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ad Born Blood RAW novel - Chapter (160)
배드 본 블러드-160화(160/197)
160
쟈파가 마련해 준 방은 고급 호텔처럼 아늑하고 정갈했다. 인간 기준에 맞춰둔 침대와 의자는 몸에 딱 맞았고, 벽면 모니터와 탁자는 컴퓨터가 연동되어 필요한 정보를 바로 볼 수 있었다.
의자에 앉아서 홀로그램 화면을 열 개를 띄워놓았다. 쟈파가 준비해 둔 정보가 먼저 나왔다.
나는 단말기를 조작해 보더시티 네트워크에 연결해서 외부 정보도 같이 출력했다.
우우웅.
내 공백기를 메울 정보 뭉치가 주르륵 떠올랐다. 영상과 글자가 현란하게 오갔다.
‘아크레시아 제국에 대한 정보는 많이 없을 거다. 폭풍기에 일어난 일은 더욱더.’
내가 가장 먼저 확인한 건 제국와 쿠스토리아 가문이었다.
‘현 황제는 이반 크라치아.’
폭풍기 이후로 황제는 바뀌지 않았다.
‘전 황제 유리 크라치아는 노환으로 인해 갑작스럽게 사망함.’
대외적 이유는 당연히 진실과 달랐다. 심지어 유리 크라치아의 사망 시기가 실제보다 훨씬 일렀다.
‘유리 크라치아는 폭풍기 첫 주에 죽었고, 제국의 관료는 황제의 공백으로 인한 혼란을 막으려고 사망 소식을 외부에 알리지 않았다.’
다음 내용을 보자마자 이가 갈렸다.
‘유리 크라치아는 죽기 전, 후계자를 새로이 지명했다. 이에 대한 반발로 프란세크 크라치아는 군부와 손을 잡고 민중을 선동해 찬탈을 시도함.’
‘차기 황제 이반은 친정에 나서 프란세크를 제압하고 스스로 황제임을 선포함. 프란세크가 대중의 지지를 받고 있기에 프란세크와 화해한 것으로 보임. 이후 사실상 공동 통치를 시작함.’
얼마나 많은 입막음과 정보 조작이 있었을지 상상도 가지 않았다. 제국과 황실도 상당히 무리했을 것이다.
황제 유리 크라치아가 왜 후계자를 바꾼 지에 대해서도 적당한 이유를 가져다 붙여놓았다.
‘유리 크라치아 황제와 프란세크 황태자는 정책적 방향성이 달라 갈등과 마찰이 잦았으나, 황제는 제국의 분열과 혼란을 걱정해 황태자 지명을 철회하진 않았다고 추정. 그러나 갑작스러운 상태 악화 때문에 유언으로 차남 이반 크라치아를 후계자로 지목함.’
진실 속에 거짓을 교묘하게 숨겨놓았다.
‘황제와 프란세크가 정책적 방향성이 다르게 보였던 건 사실이다. 프란세크는 기존의 황제들과는 결이 다른 개혁 성향이었으니까…… 황제가 내심 못마땅하게 여기고 있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지.’
그래서 인기가 많은 프란세크를 명목상 황태자로 계속 세워두다가 마지막에 이르러서 이반을 황제로 내세웠다…… 라고 설명해도 설득력이 있긴 했다.
“하하, 그럴싸한 거짓말을 지껄여 놓았군.”
대외기록을 여기까지만 봐도 알 수 있었다. 프란세크는 이반에게 잡아먹혔다.
‘3년 뒤, 프란세크는 코라 신성국에게 제국의 기밀을 넘기고 망명하려다가 붙잡혀 유폐당함. 그 이후 대외적 행보는 없음.’
그리고 나도 이때 라자루스 시설에 입원했다. 이반의 마수로부터 날 지키고자 했을 터다.
‘이 시기에 모략과 계략이 많았을 거다. 통치가 안정되자마자 이반이 프란세크를 축출하려 했어.’
이 사태를 막으려고 일레이에게 부탁해 둔 것이다. 나는 일레이가 최선을 다했다고 믿고 싶었다.
‘근위대는 경제적 이유로 양성 숫자를 매년 줄이고 있음.’
근위대는 소멸하고 있었다.
‘제국은 근위대 훈련 커리큘럼을 민간기업에 공개하고 양성을 위탁함. 그러나 레기온 기술은 황실이 여전히 독점 중이며, 민간기업에서 양성한 병사는 기존 근위대원에 비해 수준이 떨어지는 것으로 보임.’
기존의 근위대는 비용을 생각하지 않고 최정예 양성에 집중했다. 그러나 기업은 효용이 가장 높은 지점을 짚어내 적당한 수준의 병사를 배출할 것이다.
‘민간기업에서 배출한 병사 중 상위권 일부는 황실이 고용해 용병부대로 편입함. 이들은 군인 신분이 아니며, 의도적으로 군인 가문 출신도 고용에서 배제하는 것으로 보임.’
근위대를 대체하는 부대가 만들어지고 있었다. 군인이 아닌 용병이라서 계약 기간이 끝나면 군부에 남지도 않았고, 군인 가문 출신도 아니기에 군부와 협력할 끈이 더욱 적었다.
새로운 친위대는 군부와 접점이 없도록 만들었다. 먼 훗날에 어떻게 될지 모르겠지만, 당장은 서로를 견제하는 별개의 집단으로 굴러갈 것이다.
내 심정은 복잡미묘했다.
근위대가 대규모 숙청당하는 참사는 없었다. 그러나 쇠락하다가 사라질 것이다. 내가 몸을 담았던 집단이 없어진다는 건 입맛이 쓴 일이었다.
‘그리고 쿠스토리아 가문.’
헤일라스 쿠스토리아는 공식적으로 황제를 매도하며 반역을 시도했다. 증인도 많아서 그 사실을 아예 숨기긴 힘들 터다.
“……놀랍군.”
나는 기록을 보고선 입과 턱을 매만졌다.
헤일라스 쿠스토리아는 사후 2급 십자검 무공훈장을 받았다. 이반 크라치아의 명이었다.
군부 장성과 헤일라스를 습격한 건 ‘황후의 독단적 지시’로 나와 있었다. 공식적 기록에 의하면 유리 크라치아는 폭풍기 시작 직후에 죽었기 때문이었다.
어쨌든 황실을 적대한 상대에게 훈장을 줬다. 그 내막은 상당히 복잡했다.
-근위대장 헤일라스 쿠스토리아는 긍지를 아는 명예로운 군인이었다. 그의 용기는 정당했고, 선황은 근위대를 상대로 해선 안 될 짓을 했다. 이를 알았다면 나는 대화를 먼저 시도…….
이반의 연설이 나왔다. 내가 기억하던 이반보다 좀 더 성숙했다. 청년처럼 보이는 모습이었다.
황실은 과오를 공식적으로 인정했다. 그리고 근위대의 비인간화 계획은 유리 크라치아 개인의 일탈로 돌렸고, 이반은 갑작스러운 계승 탓에 그걸 몰랐다는 듯이 말하고 있었다. 오해로 벌어진 참사라는 듯이 말이다.
이반은 과오에 대한 사과의 의미로 헤일라스 쿠스토리아에게 무공훈장을 수여했다. 나아가 쿠스토리아 가문에게 특혜까지 부여했다. 그 누구도 반역자의 가문이라 생각하지 못할 혜택이었다.
‘생각해 보면 말이 안 되는 짓은 아니야. 헤일라스의 영향력은 근위대의 강박적 충성심도 흔들 정도다.’
근위대는 아직 소멸하지 않았다. 그 힘은 예전 같진 않아도 막대했다. 대체할 부대도 없으면서 다짜고짜 근위대를 없애는 건 안보에도 커다란 공백이었다.
이반은 근위대의 자연스러운 소멸을 통한 친위부대의 교체를 바라는 것이다. 수십 년이 지나면 근위대는 실권 없이 이름만 거창한 장식부대가 될 터다.
‘괜히 헤일라스를 반역자로 지정해 근위대원의 반감을 살 필요는 없지.’
강박적인 충성심이 박힌 근위대원의 성향상 쇠락과 소멸은 받아들일 것이다. 강제로 짓누르지만 않으면 된다.
난 쿠스토리아 가문의 기록을 빠르게 읽었다.
‘쥬페가 가주 자리에서 그럭저럭 잘 버티고 있군. 에바도 곁에 있으니까.’
루카우스 쿠스토리아, 재기불능.
“이야, 잘난 척하더니 이 꼴 날 줄 알았다.”
내가 빈정거리며 다음 이름을 확인했다.
‘지젤 쿠스토리아, 지앤지 사이버네틱스 공동대표.’
공업소로 시작한 회사가 지앤지 사이버네틱스라는 거창한 이름까지 달았다.
‘독자적으로 개발한 키네시스칩이 하층민의 필수품이 되면서 막대한 매출을 올림. 키네시스는 호환되지 않는 제품 간의 간섭과 오류를 최소화하고 최적화해 주는 칩. 의체의 불법 개조와 부적절한 사용이 잦은 하층민에겐 유의미한 반응성 개선 효과가 있음.’
반대로 말하면, 기업에서 보증하는 호환 의체를 쓰고 조율을 받는 사람에겐 별 효과가 없다는 뜻이다.
‘일부 사이버네틱스 기업들은 키네시스가 불법적인 해킹칩이며 자사의 특허권을 침해하고 사용자의 안전을 해친다는 이유로 제소했으나 패배.’
경쟁기업들은 키네시스칩 사용 시에 생기는 문제에 대해선 지원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그러나 어차피 하층민에겐 상관없는 이야기였다. 의체에 문제가 생기면 그들은 기업이 아니라 가까운 시술소나 공업소를 찾아간다.
자, 다음 내용을 보고 화내지 말자, 루카. 아마 좋은 내용은 아닐 것이다.
‘……지젤 쿠스토리아는 사업 확장을 위한 보더시티 방문 중 행방불명.’
좋아, 화내지 말자, 흥분할 것 없다. 예상한 결과 중 하나다. 지젤이 무사했다면 지금 난 그녀를 만나고 있었을 테니까. 치료비가 끊어진 시점부터 그녀에게 어떤 사고가 생겼을 거라…….
쾅!
소리와 함께 눈앞이 어두워졌다. 아마 내가 탁자를 걷어차는 소리였겠지.
* * *
……난 의식을 되찾았다.
파직!
내 주먹이 모니터를 깨부수고 있었다. 의수의 표면에 전기가 찌릿찌릿하게 흐르고 있었다.
-이제야 정신이 들었어? 몇 번이나 그 대가리에 총알구멍을 만들려다가 말았다. 고용주가 널 죽이면 안 된다고 소리를 질러대서 말이야.
난 뒤를 보았다. 붉은 피를 흘리는 엔이 어깨를 크게 돌리고 있었다. 나와 격렬한 싸움을 했는지 그의 전투복 아래로 드러난 피부에선 주황빛 줄무늬가 환하게 빛나고 있었다. 전투 헬멧도 일부 깨져서 오른쪽 눈동자가 드러났다.
치직, 치직.
방은 엉망이었다. 가구와 전자기기가 부서진 건 물론이고, 경비 안드로이드가 다섯 기나 반파된 상태로 쓰러져 있었다.
“흠, 스트레스 해소가 필요했거든.”
나는 멋쩍게 말했다. 내가 말하고도 멍청한 말이었다.
-넌 정상이 아니야. 방금은 화가 난 수준이 아니라 아예 의식이 없었지? 라자루스에 처박혀서 정밀검사라도 받아봐. 팔다리 전부 떼인 채로 정신병원에 처박히기 전에 말이야.
“그보다 너 실력이 좋은가 봐. 맨손이라지만 날 막은 걸 보니 말이야. 아니면 내 실력이 녹슬었던가.”
엔이 전투 헬멧을 살짝 들어 올리더니 피가 고인 침을 바닥에 뱉었다.
-정신 나간 인간 한 명도 못 막으면 대전사라는 자리부터 반납해야지.
“대전사? 용병대의 수장치고는 넌 좀 경박한 편인 것 같은데?”
-대장은 따로 있어. 우린 무리 내에서 싸움을 가장 잘하는 녀석을 대전사로 뽑아. 절대 지면 안 되는 자리에 날 내보내지. 결투 문화는 에퀘시안에게 중요하거든. 하여튼 말을 돌리지 마라, 인간. 넌 사소한 일에 이성을 잃었다.
엔이 삿대질로 나를 가리켰다. 에퀘시안의 손가락은 네 개였으나 하나하나가 굵고 억셌다.
어쨌거나 화제를 바꾸려는 내 시도를 엔이 간파했다. 그는 언변이 뛰어나진 않지만, 통찰력이 있었다. 뭐가 중요한지 아는 자였다.
“사소한 일은 아니었다.”
-무슨 일이든 이성을 잃었다는 건 나쁜 신호지.
“변명은 하자면, 난 지금 멀쩡히 서 있는 게 기적인 몸이야. 이런 이상 반응이 한둘 나타나는 건 아무것도 아니지. 내 몸은 내가 관리할 테니 신경 꺼라, 에퀘시안. 용병이면 용병답게 돈 받은 일이나 잘해.”
-실수인 척하고 죽여버릴 걸 그랬네.
엔의 기세가 사나웠다.
그 찰나에 문 뒤에서 요사스러운 웃음이 퍼졌다. 쟈파의 등장이었다. 그는 긴 손톱을 탁탁 부딪치며 안으로 들어왔다.
“호욧, 호욧! 싸우지 맙시다, 엔. 그리고 루카 씨. 평화를 사랑하는 타지룬으로서 이 광경이 너무나 가슴이 아프군요.”
-이 녀석의 힘이 꼭 필요한 건가?
“필요하고 말고요. 엔, 당신은 방금처럼 루카 씨를 지키면 그만입니다. 사견은 달 필요가 없어요. 굳이 대장님께 말해야 할까요?”
-……알았다.
쟈파는 노골적으로 내 편을 들었다.
‘도대체 키누안은 쟈파에게 무슨 짓을 한 거지?’
키누안을 찾고자 하는 쟈파의 집념은 대단했다. 치료비부터 안드로이드 대파까지, 벌써 나 때문에 입은 손실이 막심할 것이다.
‘이 모든 손실이 아무렇지 않을 정도로 키누안을 찾는 일이 그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거지.’
타지룬은 그 어떤 종족보다 탐욕스럽기로 정평이 나 있었다. 내 존재가 도움이 된다고 확신하기에 이렇게 편의를 봐주는 것이다.
“제가 다른 방으로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새 의체는 마음에 드십니까?”
쟈파가 복도를 걸어가며 말했다. 그의 로브가 바닥까지 길게 끌려서 뱀의 꼬리처럼 보이기도 했다.
“훌륭해.”
“그 의체 제작에 쟈파 상사의 상반기 매출을 쏟아부었습니다. 순익이 아니라 매출요.”
“아, 그래?”
나는 덤덤히 대답했다. 그보다 나도 내가 이성을 잃은 것에 충격을 받았다. 중요한 순간에 이런 식으로 의식이 날아간다면 곤란하다. 내 진짜 무기는 이성과 통찰이다. 이 무기를 쓰지 못한다면 난 싸움 좀 잘하는 군인에 불과하다.
“호욧! 이 냉소적인 반응은 제게도 조금은 상처입니다. 제가 쟈파 피자의 조리사였다면 당신을 화덕에 던져 넣었을지도요. 혹시 쟈파 피자 광고는 보셨습니까? 자사의 전속 아이돌이 부른 노래가…….”
“보진 않았지만 끔찍할 것 같군.”
쟈파가 단말기 화면을 내 앞에 들이댔다.
-뱀, 뱀, 뱀! 뱀 한 마리를 통째로 토핑으로 올린…….
나는 쟈파의 단말기를 빼앗아서 움켜잡았다.
콰직!
단말기의 부품이 내 손바닥 아래로 떨어졌다.
-배애앰, 배애앰…….
소리는 늘어지다가 끊어졌다.
쟈파는 하늘이 무너진 듯한 표정으로 날 보았다. 이젠 타지룬의 표정을 조금은 읽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내 능력이 필요하다면 회복을 방해하지 마. 지금부터 24시간 동안 날 혼자 놔둬.”
나는 경고하며 새로 배정받은 방으로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