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ad Born Blood RAW novel - Chapter (154)
배드 본 블러드-154화(154/197)
154
-하, 하, 하하하하! 하하하하하하하하!
이반의 웃음이 퍼졌다.
-옛 지구의 고대 국가 시절부터…… 통치란 하늘의 뜻이며 천자의 것이었다. 하늘이란 단순히 대기층이 아니라 천지자연, 그 너머의 우주를 가리키는 말이었지. 인류의 지혜가 대지를 벗어나지 못하던 시절부터 우린 알고 있었던 거다. 통치자는 초월적인 의지의 선택을 받아 탄생한다는 걸. 그게 과거의 하늘이었고, 지금은 우주라 부르지.
단말기에서 흘러나오는 이반의 기계음은 해상도가 낮았다. 그러나 드러난 감정의 색깔은 채도가 높은 원색처럼 선명했다.
‘환희.’
이반은 밑바닥까지 내려갔다가 제국의 꼭대기까지 올라왔다. 그 낙차는 땅과 하늘처럼 컸다.
-우리가 철두철미한 계획을 세운다 한들, 한낱 인간의 계산이다. 우주의 찰나에 불과한 우리가 그 뜻과 인과를 어찌 온전히 이해하겠는가. 일어서라, 기사들이여.
이반의 말에 그림자들이 일어섰다. 그들은 벽처럼 서서 이반을 둘러쌌다. 그들이 여기에 온 건 다음 황제인 이반을 지키기 위해서였다.
-천명이 아니라면 도저히 지금의 상황을 설명할 수 없지. 그렇기에 황제는 신성한 것이다. 혼란스럽던 행성들이 때론 가지런히 겹쳐 정렬하듯, 혼돈에서 발생한 질서가 내 어깨 위에 앉아있다. 위대한 초대 크라치아가 운명의 간택을 받은 것처럼.
이건 예상치 못한 결과였다.
‘이반 크라치아가 황제가 된다.’
배제했던 결과가 현실로 나타났다. 이반은 이걸 천명이라 불렀다. 그러나 내 입장에선 우주의 장난질이다.
-지금의 날 봐라, 제국의 창과 칼들이여. 모두가 나를 무너뜨리려 했으나 내 안에 깃든 천명은 날 황제로 이끌었다. 그래, 너흰 지금 상황이 이해가 되지 않을 터. 하지만 곧 알게 될 거다. 새로운 황제가 제국을 영속의 번영으로 이끌 테니까.
이 자리에는 이반의 존재조차 모르는 이들이 대다수였고, 대외적인 황태자는 프란세크다.
그러나 이반은 광기에 가까운 확신을 내뱉었고 프란세크는 제때 부정하지 못했다. 그 때문에 사람들은 이반이 황실의 일원이라는 걸 추호도 의심하지 않았다.
-아버지는 과오를 저질렀다. 그 순간, 통치자의 자격을 잃은 거지. 난 같은 실수를 하지 않겠다. 내 목소리를 들은 자는 모두 싸움을 멈춰라. 철의 단결이 곧 제국의 힘이니라. 오늘 밤엔 그 누구도 불충하지 않았고 불온하지도 않았다. 내 형제 프란세크의 조언을 받들어 제국의 균열을 메울 것이다.
이반의 목소리는 단말기의 스피커 때문에 나직했다.
우우웅, 웅웅.
그러나 그림자들이 전갑의체의 음성 출력기관으로 이반의 말을 널리 퍼트렸다. 중첩된 목소리가 저음으로 깔리듯 퍼져나갔다. 낮은 울림 때문에 진동이 일 정도였다.
-선대 황제는 지나치게 오랫동안 통치자의 자리에 앉아있었다. 군인조차 자신이 지켜야 할 제국 신민이라는 걸 망각한 거지. 근위대는 들어라, 너희는 사명을 위해 인간으로서의 존엄을 잃을 필요가 없다. 지금 내 곁에 있는 자들도 자아를 되찾을 수 있게 최선을 다하겠다.
근위대의 내전은 멎은 지 오래였다. 그들은 이쪽을 보고 있었다.
-지난 며칠 간의 일은 그 어떤 기록으로도 남지 않을 것이고, 이를 말미암아 보복하는 일도 없을 거라 맹세하겠다.
……내전으로 인한 제국의 약화는 현실로 일어나지 않았다.
‘황제는 죽었다. 그게 자살이든 암살이든 간에.’
이번 사태의 원인 제공자가 죽었고, 이반은 강경한 대응이 아니라 평화적인 협상을 약속했다.
싸울 이유가 사라지고 있었다.
‘남은 건 프란세크의 선택이다.’
프란세크는 아직 힘이 있었다. 많은 이들이 프란세크를 적통후계자라 믿고 있다.
‘프란세크가 이반의 제안을 거절하고, 황제 직위를 가지겠다고 선언하면 혼란과 싸움은 이어질 것이다.’
내가 어떻게든 프란세크를 빼돌려 개선문의 근위대까지 데려간다. 하나가 된 근위대는 프란세크를 일단 따를 것이다. 어디서 나타났는지 모를 황족이 황제를 자칭하는 걸 순순히 믿진 않을 테니까.
‘지금 이반이 황제로 인정받으려면 프란세크의 동의가 있어야 한다.’
이반이 다음 황제로 전산과 시스템에 등록됐을지라도, 현실의 사람들은 프란세크가 다음 황제라 믿고 있다.
시스템과 민심, 이 중에 하나라도 부재하면 황제가 될 수 없다.
‘그러나 프란세크의 선택은 뻔하다.’
나는 알고 있다.
프란세크는 이 암투에 맞지 않는 사람이고 한계에 치달았다. 그는 이반이 내민 달콤한 화평을 받아들일 것이다.
저벅, 저벅.
프란세크가 걸어가고 그림자들이 좌우로 길을 열었다.
“기꺼이 곁에서 통치를 돕겠습니다, 아우님. 아니, 폐하. 이로써 제국은 다시 하나가 될 겁니다.”
첨예하게 치솟았던 갈등과 긴장이 그 말 한마디로 끝났다.
당장은 앞뒤가 맞지 않는 일이 대부분이었다. 사람들은 낯선 황족이 프란세크를 대신해 황제가 되는지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프란세크가 인정했기에 사람들은 이반의 존재를 받아들이고 있었다. 모두가 사투와 암투로 지쳤고, 멈출 수 있는 적당한 핑계를 찾고 있었다.
황위 계승이 엇갈린 이유야 나중에 적당히 지어내면 그만이다. 그게 제국의 방식이지.
“루, 카우스, 쿠스토, 리아. 폐하께 가보, 보아라.”
그림자 전갑의체 한 명이 내게 말했다. 나는 공허한 시선을 느끼며 그림자 사이를 걸어서 이반에게 다가갔다.
이반은 그림자의 말을 듣다가 힘겹게 고개를 틀었다. 그림자는 아크바란에서 벌어진 굵직한 사건들을 이반에게 보고했을 것이다.
끼릭, 끼릭.
이반이 목을 고정하며 나를 보고 있었다. 부러진 팔다리로 인해 사소한 행동조차 힘들어 보였다. 턱은 내 솜씨다.
-너, 곧 머리가 고장 나지? 재기불능에 빠지거나 죽거나 둘 중 하나겠네.
“아마 그럴 겁니다.”
난 솔직히 말했다. 이제 와선 숨기는 건 의미가 없었다.
-결과적으로 잘 풀렸으니 네게 원한은 없어. 무엇보다 네 선택과 행동이 지금의 결과에 일조했겠지. 네가 재기불능이 되기 전에 물어볼 게 있다.
“조건이 있…….”
-네 안전과 쿠스토리아 가문의 존속을 약속하지. 어차피 더는 위협이 되지 않을 테니까.
나는 보이지 않는 눈을 크게 떴다. 그리곤 모든 걸 이해하고선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쿠스토리아 가문은 위협이 되지 않는다.’
재기불능 예정인 나, 그리고 다소 무능한 쥬페. 이 둘은 위협 요소가 아닐 수 있었다. 쿠스토리아 가문이 대단한 군인 집안이라도 구심점이 없으면 힘을 쓰지 못한다.
……그러나 쿠스토리아에는 가문을 넘어서 군부의 구심점이 될 헤일라스가 있었다. 헤일라스의 존재는 실존적인 위협이 된다.
추론을 마친 나는 이를 갈았다. 지금만큼은 이런 내 자신이 싫었다.
“제 아버지, 헤일라스는 죽은 거군요.”
난 힘겹게 입을 뗐다. 내 핵심 목표 중 하나가 실패했다.
차라리 나쁜 소식의 단서를 무시할 정도로 내 뇌 기능이 떨어져 있었으면 좋았으련만……. 그랬다면 나는 내가 성공했다고 믿으면서 행복한 재기불능, 혹은 죽음에 빠졌을 것이다.
상상만 해도 깨고 싶지 않은 단잠이다.
-헤일라스의 시신은 중앙통신탑에 있어. 통신 복구를 위해 무모한 짓을 했더군. 원한다면 복수를 갚게 해주지. 어차피 내 명령이면 자신의 목숨도 네게 내줄 테니까.
……그림자들이 기어코 헤일라스를 죽인 모양이다. 황제는 헤일라스부터 최우선으로 제거하려고 그림자를 대거 투입했을 터다.
“의지가 없는 칼을 부러뜨린다고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헤일라스의 죽음이 믿기지 않았다. 그 무적의 군인이 죽었다고 한다. 당장이라도 이 모든 게 거짓말이라는 듯이 나타날 것만 같았다.
‘헤일라스도 초월적인 존재가 아니라 나와 같은 인간이었지. 난 그걸 알면서도 끝까지 헤일라스에게 의지했다. 헤일라스라면 어떻게든 해줄 거라고 막연하게 믿었지. 마치 어리광을 부리듯…….’
고뇌하고 갈등하며 한계가 있는 인간이면서도, 헤일라스는 모든 걸 알고 있고 뭐든 할 수 있는 것처럼 굴었다.
그래서 모두가 헤일라스를 두려워했고, 황제조차 헤일라스에게 위협을 느꼈다.
‘헤일라스와 내가 조금만 더 서로에 대해 일찍 알았다면…….’
몇 번이나 느낀 회한이었다. 우린 비밀로 자신을 지켰으나 그 때문에 위험하게 고립됐다.
‘배신이 두려울지라도, 등을 맞댄 채로 서로를 지켜야 했지.’
놓친 선택지가 아른거렸다.
-아키에스 도미니, 루카우스 쿠스토리아.
내 상념을 깨듯이 이반이 말을 내뱉었다.
-마지막에 이르러선 넌 정말로 내 감시자가 되었지. 네 수많은 돌발 행동이 날 황제로 만든 셈이니까. 그게 네 의지이든 우연이든 간에 상관이 없어. 난 네가 내 감시자라 생각한다. 난 네 노고에 경의를 표하겠다. 이건 환심을 사기 위한 말이 아니라 진심이다.
내 판단력이 필요하기에 날 부른 것이고 얼굴에 금칠을 해주는 것이리라.
-그러니 난 네 생각과 판단을 듣겠다. 유리 크라치아가 왜 죽은 거라 생각하지?
이건 이반에게도 중요한 문제였다. 그도 황제가 왜 죽었는지 모르고 있었다. 그림자들도 그저 황제의 죽음을 인지만 하고 있었다.
난 정리한 생각을 내뱉었다. 보고는 내 특기 중 하나다.
“첫 번째, 유리 크라치아 폐하는 내전으로 치닫는 상황을 피하려고 죽음을 위장한 겁니다. 혼란이 가라앉고 제국이 정상화되길 기다리는 거죠.”
-그럴 가능성은 없다. 제국의 황제는 그런 추한 기만책을 대외적으론 쓰지 않으니까.
“저도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두 번째는 제국의 균열을 막기 위한 자결입니다. 여기서 한 가지 묻겠습니다, 폐하. 그리고 프란세크 전하. 당신들의 아버지는 제국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버릴 수 있는 사람입니까?”
나는 그들의 대답을 기다렸다.
“모르겠다, 루카. 난 아버지에 대해 많이 안다고 생각했지. 하지만 그건 꾸며낸 가면에 불과했어.”
프란세크의 말이 떨렸다. 그의 이목은 항상 이반을 향해 있었다.
‘프란세크와 이반 사이에는 불화의 싹이 있다.’
지금은 형제의 불화가 사라진 듯하다. 그러나 불씨는 쉬이 꺼지지 않은 채로 새로운 장작을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세 번째 가능성은? 이걸로 끝은 아니겠지? 넌 더 알고 있잖아. 난 쿠스토리아 가문의 안전을 약속했다. 네가 재기불능에 빠진다면 의료적 지원도 아끼지 않을 셈이야. 내 기대를 배반하지 않았으면 하는군.
제국에는 괴물이 살고 있다. 그 괴물은 최상층에 있지 않았다. 괴물은 첨탑의 그림자에 숨어서 제국을 지켜봤다.
아마, 내 뇌리에 떠오른 생각이 맞을 것이다. 나도 가슴 한구석으론 확신하고 있었다. 다른 가능성은 미력했다.
여기서 잠시 헤일라스의 인물평을 빌려오자. 그는 부족한 정보로도 다른 세력과 대등한 위치에 설 정도로 뛰어난 통찰력을 가진 사람이었다.
‘키누안은 제국에 득이 될 사람이 아니야. 만약 상부가 키누안을 통해 계획을 준비하고 있다면, 그건 키누안에게 속고 있는 거지.’
헤일라스는 키누안을 이렇게 평가했다. 이 통찰은 진실에 가까울 것이다.
“키누안이 유리 크라치아를 암살했습니다.”
내가 내린 단 하나의 결론이다. 그리고 이게 키누안의 목표였다. 베일로 싸맨 채 그 누구에게도 내보이지 않던 진짜 목적.
아키에스 빅티마는 변수와 혼돈을 무기로 삼는다. 내가 만들어낸 혼란이 더 커질수록 키누안은 웃고 있었을 것이다.
황궁에서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나는 모른다.
‘하지만 내가 만들어낸 변수가 키누안에겐 절호의 기회가 된 거다.’
여러 가지 경우를 생각할 순 있었다. 황제의 곁을 지키던 그림자들이 자리를 비웠다든가, 아니면 황제가 ‘아케인의 유산’을 사용하기 위해 홀로 움직였다든가.
뭐든 간에. 내 행동으로 인해 황제는 궁지에 몰렸고 선택을 해야 했다. 키누안에게 절호의 기회가 생긴 셈이다.
내부조사가 끝나면 자세한 정황을 알 수 있겠지. 하지만 그땐 내가 제정신이 아니거나 사망한 뒤일 것이다.
‘키누안, 키누안, 키누안…….’
키누안을 떠올릴수록 미칠 것만 같았다. 나 자신을 불사르고도 나는 그를 끝까지 이해하지 못했다.
웅성, 웅성.
내 주변의 그림자들이 일그러지는 것 같았다. 청각 시야에 비친 그들의 모습이 뒤틀리고 꼬이는가 싶더니 키누안처럼 보였다.
“그게 사실이라…….”
프란세크도 키누안의 형태였다.
‘그게 사실이라고 생각하나?’
뒷말이 마치 이렇게 들렸다. 이건 망상이다.
-알았다, 너를…….
이반도 키누안이다. 나는 머리를 감쌌다. 내 청각으론 보지 못할 밤하늘의 달조차 키누안의 얼굴처럼 보였다.
달그락.
비틀거리는 발치에 치이는 돌멩이도 키누안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데굴데굴 굴러가는 소리가 그의 웃음 같았다.
……온 세상과 만물이 키누안이다.
“제게 연민을 조금이라도 느끼신다면, 마지막으로 일레이 카르티카를 불러주셨으면 합니다.”
더 미쳐버리기 전에…… 나는 믿고 맡길 수 있는 친구를 불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