있다.
“……그래, 어디 한번 그 잘난 계획을 지껄여봐. 네 저승길 소원을 들어줄 사람은 나밖에 없는 것 같으니까.”
나는 고개를 들었다. 칼자루를 놓은 일레이가 흐트러진 앞머리를 쓸어 올리고 있었다.
* * *
나는 라비앙로즈의 저택에서 임무를 위한 장비를 준비했다. 이게 내 인생의 마지막 임무가 아니었으면 좋겠다.
그러나 마지막일 확률이 높다. 이건 비관이 아니라 현실적인 직시다.
목표가 이상적일지라도 사고는 현실적이어야 한다.
끼릭, 끼릭.
나는 손가락을 하나씩 접었다.
급하게 수리한 의체는 내 말을 그럭저럭 잘 들었다. 완벽한 상태는 아니라도 어정쩡한 놈에게 당하진 않을 것이다.
치익.
나는 일레이가 쓰던 가슴 보호구를 빌려 장착했다. 특이점으론 가변형 헬멧이 목 테두리를 따라 접혀 있었다. 일레이가 즐겨 쓰는 형태였다.
기이잉.
내가 목 테두리를 손가락으로 훑었다. 접힌 헬멧이 차근차근 올라오면서 내 머리를 감쌌다. 테두리를 반대 방향으로 훑으니 이번엔 헬멧이 다시 접혔다.
‘지젤.’
내 시선은 침대에 누워있는 지젤에게서 멈췄다. 생명엔 지장이 없으나 그녀는 깨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단시간에 정신적 충격을 많이 받은 탓이었다.
나는 극한의 환경과 중압감을 버틸 수 있게 훈련받고 개조된 인간이다. 그러나 지젤은 다르다.
이번 사태로 지젤은 평생 사라지지 않을 정신적 상처를 여러 번 입었다. 거기다가 나마저 죽는다면 끔찍한 고통을 겪을 것이다. 그래서 난 죽고 싶지 않았다.
마르티나 디바가 폭풍기 동안 지젤을 맡아 준다고 했다. 여러모로 마르티나에겐 빚이 많았다. 언젠가는 갚아야겠지.
“……갔다 올게.”
죽을 각오를 했더라도 죽진 말자, 루카.
나는 중얼거리며 방을 빠져나왔다. 저택 내부가 단번에 인식됐다. 여태 보지 못했던 것도 보였다. 네 시간 정도 잠을 잔 덕분이었다.
‘부탁한다, 일레이.’
일레이는 이미 저택에 없다. 그는 내 계획을 듣고선 네 시간 전에 저택을 나갔다.
1층으로 내려가니 술을 마시는 진가우가 보였다. 마르티나 디바는 그의 옆에서 안주를 하나씩 입에 넣어주고 있었다.
-해당 지구는 봉쇄됐으니 시민 여러분께서는…….
벽면을 가득 채운 대형 화면으로 바깥 뉴스를 보고 있었다. 상층 구역의 지구봉쇄와 폭동에 관한 이야기가 계속 흘러나왔다.
“아, 루카. 아깐 경황이 없어서 못 물어봤는데…… 내가 준 주사총은 써 봤나?”
나는 전투복 위에 걸친 외투 자락을 들어 보였다. 쇠붙이로 된 주사총이 드러났다. 예전에 진가우의 연구소에 방문했을 때 그에게 받은 선물이다.
“아마 오늘 쓸 것 같습니다.”
“설명서는?”
“다 읽어 봤습니다.”
난 저택의 뒷문을 향해 걸어가며 말했다.
“그래? 하나만 묻겠네. 방금 계단 숫자는 전부 몇 개지?”
“……42개더군요. 혹시 난간 기둥 숫자도 말해야 합니까?”
진가우가 웃었다. 그는 마르티나의 옷 속에 손을 불쑥 집어넣더니 몸을 주물렀다. 사실 마르티나가 입고 있는 천 쪼가리를 옷이라고 불러야 하는지도 모르겠다.
“양심상 말하는데, 그 정도로 높은 수준의 과각성 상태에서 그걸 썼다간 아마 죽을 거야. 운이 좋아도 폐인이 되겠지.”
“과학의 발전에는 희생이 필요한 법이죠. 제가 몸을 바쳐 이바지하고 오겠습니다.”
내가 고개를 까딱이며 뒷문을 밀었다.
“멋지군. 역시 난 자네가 좋아, 루카.”
“솔직히 전 당신이 싫습니다, 소장님.”
진가우가 시원스레 웃어댔다. 난 그 웃음을 뒤로하며 문을 열었다.
쿵!
저택을 나온 내가 문을 닫았다. 쾌적한 저택과 달리 눅눅한 공기가 가장 먼저 마중을 나왔다.
고개를 들어보니 벌써 우울증에 걸릴 것 같았다. 하늘은 어둑하고 비는 쏟아졌다.
나는 앞으로 걸었다. 복잡한 골목을 지나서 대로변으로 빠져나왔다.
건물들 너머로 보이는 건 불꽃과 연기였다. 불꽃은 분명히 붉은색일 텐데, 내 시야에선 알록달록했다. 흐느적거리는 연기의 덩어리는 어떤 은유가 있는 형상처럼 느껴졌다.
와아아아아아아!
이어서 들리는 건 군중의 함성. 내 귓가에 확성기를 대고 외치는 것 같다.
과잉 감각 때문에 머리가 아팠다. 난 목 테두리를 더듬어 헬멧을 펼쳤다.
키이잉!
헬멧이 작동하는 소리조차 내 신경을 긁어댔다.
라비앙로즈의 VIP저택은 하층 구역에 있고, 폭동은 상층 구역과 그 경계에서 일어나고 있다.
그렇다고 하층 구역이 안전한 건 아니었다. 여긴 최소한의 치안마저 사라진 무법지대나 마찬가지다. 그나마 있던 치안력은 상층 구역에 쏠려 있었다.
혼란을 틈탄 범죄가 하층 구역에서 기승이었다. 죽은 지 며칠도 안 된 시체가 골목길마다 보였다. 건물 내부조차 안전하지 않았다. 주위를 둘러보면 깨진 창문과 핏자국이 만연했다.
“넌, 뭐, 컥! 끄으으읍!”
난 지나가면서 강도의 머리를 손바닥 밑으로 후려쳤다. 그의 안면이 움푹 들어가며 안구가 삐져나왔다. 날 찌르려던 칼이 땅바닥에 떨어졌다.
방금 내 폭력은 순전히 전투 반사였다. 특별히 생각하고 움직인 게 아니다.
저벅, 저벅.
나는 유령처럼 거리를 걸었다. 의식이 명료하진 않았다. 일부러 난 집중력을 떨어뜨리려고 노력했다.
지금은 뇌를 아껴 써야 했다.
……정신을 차려보니 난 하층과 상층의 경계에 도착했다. 아크바란의 검문소 중 하나였다.
무수한 인파가 내 앞을 가로막고 있었다. 그들은 위를 향해 소리를 질러댔다.
“우리도 보호받을 권리가 있다! 세금을 내고 있잖아! 이 빌어먹을 새끼들아!”
“드론과 안드로이드라도 내보내!”
“나, 나는 상층 구역 사람이야! 비켜, 비키라고!”
“지랄하지 마!”
검문소 아래는 혼란의 도가니였다. 시위하는 사람과 출입하려는 사람이 뒤엉켰다. 밟혀 죽는 사람도 있었다.
-허가 없이 들어서면 발포하겠습니다. 다시 경고합니다. 허가 없이…….
검문소의 군인들은 인파를 막고 있었다.
나는 반쯤 감고 있던 눈을 천천히 떴다. 의식을 깨우며 주변을 인식했다.
‘여긴 다른 검문소에 비해 양호한 편이다.’
중산층 거주지구와 가까운 검문소라 유혈 사태까진 일어나지 않았다.
군인들도 섣불리 폭력을 쓰는 사람이 없었다. 그들도 하층 출신이 대다수이고, 친인척과 지인이 시위대 속에 있을 수도 있다. 상관의 명령이 없다면 대치 상태를 얌전히 유지할 것이다.
‘시위대가 폭도로만 돌변하지 않으면 황실도 발포 명령을 내리지 않는다.’
제국과 황실은 자국민의 무의미한 학살을 꺼리며 필요한 수준의 폭정만 했다. 놀랍게도 그들은 언제나 피해를 최소화하는 방법만 고른 것이다. 그러나 그 시간적 범위가 지나치게 거시적이기에 근시안적인 눈으로 보면 잔혹하기만 한 폭정으로 보인다.
툭, 툭.
내가 사람들을 밀치며 앞으로 나아갔다. 격정에 휩쓸린 일부는 화를 내며 내 몸을 붙잡으려 했다. 그때마다 나는 그들의 손가락과 팔을 분질렀다.
척.
내가 인파를 가르며 검문소 앞에 섰다. 경계선이 노랗게 점멸하며 경고를 보내고 있었다.
“다가오면…….”
날 겨누던 군인이 말을 잇지 못했다.
끼릭, 끼릭.
내가 목 테두리를 더듬어 헬멧을 접었다.
“내 이름은 루카우스 쿠스토리아다. 제국 신민은 누구나 제국의 방패 아래에서 정당한 보호를 받을 자격이 있으며…… 이는 초대 황제 디노 크라치아 폐하께서 천명하신 제국민의 권리다.”
이젠 멈출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