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ad Born Blood RAW novel - Chapter (149)
배드 본 블러드-149화(149/197)
149
끼릭, 끼리릭.
황제의 그림자들은 나와 헤일라스를 둘러싼 채로 회의실 변두리를 따라 빙빙 돌았다. 새카만 외투 사이로 드러난 의체는 인공 피부조차 없는 외골격이다.
아마도 저들은 황제에게 보고하고 지시를 받느라 섣부르게 움직이지 않는 것일 터다.
“루카, 네 첫 번째 계획은 실패했다. 황태자가 오더라도 군부의 협력은 받지 못해. 나와 궐기를 약속한 자는 방금 전부 죽었다.”
헤일라스는 내게 계획을 짜라는 듯이 말했다.
“부를 수 있는 근위대원은 없습니까?”
“즉각 전력이 될 정도로 가까운 곳은 없다. 황궁으로 들어가는 경로에 병력을 배치해 뒀거든.”
나는 군부 수뇌부의 쿠데타 계획의 전말을 알 것 같았다. 왜 여기까지 질질 끌었는지 이유도 보였다.
‘소수로 쿠데타를 일으킬 순 없다. 어떻게든 군대를 소집할 기회가 필요했겠지. 폭풍기의 폭동은 좋은 핑계였을 거고. 군부와 헤일라스도 폭동을 크게 일으키려고 물밑 작업을 펼쳤을 거다.’
폭풍기에 혼란이 생기는 건 당연하다. 모두가 이 틈을 타 뜻을 펼칠 기회를 노린 것이다.
‘소집된 군인들 대다수는 자신들이 쿠데타를 위해 모였는지 모를 거야. 하지만 군인의 습성상 의문이 생겨도 상관의 명령에 일단 복종해. 현장의 지휘관들이 적당한 이유를 만들어서 황궁을 공격해 점령한다면…… 나머진 어떻게든 된다. 명분은 나중에 그럴싸하게 가져다 붙이면 돼. 이반 크라치아라는 황족도 곁에 있으니까.’
꽤 괜찮은 계획이었다. 헤일라스가 딴마음을 품지 않았으면 성공할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그럼 지금이라도 진입을 명하시죠. 어떻게든 황궁을…….”
“내 명령으론 군대가 전부 움직이지 않아. 지휘 계통이 다르니까. 그리고 황실은 내 계획을 알고 있어. 만에 하나의 대비도 해뒀겠지. 여기서 한 가지 궁금한 게 있네. 적장자인 황태자가 우릴 도와 황제를 압박할 이유가 있나?”
이반이 여기까진 설명하지 않은 모양이다. 자신이 진짜 황태자라는 이야기도 비밀로 했군.
헤일라스의 정보 공백을 알수록 그의 판단력이 놀라울 뿐이었다. 황제가 콕 집어 제거하려는 이유가 있었다.
“황제는 전쟁 명분을 위해 프란세크를 적당한 시기에 죽일 생각이었습니다. 진짜 황태자는 이반이었죠. 차남이라 흉계를 꾸민 게 아니라 탐욕을 이기지 못해 조금이라도 더 빨리 황제가 되고 싶었던 겁니다.”
천하의 헤일라스도 여기까진 전혀 예상치 못한 모양이었다. 그의 동공이 힐끗 움직이더니 이반에게 향했다. 팔다리가 부러진 이반은 목각인형처럼 의자에 널브러져 있을 뿐이었다.
“……그렇군.”
이 사태를 전부 파악하고 있는 자는 황제뿐이다.
우리가 서로에 대해 모른 채로 그려낸 작은 그림들 모두가…… 황제의 거대한 그림 안에 속해 있었다.
그러나 단 하나의 그림만은 예외다. 정확히 말하면, 내가 그렇다고 믿고 싶었다.
“제 행동으로 인한 변수만큼은 황제의 계획에 없던 이물질일 겁니다. 저는 기존의 제 행동 원리와 상충하는 비합리적인 판단을 연속적으로 했으니까요. 원래라면 대장님과 프란세크의 협력은 존재할 수 없는 가능성이었을 겁니다.”
나도 마음에 턱 걸리는 게 없진 않았다.
‘키누안.’
키누안의 행적과 사고만큼은 나도 예상하거나 예측할 수 없었다. 그가 이 사태에서 그린 그림이 무엇인지 알 도리가 없다.
끼리리릭.
그림자들의 시선이 우리에게 모이고 있었다. 사람보단 안드로이드에 가까운 눈빛이었다.
“폐, 하께서 마지막 기회를 준, 다고 하셨다. 루, 카우스 쿠스, 토리아의 생존도 거, 거래에 넣겠다.”
그림자 중 하나가 말했다. 내가 죽였던 로우젠보단 언어 기능이 정상이었다. 다른 그림자들은 무기를 아래로 내린 채로 우리를 노려보고 있었다.
‘저 제안을 받아들여선 안 돼.’
황제의 제안은 관대했다. 황제 본인이 유리하다고 판단했다면 강압적인 조건을 내세우거나 진작 공격했을 것이다.
‘황제도 마냥 여유가 있는 상황은 아니다. 많은 일이 꼬였기에 급한 불부터 끄고 싶은 거다.’
헤일라스도 나와 똑같이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굳이 내가 조언하듯 말하지 않아도 된다.
스륵.
내가 천천히 헤일라스 옆에서 떨어지며 자리를 잡았다. 나는 그림자들이 이반을 데려가지 못하도록 그 중간에 섰다.
‘이반은 좋은 협상 무기가 된다.’
살아만 있다면 여러모로 쓸모가 있을 테니 우리가 이반을 확보하는 게 좋았다. 프란세크도 이반의 생포를 원했다.
우린 서로의 영역을 확보하며 주도권 싸움을 계속했다.
“기껏, 준, 비를 끝내놓고 멸, 멸족을 택하는 건가?”
“내 유능한 아들이 다른 방책을 찾았으니 따르지 않을 이유가 없지.”
헤일라스의 허세는 여전했다. 마치 처음부터 나를 믿고 있었다는 듯이 말했다.
헤일라스는 매일 고뇌하며 나를 죽일지 말지 수만 번은 더 고민했을 것이고, 날 그림자로부터 구할 때도 속으론 수백 번은 갈등했을 터다. 그의 마음이 조금만 더 기계에 기울어져 있었어도 난 이미 시체였겠지.
‘헤일라스는 자신을 부풀리는 법을 잘 알고 있다.’
그 허세에 나는 몇 번이나 속았다. 헤일라스가 뭔가 알고 있을 거라고 혼자서 지레짐작하고선 움츠러들었다.
“가주의 어, 어리석은 판단으로 일가가 몰, 살당하겠군.”
그림자는 그 말을 끝으로 입을 다물었다.
“루카, 날 믿는다면 지금부터 내 지시에 어떤 군말도 하지 말고 따르게. 이반을 데리고 프란세크 황태자와 합류해. 지금은 모든 정황을 아는 참모가 황태자 곁에 있어야 하네. 나는 뒤처리부터 하고 가도록 하지.”
“저들은 원래 근위…….”
“레기온에게 먹힌 망자 따윈 몇이 오더라도 내 상대가 아니지.”
이 망할 인간이 또 허세를 부리는군. 저들을 상대로 살아남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 내가 말을 덧붙이기 전에 헤일라스가 사납게 말을 내뱉었다.
“한 번만 더 토를 달면 자네의 목을 베고, 내 원래 계획대로 일을 진행할 거야. 폐하께서 참 좋아하시겠군.”
나는 대꾸하고 싶었지만, 입술을 깨물 듯 다물었다.
일곱 명의 그림자들이 곧바로 움직였다. 그중 세 명은 헤일라스를 무시하며 나를 노렸다.
키이이이잉!
헤일라스가 창을 길게 휘둘렀다. 그는 자신을 향해 오는 그림자들을 무시하고 날 노리는 자들의 동선을 막아섰다.
더는 따질 여유가 없었다.
내가 이런 말 하는 게 웃기지만 군인에겐 상명하복이 중요하다. 전투 상황에서 일일이 의견을 교환하며 조율했다간 전멸한다. 일단은 상관의 명령에 따라 움직이는 게 우선이다.
지금은 헤일라스의 명령에 따를 때다.
휙!
나는 이반을 어깨로 들쳐 메곤 창문으로 내달렸다. 내가 뛸 때마다 이반이 덜컹거렸다.
기이잉.
청각 시야의 초점을 그림자에게 집중했다. 영역이 좁아지면서 그들의 움직임이 더 섬세하게 보였다.
그림자들이 제각각의 총화기로 날 겨누었다. 난 좌우로 움직이지 않고 직진으로 도주했다. 조금이라도 동선을 낭비했다간 따라잡힌다. 사격은 헤일라스가 막아줄 것이다.
‘헤일라스를 믿어.’
가속을 붙인 나는 일직선으로 길게 도약했다.
타- 앙! 퓻!
그림자들의 사격이 흐트러지면서 내 곁을 스쳐 갔다. 내가 피한 건 아니었다.
헤일라스가 창대와 발로 주변의 가구를 날리며 놈들의 사격을 정교하게 방해한 덕분이었다. 일부는 자신의 몸으로 막은 것 같기도 했다.
까아아아아앙!
내 발에 닿은 방호 유리창은 신발 모양을 따라 질기게 늘어지는가 싶더니 장력 한계에 이르러선 굉음을 내며 깨졌다.
길이 열렸다. 나는 머리를 웅크리며 창문을 통과했다. 참고로 여긴 21층이다.
쏴아아아!
창문이 깨지면서 빗소리가 갑자기 몰아쳤다. 갑작스러운 외부 변화에 내 청각 시야가 엉망진창으로 꼬였다. 강한 전조등 빛을 정면으로 본 느낌과 엇비슷했다.
그러나 당황할 건 없다.
지금 내 인지와 뇌 기능은 한계를 한참 넘어선 상태다. 내 얼굴에 빗물이 몇 방울 닿을 때부터 나는 청각 보정을 끝마쳤다.
키리리릭!
나는 건물 외벽을 긁으며 내려갔다. 적당한 높이에 이른 나는 가로등을 향해 몸을 날렸다.
콰직!
가로등이 충격을 흡수하듯 길게 구부러졌다. 나는 반쯤 쓰러진 가로등 아래로 미끄러지듯 떨어졌다.
난 위를 확인하지 않았다. 바로 골목길로 뛰어 들어가며 혹시 모를 저격에 대비했다.
톡, 톡, 토독.
이반이 부러진 팔의 손가락으로 내 등을 반복적으로 두드렸다. 손가락의 신호를 해석하니 재갈을 풀어달라는 뜻이었다.
나는 이반의 신호를 무시하며 주변을 살폈다.
‘프란세크가 이쪽으로 오고 있을 거다. 합류해야 해.’
이반은 끈질기게 내 등을 두드렸다. 신경이 곤두서다 보니 내 사고를 방해하는 그 손가락을 분질러 버리고 싶었다.
그러나 프란세크를 만나기 전에 이반의 이야기를 들어볼 필요는 있다.
으득!
나는 이반의 재갈을 거칠게 잡아당겨서 고리를 끊었다. 이반의 머리는 망치에 맞은 듯이 흔들렸다.
“허튼소리를 한다면 턱을 부숴버릴 거야. 두 번 경고하진 않아.”
나는 골목길로 뛰어가며 말했다. 내 어깨에 실린 이반의 몸도 같이 들썩였다.
“……너흰 모두 실수하고 있어. 기습에 실패했다면 모든 게 끝장이야. 너흰 황실과 크라치아의 혈통에 대해서 모르지.
황제를 단순히 제국의 상징이라 생각하겠지만, 황제는 제국에서 가장 강대한 무력을 가진 존재야. 이렇게 시간이 끌린 이상에야 너희에겐 승산이 없어. 이미 아버진 출정 준비를 하고 있을 거야. 직접 나서서 자신에게 반한 자를 모두 태워 버리겠지. 그때 와선 레기온을 무더기로 끌고 와도 의미가 없어.”
이반이 키득키득 웃었다. 자조하는 것 같기도 했다.
새로운 정보다. 나는 지금 들은 말을 내 머릿속에 구겨 넣었다. 기존 지식의 배열이 뒤섞이고 있었다.
“그걸 왜 이제야 말하는 거지?”
“이 정보를 외부로 발설했다간 나라도 죽어. 아버진 내가 ‘그걸’ 모르는 줄 알 거야. 우연히 알게 된 거니까.
루카, 지금 내가 이 말을 하는 이유를 알겠어? 네게 망명을 제안하는 거야. 코라든 벨라토든 어디든 괜찮아. 네가 챙기고 싶은 사람도 챙겨. 지금이라면 가능해. 너와 내가 가진 기밀 정보를 판다면 괜찮은 대우를 받을 수 있을 거다. 특히 코라, 그래, 코라가 좋겠군. 우리보다도 더 음습한 놈들이니까.”
이반이 달콤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나 난 그 안의 감정을 읽었다. 시각이 없으니 목소리의 감정이 더 섬세하게 들렸다.
‘두려워하고 있다.’
그토록 오만하던 이반이 떨고 있었다. 이럴 거면 왜 반란을 일으킨 거지? 어째서 서둘러 황제가 되려고 한 거고?
‘아…….’
난 이반의 행동 원리를 착각했다. 그는 탐욕으로 움직인 게 아니었다. 두려움에 떠밀려 여기까지 온 것이다. 그렇다면 오만이란 가면에 가려진 조급한 판단과 엉성한 계획도 다 이해가 됐다.
“황제의 힘이 뭔지나 말해. 듣고 나서 판단할 테니까.”
“바이……. 아니, 설사 네가 이걸 이해하더라도 넌 망명하지 않을 거야. 그럴 놈이었으면 여기까지 오지도 않았겠지. 날 안전한 곳으로 빼내라, 루카. 그럼 전부 말해 주지.”
이반이 기세를 잡았다는 듯이 말했다.
그러나 나도 분명히 경고했다, 두 번은 없다고.
내가 손을 움직였다.
콰직!
이반의 아래턱이 으스러지면서 부서졌다. 그는 옅은 신음을 흘리며 놀란 듯이 눈만 깜빡였다. 박살 난 턱에서 오밀조밀한 미세부품이 툭툭 떨어졌다.
“그럼 프란세크에게 가자고.”
내가 중얼거리고는 나아가려 했다.
쿵.
나는 순간적으로 세상이 뒤집히는 느낌을 받았다. 간신히 무릎에 힘을 주며 몸을 지탱했다. 방향 감각이 흐트러져서 제대로 설 수가 없었다.
까득.
나는 이를 악물며 벽에 어깨를 기댔다.
어질어질했다. 청각 시야도 일시적으로 사라졌기에 나는 새카만 어둠에 잠겼다. 얼마나 이 자리에서 쉬었는지 가늠이 가지 않았다.
호흡을 가다듬은 나는 소리에 집중했다. 이 와중에 내 등을 두드리던 이반의 손가락은 잡아서 분질렀다.
어둠 속에서 하얀 실타래가 빛나듯 풀렸다. 난 간신히 청각 시야를 복구했다.
‘키누안?’
골목길 끝에 누군가가 보였다. 나는 그가 키누안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키누안의 형체는 금방 사라졌다. 연기처럼 사라졌기에 난 실체가 아니라고 판단했다.
‘이젠 청각 시야로도 환각을 보는군.’
아니, 방금 내가 본 게 환각이 맞을까? 진짜 키누안이 나타났던 게 아닐까? 그가 언제부터 나를 지켜보고 있던 거지? 처음부터 이상했어. 내가 그의 목적에 따라 움직이고 있다면? 키누안이, 키누안, 키누안은…….
미칠 것 같다…… 가 아니라 난 미쳤다. 편집증이 생기기 직전이었다. 조금만 중심을 잃어도 망상과 현실이 뒤섞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