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ad Born Blood RAW novel - Chapter (148)
배드 본 블러드-148화(148/197)
148
헤일라스는 술에 젖은 손을 외투에 문지르며 한숨을 쉬었다.
“지젤이 묘하게 부드러워진 느낌이 있더니……. 그나저나 대범한 짓을 했군. 자네와 지젤이 그런 관계를 형성했을 줄이야.”
“대장님이 지젤에게 좀 더 관심을 가지셨다면 눈치채셨을 겁니다. 저도 항상 조마조마했으니까요.”
헤일라스의 통찰력이라면 나와 지젤의 관계를 알아챌 만도 하다. 그러나 그는 다른 곳에 신경을 쏟느라 나와 지젤에게 관심을 가지지 못했다.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네.”
“보호했다고 아버지의 의무를 다한 건 아니죠.”
“아니, 나는 보호에도 실패했지. 니콜라오스를 지키지 못했으니까. 그때 내 능력의 한계를 똑똑히 알았네, 이대론 이길 수 없다는 것도.”
우린 차분히 이야기했다.
나는 내 앞에 놓인 술잔을 응시했다. 청각 시야에선 액체가 기묘하게 보였다. 술이 출렁거릴 때마다 실타래가 꼬였다가 풀리는 듯했다.
“대장님이 굴복하는 성격인지는 몰랐습니다.”
헤일라스는 피곤하다는 듯이 의자에 등을 기댔다.
“루카, 마지막 기회네. 이 술을 마시고 나면, 뒤로 돌아서 여길 나가. 부디 내가 자넬 지킬 수 있게 해주게.”
헤일라스는 명령을 어긴 나를 죽이려 했다. 그러나 날 지키고 싶다는 말도 진심일 것이다. 그는 몇 번이나 돌아갈 기회를 내게 줬다.
“저는 알아선 안 될 걸 많이 알고 있습니다. 이 상황에서 제가 살아남을 방법은 몇 없습니다. 물러나면 어차피 죽겠죠.”
“눈만 먼 게 아니라 귀도 잘 들리지 않나 보군. 난 방금 자네도 지키겠다고 말했지. 자네 생각 이상으로, 나는 많은 부분을 폐하와 협상을 할 수 있네.”
“프란세크 전하가 이리 오고 있습니다. 그것도 대중과 귀족의 지지를 꽤 많이 끌어낸 상태죠. 대장님이 그쪽과 협력한다면 더 나은 조건으로 협상이 가능할 겁니다. 대장님의 목숨도 건질 수 있을 거고요.”
황제의 그림자들이 스산한 시선으로 우릴 보고 있을 터다. 그러나 숨기면서 말할 처지가 아니었다.
나는 언제든 싸울 수 있게 감각을 곤두세웠다. 헤일라스와 함께라면 여덟 명의 그림자 정돈 어떻게든 해볼 수도 있다.
“자네가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지 알곤 있나?”
알다마다. 제국이 약해지면서 외부의 공격에 취약해지겠지. 나는 머릿속으로 정리한 말을 내뱉었다.
“프란세크 전하가 협상에 성공하면 황제 폐하의 권한이 줄면서 통치 체계가 이원화되겠지만…… 그딴 건 제 알 바가 아니죠. 제게 중요한 건 당신이 살아남는 겁니다, 헤일라스.”
“난 이미 친구와 부하들을 사지로 내몰았네. 날 부끄러운 인간으로 만들 생각인가 보군.”
“이스칸과 파이곤에겐 미안하지만, 그 사람들은 제게 스쳐 가는 인연에 불과합니다. 제게 중요한 사람은 아니죠.”
헤일라스가 몸을 들썩이며 웃었다.
“그럼 난 자네에게 중요한 사람이라는 건가?”
“마지막까지 살리고 싶은 사람 중 하나입니다. 당신이 몇 번이나 살리려고 한 것처럼요.”
헤일라스가 내게 한없이 냉혹했다면, 내가 아무리 재주가 뛰어나도 죽었을 것이다.
“그 물렁물렁한 성격이 자네의 발목을 크게 잡을 거네. 아니, 이미 잡고 있군.”
“제가 이익에 밝고 계산적인 놈이었다면, 대장님부터 절 살려두지 않으셨겠죠. 제가 지금까지 살아있는 건 물렁물렁하기 때문입니다.”
이제 고백할 때가 됐다.
……내 천성은 그리 악독하지 못하다. 외부로부터 날 보호하고 살아남기 위해서 배타적으로 변한 거다.
옛 기억이 떠올랐다. 과거의 나는 코라인 소년을 죽이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날 대신해 그 소년을 죽인 건 일레이였다.
그날의 일이 세세하게 기억났다. 시각을 잃고 나니 상상이 더 선명했다.
“물렁물렁하다는 걸 장점으로 여길 줄은 몰랐네.”
“장점인지는 모르겠지만, 그 물렁함 덕분에 주변 사람들이 절 도와주더군요. 그리고 당신도 저와 별반 다르진 않습니다. 이스칸과 파이곤이 기꺼이 당신을 위해 죽은 게 맹목적 충성심 때문만은 아닐 겁니다. 그 사내들이 헤일라스라는 인간 자체를 좋아했기 때문이겠죠. 제가 죽음을 각오하고 여기까지 온 것도요.”
헤일라스와 나는 노엘과 비슷하지만 다르다. 키누안과는 말할 것도 없이 차이가 있다.
이 사실을 진작 알았어야 했다. 헤일라스는 기꺼이 내 말에 귀를 기울이며 더 나은 선택지를 찾아냈을 것이다.
‘헤일라스가 인간성을 강조한 건 나를 부려먹기 위해서가 아니야, 그런 의도가 아예 없진 않았을 테지만…….’
키누안의 말에 혹한 내가 멍청했을 따름이다.
‘……인간성을 매번 언급한 건, 본인부터가 자신의 인간성을 보물처럼 간직하고 있기 때문이야. 진짜 중요한 게 뭔지 내게 알려주고 싶었던 거지.’
심리적 궁지에 몰렸던 나는 키누안의 말을 듣고 헤일라스의 의도를 의심했다. 그래서 일이 이 지경에 이를 때까지 진실을 고하지 못했다. 미리 말했다면 많은 게 바뀌었을 것이다.
‘나는 키누안의 심리 장악에 당한 거다.’
키누안은 괴물 같은 인간이었다. 그와 내가 대등한 층위에서 사고한다 생각하지 말자. 그건 말도 안 되는 내 오만이었다. 키누안은 내 머리 꼭대기에 있는 존재다.
난 이반의 사고조차 읽지 못한 머저리다. 그런 주제에 어떻게 키누안을 안다고 자부했단 말인가.
“알았네, 루카. 여기에 중요한 정보가 담겨있다는 건가?”
헤일라스가 손가락을 뻗어 칩을 자신의 앞으로 당겼다.
“대장님의 사양이면 외부 감각을 유지한 채로도 큰 줄기를 보실 수 있을 겁니다.”
전신의체인 헤일라스는 따로 가상 시뮬레이션 기기를 쓸 필요가 없었다. 목덜미에 칩을 그대로 삽입하면 된다.
바스락.
헤일라스는 칩을 손가락으로 비볐다. 칩은 부서지다 못해 가루가 되어 흩날렸다.
“난 내 선택을 믿네. 내가 이걸 보는 순간부터 내 공물을 담보로 하는 가문의 안녕은 사라지는 셈이야. 식솔의 운명을 걸고 도박할 생각은 없어.”
내 청각 시야로는 보이지 않지만, 헤일라스의 안광이 세차게 빛나고 있을 것이다.
나도 느끼고 있었다. 황제의 그림자들이 움찔움찔했다. 그들은 여차하면 움직일 것이다. 나는 아랫입술을 깨물며 눈을 찌푸렸다.
“이건 시조 아가타가 남긴……!”
“거기까지! 더는 말하지 마.”
헤일라스가 내 목소리를 묻어 버리듯 외쳤다. 그가 일어서면서 주변을 둘러봤다.
끼릭, 끼릭.
여덟 명의 그림자가 무기를 뽑고 있었다. 그들은 어둡고도 차가웠다. 전투를 준비하면서도 고양감조차 드러내지 않았다.
달그락!
침묵하던 장성과 장교들도 몸을 들썩였다. 어제까지만 해도 혁명을 꿈꾸던 이들은 황제의 칼날 아래에 있었다.
다들 오랫동안 헤일라스가 고르고 고른 불온분자일 것이다. 황실에게 위협이 될 만한 자들만 헤일라스가 공들여 꾀어냈겠지. 여러모로 황제의 구미에 당기는 공물인 셈이다.
“당신은 과거의 노엘 뮬리즈카와 똑같은 짓을 하고 있습니다!”
내가 소리를 질렀다.
노엘 뮬리즈카라는 말에 그림자들이 반응했다. 그들의 무기질적인 시선이 내게 꽂혔다.
포로로 잡힌 장성과 장교들의 눈동자가 커졌다. 군부의 상층부인 그들도 노엘 뮬리즈카가 누군지는 알 것이다.
“루카! 그만!”
헤일라스가 창을 늘어뜨리며 마지막까지 날 만류하려 했다. 그의 창날이 내 목덜미를 노렸다.
카- 앙!
크루시스와 창날이 부딪쳤다. 칼날과 창날이 갈리듯 길게 끌렸다. 내 능숙한 대응에 헤일라스가 놀란 듯했다.
다행이다. 아직 약 효과가 내 머릿속에 넉넉하게 남아있다. 내 사고는 여전히 차갑고 빨랐다. 헤일라스의 매서운 공격에도 반응할 수 있었다.
“제국과 황실은 몇 번이나 당신 같은 사람을 이용해 내부의 불만을 끌어모아 단번에 제거했죠. 이건 당신 스스로 한 선택이 아닙니다, 아버지!”
제국의 비밀 중 하나가 내 입에서 새어 나갔다. 그리고 소리 없는 비명과 단말마가 이어졌다.
콰직! 푹!
황제의 그림자들이 움직였다. 그들은 내 말을 들은 포로들을 처형하기 시작했다. 내가 내뱉은 말은 죽음으로 막아야 하는 기밀이다. 이반을 제외한 모두가 죽어가고 있었다.
처형을 끝낸 그림자의 창칼이 곧 내게 향할 것이다.
헤일라스는 눈썹이 휠 정도로 미간을 찌푸렸다.
“내 의지이든 아니든 그건 상관없다. 이게 최선이라는 게 중요하지. 나는 의무를 수행하고, 내 행동에 책임을 질 뿐이다. 루카, 도대체 왜 이번만큼은 내 결정에 따르지 않는 거냐! 가장 중요한 이 순간에! 몇 번이나 기회를 줬거늘!”
헤일라스가 노성을 내질렀다. 그 목소리가 내 청각 시야를 부수듯 쩌렁쩌렁 퍼졌다.
나는 눈앞이 아찔해지는 느낌을 받았다. 시간이 많이 없다. 처형이 끝나가고 있었다.
“마음에 들지 않으니까요. 어쩔 수 없다는 핑계로 마음마저 스스로 꺾고 순응하는 당신들이! 하나부터 열까지 전부 마음에 들지 않아! 헤일라스, 당신만 그런 게 아니야. 이 똥통에 발을 담근 모두가 그래! 나도 그러했고! 이젠 지긋지긋하다고!”
결정적인 순간마다 나는 이랬다.
코라인 소년을 쏘지 못했다. 일레이를 도와 릴리안 라모네스를 살리려 했다. 릭 카이저에게 항복할 바에 목이 꺾이길 택했다. 제국의 편을 들면 죽을 걸 알면서도 릭과 키누안에게 반항했다. 이반의 암살로 인한 프란세크의 죽음이 내게 유리하다는 걸 알면서도 막아섰다.
행동만 그러한 게 아니었다. 내 감정도 마찬가지다. 지젤을 좋아하면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끝내 참지 못하고 손을 댔다.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본가의 저택으로 돌아가서 얌전히 목숨이나 건져야 한다는 걸 알면서도…… 끝내 여기에 왔다.
마지막에 이르러선 파국을 선택하는 반골.
내가 하층민인 까닭이다. 출세할 기회를 줘도 못 잡는 천하의 머저리. 이러니 밑바닥 인생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거다.
아득바득 기어서 올라가 놓고선, 시뻘건 충동을 참지 못해 절벽 아래로 몸을 던지는 등신 새끼가 여기에 있다.
빠득!
헤일라스가 창대를 움켜잡았다. 그의 창끝이 어디로 향할지 나도 모르겠다.
그림자들은 헤일라스를 지나치며 나를 향해 다가왔다. 둘 정도는 어떻게 해볼 수 있을 터다. 그러나 여덟이면 내게 승산이 없다.
콰직!
그림자 중 한 명의 입에서 창날이 튀어나왔다. 입에서 창날이 튀어나오는 기능은 전장에서 별로 쓸모가 없을 것이다. 키스라도 하면서 암살하려는 게 아니라면 말이다.
……그러니 저 창날은 헤일라스의 것이었다. 그가 그림자를 죽였다.
끼릭, 끼릭.
일곱 명의 그림자가 빠르게 좌우로 흩어지면서 우리를 포위해 유리한 위치를 선점하려 했다.
“루카우스 쿠스토리아, 넌 가문 전체를 위험에 빠뜨렸다. 그러니 가주 대행에서 해임하겠다. 내 자비는 이게 마지막이고, 일이 잘못된다면 내 손에 가장 먼저 죽는 건 너다.”
헤일라스가 빠르게 말하며 창을 빙글빙글 돌렸다. 그의 동작은 예나 지금이나 절도가 있었다. 공격은 직관적이면서도 효율적이었다.
“쥬페에겐 우리가 제때 오지 않으면 망명 준비를 해두라 일렀습니다.”
“망명? 쥬페를 어떻게 믿고?”
헤일라스가 진심을 담아 반문했다. 정말로 못된 아버지네, 진짜. 그러니 자식들이 하나같이 삐뚤어지고 성격이 더럽지.
“쥬페도 어른이니 알아서 하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