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ad Born Blood RAW novel - Chapter (161)
배드 본 블러드-161화(161/197)
161
나는 근위대에서 배운 걸 떠올리며 정신을 점검했다.
바닥에 앉으며 명상을 통해 내면을 응시했다. 수 시간조차 찰나로 느껴질 정도로 내면 깊이 들어갔다.
의식의 연속성 인식, 기억의 정합성 확인.
만약, 내 인격과 기억에 변질이 있다면 어딘가 이질감과 위화감이 생겼을 것이다.
‘아직까진 변질이 없다.’
물론 완벽한 확신은 아니다. 자기 점검은 아무리 꼼꼼해도 편향적이다. 나 자신을 끊임없이 의심하고 있어야 한다.
‘이성이 날아간 이유.’
나는 내면에 더욱더 깊이 들어갔다.
‘……한계에 치달으면 치명적인 손상이 온다는 걸, 내 뇌가 학습했다.’
지젤의 행방불명 소식을 확인하고 내 뇌는 본격적으로 작동했다. 격렬한 감정까지 겹쳤으니 그 부하가 상당했을 것이다.
비유하자면, 수십 년은 가동하지 않은 기계를 기름칠도 하지 않고 단시간에 고점 출력까지 가동한 셈이었다.
‘그래서 내 의식의 빛이 꺼졌다.’
과열로 고장 나기 전에 전원이 꺼지는 것과 같은 원리다.
한번 학습된 한계는 의식적으로 뚫기 힘들다. 생존 본능은 몹시도 강력하다. 유사 죽음을 경험한 내 뇌는 그런 상황까지 다시 가는 걸 두려워하고 있었다.
‘골치 아픈 걸 학습했군.’
뇌가 내 의지를 거스르고 있었다. 이성과 논리로 안다고 해서 하루아침에 수정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이 문제에 대해선 좀 더 지켜봐야 한다.
‘일시적인 거라면 다행이지만, 전투 시에 이런 상황이 벌어지면 조치가 필요하다.’
나는 지젤에 대한 기억을 차분히 더듬었다. 수도꼭지를 조금씩 돌리듯 감정을 열었다. 아까처럼 흥분해서 의식을 날려 먹기 싫었다.
‘보더시티에서 출장 중 행방불명.’
내 사고가 가지를 뻗듯 번져나가고 있었다.
짚이는 바가 너무나 많았다.
‘황실, 바바라, 제국 내의 경쟁기업, 쿠스토리아 가문에게 적대적인 자, 보더시티의 토착 기업…….’
그리고 5년이나 지젤의 행방을 아무도 모르고 있다.
최악의 경우…… 지젤은 죽었다. 이 정도로 오랫동안 행방이 묘연하다면 사망했을 확률이 매우 높았다.
감정이 시뻘겋게 들끓기 시작했다. 당장이라도 아크바란으로 달려가서 탐문 수사를 하고 싶었다.
‘나는 제국과 황실에 꺼림칙한 존재다. 이렇게 의식을 되찾은 걸 안다면 죽이려고 들겠지.’
프란세크라도 건사했다면 찾아갈 여지가 있었을 터다. 그러나 이반은 믿지 못할 인간이다.
‘지젤은 나를 케이사 트레스라는 이름으로 보더시티까지 빼돌렸다. 제국의 감시를 피하려고 한 거야.’
좋게 말해서, 나는 지금 자유였다. 드디어 제국의 감시에서 벗어났다.
‘어디서 어디까지, 누구를 믿을 수 있을까. 과거의 친구들조차 여전하진 않을 거야.’
난 날 도와준 사람들조차 예나 지금이나 같을 거라 믿지 않는다. 그건 내 편의주의적인 사고였다.
내가 근위대 생도 시절 동안 가치관이 변했듯이, 그들도 끊임없이 변하는 인간이다. 자아와 의지란 고정된 물질이 아니라 변동하는 현상이다.
과거의 나는 헤일라스를 믿지 못해 과오를 저질렀다. 그렇다고 해서 타인을 무한히 신뢰하는 바보가 될 필요는 없다. 자기중심이 없는 머저리들이나 가치관이 극단과 극단을 매번 오가는 법이다.
……지금의 나는 버려진 강아지나 다름없었다. 누구라도 좋으니 의지하고 싶고 기대고 싶다. 호의로 다가오는 사람에게 자아를 의탁하면 세상 편안할 것이다.
그러나 그 누구도 섣불리 믿지 마라. 세상엔 거저 주어진 호의란 없다. 모든 것엔 그 나름의 이유와 목적이 있는 법이다.
나는 자아를 똑바로 세웠다. 내가 어떤 인간인지 확인했다.
“후우…….”
루카, 루카우스 쿠스토리아.
지금 나는 아무것도 모른다. 폭풍기 이후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 내가 왜 여기에 있는지……. 모든 게 추론과 가설의 영역이다.
그러나 내게 주어진 목적은 확실했다. 난 군인으로 훈련을 받았고, 임무만 있다면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
‘행방불명이 된 지젤 쿠스토리아를 찾는다. 그리고 쟈파의 지원을 받기 위해 키누안을 추적한다.’
이제 두 번째 삶을 시작하자.
* * *
난 자고 일어났다.
지금 내겐 사소한 것 하나하나가 확인사항이었다. 내 수면 시간도 그중 하나였다. 수면은 여섯 시간이었다.
머리 안쪽이 뻐근한 느낌이었다. 내겐 적지 않은 수면 시간을 가졌는데도 기저의 피로가 남아있었다. 이것 또한 계속 지켜볼 일이었다.
쏴아아아.
욕실로 들어간 나는 거울을 보았다. 내겐 냉동 수면 5년을 제외하고도, 재기불능 3년과 치료 기간 4년을 합쳐 7년의 공백기가 있었다. 시간의 풍파가 날 녹슬게 했을 터다.
7년 동안 성장한 내 모습이 아직 낯설었다. 눈매가 더러운 청년이 지저분한 몰골로 나를 보고 있다. 그 아래의 몸뚱이는 오랜 흉터가 빼곡했다.
스걱.
면도를 마치니 그나마 얼굴은 봐줄 만했다.
난 젖은 머리카락을 꼬며 만졌다. 혼자선 다듬을 도리가 없으니 당분간은 묶고 다녀야겠다.
“……흐음.”
옷장을 열어젖힌 나는 정장과 코트를 보곤 묘한 기분을 느꼈다. 인류의 옛 복식이 준비되어 있었다.
벨라토 연방이 지구 시절의 양식을 가장 잘 보존하고 있다더니 그게 체감으로 와닿았다. 정장과 코트는 제국에도 있다. 그러나 그건 현대의 제국 양식에 맞게 빳빳하고 날카롭게 변형된 형태다.
지금 내가 보고 있는 옷은 20세기 복고주의자나 입을 법한 복식이었다. 20세기 복고주의자는 20세기 중반부터 21세기 초까지를 인류의 전성기라 여기며 그때를 그리워하는 자들이다. 살아보지도 못한 시대를 그리워하다니, 병신이 따로 없다.
딸깍.
나는 검은색 셔츠를 입고선 단추를 하나씩 잠갔다. 넥타이는 맬 줄 모르니 바닥에 내던졌고, 재킷을 걸친 다음에 남색 코트를 걸쳤다. 준비된 부츠는 기능성 소재가 아니라 불편하고 딱딱했다.
기잉.
옷을 다 입으니 외부로 드러난 의체는 손이 전부였다. 언뜻 보면 기계식 장갑처럼 보이기도 했다. 밖에서 옷을 벗을 일도 없을 테니 인공 피부는 덧대지 않아도 괜찮을 것 같았다.
삑.
나는 단말기로 일정을 확인했다. 내 기상 시점을 기준으로 일정표 시간이 수정되면서 잡혔다.
옷이 아직 어색한 터라, 나는 어깨를 매만지며 방을 나섰다. 이른 아침이라 복도는 고요했다.
복도 벽면에는 쟈파 상사의 하위 브랜드 광고 포스터가 빼곡했다. 대부분은 요식업이었다. 공통적인 특징은 뱀고기를 쓴다는 점이었다.
-하얀 누더기보단 그 차림새가 훨씬 낫군.
승강기에선 엔이 날 기다리고 있었다. 내가 방에서 나오자마자 같이 나온 모양이었다.
“내가 타지룬 종족에 대해 잘 모르지만…… 타지룬이 요식업에 종사하는 게 특이한 경우지? 누가 뱀이 광고하는 음식을 먹고 싶겠어.”
나는 승강기 내부에 붙은 광고 포스터를 툭툭 두드리며 질문을 던졌다. 엔이 전투 헬멧 너머로 눈동자만 힐끗 움직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보더시티에서 요식업에 발을 담근 타지룬은 쟈파가 유일하겠지. 타지룬들은 대개 남 등쳐 먹는 사업을 좋아하거든.
난 옛 기억을 떠올렸다. 지젤도 타지룬에 대해 ‘돈독이 오른 놈들’이라고 표현했다.
“종족 자체의 인상이 좋지 않으니, 요식업 같은 서비스 업종은 힘들겠지. 쟈파는 여러모로 기인이로군.”
-쟈파를 배신하지 않는 게 좋을 거다. 내 고용주라서 이런 말을 하는 게 아니야. 보더시티 내의 영향력과 인기가 대단한 자다. 타지룬의 수완과 타지룬답지 않은 성품을 동시에 가졌거든.
고속 승강기는 상층에 도착했다. 여기서부턴 출입 제한이 걸려서 쟈파의 측근만 드나들 수 있는 듯했다.
“대단하든 말든…… 그래 봐야 사람 하나 못 찾아서 날 깨웠잖아. 아니면 그 수하들이 돈값 못 하는 머저리거나 그렇겠지.”
내가 빈정거리며 승강기에서 내렸다.
-말버릇을 보니 넌 오래 살긴 힘들겠군.
“오래 살 생각도 없어.”
우린 곧장 건물 내에 있는 병기고로 향했다. 병기고 앞에선 쟈파가 먼저 서 있었고, 그 뒤엔 에퀘시안 용병 두 명이 봉투를 들고 서 있었다.
“호욧, 좋은 아침입니다, 여러분! 전 혈압이 낮아서 아침에 약하지만, 특별히 루카 씨를 위해 일어났답니다. 다들 식사를 안 하셨을 테니, 이거라도 드시죠.”
쟈파가 손짓하자, 에퀘시안 두 명이 들고 있던 봉투를 우리에게 건넸다.
……난 무표정하게 봉투를 응시했다. 겉면의 로고 그림은 빵 사이에 낀 뱀이었다. 뱀, 뱀, 뱀으로 시작하는 쟈파 버거의 광고 문구도 적혀 있었다.
부스럭.
엔은 버거를 꺼내더니 전투 헬멧을 살짝 들어서 한입에 구겨 넣었다.
-언제 먹어도 맛있군. 영양소 균형만 더 훌륭했다면 매일 먹고 싶을 정도야.
“호요오옷, 그럴 줄 알고 영양을 강화한 자양강장 버거도 준비 중입니다. 뱀 내장을 말려서 빵 반죽에…….”
-기대하지.
안 그래도 무미건조한 기계음이다. 나조차도 엔의 발언이 진심이 아닌지 긴가민가할 정도였다.
“루카 씨? 그거 다 드시기 전에 병기고 입장은 금지입니다.”
쟈파가 부담스러울 정도로 날 빤히 쳐다봤다. 그는 손을 비비며 뭔가를 기대하는 듯했다.
엔의 시선도 내게서 멈췄다. 쟈파의 호위 에퀘시안 두 명도 날 보고 있다. 나는 무언의 압박감을 느끼며 봉투를 열었다.
바스락.
김과 함께 고릿한 냄새가 났다. 첫인상은 좋지 않았다. 내가 음식을 가리는 사람은 아니지만, 좋은 냄새와 나쁜 냄새 정돈 구분한다.
덥석.
나는 버거를 꺼내 깨물었다. 알싸한 향신료의 알갱이가 입안에서 터지는 것 같았다. 굉장히 풍미가 두텁고 복잡미묘했다.
으적, 으적.
난 버거를 씹으면서 뭔가 생각하듯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렸다. 곰곰이 생각하게 만드는 맛이었다.
이거 참 놀랍군.
꺼림칙한 버거였다. 그러나 결론부터 말하자면…….
“……맛있네.”
이게 왜 맛있지 바로 설명하기가 어려웠다.
단순하게 맛있는 건 아니었다. 누린내처럼 느껴지는 불쾌한 향도 있었지만, 형용하기 힘든 자극적인 풍미를 머금은 기름기가 불쾌한 맛을 덮으며 부드럽게 녹여냈다. 쓴맛과 단맛의 조합처럼 맛의 상승작용이 있었다.
복잡하고 중독성이 있는 맛.
한마디로 설명하자면 이랬다.
“역시 칭찬은 언제 들어도 짜릿하군요. 오늘도 단골손님을 한 분 만든 듯합니다, 호욧.”
쟈파가 기다란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말했다. 내가 버거를 먹는 동안, 쟈파는 병기고의 잠금장치를 해제했다.
끼릭.
병기고가 열렸다. 나는 손가락에 묻은 양념을 가볍게 빨며 안으로 들어섰다.
건물 내의 병기고라고 믿기 힘들 정도로 내부가 넓었다. 무구의 배치가 멀끔해서 박물관 같기도 했다.
“수집용 창고로군.”
내가 소감을 말했다.
“하지만 장식용 무기는 없습니다. 전부 치명적인 것들이죠. 근위대원은 근접 무기와 권총 조합을 선호한다고 들었습니다.”
쟈파는 근접 무기가 걸린 벽으로 나를 안내했다.
단순하게 튼튼한 놈부터 단분자 코팅이나 전기충격 기능이 있는 무기까지 다양했다. 특이한 장치가 된 무기들, 예컨대 칼날과 창대에 총신을 삽입한 물건도 있었다.
나는 쭉 들러보며 들어보거나 휘두르기도 했다.
“이건 고압축 중량병기입니다. 제국 출신의 장인이 만든 겁니다. 아마 마음에 드실 겁니다.”
쟈파가 단상에 눕힌 칼을 가리켰다. 크루시스처럼 외날이었다. 날의 넓이는 크루시스보다 조금 더 넓었다.
후- 웅!
내가 칼을 몇 번 휘둘렀다. 의체의 출력도 잔뜩 올라서 모터음이 울리고 있었다.
‘크루시스와 달라.’
품질이 떨어졌다. 무게 배분이 미묘하게 엉망이었다. 완성도가 떨어져 칼날의 무게 배분이 고르지 않아 휘두를 때마다 궤적의 흔들림이 있었다.
“자칭 장인인가 보군. 제대로 된 공정을 거친 건 아닐 거야.”
불만족스럽다. 동질의 고압축 중량병기와 부딪히면 깨질 것 같았다.
“그, 그런가요? 흐음, 제국 공방 수준의 물건이라 자부하더니 저한테 거짓말을 했나 보네요. 나중에 손 좀 봐야겠어요.”
쟈파가 혓바닥을 날름거리며 말했다. 그의 동공이 일자로 가늘어졌다.
난 어설픈 칼을 가만히 바라봤다. 내 목숨을 이놈에게 맡기기 싫었다. 차라리 단분자 칼날을 쓸까 싶었다.
그러나 단분자 코팅은 소모성이다. 전투가 끝날 때마다 코팅을 새로 해야 한다. 허구한 날 칼로 치고받는 내겐 번거로운 방식이다.
-마음에 드는 무기가 없는 표정이로군. 그걸 이놈에게 주는 게 어때? 사람 잡아먹는 마검 말이야. 오래 살 생각이 없다는 사람에게 딱 좋은 무기지.
엔이 내 뒤에서 한마디 내뱉었다. 쟈파가 기겁하며 손사래를 쳤다.
“안, 안 됩니다. 루카 씨는 귀한 인재입니다. 그런 위험한 칼을…….”
난 쟈파의 반응을 보며 웃었다. 위험하다는 소리에 호기심이 더 크게 일었다.
“일단 내놔봐. 목숨을 내놓고 다니는 데는 익숙하니까.”
쟈파가 떨떠름하다는 듯이 혀를 계속 내밀다가 벽면을 손바닥으로 눌렀다. 그의 손바닥을 인식한 벽이 묵직하게 뒤집혔다.
“첫 제품으로 52자루만 주문제작하고 공방은 망했고, 제작자들은 유족들에게 두들겨 맞아 죽었습니다…….”
쟈파는 벽이 다 돌기도 전에 설명을 이어갔다.
“……모델명은 화광예도입니다. 초고온 열선을 칼날에 심어둔 무기죠.”