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ad Born Blood RAW novel - Chapter (158)
배드 본 블러드-158화(158/197)
158
타지룬은 얼음주머니를 자신의 머리에 올렸다. 뱀과 같은 변온동물이라 체온 조절이 쉽지 않은 모양이었다.
“서로 오해가 있는 것 같으니 제대로 통성명하죠. 제 이름은 쟈파입니다. 원래 이름은 아니지만, 당신들이 부르기 쉬운 형식으로 바꿨습니다.”
“루카, 루카우스 쿠스토리아다.”
“일단 먼저 말하자면, 전 당신에게 해를 끼칠 생각이 없습니다. 보호하고 있었죠.”
“흠, 보호해 달라고 부탁한 기억이 있는지 더듬어 봐야겠군. 기억이 온전치 않아서 말이야.”
타지룬, 쟈파가 끝이 갈라진 혀를 내밀며 숨을 내뱉었다.
“……제 말을 믿지 않는군요, 루카 씨. 협상에서 우위를 잡으려고 공격적으로 구는 건 관두시죠. 저도 이쪽 방면에선 전문가이고, 슬슬 당신을 적대적으로 대하고 싶어 집니다.”
“그래?”
난 팔짱을 끼며 고개를 기울였다.
“에퀘시안 용병 셋이 저를 지키고 있습니다. 당신이 우수한 군인이라는 건 알지만, 그 몸으로 어찌하진 못할 겁니다. 협상의 주도권은 제게 있습니다. 당신의 편의를 봐주는 건 순전히 제 호의라는 걸 명심하시죠.”
쉽지 않군. 타지룬이 타고난 상인이라는 건 역시 소문만이 아니었다. 실제로도 흐름을 읽는 통찰력이 있었다.
“네 말이 맞아. 난 12년 만에 깨어나서 아무것도 아는 게 없어. 자신을 보호할 수단조차 잃은 상태지. 그러니 나는 너만이 아니라 그 누구도 믿지 못해.”
“상처 입은 짐승이니 사납게 굴어도 이해해 달라는 소리 같군요.”
“물리더라도 참아달라는 소리지. 정말로 내게 호의가 있다면 말이야.”
“호욧…….”
쟈파가 혓바닥을 찔끔찔끔 내밀며 생각에 빠졌다. 곧 그는 길게 자라난 손톱으로 문을 가리켰다.
“에퀘시안 여러분. 호위는 괜찮으니 밖에서 기다려 주세요. 루카 씨와 이야기가 끝나면 부르겠습니다.”
에퀘시안들은 반문도 하지 않았다. 그들은 담담하게 나를 스치더니 문밖으로 나갔다.
드르륵, 드륵.
쟈파가 의자를 밀어오더니 내 앞에 앉았다. 몹시 가까운 거리였다. 한 발자국만 나아가면 놈의 목을 쥘 수 있었다.
나보다 키가 큰 쟈파는 등을 구부리며 나와 시선을 맞췄다. 그의 샛노란 눈동자 중심에선 세로 꼴 동공이 검게 벌어졌다. 뱀과 같은 눈을 보니 나와 다른 종족이란 게 더 실감이 갔다.
“루카 씨, 당신의 능력이라면 이 정도 거리에서는 언제든 저를 죽이거나 생포할 수 있죠. 이제 저와 당신은 대등한 위치에 있습니다.”
대범하고도 놀랍군.
“상인이라면 자신의 목숨을 거래에 올려두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
내가 자세를 고치며 허리를 똑바로 세웠다.
“군인과 전사들은 종종 그런 오만함에 빠지죠. 상인은 자신의 목숨을 내놓지 않을 거라 착각합니다. 목숨을 거는 건 당신네의 특권이 아닙니다, 호욧.”
이야기할 준비가 끝났다.
우린 대등한 위치에 있었다. 나는 언제든 쟈파를 죽일 수 있다. 쟈파도 에퀘시안을 불러서 날 죽일 수 있다.
서로를 죽일 수 있는 위치.
이거보다 공평한 건 없지.
내가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내가 라자루스에서 깨어난 정황을 설명해 줬으면 좋겠군.”
“부탁하지 않아도 찬찬히 설명할 생각이었습니다. 당신의 신뢰를 얻고 싶으니까요.”
쟈파가 길게 자란 손톱을 딱딱 부딪치며 말했다. 난 그가 미소를 짓고 있다고 생각했다. 파충류의 얼굴이니 어떤 표정이 웃는 건지는 잘 모르겠지만 말이다.
쟈파는 설명을 이어갔다. 그 시점은 아크바란의 폭풍기가 아니라 꽤 근래부터 시작했다.
“제가 당신의 존재를 찾아낸 건 3년 전입니다. 치료비 미납 사유로 냉동 수면 상태로 라자루스에 있더군요. 치료비 납부가 끊어지면 대개 실험체로 처분당하는 경우가 많지만, 당신의 보호자가 그간 고액의 치료비를 꾸준히 냈기에 권력자나 부유층으로 판단하고 보류 상태로 놔둔 모양입니다. 아마 그대로 있었으면 라자루스 시설이 망할 때까지 냉동창고에 처박혔겠죠.”
나는 애써 얼음장 같은 표정을 유지했다. 날 라자루스에 넣은 보호자의 이름은 미상이었으나 그게 지젤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무슨 이유인지 몰라도 지젤에게 변고가 생긴 거야.’
폭풍기가 끝나고 3년 뒤, 지젤은 나를 라자루스에 입원시켰다. 아마 여기서 나를 치료할 수 있다는 정보를 얻은 듯했다. 결국에는 내가 회복한 걸 봐선 그녀의 판단은 정확했다.
‘내가 라자루스에 온 지 2년 만에 지젤의 지원이 끊어졌다. 이때 무슨 사건이 생겼을 거야. 그 후, 나는 5년이나 냉동 수면 상태로 보관됐고.’
쟈파는 3년 전에 날 찾아내 치료비를 이어서 대납했다. 그리고 내가 이승으로 돌아온 것이다.
“내가 여기에 있다는 정보는 어디서 얻어낸 거지?”
“당신의 치료비만큼이나 막대한 돈을 지불했죠. 타지룬의 정보 시장은 당신의 생각 이상으로 거대합니다. 삼국의 수장들조차 모르는 정보도 있죠. 그게 우리의 무기니까요. ”
조금 의아했다.
타지룬이 아무리 비밀스러워도 자신만의 국가도 없는 방랑 종족이다. 그런 그들이 삼국의 수장도 모르는 정보를 가지고 있을 것 같진 않았다.
타지룬은 인간이 아니다. 당연히 거짓말할 때의 반응과 무의식적 감정 표현이 인간과 다르다.
‘난 아직 타지룬에 대해 모른다.’
타지룬에 대한 경험과 정보가 부족하다. 직관만으로는 타지룬의 속내를 간파하긴 힘들다.
타지룬의 동공이 커졌다가 작아지길 반복했다. 혓바닥도 아까보다 더 빠르게 날름거렸다.
‘내가 놈을 읽으려고 하듯, 놈도 나를 읽고 있다.’
마치 아키에스 빅티마로 관찰당하는 느낌이었다.
“타지룬은 대개 가문 단위로 움직입니다. 가문마다 전문분야와 원칙이 있죠. 그리고 상업에는 신뢰가 중요합니다. 자신의 원칙을 깬 상인은 그 누구도 믿지 않죠. 우린 남을 속일지언정 거짓말은 하지 않습니다.”
“하하, 웃기는 말이지만 공감해. 거짓말을 하지 않고 속이는 게 가장 고등한 방식이지.”
“당신은 별로 관심이 없겠지만, 타지룬에겐 ‘라라샤’라고 불리는 정보상 가문이 있습니다. 비밀스러운 정보만 전문적으로 다루는 가문이죠. 라라샤 가문에겐 하나의 원칙이 있습니다.
한 번 판 정보는 남에게 두 번 팔지 않는 것. 정보의 독점을 약속하는 거죠. 그리고 해당 정보가 어떤 방식으로든 다른 사람에게 퍼진 걸 알게 되면, 즉시 구매자에게 알려줍니다. 상품의 사후지원인 셈이죠.”
이들은 정보마저 물질처럼 통제하고 다룬다. 이건 좀 놀라웠다.
‘그리고 이런 설명을 덧붙인다는 건…… 쟈파가 내 속내와 감정을 읽고 있다는 뜻이다. 난 지금 놈에게 읽히고 있어. 어떻게?’
나는 나름대로 감정 신호를 통제하고 있었다. 공백기가 있어서 완벽하진 않겠지만, 내가 그리 허술하진 않을 것이다.
“우리 타지룬은 공기 중에 떠도는 체취로 다른 이의 감정을 예측할 수 있습니다. 감정의 맛이 혀로 느껴진다고 표현하는 게 정확하겠죠.”
“아까부터 내게 정보를 계속 넘겨주는군.”
“제 호의 표시입니다. 전 인간을 수없이 상대했지만, 당신은 타지룬이 처음이니까요. 이 정도는 퍼줘야 저를 믿을 것 같기도 하고요.”
이제 정말로 조금 신뢰가 간다. 이 정도로 구애하면 목석도 힐끗 보긴 할 터다.
“……키누안을 찾는다고 했나?”
내가 허락하듯 말했다.
“호요오오옷! 그래서 당신을 찾은 겁니다. 키누안은 아키에스 빅티마라는 특수한 능력을 쓴다고 들었습니다. 고속 사고를 기반으로 한 인지 확장과 다각 추론 방식이죠. 정보에 따르면 노바스 행성에서 키누안 다음가는 아키에스 빅티마 수련자가 당신이더군요.”
내가 키누안의 제자이고 감시자라는 것까지는 모르는 듯했다. 아니면 알면서 모르는 척하는 걸 수도 있지.
“난 키누안에게 아키에스 빅티마를 배웠으니까.”
난 슬쩍 던졌다.
“그럴 거라 예상은 했습니다. 그러나 제자인 당신이 키누안을 좋아하지는 않는 것 같군요.”
“왜 그렇게 생각하지?”
“아까도 말했지만, 감정을 읽을 수 있으니까요. 키누안이라는 말이 처음 나왔을 때, 당신의 감정은 놀랍도록 쓰고도 차가운 맛이었습니다. 아주 드문 감정이었죠.”
“내 감정이 읽힌다는 게 그리 유쾌하진 않군.”
아키에스 빅티마 사용자 앞에 선 사람들의 마음을 느끼는 중이다.
“솔직히 말하겠습니다. 키누안의 이름을 듣고 당신이 긍정적인 감정을 내보였다면…… 저는 끔찍한 방법까지 동원해 당신에게 목줄을 채웠을 겁니다. 그리고 키누안을 찾는 사냥개로 썼겠죠, 호요옷.”
저렇게 말하니 내겐 오히려 더 믿음직스러웠다. 모든 타지룬이 이런지 모르겠지만, 쟈파는 상당한 달변가였다.
“날 찾고 치료하느라 엄청나게 많은 돈을 썼겠군. 키누안에게 원한이라도 있는 건가? 찾아서 죽여줄까?”
“제가 원하는 건 생포입니다. 그 이유는 대답하지 않겠습니다. 전 성공한 사업가입니다. 제 재력으로 당신에게 필요한 모든 지원을 할 겁니다.
나쁘지 않은 조건이겠죠. 당신에게도 든든한 지원이 필요하시지 않나요? 폭풍기의 주인공 중 하나인 당신이 제국의 지원도 받지 못한 채로 여기에 있다는 건 좋은 이유가 아니겠죠. 제국의 어둠이 깊다는 건 우리도 잘 알고 있으니까요.”
나는 찌푸려지는 표정을 숨기지 않았다. 어차피 내 감정을 잘 읽는 상대였다.
“……지금 내가 손만 움직이면 넌 죽어.”
“호욧, 피가 식을 정도로 무섭지만 전 지금 목숨을 걸었습니다. 아차, 저는 변온동물이지요. 인간의 관용구는 어렵단 말이죠.”
나는 쟈파를 바라보다가 일어섰다.
“필요한 건 따로 적어서 보내겠다. 일단은 휴식할 시간을 줘.”
“이미 전부 준비해 뒀습니다. 당신도 자신의 몸을 지킬 힘을 갖춰야 안심할 수 있을 테니까요. 엔을 따라가시죠.”
“엔?”
“당신을 여기까지 안내한 에퀘시안 용병입니다. 당신의 파트너로 붙을 겁니다. 제 휘하에선 최고의 전사입니다.”
“파트너가 아니라 감시자겠지.”
내가 투덜거렸다.
“호욧, 호욧…….”
쟈파는 웃음인지 숨인지 모를 소리를 내뱉으며 날 배웅했다.
끼익, 쿵.
쟈파를 놔두고 난 혼자서 밖으로 나왔다. 복도에는 세 명의 에퀘시안 용병이 서 있었다. 그나마 낯익은 에퀘시안 ‘엔’이 나를 향해 턱짓했다.
-따라와라.
여전히 고압적인 태도였다. 난 빈정거리고 싶은 마음을 참으며 그를 따라갔다.
‘감정을 읽는 쟈파에게 정보를 캐내는 건 좋은 생각이 아니야. 내 사고만 읽히겠지.’
더 묻고 싶은 게 많아도 대화를 끊은 이유다. 특히 지젤과 관련된 감정은 들키기 싫었다. 내 약점을 드러낼 필요는 없었다.
‘아직 나는 심리적으로 불안정하다. 벌거벗겨진 상태니 취약할 수밖에 없지. 평정을 유지하는 것만 해도 벅차.’
내가 예전처럼 자신을 추슬러 통제한다면 쟈파도 내 감정을 쉽사리 읽지 못할 거다.
나는 엔을 따라 아래층으로 내려가며 주변을 관찰했다.
건물 전체가 쟈파의 소유인 듯했다. 에퀘시안 경비가 층마다 돌아다녔다. 오가는 자는 인간을 비롯해 외계인도 여럿이었다.
우뚝.
난 복도를 걷다 걸음을 멈췄다.
‘병기고.’
문패에 그렇게 적혀 있었다. 익숙한 냄새가 저 너머에서 흘러 들어온다. 기름에 절인 듯한 쇠 냄새와 화약, 그리고 에너지 병기의 비릿한 냄새. 난 그 모든 것이 몹시도 그리웠다.
난 흥분할 것 같았다. 아니, 흥분했다. 지금 내 손에 없는 루이나와 크루시스의 매끄러운 감촉이 떠올랐다.
머릿속에서 날 공격적인 사이코로 만드는 호르몬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뇌가 살살 녹아내리는 기분이었다. 당장 루이나와 크루시스를 다시 만질 수 있다면 무고한 사람 셋, 아니 네다섯 명 정도는 죽일 수 있을 것 같았다. 아니, 뭐, 이건 어디까지나 일시적 충동이다. 실제로 실천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 정말이다.
-거긴 아직 방문하기에 일러. 너도 전사이긴 한가 보군.
엔이 뒤돌아보며 말했다. 무기질적인 기계음 속에서 웃음이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