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ad Born Blood RAW novel - Chapter (147)
배드 본 블러드-147화(147/197)
147
시각은 가장 중요한 감각이다.
난 그걸 잃은 채로 그림자와 싸우고 있었다. 반향정위를 위해 소리를 따로 낼 필요도 없었다.
카- 앙!
몰아치는 굉음이 쉬지 않고 번져 나갔다.
나는 청각 신호와 정보를 시각 중추에서 처리하고 있었다. 아무리 뇌 기능이 뛰어나더라도 그간의 청력 강화 훈련이 없었다면 어림도 없는 일이었다.
대강 어떻게 보이는지 설명하자니 애매하다. 암흑 속에서 하얀 실이 뭉쳐서 형태를 이룬 느낌이다.
소리와 진동이 느껴질 때마다 하얀 실이 흐트러지면서 실시간으로 주변의 모습을 그려냈다.
키이이이잉!
향상된 뇌의 기능 때문에 소리도 늘어지듯 들렸다.
처음에는 나도 당황했다. 시각을 잃었으니 상당히 고전할 거라 생각했다.
그러나 5초도 지나지 않아서 나는 눈으로 보듯 소리를 보았다. 색깔만 보이지 않을 뿐이지, 형체가 또렷하게 느껴졌다.
실시간 레이더처럼 또렷한 청각 시야.
이건 진가우의 약물 때문이었다. 지금까지 내가 쓰던 반향정위와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청각 시야는 선명했다. 시각을 잃었다는 불편함조차 느껴지지 않을 정도였다.
어떤 부분에서는 청각 시야가 시각보다 더 입체적이었다. 눈으로는 놓칠 부분마저 보였다. 예컨대, 그림자의 등에 수납된 보조 팔 같은 것 말이다.
키리릭!
그림자의 등이 열리더니 팔이 하나 나왔다. 그림자는 세 개의 팔을 자유자재로 사용했다. 보조 팔조차 원래 자신의 팔처럼 섬세하게 움직였다.
퉁!
그림자의 보조 팔이 권총을 든 채로 날 노렸다.
키잉!
나는 크루시스를 비스듬하게 기울여 총알을 튕겨냈다. 고위력의 대구경탄인지라 손이 쩌릿쩌릿했다.
‘놈은 여기까지다.’
나는 놈을 파악했다. 그림자는 자신의 역량을 바닥까지 끌어 썼다. 등에 수납했던 보조 팔도 비장의 수단 중 하나였을 것이다.
남은 건 내 반격이다. 나는 왼손으로 크루시스의 칼날 밑부분을 받치며 짧게 휘두를 준비를 했다.
휙!
나는 크루시스를 크고 길게 휘두르지 않았다. 평소의 사용법과는 달랐다. 짧게 쥐고 놈의 빈틈만 좁게 노렸다.
적을 완전히 파악했기에 쓸데없이 큰 동작이 필요가 없었다. 적절한 위치만 공격하면 된다. 짧고 정확한 찌르기와 베기가 이어졌다.
내 공격이 지나갈 때마다 놈의 파편이 흩날렸다. 처음에는 손가락과 외피만 떨어지다가 나중엔 팔이 잘리고 다리도 무릎 아래로 뭉텅 잘려 나갔다.
치직, 끽.
그림자의 팔다리가 전부 날아갔다. 보조 팔도 너저분하게 떨어져 있었다.
우득!
나는 그림자의 몸통을 밟으며 크루시스를 그의 이마에 대었다.
“여기서 당신은 죽습니다.”
내가 중얼거렸다. 일단은 상대도 제국의 군인이며 근위대 출신이다. 최소한의 예의를 갖추고 싶었다.
나와 그가 싸운 까닭은 입장이 다르기 때문이었다. 감정적인 이유는 없다.
“그, 그렇, 군.”
그림자가 낡은 목소리로 말했다.
“이름과 남길 말은?”
“이, 이름?”
그림자의 안광이 혼탁했다. 그는 자신의 이름조차 기억하지 못하고 있었다.
나는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웃기게 들릴 수도 있지만, 나는 내 발에 깔린 사내를 동정하고 있다. 충실한 근위대원의 말로가 어찌 이럴 수 있단 말인가…….
자신을 잊다 못해 인간의 부분을 잃은 채로 기계의 부품이 되었다.
제국과 황제에게 대의가 있다는 건 나도 안다. 그러나 그 아래에서 바스러진 자들이 너무나 많았다.
까득.
나는 자신도 모르게 이를 갈았다.
“이, 름, 이름, 이, 름, 나, 는, 누, 구?”
그림자가 고요히 말했다. 난 그가 자신이 누군지 기억해 내길 바랐다. 하지만 쉽지 않아 보였다.
그리고 내겐 시간이 많지 않다.
“그럼 안녕히, 이름 없는 선배님.”
내가 크루시스로 그림자의 머리를 내리찍으려 했다.
“선, 배?”
그림자가 선배라는 단어에 반응했다. 조금만 더 기다려주자. 그 정도의 여유는 베풀 수 있다.
“당신은 근위대원이었을 겁니다. 따지고 보면 제 선배죠.”
인간 시절의 찌꺼기라도 남아있길 바랐다.
“아, 난, 그래, 아, 아, 로, 로우젠.”
나는 눈을 크게 떴다.
아가타가 운명과 미신을 믿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세상엔 우연이라 치부하기 힘든 필연이라는 게 종종 일어나니까.
그레이스가 찾던 이레귤러 선배가 바로 여기에 있었다.
“그레이스에게 안부를 전해 드리겠습니다.”
“……고, 맙다.”
나는 양손으로 크루시스를 짓눌러 그림자의 머리를 찍었다.
콰직!
그의 유일한 생체, 뇌가 내 칼날 아래에서 찢어졌다.
강자를 상대로 승리했지만 기쁘지 않다. 그저 짜증이 났다. 내키지 않는 살인이다. 그리고 나는 부정행위를 한 거나 마찬가지고.
* * *
전투 상황이 끝나도 내 시력은 회복되지 않았다. 일시적인 상실이 아니라 영구적 손실인 듯했다.
그렇다고 상실감까지 느낄 필요는 없다. 살아남는다면 재건 수술을 받으면 된다.
저벅, 저벅.
난 계단을 오르고 있었다. 고각성 상태로 인해 내 체감 시간은 비약적으로 길어졌다.
평소라면 짧게 느껴질 계단이 영겁의 형벌처럼 느껴졌다. 사실 이미 뇌에 약물을 투여하고 며칠은 지난 것 같았다.
그러나 며칠이나 깨어있는 느낌인데도 전혀 피곤하지 않았다.
난 약물의 효과가 사라지기 전에 헤일라스와 만나야 한다.
‘만나서 무얼 하려고? 노엘의 기억? 정보 공유?’
처음에는 그게 목적이었다. 하지만 여기까지 상황이 밀려났는데 그게 의미가 크게 있을까 싶다.
그림자가 등장했으니 정황상 황제도 대략적인 개요를 알고 있을 것이다. 내가 겨우 만든 프란세크의 세력도 쉽게 와해될지도 모른다.
……역시나 황제가 가장 강력한 세력이었다. 애초에 다른 세력에겐 승산이 희박했다. 나도 생존이 우선 목적이라면 황제에게 붙어야 했다.
‘어쩌면 이 모든 게 황제의 손아귀에서…….’
정말 상상도 하기 싫은 결말이다.
헤일라스의 공물, 이반의 돌발행동, 프란세크의 민중봉기…… 그리고 나의 몸부림조차 황제의 예측 아래에 있다는 것.
솔직히 이게 사실이라면 난 절망할 것이다. 이 모든 게 누군가의 모략과 계략이라면, 내 자유의지는 도대체 어디에 있다는 거고, 내 고뇌에는 어떤 의미가 있었던 거지?
지금 내가 있는 21층 건물은 봉쇄된 지구의 청사다. 내부는 폭도가 훑고 지나가서 엉망이었다. 그러나 이 꼭대기에 헤일라스와 군부의 장성이 있을 것이다.
저벅.
계단이 끝났다. 나는 회의실 입구를 보았다.
끼이익.
손을 뻗어 문을 열었다. 소리의 반사로 내부의 인원을 볼 수 있었다.
‘24명.’
나는 속으로 숫자를 세며 안으로 들어갔다.
“왔군, 루카.”
헤일라스가 집무실에서 나를 반기듯 태연하게 말했다. 그는 회의실 중간에 앉아 있었다.
“좀 피곤하네요.”
“거기 앉게. 물도 있으니 목도 축이고.”
나는 발소리를 일부러 크게 내며 헤일라스의 맞은편에 앉았다.
회의실 내부는 고요했으나 사람이 없는 건 아니었다. 그 대단한 군부의 장성과 고위 장교, 그리고 일부 근위대원들이 포박된 채로 의자에 앉아 있었다. 그들의 입은 재갈에 막혀 있었고, 의체는 마비된 건지 팔다리가 힘을 잃고 흐느적거렸다.
이미 헤일라스의 계략에 모두 당한 것이다.
기이잉.
나는 머리를 돌리지 않고 소리로 주변을 보았다.
황제의 그림자 8명이 회의실 벽을 따라 서 있었다. 내게 죽은 ‘로우젠’과 똑같은 부류일 것이다. 자아를 잃고 전투 기능과 충성심만 남은 자들.
황제가 헤일라스의 공물을 받아들이면서 그림자를 파견했을 것이다. 그렇다는 건 황제와 헤일라스 사이의 거래가 거의 끝났다는 소리지.
“……처참하군요, 이반.”
난 눈이 보이지 않지만, 머리를 이반에게 돌리며 말했다. 회의실 상석에는 팔다리가 부러진 이반이 앉아 있었다.
이반은 어깨를 떨며 킥킥 웃었다.
“그러게. 아버지를 내심 우습게 봤는데 만만친 않네. 그보다 헤일라스가 내 생각보다 복잡한 인물이었다는 게 결정적인 패인이지. 아, 그리고…….”
이반은 말을 잇지 못했다. 그의 뒤에 서 있던 그림자가 이반의 입에도 재갈을 물렸다.
헤일라스와 손을 잡은 이반은 궁지에 몰렸다. 황족이지만 죽을지도 모른다. 더군다나 이반은 대외적으로 알려진 황족이 아니다. 프란세크보다 더 쉽게 처분할 수 있었다.
오히려 프란세크가 어떤 식으로든 이번 사태에서 살아남을 가능성이 높았다. 프란세크가 갑자기 대중 앞에 나타나지 않는다면 황실에 대한 여론이 급격히 안 좋아지니까 말이다.
나는 고개를 들어 시선을 헤일라스에게 두었다.
“물맛이 좋네요.”
내가 물을 마시며 말했다.
“신경 써서 준비했네. 자네의 하루가 무척 고되었을 것 같아서 말이야.”
“제가 힘들어 봐야 대장님만큼은 아니겠죠.”
“난 신경 쓰지 말게. 곧 휴가를 갈 생각이니까.”
돌아오지 못할 휴가겠지.
“선물이 있습니다. 원래라면 대장님께 가야 할 물건이죠.”
내가 노엘의 기억이 담긴 칩을 꺼내서 앞으로 밀었다.
“이걸 주려고 여기까지 온 건가? 내 명령을 몇 번이나 어기면서까지?”
헤일라스의 말에는 은은한 노기가 담겨 있었다. 그의 눈빛은 날 타박하고 있을 것이다.
“자식이 부모의 말을 듣지 않는 건 흔한 일이죠.”
내 말에 헤일라스가 웃었다.
“그야 그렇긴 하지. 뭐, 자네가 여기에 왔다는 건 파이곤과 이스칸이 이 세상 사람이 아니라는 소리겠지?”
헤일라스는 기밀 유지를 위해 파이곤과 이스칸과의 연락도 끊었던 모양이다. 수족에게 명령과 지침만 내려두고서 마지막 계획에 돌입한 거겠지.
“염치 불고하지만, 일이 그렇게 됐습니다.”
“자네의 역량을 내가 과소평가했군.”
“저도 이걸 보지 못했다면 여기까지 오지 못했을 겁니다. 제게 부족한 경험을 메꿀 수 있었죠.”
내가 가볍게 탁자를 두드리며 칩을 가리켰다. 칩의 중요성을 간접적으로 강조했다.
“루카, 난 자네가 이걸 통해 무얼 보았는지 모르네. 그리고 자네의 정체도 이반을 통해 알았지. 내겐 부족한 게 많았지만, 그중에서도 정보의 부재가 가장 문제였어.”
그럴 것 같았다. 그리고, 그래서 놀라웠다.
헤일라스는 부족한 정보만으로 여기까지 왔다. 그는 노엘과 아가타의 관계도 모르고, 나와 키누안이 황제의 감시자라는 것도 알지 못했다. 황실의 의도도 자력으로 알아채곤 움직였다.
캄캄한 어둠 속에서 일일이 손을 뻗어가며 심증과 추측만으로 움직였다. 정보력에 있어선 제일 불리한 위치였다.
‘헤일라스 입장에선 모든 정황이 그저 추측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두려워하는 기색조차 드러내지 않고 모든 걸 아는 것처럼 굴었다. 실상은 나보다도 정보가 부족했을 양반이 말이다.
“날 속이면서 기밀과 정보를 숨긴 것에 대해 자넬 탓할 생각은 없어. 우린 서로를 이용하는 관계였으니까. 이레귤러인 자네가 여기까지 살아남기 위해 얼마나 필사적으로 굴었을지 난 상상도 못 하네. 자네보다는 훨씬 좋은 환경에서 자란 내가 결코 알 순 없지. 하지만 그렇기에 존경은 하고 있어.”
나는 움찔했다.
‘존경.’
나는 헤일라스가 그런 감정으로 날 볼 거라곤 상상도 못 했다. 처음으로 속을 터놓는 느낌이었다.
아마도 내가 여기까지 온 건…… 거창한 이유가 아닐 것이다. 나는 천천히 내 내면을 들여다봤다.
“모든 게 끝나기 전에 당신과 이야기해 보고 싶었습니다.”
헤일라스가 품에서 술이 담긴 휴대용 용기를 꺼냈다. 그는 물잔을 뒤집어 탁탁 털더니 술을 따라서 내 쪽으로 밀었다.
“한잔하게, 아들.”
음, 아들이라는 소리를 들으니 조금 미안한 마음이 있다. 이야기를 시작하기 전에 이 말은 해야 할 것 같았다.
“혹시 해서 말하는 건데, 듣고 나서 화내진 않으셨으면 합니다.”
“여기서 자네가 내 뒤통수를 거하게 치더라도 화내진 않을 거네. 오히려 재밌어하겠지. 자네에게 그런 비장의 수가 있어 보이진 않지만.”
나는 입술을 달싹였다. 여러모로 껄끄러운 말이다. 하지만 꼭 해야 하는 말이긴 하다.
“저는 지젤을 좋아합니다. 남매가 아니라 남녀로서요.”
잔에 술을 따르던 헤일라스의 손이 우뚝 멈췄다.
“……그건 좀 곤란하지. 마음속으로만 담아두게.”
난 한 대 맞을 각오를 하며 말을 이어갔다.
“이미 잤습니다.”
헤일라스는 고개를 기울이며 나를 빤히 쳐다봤다. 그의 침묵이 매서웠다.
우드득.
헤일라스가 쥐고 있던 용기가 찌그러졌다. 그의 손아귀에서 술이 쪼르르 흘렀다.
……이건 말하지 말 걸 그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