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ad Born Blood RAW novel - Chapter (156)
배드 본 블러드-156화(156/197)
156
모든 생명은 에너지를 발산한다.
별을 살아있다고 말하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별은 생명체처럼 에너지를 발산하다가 그 힘을 다하면 죽는다.
생명은 역동적이며 변화한다. 그리고 죽음이란 변화하지 않는 상태를 뜻한다.
……죽음이란 정지다.
‘죽음, 그 너머에 무엇이 있는가.’
수많은 지성체가 우주를 향해 던진 질문이다.
누군가는 그 너머에는 아무것도 없다고 말했다. 유물론적인 발언이다. 냉엄한 시선으로 보면 의식이란 가냘프고 허술한 착각에 불과하다. 심지어 우리의 의식은 뇌 그 자체도 아닌 ‘일시적 반응 현상’에 불과하다. 그 증거는 너무나 많아서 부정하기 힘들 정도다.
의식이란 에너지가 육체에 흐르는 동안에만 나타나는 현상의 통칭일 뿐. 전등의 스위치가 꺼지면 사라지는 빛과 다를 바 없었다.
그러니 우린 ‘전등’ 그 자체가 아니라 ‘빛’에 가까우며, 우리의 가치는 빛의 형태에 달려 있다.
더 환하게, 더 다채롭게, 더 오랫동안.
별이 빛나듯 우린 자신의 색채를 자랑하며 뽐낸다. 그리고 언젠가 모두 조용히 꺼지겠지.
‘루카, 루카우스 쿠스토리아.’
난 내 이름을 떠올렸다. 아직 죽지 않은 모양이다.
내가 죽었다면 사고는 완전히 정지했을 것이다. 희미한 빛조차 남지 않았겠지.
내 의식은 옅고 기억은 혼탁하다. 뇌 기능이 온전하지 않기 때문이다. 내 경험과 기억은 정렬되지 않았다, 시간순으로도 인기순으로도.
눈을 감고 무작위로 책장을 펼친 것처럼 기억의 순서가 멋대로다. 장면과 장면으로 인과를 추론해 시간별로 나눠두자. 감정이 또렷한 장면은 따로 빼놔야지. 저건 내게 중요한 사건이었을 테니까.
나는 사서처럼 기억을 정리했다. 지루한 작업이로군.
난 지금 깨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았고, 의식의 각성 수준도 매우 낮았다. 사고는 녹슨 기계처럼 뻑뻑했고, 신체와 뇌의 연결은 전혀 이뤄지지 않았다.
……잠시 끔찍한 생각을 해보자.
지금 나는 통 속의 뇌가 아닐까? 뇌만 둥둥 뜬 채로 사고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상황은 좋지 않다. 난 현재 외부의 자극을 느끼지 못한다. 인간적인 기능을 쓰지 않으면 인간성을 상실하듯, 적절한 자극을 받아야만 뇌는 기능을 유지할 수 있었다.
이대로 있다간 나는 바보가 될 것이다.
“깨어…….”
아, 다행이로군. 소리가 들린다.
청각이 가장 먼저 반응했다. 자극에 굶주린 내 뇌는 알뜰살뜰하게 소리를 잡아채며 음미했다.
변성기가 지난 남성의 목소리다. 쇠락하거나 노화 현상이 없었고, 기계장치의 개입도 없는 듯 인위적이지 않았다. 첫인상으로 변성기가 지났다는 느낌이 든 것으로 보아 젊은 남성이겠지. 발성 기관도 생체일 것이다. 담배나 술, 약물의 중독으로 인한 기관지의 손상도 느껴지지 않았다.
별거 아닌 자극이 이토록 감미로울 줄이야. 그 목소리가 참으로 반가웠다. 남자라도 괜찮으니 힘껏 안아주고 싶을 정도다.
“……났습니다. 각성도가 빠르게 높아지고 있습니다.”
“멍청아, 각성이 빠른 걸 알면 말만 하지 말고 바로 움직여.”
“선, 선배님. 그럼 안정제를 투여할까요?”
“야, 언제까지 일일이 물어볼 거야? 하루 이틀 일해?”
못된 선배와 모자란 후배의 대화인 듯하군. 억양은 아크바란 쪽이 아니었다.
나는 그 대화를 차분히 들었다. 급격한 각성은 뇌에 과부하를 일으키고 손상을 줄 수도 있다. 준비 운동 없이 고난도의 동작을 하면 몸이 쉽게 다치는 것과 같은 원리다.
하지만 내게 ‘급격한 각성’은 고난도 정신 활동이 아니다. 지극히 일상이지.
난 집중해서 감각부터 의식적으로 깨웠다. 청각이 활성화됐으니 다른 감각도 일순간에 반응했다.
파르르.
눈꺼풀이 떨렸다. 생각해 보니 내 눈과 시신경이 전부 망가졌던 것 같은데…….
“아, 환자가 일, 일어났습니다!”
“아씨, 아직 깨면 안 된다니까! 안정제 투여해! 어서!”
내 시야는 지극히 정상이었다. 시신경 재건 시술이라도 누가 해준 모양이다.
하얀 가운을 입은 사내 두 명이 보였다. 말투만큼이나 못되게 생긴 놈은 하얀 가운이 민망할 정도로 문신이 뺨까지 그득했다. 복장 꼬락서니를 보니 의료계 종사자인 듯한데 생긴 건 하층 구역의 갱 같았다.
그리고 저 문신쟁이에게 쩔쩔매는 후배직원은 허둥지둥 주사기를 꺼내고 있었다. 후배직원의 얼굴은 자주 얻어맞는지 멍이 들어있었다.
“저, 저기, 고, 고객님. 절차에 따라, 일, 일어나셔야 해서 지금은 잠들어 계셔야…….”
뭔 등신 같은 소리를 하고 있군.
주변을 훑어봤다. 난 침대에 누워있었고, 내 몸에는 주렁주렁 뭔가가 달려 있었다. 내 생체 신호를 읽는 복잡한 장치였다. 내 상태를 나타낸 그래프와 숫자가 모니터에서 나오고 있었다. 풍경만 보면 하층 구역의 병원 같았다.
빡!
문신쟁이가 후배직원의 뒤통수를 세게 후려쳤다.
“제대로 된 의식도 없는 양반에게 말해서 뭐 하게? 어차피 움직이지도 못할걸. 이리 줘봐.”
문신쟁이는 주사기를 빼앗아 들더니 내게 다가왔다.
난 입을 몇 번 뻥긋거렸다. 언어 기능 회복이 조금 늦어서 말이 바로 나오지 않았다.
“……손목 분질러 버리기 전에 그 주사기를 내려놔.”
내가 누운 채로 간신히 말했다. 문신쟁이가 눈을 크게 뜨며 주춤거렸다.
끼릭.
내 팔다리가 미미하게 움직인다. 의수와 의족이 달려 있긴 하다.
난 눈을 살짝 감으며 생체 신호를 조율했다. 반응성과 출력을 보니 일상용으로도 쓰기 힘든 싸구려 의수와 의족이었다. 구색 맞추기로 달아둔 듯했다. 인공 피부와 감각 센서조차 없어서 둔탁했다. 말 그대로 움직이는 쇳덩이에 불과했다.
내 몸을 확인했으니 행동 방침을 정하자.
내 이름은 루카이고, 현재 상황을 정확히 알 수가 없다. 내 마지막 기억은 폭풍기의 아크바란이다. 그 뒤의 일은 모른다. 하지만 페인트칠이 벗겨진 벽과 색이 바랜 의료장비들 그리고 의료진으로 추정되는 자들의 말투를 볼 때 ‘좋은 곳’에서 치료를 받은 건 아닌 듯했다.
최악의 경우, 내게 적의와 악의를 가진 누군가가 날 깨운 것일 수도 있다.
그리고 난 항상 최악을 가정한다. 세상살이가 그리 쉽지 않다는 건 걸음마를 뗄 때부터 알았으니까.
“갑자기 깨어나서 놀란 건 이해합니다만. 거, 얌전히 있으시면 별일 없을 겁니다.”
문신쟁이가 주사기를 내 목덜미에 들이밀며 말했다.
난 친절히 경고했다.
우득!
손목을 분질러 버리겠다고.
난 오른 주먹을 뻗어서 문신쟁이의 팔꿈치를 강타했다. 놈의 팔꿈치는 생체였기에 뼈가 경쾌하게 부러지면서 피부와 옷을 뚫고 튀어나왔다.
사실은 팔꿈치를 부술 생각은 없었다. 의체가 낯선 탓에 출력과 움직임이 멋대로였다. 내 생각과 행동 사이에 괴리감이 컸다. 지금은 자가조율할 시간도 없으니 대충 요령껏 해야 한다.
“우, 끄아아아아! 내, 내 팔! 내 팔! 아프잖아, 시발, 이, 개새끼야!”
미안한 말이지만 놈의 비명은 훌륭한 자극이었다. 조미료를 잔뜩 친 음식을 먹는 것 같았다. 뇌 안쪽까지 저릿저릿했다.
전투를 인식한 내 뇌가 단번에 활성화됐다.
“어, 어, 어어어? 선배님! 뼈, 뼈가! 뼈가 튀어나왔어요!”
멍청한 후배가 소리를 질렀다.
“커억, 컥. 경, 경비! 경비!”
문신쟁이가 벽에 있는 버튼을 누르려 했다.
나는 일단 상체를 일으켜 세우며 움직였다. 온몸에서 삐걱거리는 소리가 났다.
휘릭!
내가 문신쟁이의 옷깃을 잡아 뒤로 잡아당겼다. 흠, 옷만 잡은 게 아니라 살점까지 집어버렸다.
“아파아아아아아!”
쇳덩이 손가락에 옆구리가 꼬집혔으니 아플 만도 하지.
나는 문신쟁이를 잡아당기며 목을 감아 조였다.
“여긴 어디지?”
내가 차분히 물었다.
“일, 일단 놓, 놓아, 주, 세요, 고, 객님, 컥! 컥!”
“질문에만 대답해.”
문신쟁이는 전투에 익숙하지 않고 통증 내성도 없는 놈이었다.
까드드득!
난 문신쟁이의 귀를 물고선 힘껏 잡아 뜯었다.
“끼야야아아옷오옹!”
문신쟁이가 기겁하는 비명을 내뱉었다. 나는 피어싱이 달린 귀때기를 바닥에 뱉었다.
“다음은 눈깔을 후벼 파주마. 거기 등신 새끼, 넌 가만히 있어. 손가락이라도 까딱하면 네 선배님의 목이 360도 회전하는 꼴을 볼 수 있을 테니까.”
협박은 어중간해선 안 된다. 정말로 하겠다는 생각을 가져야 한다.
“가, 가만히 있어! 가만히! 고객님의 말 들어! 커억, 컥, 허억.”
문신쟁이는 내 폭력을 경험하더니 필사적으로 외쳤다. 정말로 죽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머리에 박혔기 때문이다.
“대답해. 여긴 어디지?”
“라, 라자루스입니다.”
처음 듣는 단어다.
“지리적 위치와 내 치료대금을 치른 사람의 이름을 말해.”
“보, 보더시티……. 저, 저는 말단이라 자, 자세한 건 모, 모릅니다, 제발, 살, 살려주십쇼.”
문신쟁이의 억양이 낯선 이유가 있었다. 여긴 제국의 변두리도 아니었다.
‘벨라토 연방의 보더시티.’
몇 번이나 들은 적이 있다. 릴리안 라모네스가 가고 싶어 했던 도시다.
딸깍!
나는 눈을 찌푸렸다.
눈치를 보던 후배직원이 벽까지 뛰어가더니 경비 호출 버튼을 눌렀다. 그 누구보다 놀란 건 문신쟁이였다.
“야, 이 시발 새끼야아아아아아! 왜 움직이냐고오오오오!”
나는 후배직원이 움직이면 문신쟁이를 죽이겠다고 엄포를 놓았다. 그런데도 후배직원은 과감히 움직였다. 저놈에게 이 정도 담력이 있을 줄은 몰랐다.
“어, 선, 선배님을 안 죽이시나요? 저, 방금 움직였는데? 이러면 어, 어색해지잖아요.”
후배직원이 당황한 듯이 말했다.
“뭐?”
문신쟁이는 아연실색했고, 나도 방금은 어이가 없었다.
덜컹!
후배직원이 문을 열더니 후다닥 도망갔다.
“……너 저놈을 계속 갈궜다간 조만간 죽었겠는걸? 저런 새끼들이 제일 무서운 거야.”
나는 문신쟁이를 발로 걷어차며 놓았다. 문신쟁이는 끙끙 앓으며 구석으로 기어가듯 도망갔다.
삐걱, 삐걱.
난 고물이나 다름없는 의족으로 걸으며 벽면 모니터 앞에 섰다.
막상 움직여보니 생각보다 몸이 굳진 않았다. 내 의식이 없는 동안에도 동작성 재활 치료를 했던 모양이다. 그러니 근육도 여전하고 의족과 의수도 붙어있었던 거겠지.
휙.
나는 손바닥으로 화면을 넘기며 내 의료 기록을 확인했다.
‘케이사 트레스.’
가명으로 등록되어 있었다.
‘케이사는 내가 여장했을 때의 이름이다.’
케이사라는 이름을 아는 자는 몇 없다.
‘……트레스(Tres).’
여러 언어로 숫자 3이라는 뜻을 가진 단어다.
나는 다음 기록으로 넘어갔다. 경비가 이쪽으로 오고 있을 것이다. 빨리 정보를 전부 습득하고 움직여야 한다.
“미치겠군.”
난 인상을 찌푸렸다.
9년이나 여기에 있었다. 그중에 5년은 냉동 수면 상태로 지냈다. 실질적인 치료 기간은 4년이었다. 심지어 날짜를 확인해 보니 폭풍기가 끝나고 3년이 지난 이후에야 입원한 모양이었다.
‘12년이 흘렀다.’
내 예상보다 더 오랜 세월이 지난 뒤였다.
타닥, 타닥.
복도에서 발소리가 들린다. 금속성도 같이 울리는 걸 보니 무장한 경비인 듯했다.
‘이를 어쩐다.’
지금 내가 쓰는 팔다리는 전투용이 아니다. 더군다나 조율과 적응도 못한 상태다. 내 양쪽 눈은…… 나는 움찔했다.
의안이 아니라 양쪽 다 생체 안구였다. 어쩐지 지나칠 정도로 편안하다 싶었다.
나는 문에 등을 붙이며 복도를 힐끔 보았다. 무장한 경비 두 명이 복도 모퉁이에서 보였다.
치직, 치직.
경비 두 명은 전류가 흐르는 봉을 들고 있었고, 권총은 허리춤에 곱게 보관하고 있었다.
난 입꼬리를 씰룩거렸다.
‘뭐, 근접전이면 어찌어찌 되겠지.’
지금 상태로 총알은 피하기 힘들다. 하지만 근접전은 요령껏 하면 된다.
까마득한 지구의 선조들은 돌멩이로도 사람의 머리를 찍어 죽였다. 하물며 난 쇳덩이를 양팔에 차고 있다. 사람은 쇳덩이에 얻어맞으면 죽는다.
날카롭게 감각을 끌어 올리던 나는 움찔했다. 기척이 더 있었다.
-케이사 트레스, 벌써 깨어난 것인가?
복도 모퉁이에서 기계음이 들렸다. 누군가가 이쪽으로 오고 있었다. 내 뇌 상태가 좋았으면 청각 시야로 형태를 파악했을 것이다.
이윽고, 덩치가 큰 외계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난 저 외계인을 본 적이 있었다.
‘에퀘시안.’
불안정한 기억의 일부가 빠르게 떠올랐다. 난 필요한 정보부터 인출했다.
예전에 에퀘시안을 상대해 본 적이 있었다. 그들은 인간보다 체구가 더 큰 종족이고, 용병 종족이라 불릴 만큼 전투에 능했다.
얼굴을 전부 가린 전투 헬멧과 주황빛 줄무늬가 박힌 푸른 피부도 여전했다.
-내 고용주가 네 치료비를 지불했다. 낯선 환경을 경계하는 건 이해하지만, 네게 해를 끼치려 했다면 막대한 비용을 들일 필요가 없겠지. 팔다리도 미리 떼놨을 거고.
에퀘시안의 목에 달린 번역기에서 기계 음성이 흘러나왔다.
“고용주의 이름은?”
-여기서 말할 수 없다. 현명하게 생각해라. 고용주께선 널 아끼시니까.
나는 잠시 생각했다. 뇌세포가 차례대로 깨어나는 느낌이었다. 내 인지의 해상력이 넓어지면서 세상이 점점 또렷해지고 있었다.
‘케이사 트레스.’
나만 알아먹을 수 있는 암호일 것이다.
케이사라는 이름을 아는 자는 손에 꼽는다. 그중에서 트레스, 즉 숫자 3을 의미로 삼을 사람은 하나뿐.
“하…… 하하.”
난 입을 감싸며 손가락 사이로 웃음을 흘렸다.
‘지젤 쿠스토리아.’
나와 그녀의 관계 횟수가 3이었다. 나만큼이나 퍽 낭만적인 암호로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